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顔氏家訓(1)

안씨가훈(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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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老莊學者들의 矛盾
12. 老莊學者들의 矛盾
夫老、莊之書, 蓋, 不肯也。
무릇 노자老子장자莊子의 책은 대개 진성眞性보전保全하고 본성本性함양涵養하는 것이니 외물外物 때문에 자신에게 를 끼치려 하지 않는다.
故藏名, 終蹈流沙; , 卒辭楚相:此之徒耳。
그러므로 〈노자老子는〉 이름을 감추고 조정관리朝廷官吏 노릇도 하였으나 끝내는 사막으로 들어가버렸으며, 〈장자莊子는〉 칠원漆園에서 종적을 감추고 살며 마침내 나라의 재상宰相 직책을 사양하였으니, 이들은 멋대로 방종하는 무리일 따름이다.
, , 遞相誇尙, , 皆以農、之化, 在乎己身, 之業, 棄之度外。
하안何晏왕필王弼노장老莊을 본받아 전술傳述하자 마침내 서로 번갈아 크게 떠받들어 그림자가 〈형체마다〉 따라붙고, 풀들이 〈바람에 쏠려〉 한데로 쓰러지듯이 모두가 신농씨神農氏황제黃帝의 교화가 제 몸에 있다고 여길 뿐 주공周公공자孔子의 학업은 포기하고 도외시하였다.
그러나 하안何晏조상曹爽과 같은 패가 되었다가 주살誅殺을 당하였으니 권력을 위해 죽는 그물망에 걸려든 것이며, 왕필王弼은 자주 남들을 비웃다가 미움을 받았으니 호승지벽好勝之癖의 함정에 빠진 것이며, 산도山濤는 재물을 축적하다 남들의 비난을 받았으니 많이 감추어둔다면 잃는 것도 〈그만큼〉 많다는 글〈의 교훈〉을 어긴 것이며, 하후현夏侯玄은 재능과 명망 때문에 살육을 당하였으니 뒤틀리고 혹이 불거진 것들 〈즉 무용지용無用之用의 가르침〉에 비추어보지를 못했던 것이며, 순찬荀粲은 아내가 죽자 비탄에 빠져 죽었으니 〈장자莊子가〉 동이를 두드리던 심정이 아니었으며, 왕연王衍은 죽은 아들을 애도함에 슬픔을 이길 수가 없었으니 동문오東門吳의 달관한 경지와 달랐으며, 혜강嵇康은 세속을 배척하다 화를 자초하였으니 어찌 〈의〉 광채를 거두어 머금은 채 세속과 함께하고자 하였던 〈노자老子의〉 부류였겠으며, 곽상郭象은 선망을 받자 권세를 오로지하였으니 어찌 제 몸을 〈낮추어〉 뒤에 두고 자신의 생사를 도외시한 기풍이 있었겠으며, 완적阮籍은 술에 취해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 있었으니 위태로운 길에서 서로가 조심을 시키라던 일깨움을 어긴 것이며, 사곤謝鯤장물臟物을 숨겼다가 관직에서 쫓겨났으니 〈먹고 남음직한〉 여분의 물고기조차 도로 놓아주었던 〈장자莊子의〉 무욕無慾을 어긴 것이다.
彼諸人者, 竝其領袖, 玄宗所歸。
저들은 모두 사계斯界영수領袖로서, 노장老壯종지宗旨로 삼았다.
其餘桎梏之中, 名利之下者, 豈可備言乎!
그 나머지 속세의 더러움에 속박되고 명리名利의 아래에 〈매여서〉 허우적거리던 이들에 대해 어찌 일일이 다 거론하겠는가.
直取其淸談雅論, 剖玄析微, 賓主往復, 娛心悅耳, 非濟世成俗之要也。
그저 그들은 고상한 담론의 형식으로 허황된 이치를 탐색하느라 주인과 손이 서로 묻고 답하며 마음과 귀를 즐겁게 할 뿐이었으니, 세상을 구제하고 풍속을 바로잡을 요체要諦는 아니었던 것이다.
