而
云:“伏羲或謂之宓羲。” 按諸經史緯候, 遂無宓羲之號。
虙字從虍, 宓字從宀, 下俱爲必, 末世傳寫, 遂誤以虙爲宓,
今兗州永昌郡城, 舊單父地也, 東門有子賤碑, 漢世所立, 乃曰:“
, 卽子賤之後。”
장읍張揖은 “복虙이란 지금의 복희씨伏羲氏이다.”라고 하였으며, 맹강孟康 역시 《한서고문주漢書古文注》에서 “복虙은 지금의 복伏자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황보밀皇甫謐은 “복희伏羲는 혹간 복희宓羲라고도 한다.”고 하나, 경서經書‧사서史書‧위서緯書‧점서占書를 모두 살펴보건대 복희宓羲라는 호칭은 어디에도 없다.
복虙자는 ‘호虍’ 부수部首를 따르고 밀宓자는 ‘면宀’ 부수部首를 따르되, 그 밑에는 모두 필必자를 쓴 것으로 후대後代에 옮겨 쓰면서 마침내 복虙자를 밀宓으로 잘못 쓴 것이나,
〈황보밀皇甫謐은〉 《제왕세기帝王世紀》에서 이를 좇아 잘못 이름을 바꿔 쓴 것이다.
이를 어떻게 입증할 수 있는가? 공자孔子의 제자 복자천虙子賤이라는 이는 선보單父 땅의 읍재邑宰를 역임한 이로, 바로 복희씨虙羲氏의 후예後裔였으나, 속자俗字로는 밀宓으로도 쓰며, 혹은 다시 산山자를 더하여 〈밀密로 쓰기도〉 하였다.
지금의 연주兗州 영창군永昌郡의 성城이 옛날 선보單父의 유적지遺蹟地이다. 동문東門에 자천비子賤碑가 있는데, 한漢나라 때에 세워진 것으로, “제남濟南의 복생伏生은 바로 자천子賤의 후예後裔이다.”라고 쓰여 있다.
이것으로 복虙은 복伏과 고래로 통용되는 글자였으며, 잘못하여 밀宓이라 여겼던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