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顔氏家訓(1)

안씨가훈(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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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출신이 미천하여도
, 有者, 홍정洪亭民耳, 頗善
文, 殊工草隷, 효원제孝元, 一皆使之。
輕賤, 多未之重, 恥令子弟以爲,
時云:“十紙, 不敵。” 吾雅愛其手迹, 常所寶持。
효원제孝元嘗遣혜편惠編送文章示소자운
좨주, 좨주祭酒問云:“君王比賜, 及寫, 殊爲, 姓名爲誰?
那得都無?”
혜편以實答。
소자운子雲歎曰:“此人後生無比, 遂不爲世所稱, 亦是奇事。”
於是聞者稍復
陷歿, 簡牘湮散, 정첨亦尋卒於양주揚州, 前所輕者, 後思一紙, 不可得矣。


4. 출신이 미천하여도
효원제孝元帝가 전에 형주荊州에 있을 때 정첨丁覘이라는 이가 있었는데, 홍정洪亭 지방의 평민일 뿐이었으나 글을 상당히 잘 지었고 특히 초서와 예서에 뛰어나, 효원제孝元帝는 글씨 쓰는 일을 모두 그에게 시켰다.
그러나 군부軍府에서는 출신이 미천하다고 그를 존중하지 않는 이들이 많았으며, 자제들로 하여금 그의 글씨를 본으로 삼게 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당시에 “정군丁君의 글씨 열 장이 왕포王褒의 글씨 몇 를 못 당한다.”라고 했지만, 나는 평소 그의 글씨를 애호하여 늘 소중하게 간직했다.
효원제孝元帝가 일찍이 전첨典籤이었던 혜편惠編을 시켜 좨주祭酒소자운蕭子雲에게 문장을 보냈는데, 좨주祭酒가 묻기를 “군왕께서 근자에 내려주신 서한書翰시문詩文을 쓴 글씨가 참으로 뛰어난 솜씨인데, 그분의 성명이 어떻게 되시오?
어떻게 전혀 알려지지 않을 수가 있소?”라 하였다.
혜편惠編은 사실대로 대답을 했다.
소자운蕭子雲은 탄식을 하면서 “이 사람은 후인들이 견줄 수가 없을 텐데, 끝내 세상 사람들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으니, 이 역시 별난 일이로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점차 정첨丁覘을 다시 보게 되었다.
얼마 후 벼슬이 상서의조랑尙書儀曹郞에 이르렀고 나중에는 진안왕晉安王시독侍讀이 되어 을 수행하여 동쪽으로 내려갔다.
강릉江陵이 함락될 때 〈정첨丁覘이 쓴〉 편지나 문서들은 다 없어져버렸고 정첨丁覘 역시 얼마 후에 양주揚州에서 죽었으니, 예전에 얕보던 이들은 뒤에 〈그의〉 글씨 한 장을 얻고 싶어도 얻을 수가 없었다.


역주
역주1 梁孝元前在荊州 : 《梁書》 〈元帝紀〉에 “普通 7년(526)에 使持節이 되어 荊‧湘‧郢‧益‧寧‧南 등 梁나라 6州의 都督諸軍事로 나갔고, 西中郎將 및 荊州刺史가 되었다.”라 하였다.[盧文弨]
역주2 丁覘(첨) : 張彦遠의 《法書要錄》에서 “丁覘은 智永과 동시대 사람으로서 隷書에 능하여 세칭 ‘丁眞永草’라 하였다.”라 하였다. 이 사람이 智永과 함께 이름을 날렸다면, 아무래도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李詳]
《日本見在書目》에 丁覘 注의 《千字文》 1卷이 기재되어 있다. 이 《千字文》의 注釋들을 살펴보면 모두가 梁‧陳의 文士들의 것이니, 그렇다면 이 丁覘이 아마도 顔之推가 여기 거론한 사람일 것이다. 또 梁 元帝가 《金樓子》 〈著書〉에서 “《夢書》 1秩 10卷은 金樓가 丁覘으로 하여금 짓게 한 것이다.”라고 한 것도 이 사람이다.[劉盼遂]
張懷瓘의 《書斷》 中에서 “智永의 章草와 草書는 妙의 경지에 들었고, 隷書는 能의 경지에 들었으며, 그의 형 智楷 역시 草書를 잘 썼고 丁覘 역시 隷書를 잘 써, 당시 사람들이 ‘丁眞楷草’라 칭했다.”라 하였다.[王利器]
역주3 : 첨
역주4 屬(촉)文 : 글을 짓는 일을 뜻한다. 본서 제1 〈序致〉篇 2 주 14) 참조.