於梁世, 玆風復, 《莊》、《老》、《周易》, 總謂
양대梁代에 이르자 이러한 풍조는 다시금 널리 퍼져서, 《장자莊子》, 《노자老子》, 《주역周易》을 아울러 ‘삼현三玄’이라 일컬었다.
, 周弘正, 化行都邑, 學徒千餘, 實爲盛美。
무제武帝간문제簡文帝는 자신이 직접 이것을 강론하였으며, 주홍정周弘正이 군왕을 모시고 삼가 치국治國대도大道를 아뢰자 교화敎化가 도읍에 행하여지며 배우는 무리들이 천여 명에 이르렀으니 실로 성황을 이루었다.
間, 復所愛習, 召置學生, 親爲敎授, 廢寢忘食, 以夜繼朝, 至乃愁憤, 輒以講自釋。
원제元帝강릉江陵형주荊州출임出任해 있을 때 다시 즐겨 익혀오던 것을 학생들을 불러다놓고 직접 교수하느라 침식조차 잊고 밤을 꼬박 새웠는데, 극히 피곤해지거나 울분이 쌓이면 문득 강론을 하여 스스로 풀곤 하였다.
吾時頗預末筵, 親承, 性旣, 亦所不好云。
나는 그때마다 곧잘 말석에 참가하여 원제元帝강론講論을 직접 들었으나, 성품이 진작부터 미련하고 어리석어서 이 역시 좋아하지는 않았다고 하겠다.
역주
역주1 全眞養性 : 《淮南子》 〈覽冥訓〉에 “天性을 온전히 하고 眞性을 保全하여 그 신체를 손상시키지 않는다.”고 하였다. 嵇康의 〈幽憤詩〉에 보이는 “本性을 涵養하며 眞性을 保全한다.”는 구에 대한 張銑의 주석에 따르면 “全眞은 본질을 함양함으로써 眞性을 保全함을 이른다.”[王利器]
역주2 以物累己 : 《莊子》에는 〈天道〉, 〈刻意〉 두 篇에 모두 “外物 때문에 〈자신에게〉 수고를 끼치는 법이 없다.[無物累]”는 말이 있는바, 곧 〈秋水〉篇에 “外物로 자신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는다.[不以物害己]”는 말과 뜻이 같다.[王利器]
역주3 柱史 : ‘柱下史’와 같은 말로, 대개 御史나 侍郞 等의 朝廷官吏를 가리킨다. 周나라와 秦나라는 다 柱下史를 두었으니, 이는 항상 殿閣의 柱下에 侍立하였으므로 일컫는 말이며, 老子는 周나라의 柱下史를 맡은 적이 있다.[역자]
역주4 匿跡漆園 : 《史記》 〈老莊申韓列傳〉에 “莊子는 蒙縣 사람으로 이름은 周이며 漆園 지방의 관리였다. 楚 威王이 그가 현명하다는 말을 듣고 사신을 보내어 후한 예물로 그를 맞이하여 재상을 맡아주기를 요청하였다. 莊周가 웃으며 말하였다. ‘그대는 郊祭에 희생으로 쓰는 소를 못 보았소? 몇 해를 기르며 먹이다가 수놓인 옷을 입혀 왕실종묘에 끌고 들어가면 이때에 이르러서야 비록 새끼돼지가 되고 싶은들 어찌 그럴 수가 있겠소? 그대는 얼른 떠나고 나를 더럽히지 마시오.’”라고 하였다.[趙曦明]
역주5 任縱 : 徐時棟에 의하면 “《顔氏家訓》에서는 老子와 莊子를 ‘멋대로 방종하는[任縱]’ 무리라고 비난하였으며, 《北齊書》 〈顔之推傳〉 역시 그에 대해 “너무 멋대로 방종하며[任縱], 기품이나 옷차림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러나 胡三省의 《資治通鑑》 注에 의하면 “任이란 物性의 自然에 맡긴다.[任]는 뜻이다.”라고 하였다.[王利器]
