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顔氏家訓(1)

안씨가훈(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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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羊侃의 활약
5. 羊侃의 활약
, 雖閉, 公私, 各不自全。
후경侯景이 막 건업建業에 들어왔을 때 궁궐 문은 비록 닫혀 있었지만 민관民官이 혼란에 빠져서 다들 어찌할 바를 몰랐다.
門, , 一宿皆辦, 遂得百餘日抗拒兇逆。
태자좌위솔太子左衛率이었던 양간羊侃동액문東掖門을 지키며 인원을 나누어 배치하고 공격에 대처하였는데, 하루 밤새에 모든 준비를 다 해내어 결국 백여 일 동안 흉적들에 대항할 수 있었다.
於時, 城內四萬人, 王公朝士, 不下一百, 便是恃侃一人安之, 其相去如此。
이때 성안에 있던 4만여 명쯤의 민간인과 적어도 100명이 넘는 왕공王公들과 조정의 신하들이 바로 양간羊侃 한 사람에 의지하여 버틸 수가 있었으니, 그 〈능력의〉 차이가 이와 같다.
古人云:
“巢、許由, 讓於天下;市道小人, 爭一錢之利
。”
옛사람이 말하기를 “소보巢父허유許由천하天下를 사양하였건만, 저자거리의 소인들은 한 푼의 이익을 다툰다.”라고 하였다.
亦已矣。
또한 차이가 크다.
역주
역주1 侯景初入建業 : 《南史》 〈賊臣傳〉에서 “侯景은 字가 萬景이고 魏의 懷朔鎭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爾朱榮을 섬겼는데, 高歡이 爾朱榮을 죽이자 侯景은 군사들을 이끌고 高歡에게 항복하니 병사 10만을 거느리고 河南을 맡아 다스리게 하였다. 太淸 元年 2월 〈梁나라에〉 表를 올려 항복을 구하자, 梁 武帝는 侯景을 河南王에 봉하고 大將軍, 使持節, 都督河南北諸軍事 및 大行臺에 임명하였다. 梁이 東魏와 和親하게 되자 太淸 2년 8월에 결국 병사를 일으켜 반란을 했다.”라고 하였다. 《吳志》 〈孫權傳〉에서 “16년에 秣陵으로 수도를 옮기고, 이듬해에 石頭에 성을 쌓고 秣陵을 建業으로 바꾸었다.”라고 하였다.[趙曦明]
역주2 臺門 : 《容齋隨筆》에서 “晉‧宋 간에 朝廷의 출입통제 지역을 臺라 불렀다. 그래서 禁城을 臺城이라 했고, 官軍을 臺軍이라 했으며, 使者를 臺使라 했다.”라 하였다. 臺門은 또한 臺城門이라고도 부른다.[盧文弨]
역주3 草擾 : 어지럽다. 혼란에 빠지다.[역자]
역주4 太子左衛率羊侃 : 《唐六典》 28의 〈太子左右衛率府〉에서 “左衛率과 右衛率은 東宮의 兵仗과 羽衛의 政令을 관장하고, 諸曹의 일들을 총괄한다.”라 하였다.[趙曦明]
羊侃은 字가 祖忻이고 泰山 梁甫 사람이다. 본서 〈風操〉篇 14에 나오는 太山 출신의 羊偘이 바로 이 사람이다. 그는 中大通 6년에 晉安太守로 나갔다가 얼마 안 있어 太子左衛率로 불려 들어왔고, 太淸 2년에는 都官尙書가 되었다. 侯景의 난 때 臺城의 수비를 총괄하면서 각종 계책을 써서 적의 예봉을 꺾고 끝까지 버텼지만, 그가 病死하면서 결국은 臺城이 함락되고 말았다. 《梁書》 39에 수록된 그의 傳에 이때의 활약이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역자]
역주5 : 간
역주6 東掖(액)門 : 臺城 端門 우측의 문이다. 《資治通鑑》 166 胡三省 注에서 “臺城 정남의 端門 좌우에 있는 두 문을 일컬어 東掖門, 西掖門이라 한다.”라 하였다.[王利器]
역주7 : 액
역주8 部分 : 인원을 나누어 배치하다.[역자]
역주9 經略 : 다스리고 공략하다. 여기서는 侯景의 공격에 대처한다는 뜻이다.[역자]
역주10 : 許는 예전의 ‘所’와 통한다. 《詩經》 〈小雅 伐木〉의 ‘伐木許許’를 《說文解字》에서는 ‘伐木所所’로 인용해놓았다. 《禮記》 〈檀弓〉 注에서 “봉분은 높이가 한 자 정도이다.[封高尺所]”라고 한 것에 대해, 《正義》에서 “所는 不定辭[~쯤, ~정도]이다.”라 하였다.[王利器]
역주11 巢父(보)許由…爭一錢之利 : 《太平御覽》 836에 인용된 曹植의 〈樂府歌〉에서 “巢父와 許由는 천하를 우습게 보고, 장사꾼은 한 푼을 다툰다.”라 하였다. 《晉書》 〈華譚傳〉에서는 “누군가가 華譚에게 묻기를 ‘속담에 사람의 차이는 아홉 마리의 소의 많은 털 가운데 털 하나[九牛一毛]와 같이 미세한 것이라 하거늘, 어떻게 이런 이치가 있을 수 있습니까?’라 하자, 華譚이 대답하기를 ‘옛날 許由와 巢父는 天子의 귀한 지위를 사양하였지만, 저자거리의 小人들은 반 푼의 이익을 다투지요. 이들의 차이가 어찌 九牛一毛 정도일 뿐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훌륭하다고 했다.”라 하였다.[王利器]
역주12 巢父(보)許由 : 《高士傳》에서 “巢父는 堯임금 때의 隱者로서 나무를 둥지로 삼아 그 위에서 잠을 잤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巢父라 불렀다. 許由가 堯임금이 자기에게 〈천하를〉 양보했다는 이야기를 巢父에게 고하자, 巢父는 ‘너는 어찌 너의 모습을 숨겨서 너의 빛을 감추지 않느냐? 너는 내 친구가 아니다.’라고 하였다.”라 하였고, 또 “許由는 字가 武仲이고 陽城 槐里 사람이다. 堯임금이 불러 九州의 長으로 삼으려 하자 許由는 그 말을 듣고 싶지 않아 潁水 가에서 귀를 씻었다. 〈이에〉 巢父는 ‘내 송아지 입을 더럽히겠다.’라 하고서 송아지를 끌고 상류로 올라가 물을 마시게 했다.”라 하였다.[趙曦明]
역주13 : 보
역주14 : 크게 다르다는 말이다. 《鹽鐵論》 〈貧富〉篇에서 “그러한 다음에야 여러 직업들이 서로 멀어지지 않게 되고, 빈부 차이가 서로 현격해지지 않는다.[貧富不相懸]”라 하였고, 馬融의 〈論日食疏〉에서는 “侯服, 甸服, 采服, 衛服에서 백성들을 다스리는 관리들은 우열이 서로 현격하므로[優劣相懸], 그 인물들을 살펴서 뽑지 않을 수가 없다.”라 하였다. 嵇康의 〈養生論〉에서는 “심고 기르는 방법이 다르면, 수확이 서로 현격히 차이가 난다.[功收相懸]”라고 하였는데, 모두 같은 뜻이다.[王利器]

안씨가훈(1)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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