역주5 : 촉
역주6 書記 : 《後漢書》 〈百官志〉에 “記室令史는 章表 올리는 일과 문서[書記]의 보고를 주관한다.”라 하였다.[盧文弨]
역주7 軍府 : 본서 제8 〈勉學〉篇 15에서 “軍府에서 그의 포부에 감복했다.”라고 했다. 軍府라 함은 湘東王이 당시 江陵의 西府에서 六州諸軍事를 맡고 있었음을 말한다. 그래서 軍府라 하였다.[王利器]
이를 통해 六朝時代에 門閥과 名望을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吳梅]
역주8 楷法 : 楷法이란 글씨를 익힐 때 本으로 삼는 것을 말한다. 《世說新語》 〈方正〉의 注에서 宋 明帝의 《文章志》를 인용하여 “魏나라 때 凌雲閣을 세웠는데, 현판에 글씨 쓰는 것을 잊었다가 韋仲將으로 하여금 사다리에 올라가 글씨를 쓰게 하였다. 잠시 후 내려왔는데 수염과 머리카락이 다 하얗게 세었고, 거의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돌아와 자제들에게 ‘마땅히 楷法 노릇은 그만두어야 한다.’라고 말했다.”라 하였다.[王利器]
역주9 丁君 : 南朝에서 ‘君’으로 불리는 사람은 時俗에서 중요한 인물로 간주되는 경우이다. 《梁書》 〈任昉傳〉에서 “任昉은 남들과 친교 맺기를 좋아하고 士友들을 잘 끌어주어, 그의 추천을 받은 사람들은 대체로 승진하거나 발탁된 이들이 많았다. 그래서 지체 있는 집안의 사람들은 다들 앞다투어 교유를 맺으려 했고, 좌중의 빈객들이 늘 수십 명에 달했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경모하여 ‘任君’이라 불렀는데, 漢代의 三君(竇武‧劉淑‧陳蕃)과 같다는 말이었다.”라 했다. 陸倕의 〈贈任昉〉 詩에서는 “任君은 본래 뛰어난 식견이 있었고, 張子는 또한 사람이 맑았다.”라 하였다.[王利器]
역주10 王褒數字 : 《周書》 〈王褒傳〉에 “王褒는 字가 子淵이고 琅邪 臨沂 사람이다. 梁代 國子祭酒 蕭子雲이 王褒의 고모부였는데 초서와 예서에 특히 뛰어났다. 王褒는 인척으로서 그 집안에 드나들며 그의 글씨를 모범으로 삼았는데, 얼마 안 있어 ‘亞子雲’으로 불리며 함께 세상에서 존중을 받았다.”라 하였다.[趙曦明]
王褒가 글씨를 잘 쓰는 것으로 존중받았다는 이야기가 본서 제19 〈雜藝〉篇 2에도 나온다.[郝懿行]
역주11 典籤(첨) : 《南史》 〈恩倖 呂文顯傳〉에서 “故事에, 府州의 부서 내에서 일을 논할 때에는 늘 쪽지[籤]의 앞쪽에다 논하는 일을 순서대로 써놓았는데, 훗날 이를 謹籤이라 하고 날짜 아래에 아무개 관리의 아무개 쪽지라고 표시를 했다. 그리하여 府州에서는 典籤을 두어 그 일을 맡겼는데, 본래는 五品의 관리였다가 宋代 초에 七職으로 바뀌더니, 宋朝가 들어서자 나이 어린 皇子를 藩鎭으로 내보내면서, 당시 군주들이 다들 가까운 측근을 典籤으로 임명함에 따라, 그 권한이 점차 커지게 되었다.”라 하였다.[趙曦明]
《唐六典》 29에 “親王의 官府에 典籤이 있는데, 宣傳과 敎令의 일을 관장한다.”라 하였다.[王利器]
역주12 : 첨
역주13 祭(좨)酒 : 《隋書》 〈百官志〉에 “學府에 祭酒 1人이 있다.”라 하였다.[盧文弨]
역주14 : 좨