역주6 何晏 : 《魏志》 〈何晏傳〉에 “何晏은 何進의 손자로, 젊어서 재주가 빼어나 이름이 알려졌으며 老莊의 言語를 좋아하여 《道德論》을 지었다.”라고 하였다.[趙曦明]
역주7 王弼 : 《魏志》 〈鍾會傳〉에 보이는 “처음 鍾會는 弱冠 무렵 山陽郡의 王弼과 나란히 이름을 날렸다. 王弼은 儒家와 道家에 대해 토론하기를 좋아하였고 글솜씨가 있었으며 달변이었다. 《周易》과 《老子》를 주석하였고 尙書郞이 되었으나, 나이 스물 남짓에 죽었다.”는 구절의 주석에 따르면 “王弼은 字가 輔嗣이니, 何劭가 그를 두고 〈王弼別傳〉을 지어 ‘王弼은 老氏를 좋아하는데다 독창적인 견해로 이를 잘 해석하고 설명하였다. 何晏은 吏部尙書의 지위에 있었는데 王弼에 대해 놀라워하며 탄식하였다. 「孔子가 後生은 두려워할 만하다고 하였으니 이만 한 사람이라면 함께 오묘한 도리를 이야기할 만하리라!」’라고 하였다.” 하였다.[趙曦明]
역주8 祖述玄宗 : 《禮記》 〈中庸〉에 “堯‧舜을 본받아 傳述하다.[祖述]”라고 하였으며, 《文選》에 보이는 王儉의 〈褚淵碑文〉의 “아득하여라 道의 심오함[玄宗]이여”라는 구에서 李周翰은 “玄宗이란 道이다.”라고 주석하였다.[王利器]
老莊을 본받아 전술하다. ‘玄宗’은 道家가 내세운 ‘道의 심오한 宗旨’, 곧 ‘老莊의 사상’을 가리킨다.[역자]
역주9 景附草靡 : 《說苑》 〈君道〉篇에는 “무릇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교화한다는 것은 마치 바람이 풀들을 쓰러지게[靡草] 함과 같으니, 동풍이 불면 풀들은 서쪽으로 쓰러지고[草靡] 서풍이 불면 풀들은 동쪽으로 쓰러지니[草靡] 바람이 부는 대로 풀들이 이 때문에 쓰러지는 것이다.”라고 하였다.[王利器]
그림자가 형체마다 따르고 풀들이 바람을 쫓음을 말한 것이다.[盧文弨]
역주10 農黃 : 神農과 黃帝이니 道家에서 시조로 삼는 이들이다.[盧文弨]
역주11 周孔 : 周公과 孔子이니 儒家에서 시조로 삼는 이들이다.[王利器]
역주12 平叔 : 《魏志》 〈何晏傳〉에 “何晏은 何進의 손자로 젊어서 재주가 빼어나 이름이 알려졌다. 老莊의 淸談을 즐겨 말하였으며 《道德論》과 여러 편의 글과 賦를 지었다.”고 하였는데, 그 주석에 의하면 “何晏은 字가 平叔이다.”라고 하였다.[趙曦明]
역주13 曹爽 : 《魏志》 〈曹眞傳〉에 “曹眞의 자식이 爽인데, 字가 昭伯으로, 明帝의 총애와 대우가 남달라서, 明帝가 병으로 눕자 病床에까지 불려 들어갔다. 大將軍을 제수받고서는 황제의 符節과 斧鉞을 받들었으며, 都督中外諸軍事와 錄尙書事의 지위로 遺詔을 받아 어린 군주를 보필하였다. 이에 南陽의 何晏 等을 임용하여 心腹으로 삼자 아우 曹羲가 몹시 염려스러워 당시에 이를 간하고 일깨우려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으므로 눈물을 흘리며 일어났다. 제왕의 수레가 高陵를 향할 때 曹爽 兄弟가 모두 御駕를 따랐으나 司馬懿가 무기고를 선점하자 마침내 洛水의 浮橋로 나가 주둔하고서 황제께 상주하여 曹爽 형제를 면직시키고 집으로 돌려보냈는데 何晏 等을 잡아 하옥시키고 나중에는 一族을 誅殺하였다.”고 하였다.[趙曦明]
