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顔氏家訓(2)

안씨가훈(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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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史記》 〈始皇本紀〉의 ‘隗林’
23. 《사기史記》 〈시황본기始皇本紀〉의 ‘외림隗林
《史記・始皇本紀》:“二十八年, 丞相、丞相王綰等, 議於。”
사기史記》 〈시황본기始皇本紀〉에 “28년에 승상丞相 외림隗林, 승상丞相 왕관王綰 등이 동해東海의 바닷가에서 의논하였다.”고 하였는데, 판본들마다 모두 〈외림隗林의 이름자가〉 산림山林이라고 할 때의 자로 되어 있다.
二年五月, 長安民掘得秦時鐵稱權,
개황開皇 2년 5월 장안長安 사람이 나라 때의 쇠 저울추를 발굴하였는데, 옆쪽에 구리로 도금하고 새겨놓은 명문銘文이 두 곳 있었다.
其一所曰:“卄六年, 皇帝盡幷兼天下諸侯, 黔首大安,
그중 한 곳에는 “26년에 황제皇帝께서 천하天下제후諸侯들을 모두 병합倂合하시고 백성들이 크게 평안平安해지자,
立號爲皇帝, 乃詔丞相狀、綰, 度量者, 。” 凡四十字。
황제皇帝라는 칭호를 세우시고, 승상丞相 외장隗狀왕관王綰에게 조칙詔勅을 내리사 도량형度量衡의 법도를 마련하시니, 혼돈스럽고 미심쩍던 것들이 모두 분명해지고 통일되었다.”라고 쓰여 있는데, 원문原文은 모두 40자였다.
其一所曰:“元年, 制詔丞相斯、去疾, 灋度量, 盡始皇帝爲之, 皆有刻辭焉。
다른 한 곳에는 “〈이세황제二世皇帝원년元年조칙詔勅을 내리사 승상丞相 이사李斯풍거질馮去疾로 하여금 도량형度量衡의 법도를 마련하게 하셨으니, 모두 시황제始皇帝께서 하신 일이므로, 그 말씀을 죄다 이곳에 새겨둔다.
今襲號而刻辭不稱始皇帝, 其於久遠也。
지금 칭호稱號를 계승하였으나 그 내용을 새김에, 시황제始皇帝라 칭하지 않은 것은 이것이 〈후세 황제皇帝들에게까지〉 영원하기 때문이다.
如後嗣爲之者, 不稱成功盛德, , 使毋疑。” 凡五十八字。
행여 후손들 중 이를 시행하는 자가 공을 이룩하신 훌륭한 덕을 칭송하지 않을까 하여 이 조칙詔勅을 왼편에 새겨 미심쩍어할 바 없도록 해둔다.”라고 쓰여 있는데, 원문原文이 모두 58자이다.
一字磨滅, 見有五十七字, 分明, 其書兼爲古隷。
1자가 마모되긴 하였으나, 남아 있는 57자를 보건대 아주 분명하였으며, 그 글씨는 모두 고풍古風예서체隷書體로 쓰여 있었다.
余被敕寫讀之, 與對, 見此, 今在官庫。
내가 조칙을 받들어 이를 옮겨 쓰고 해독하며 내사령內史令 이덕림李德林대교對校하였다. 이 저울추는 지금 관고官庫에 보관되어 있다.
其“丞相狀”字, 乃爲狀貌之“狀”, 爿旁作犬, 則知俗作“隗林”, 非也, 當爲“隗狀”耳。
그 ‘승상丞相 ’자는 장모狀貌(모양)라고 할 때의 자로, ‘편방偏旁자로 쓰여 있으니, 이로 말미암아 항간에서 외림隗林으로 써온 것은 옳지 않으며, 마땅히 ‘외장隗狀’으로 써야 했던 것임을 알게 되었을 따름이다.