역주15 書翰 : 본서 제8 〈勉學〉篇 25에 “세간의 편지글[書翰]”이라 하였는데, 오늘날의 書信과 같은 말이다. 《文選》에 수록된 〈長楊賦〉의 注에 “翰은 붓이다.”라 하였다.[王利器]
역주16 詩筆 : 六朝人들은 詩와 筆을 상대적으로 보았는데, 筆은 韻이 없는 글을 말한다. 《南齊書》 〈晉安王子懋傳〉에서 “文章 詩筆은 훌륭한 일이긴 하지만, 세상일이 더 근본이다.”라 하였고, 《梁書》 〈劉潛傳〉에서는 “劉潛은 字가 孝儀이고, 秘書監이었던 劉孝綽의 동생이다.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형제가 서로 독려하며 열심히 공부하였는데, 둘 다 글을 잘 지었다. 劉孝綽은 늘 ‘三筆六詩’라고 했었는데, 三은 劉孝儀를, 六은 劉孝威를 가리킨 말이다.”라고 하였다. 또 《梁書》 〈庾肩吾傳〉에서 “梁 簡文帝의 〈與湘東王書〉에 ‘詩가 이미 이와 같을 뿐만 아니라, 筆 또한 그와 같다.’라고 했다.”라 하였고, 《北史》 〈蕭圓肅傳〉에서는 “당시 사람들의 詩筆을 엮어 《文海》 40권을 만들었다.”라 하였다. 여기에 나온 詩筆은 모두 같은 뜻이다.[王利器]
역주17 佳手 : 《梁書》 〈庾肩吾傳〉에서 “梁 簡文帝는 〈與湘東王書〉에서 ‘張士簡의 賦와 周升逸의 辨 역시 참으로 훌륭한 솜씨[佳手]여서, 다시 만나기 어렵다.’라 하였다.”라고 했다. 또 本書 제19 〈雜藝〉篇 8에서 “열에 예닐곱만 맞혀도 上手로 여긴다.”라 하였는데, 이 ‘上手’도 이와 같은 뜻이다.[王利器]
역주18 聲問 : 聲問은 곧 聲聞으로, 오늘날 명성이라 하는 것과 같다. 《詩經》 〈卷阿〉의 ‘훌륭한 소문과 훌륭한 명망[令聞令望]’에 대하여, 《詩經釋文》에서 “聞은 본래 問으로 되어 있었다.”라 하였다.[王利器]
역주19 刮目 : 裴松之 注의 《吳志》 〈呂蒙傳〉에서 〈江表傳〉을 인용하여 “呂蒙이 魯肅에게 일러 말하기를 ‘선비가 3일을 헤어져 있으면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아야 한다고 했소.’라고 했다.”라 하였다.[趙曦明]
역주20 尙書儀曹郎 : 《隋書》 〈百官志〉에 “尙書省에 儀曹와 虞曹 등 郎 23인을 두었다.”라 하였다.[趙曦明]
역주21 晉安王 : 簡文帝 蕭綱을 가리킨다. 《梁書》 〈簡文帝紀〉에서 “天監 5년 晉安王에 봉해졌다.”라 하였다.[趙曦明]
역주22 侍讀 : 《資治通鑑》 130의 胡三省 注에서 “여러 왕들에게는 侍讀이 있는데, 왕에게 經典을 傳授하는 일을 관장하였다.”라 하였다.[王利器]
역주23 東下 : 《春秋左氏傳》 襄公 16년의 杜注에서 “강을 따라 동쪽[東]으로 가므로 내려간다[下]고 하였다.”라 하였다. 《國語》 〈晉語〉의 韋注에서는 “동쪽으로 가는 것을 내려간다고 한다.”라 하였다. 南朝人들이 동쪽으로 내려간다고 하는 것은 바로 長江을 따라 동쪽으로 가는 것을 일컫는다.[王利器]
역주24 西臺 : 《資治通鑑》 144의 胡三省 注에서 “江陵이 서쪽에 있으므로 그래서 西臺라 하였다.”라 했다.[王利器]

안씨가훈(1)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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