역주14 死權 : 《史記》 〈賈誼傳〉에 “〈鵩鳥賦〉에서 ‘오만한 자는 권세를 위하여 죽는다.[死權]’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생각건대, 《金樓子》 〈立言〉篇에 “道家는 虛無를 근본으로 삼고 허송세월하는 데만 힘을 쏟았으므로 中原에서 난리가 나고 나라가 어지러웠던 것도 실은 이런 풍조 때문이었으니, 何晏과 鄧颺이 앞서 誅殺되고 裴楷와 王衍이 뒤따라 滅族된 것도 대개 이 때문이었다.”라고 하였다.[趙曦明]
역주15 輔嗣 : 王弼의 字이다.[역자]
역주16 好勝之穽 : 何劭가 쓴 〈王弼別傳〉에 “王弼은 道를 논함에 글을 견강부회하여 何晏의 自然스러움만 못하니, 그가 뽑아놓은 말에는 何晏의 것이 많았다. 자못 자신의 장점으로 남을 비웃었으니 이 때문에 당시의 인사들에게 미움을 받았다.”라고 하였다.[趙曦明]
《孔子家語》 〈觀周〉篇에 따르면 “횡포한 이는 제명에 죽지 못하고, 이기기 좋아하는[好勝] 사람은 반드시 적수를 만나게 마련이다.”라고 하였다.[盧文弨]
역주17 山巨源以蓄積取譏 : 그 출전이 자세하지 않다.[何焯]
《晉書》 〈山濤傳〉에 “곧고 검약하여 비록 관직이 제후와 맞먹어도 첩이 없고, 녹봉을 받아도 친지나 옛 벗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죽고 나자 范晷 등이 상소를 올리기를 ‘山濤의 옛 집은 방이 열 칸이라 자손들을 수용하지 못합니다.’ 하므로, 임금이 그를 위해 집을 세워주었다.”고 하였으니, 어찌 蓄財를 하느라 비난을 살 리가 있겠는가? 다만, 陳郡의 袁毅가 일찍이 鬲縣令이 되었는데 탐욕스럽고 부정하여 公卿들에게 잘 보이려고 뇌물을 바치며 山濤에게도 비단 백 근을 보내었다. 산도는 당시 습속과 달리하고 싶지 않으므로 받아서는 별채에다 쌓아놓았으나, 나중에 袁毅가 일을 폭로하여 뇌물을 받은 사람이 모두 조사를 받게 되자 山濤는 비단을 가져다 관리에게 건네었는데, 몇 년째 먼지가 쌓였고 봉인 역시 처음에 찍힌 그대로였다. 이 일로 축재의 죄명을 씌울 수는 없으니, 아마도 이 구에는 오해가 있는 듯하다.[盧文弨]
山巨源, 곧 山濤는 아마 王濬沖, 곧 王戎임에 마땅할 것이니, 이는 宮中의 宦官들이 잘못 옮긴 것이다. 山濤와 王戎은 똑같이 竹林名士였으므로 쉽게 혼동하였을 것이다. 王戎의 인색함을 살펴보자면, 예컨대 씨앗에 구멍을 낸 배를 팔았다거나 주판을 잡고 재산을 계산하였다는 등의 일들이 《世說新語》 〈儉嗇〉篇에 두루 쓰여 있다.[劉盼遂]
역주18 多藏厚亡 : 《老子》 제44장에 “많이 감추어둔다면 반드시 잃는 것도 그만큼 많을 것이다.[多藏必厚亡]”라고 하였다.[역자]