역주
역주1 隗(외)林 : 《史記》 〈始皇本紀〉의 司馬貞(唐)의 《索隱》에 의하면 “隗는 姓이며 林은 이름으로, 어떤 판본에 狀으로 된 것이 있지만, 옳지 않다. 顔之推가 〈狀으로 된 것이 있다고〉 이야기하고 王劭도 그렇다고 하였으니, 이는 오랜 옛날의 증명이다.”라고 하였다.[王利器]
역주2 海上 : 東海의 바닷가이다. 당시 始皇帝는 東土 〈六國을〉 병탄하자 琅邪에 이르러 群臣들과 함께 바닷가에서 시국을 의논하였다.[王利器]
역주3 諸本皆作山林之林 : 沈濤의 《銅熨斗齋隨筆》 3에 의하면 “丞相 隗林에 대하여는 《索隱》에 언급되었거니와, 생각건대 司馬貞은 어차피 狀이라 쓰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할 바이면 어쩌자고 다시 《顔氏家訓》을 인용하여 증거로 삼았겠는가? 아마도 《索隱》의 판본에는 본래 隗狀으로 되어 있고 ‘어떤 판본에는 林으로 된 것이 있지만, 옳지 않다.’고 말했을 것이다. 이 때문에 顔之推와 王劭 두 사람의 주장을 인용하며 狀이 옳고 林은 옳지 않음을 증명하였을 것이나, 今本에서 林과 狀 두 자가 傳寫하는 과정에 서로 뒤바뀌면서 마침내 모순되어 통하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라고 하니, 본인이 생각하기에 沈濤의 주장은 옳다. 《佩觿》 上에 의하면 “丞相의 〈이름자의〉 林자는 狀자가 옳다.”고 하였고, 그 原注에도 “《史記》 〈始皇本紀〉에 의하면 ‘28년에 丞相 隗狀, 王綰 等과 東海의 바닷가에서 의논하였다.’는 구절을 항간에서 隗林이라고 쓴 것은 옳지 않다.” 한 것은, 곧 顔之推의 이 글에 근거하여 글자를 狀으로 바로잡아 쓴 것일 것이다.[王利器]
역주4 開皇 : 隋 文帝의 年號이다.[趙曦明]
역주5 旁有銅塗鐫銘二所 : 《玉海》에는 “銘文이 두 곳에 있다.”고 하였으며, 歐陽脩의 《集古錄》 〈跋尾 一〉의 ‘秦度量銘’條에 의하면 “오른편의 秦度量銘은 2개이다. 《顔氏家訓》을 살펴보건대, 隋나라 開皇 2년에 顔之推가 李德林과 長安의 官庫에 소장된 秦나라 때의 쇠 저울추를 보았을 적에 옆쪽에 銘文 2개가 새겨져 있었다고 하였는데, 그 銘文이 바로 이곳의 銘文 2개와 같다. 이 때문에 顔之推는, 司馬遷의 《史記》 〈秦始皇本紀〉에는 丞相 隗林으로 되어 있으나, 이 銘文에 근거하면 隗狀이라고 써야 마땅하다고 말하며, 마침내 銘文 2개를 베껴다 《顔氏家訓》에 실었다. 내가 이 銘文 2개를 얻은 곳은 다름 아닌 祕閣校理로 있던 文同의 집이었는데, 〈그도〉 똑같이 蜀人이다. 그가 말하기를 일찍이 長安을 돌아다니다가 器物 2개를 사들였는데, 그 위에 銘文 2개가 새겨져 있다고 하였다. 그것을 꺼내어 내게 보여주었는데 하나는 銅으로 만든 고리[鍰]로, 무엇에 쓰던 器物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위에 銘文이 둘러져 새겨져 있는 것이 바로 앞에 든 銘文이며, 나머지 하나는 銅으로 만든 方版으로, 서너 치 됨직한 크기로 그 위에 새겨진 것이 바로 뒤에 든 銘文이었다. 그 銘文을 살펴보니 《顔氏家訓》에 실린 것과 꼭 같았다. 다만, 顔之推가 본 것은 쇠 저울추였으나, 文同이 얻었던 것은 銅器 2개이므로, 내 생각에는 秦나라 때에 이 2개 銘文을 새긴 器物은 하나뿐이 아니었을 것이다. 나중에 集賢殿 校理 陸經의 집에서도 銅版 1개를 보았는데 새겨진 銘文은 앞에 든 銘文과 역시 같아서 더욱 그러함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이곳에 함께 기록해둔다. 嘉祐 8년 7월 10일에 쓰다.”라고 하였다.[王利器]
梅堯臣의 〈陸子履示秦篆寶詩〉에는 題目의 주석에 銘文을 싣고 있는데, 역시 앞에 든 銘文이다.[王利器]
역주6 灋(법) : 표준을 정하다. 규범을 세우다. 法의 본디 자이니, 許愼의 《說文解字》에 의하면 “法은 今文으로 〈灋을〉 간략히 쓴 것이다.”라고 하였다.[역자]
역주7 ?(칙) : 宋本의 原注에 의하면 “독음이 則(칙)이다.”라고 하였다.[趙曦明]
《廣川書跋》에 의하면 “《顔氏家訓》에 옮겨진 則(칙)자는 〈왼편의 구성소에〉 鼎을 쓰고 있는데, 이는 〈왼편의 구성소에〉 貝를 쓴 것과는 다르다. 許愼의 《說文解字》에는 두 글자가 모두 실려 있지만, 대개 籒文으로 쓰인 것이어서 글자가 다른 것이다.”라고 하였다.[王利器]
標準 度量衡[權衡器], 혹은 저울추와 저울대[權衡]이다.[역자]
역주8 不壹 : 통일되지 않다. 혼돈스럽다.[역자]
역주9 歉疑 : 분명치 않아 미심쩍다. 嫌疑와 같은 뜻이다.[역자]
역주10 皆明壹之 : 모두가 분명하고 한결같다.[역자]
역주11 刻此詔□左 : 王利器와 周法高는 모두 마멸된 글자(□)를 두고 원문을 소개하고 있으나, 여기서는 四庫全書本 《顔氏家訓》의 원문 ‘刻此詔於左’를 따라 풀이하였다.[역자]
역주12 了了 : 명백하다. 분명하다.[역자]
역주13 內史令李德林 : 《隋書》 〈李德林傳〉에 의하면 “李德林은 字가 公輔로 博陵郡 安平縣 사람이다. 中書侍郎을 제수받자 北齊의 主君이 文林館으로 불러들였으며, 다시 영을 내려 黃門侍郎 顔之推와 함께 判文林館事로 기용하였다. 高祖가 顧命을 받을 때 丞相府 屬官이 되었으며, 즉위하는 날 內史令을 제수받았다.”고 하였다.[趙曦明]
역주14 稱權 : 저울추[稱錘], 혹은 分銅이다.[역자]

안씨가훈(2) 책은 2019.03.1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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