역주19 夏侯玄以才望被戮 : 《魏志》 〈夏侯尙傳〉에 “〈夏侯尙의〉 아들 玄은 字가 太初로 어려서부터 이름이 알려졌다. 正始 연간 초에 曹爽이 政事를 보필하였다. 夏侯玄은, 曹爽의 고모의 아들로 여러 차례 직위를 옮겨 散騎常侍中護軍이 되었으며, 曹爽이 誅殺되자 大鴻臚가 되었으며 몇 년 만에 太常으로 옮겼다. 夏侯玄은 曹爽이 배척당한 것을 내심 불만스러워했다. 中書令 李豐은 비록 司馬師, 곧 司馬景王에게 측근 대접을 받았으나 몰래 夏侯玄에게 마음을 두어 마침내 皇后의 아버지 張緝과 결탁하고 夏侯玄이 政事를 보필하게 하고자 도모하였다. 嘉平 6년 2월, 貴人을 임명할 때, 李豐 등은 황제가 전각에 행차하여 문마다 경호군사가 전각을 호위할 때 大將軍을 誅殺하고 夏侯玄으로 그를 대신하고자 하였으나, 大將軍이 그 모략을 엿듣고 李豐을 초청하여 죽여버린 다음 夏侯玄 등을 잡아다 刑獄을 관장하는 廷尉에게 송치하였다. 鍾毓은 李豐 等이 大逆罪를 지었음을 上奏하고 모두 三族을 멸하였다. 夏侯玄은 도량이 커서 東市에서 참수될 때도 낯빛이 변하는 법이 없이 태연하게 거동하였으니 이때 나이 46세였다.”라고 하였다.[趙曦明]
才望이란 재능과 명망[才氣名望]의 뜻이다.[王利器]
역주20 支離 : 《莊子》 〈人間世〉에 “支離疏는 턱이 배꼽 아래에 묻히고 어깨가 머리 뒤꼭지보다 높으며 목덜미 뒤의 상투가 하늘을 찌르고 五臟의 經絡이 척추 위로 불거졌으며, 양쪽 넓적다리는 갈비뼈와 붙어 있었다. 그는 바느질하고 빨래하여 제 입에 풀칠하기 넉넉하고, 남의 占을 쳐주어 충분히 열 식구를 먹여살렸다. 정부에서 병정을 징집하면 支離疏는 그 사이로 팔을 휘저으며 나다녔다. 정부에서 大役事를 일으키면 支離疏는 오래된 병 때문에 일을 할당받지 않았다. 정부에서 병자에게 곡식을 내려주면 3鍾(‘鍾’은 고대의 도량형 명칭 1鍾은 6섬 4말)의 쌀과 장작 열 단을 받았다. 무릇 그 몸이 뒤틀린[支離] 사람도 오히려 제 몸을 부양하고 천수를 다하기에 넉넉하거니와, 하물며 그의 덕이 뒤틀린[支離] 이들이랴?”라고 하였다.[趙曦明]
역주21 擁腫 : 《莊子》 〈逍遙遊〉에 “惠子(B.C.390~B.C.317)가 莊子(B.C.369~B.C. 286)에게 말하기를 ‘내가 사는 곳에 큰 나무가 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가죽나무라 부른다네. 커다란 줄기는 울퉁불퉁하니[擁腫] 먹줄도 칠 수가 없고, 작은 가지들은 구불구불하니 자도 댈 수가 없다네. 길가에 서 있지만, 목수들은 거들떠보지를 않지.’ 하자, 莊子가 말하였다. ‘당신은 그것이 쓸모가 없다고 근심을 하시니, 어찌 그것을 無何有의 이상향에다 심지를 않으십니까? 도끼에 찍혀 일찍이 꺾이지도 않을 테고, 그것을 해칠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을 텐데요. 쓸모가 없다는 것이 어찌 어렵고 괴로운 일이겠습니까?’”라고 하였다.[趙曦明]
역주22 荀奉倩 : 荀粲이다. 三國시대 魏나라의 尚書令 荀彧의 아들로, 字가 奉倩이다. 《世說新語》 〈惑溺〉篇에 “荀奉倩은 부인과 지극히 돈독하여서 겨울에 부인이 열병을 앓으면 곧 뜰 가운데로 나가 자기 몸을 차갑게 만들고 돌아와 제 몸으로 부인을 식혀주었다. 부인이 죽자 荀粲도 그 뒤 얼마 안 있어 역시 죽었다.”고 하였다.[역자]
역주23 鼓缶 : 《莊子》 〈至樂論〉에 “莊子의 아내가 죽어서 惠子가 문상을 갔더니 〈莊子가〉 마침 두 다리를 쭉 뻗고 앉아, 동이를 두드리면서[鼓盆] 노래를 부르고 있으므로, 惠子가 말하기를 ‘아내와 함께 살면서 자식을 키우고 몸이 늙도록 함께 살다가 그 아내가 죽었는데, 곡을 하지 않는 것만 해도 〈경우를 벗어나기에〉 충분하건만 동이를 두드리면서[鼓盆] 노래까지 하다니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하자, 莊子가 말하였다. ‘그렇지가 않다네. 그가 갓 죽고서야 나만 어찌 놀라고 슬프지 않았겠는가! 〈다만〉 갓 태어날 때를 살펴보자면 본래는 생명이 없었던 것이네. 생명이 없을 뿐더러 본래는 형태도 없었던 것이네. 형태도 없었을 뿐더러 본래는 氣도 없었던 것일세. 집사람은 이제 천지라는 큰 방 안에 편안히 자고 있는 것인데 내가 애고애고 하고 뒤따라 곡을 하려다가도 스스로 운명을 달관하지 못한 일이라 여겨져서 곡하기를 그만둔 것이라네.’”라고 하였다.[趙曦明]
缶는 고대에 술을 담던 질그릇, 장군이다. 노래의 장단을 맞추는 데 장구처럼 썼다. 여기서는 ‘동이를 두드리다.[鼓盆]’와 같은 뜻이다.[역자]
역주24 王夷甫悼子 悲不自勝 : 《晉書》 〈王戎傳〉에 “王戎의 堂弟 衍은 字가 夷甫로, 어린 아들이 죽어 山簡이 문상을 하자 王衍이 슬픔을 이기지 못하였다. 山簡이 말하기를 ‘아이란 가슴에 품어주던 것일 뿐인데, 어찌 이처럼 비통해하시오?’ 하자, 王衍이 말하였다. ‘聖人이야 감정을 잊지만, 가장 천한 것들이야 감정을 이길 수가 없지요. 그러니 감정에 가장 전념하는 것이 바로 우리 같은 것들이지요.’ 山簡이 이 말에 감복을 하며 더욱 그를 위해 애통해하였다.”[趙曦明]
역주25 東門之達 : 《列子》 〈力命〉篇에 “魏나라 사람에 東門吳라는 이가 있어 그의 아들이 죽었는데도 비통해하지를 않자 그의 집사가 묻기를 ‘公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기로 세상에 비길 만한 이가 없으셨습니다. 지금 아들이 죽었는데도 비통해하지를 않으시니 어쩐 일이신지요?’ 하자, 東門吳가 말하였다. ‘내가 일찍이 아들이 없었는데, 아들이 없을 때는 비통해하지를 않았다. 지금은 아들이 죽었으니 아들이 없던 때와 같아진 것인데 내가 어찌 비통해하겠느냐?’”라고 하였다.[趙曦明]
東門吳의 달관한 심정이나 경지이다.[역자]
역주26 嵇叔夜排俗取禍 : 嵇康은 字가 叔夜로 譙郡 銍縣 사람이다. 老莊에 深醉하여 늘 性情을 함양하고 丹藥을 복용하였다. 가난해서 집안의 큰 버드나무 아래에 도랑을 내고 쇠를 단련하여 자급하였다. 언젠가 潁川의 귀공자인 鍾會가 찾아왔는데 쇠를 단련하는 일에 열중하고 돌아보지도 않았다. 嵇康이 평소 東平의 呂安과 친했는데 후일 呂安이 誣告로 투옥되자 嵇康도 이에 連累되어 체포되었다. 嵇康에게 유감이 있던 鍾會가 文帝에게 嵇康이 군벌 毋丘儉을 돕고자 한다고 讒訴하여 마침내 죽임을 당하였다. 《晉書》 〈嵇康傳〉에 보인다.[역자]
역주27 和光同塵 : 《老子想爾注》에 “性情이 흔들리지 않고 喜怒의 감정이 일지 않으면, 五藏이 모두 함께 어울려 相生할 것이니[和同相生], 道와 더불어 세속에 섞여 같아질 것이다.[與道同光塵]”라고 하였다.[趙曦明]
〈道의〉 광채를 거두어 머금은 채 세속에 섞여 같아지다. 《老子》 제56장의 “그 빛을 부드럽게 하고, 그 티끌을 함께한다.[和其光 同其塵]”라는 구절을 四字成語로 줄여 말한 것이다.[역자]
역주28 郭子玄 : 《晉書》 〈郭象傳〉에 “郭象은 字가 子玄으로, 젊어서부터 재치 있게 생각할 줄 알았고 老莊 사상을 좋아하여 淸談을 할 수 있었다. 州와 郡에서 등용하고자 하였으나 나가지 않고 언제나 閑居하여 文學을 논하면서 자기만의 흥취를 좇았다. 東海王 越이 太傅主簿로 임용하자 비로소 직무를 맡고 권력을 장악하여 안팎으로 사람들을 불에 굽듯이 다그쳤으니 이로부터 평소의 持論을 내버렸다.”고 하였다.[趙曦明]
역주29 專勢 : ‘권세를 오로지 하다.’ 위의 《晉書》 〈郭象傳〉에 보이는 ‘권세를 장악하다.[當權]’와 같은 뜻이다.[역자]
역주30 後身外己 : 《老子》 제7장에 “제 몸을 〈낮추어〉 뒤에 두지만[後其身] 오히려 그 몸이 존중을 받고, 자신의 생사를 도외시하지만[外其身] 오히려 그 생명이 本性을 보전한다.”고 하였다.[趙曦明]
역주31 阮嗣宗沈酒荒迷 : 《晉書》 〈阮籍傳〉에 “阮籍은 字가 嗣宗으로 陳留郡 尉氏縣 사람이다. 본래 經國濟世의 뜻을 품었으나 魏晉시대를 통하여 天下에 변고가 많아 名士로서 목숨을 보전한 이가 적으므로, 세상일에 참견하지 않고 마침내 거나하게 술을 마시는 것을 일로 삼았다. 文帝가 일찍이 武帝를 위하여 阮籍과 혼사를 맺고 싶어 하였으나 阮籍이 60일 동안을 거나하게 취해 있는지라 말을 할 수가 없어 그만두었다. 鍾會도 여러 차례 시국의 일을 물으며 可否간 대답을 살펴보아 죄를 다스리려고 하였으나 모두 거나하게 취해 있던 술 때문에 위기를 면할 수가 있었다. 때때로 멋대로 혼자 수레를 몰되 小路로는 들어서지 않았으며, 막다른 길에 이르면 문득 통곡을 하고 돌아왔다.”고 하였다.[趙曦明]
역주32 乖畏途相誡之譬 : 《莊子》 〈達生〉篇에 “무릇 〈나서기가〉 두려운 길[畏途]에서 행인이 열 가운데 한 사람 꼴로 죽는다면 부자와 형제는 서로간에 이를 경계시킬[相戒] 것이다.”라고 하였다.[趙曦明]
생각건대, 《莊子》의 이 다음 구절에 “반드시 많은 사람들을 모은 다음에 감히 문을 나선다면 이 또한 지혜롭지 않겠느냐! 사람이 두렵게 여겨야 할 것임에도 잠자리에서나 밥을 먹을 때에는 이를 경계할 줄 모른다면 이는 잘못이다.”라고 하였는데, 이 구절까지 모두를 인용하는 것이 옳았을 것이다.[王利器]
역주33 謝幼輿贓賄黜削 : 《晉書》 〈謝鯤傳〉에 “謝鯤은 字가 幼輿로 陳國郡 陽夏縣 사람이다. 《老子》와 《周易》을 좋아하였는데, 東海王 越이 불러다 掾吏[屬官]를 시켰으나, 집안 하인이 관청의 볏짚을 훔친 데 연루되어 제명되었다. 謝鯤은 功名을 위해 목숨을 걸지도 않았고 연마하려고 수행하는 일도 없이 옳고 그름의 중간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 비록 자신이 처한 곳이 더러운 것 같아도 항시 높아지려고 애쓰는 법이 없었다.”고 하였다.[趙曦明]
‘黜削’은 ‘파면시키다’의 뜻이다.[역자]
역주34 棄其餘魚之旨 : 《淮南子》 〈齊俗〉篇에 “惠子가 수레 百乘을 거느리고 孟諸澤을 지나는데 莊子가 그를 보고서 여분의 물고기를 놓아줘버렸다.[棄其餘魚] 하였다.”고 하였다. 이 구절의 주석에 “莊周는 惠施가 〈百乘의 수레에도 오히려〉 만족해하지 않는 모양을 보고서, 이 때문에 〈먹고 남음직한〉 여분의 물고기를 못 속에 놓아줘버린 것이다.”라고 하였다.[趙曦明]
역주35 塵滓 : 속세의 더러움[塵俗滓穢]을 일컫는다.[王利器]
역주36 顚仆 : 걸려 넘어지다. 곤란에 빠지다.[역자]
역주37 洎(계) : 이르다. 미치다.[역자]
역주38 : 계
역주39 : 천
역주40 三玄 : 吳承仕에 의하면 “《梁書》 〈儒林傳〉에서는 ‘太史叔明의 三玄은 해설이 더욱 해박하여 그 당시의 으뜸이었다.’고 하며, 陳나라 말엽의 陸德明은 《經典釋文》을 지으며 《老子》와 《莊子》를 《論語》의 뒤, 《爾雅》의 앞에 열거해놓아, 그 당시의 풍조를 충분히 엿볼 수가 있다.”라고 하였다.[周法高]
《老子》, 《莊子》, 《周易》을 함께 일컫는 말이다.[역자]
역주41 武皇簡文 躬自講論 : 《梁書》 〈武帝紀〉에 “〈梁 武帝는〉 젊어서부터 학문에 독실하여 儒學과 玄學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으며 《周易講疏》와 《老子講疏》를 지었다.”라고 하였다. 또 《梁書》 〈簡文帝紀〉에 “〈簡文帝는〉 儒學 서적에 널리 통하였을 뿐만 아니라 玄妙한 道理도 능숙히 말하였으니, 저서로 《老子義》와 《莊子義》가 있다.”고도 하였다.[盧文弨]
역주42 奉贊大猷 : 大同 8년에 周弘正이 梁 武帝에게 《周易》의 글뜻 중 의심스러운 부분에 대해 아뢰었음이 《陳書》 〈弘正本傳〉에 보인다.[王利器]
大猷란 治國의 大道를 가리킨다. 《詩經》 〈小雅 巧言〉의 鄭玄의 箋에 의하면 “猷란 道의 뜻이다.”라고 하였다.[역자]
역주43 元帝 : 蕭繹(508~554)은 自號가 金樓子로, 南蘭陵 사람이다. 梁 武帝 蕭衍의 제7子이며, 梁 簡文帝 蕭綱의 아우이다. 《梁書》 〈元帝紀〉에 “天監 13년에 湘東郡王에 봉해졌으며, 普通 7년에는 使持節都督六州諸軍事로 出任하였다.”라고 하였다.[역자]
역주44 江荊 : 江陵과 荊州를 가리킨다.[역자]
역주45 倦劇 : 극히 피곤하다.[역자]
역주46 音旨 : 말과 취지이다. 여기서는 梁 元帝의 講論이다.[역자]
역주47 頑魯 : 미련하고 어리석다.[역자]

안씨가훈(1)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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