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顔氏家訓(1)

안씨가훈(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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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顔氏 집안의 文風
10. 顔氏 집안의 文風
吾家世文章, 甚爲典正, 不從流俗。
우리 집안의 문장은 매우 점잖고 곧았으며 세간의 시류時流에 따르지 않았다.
梁孝元在時, 撰, 亦以不偶於世, 無故也。
효원제孝元帝번진藩鎭에 있을 때 《서부신문西府新文》을 편찬하였지만 한 편도 수록되지 못한 까닭은, 아무래도 당시의 조류에 맞지 않고 〈부박한〉 이 없었던 탓이었을 것이다.
有詩、賦、銘、、書、表、啓、疏二十卷, 吾兄弟始在, 竝未得編次, 便遭火盪盡, 竟不傳於世。
, , , , , , , 등의 문장 20권이 있었는데, 우리 형제가 막 상을 당하고서 채 정리도 하기 전에 전란을 만나 다 없어져 끝내 세상에 전하지 않게 되었다.
銜酷茹恨, 徹於心髓!
원통하고 한스러운 마음이 가슴에 사무치는구나!
操行見於, 及孝元
〈우리 집안의〉 품행은 《양사梁史》 〈문사전文士傳〉과 효원제孝元帝의 《회구지懷舊志》에 나와 있다.
역주
역주1 蕃邸(저) : 藩鎭이다. 여기서는 蕭繹이 湘東王으로 江陵에 있었을 때를 가리킨다.[역자]
역주2 : 저
역주3 西府新文 訖無一篇見錄者 : 《隋書》 〈經籍志〉에 의하면 《西府新文》 11卷은 梁 蕭淑이 지은 것이다. 《金樓子》 〈著書〉篇에 수록된 책들 중 어떤 것은 蕭繹이 직접 지었고, 어떤 것은 顔協, 劉緩, 蕭賁 등을 시켜 지었는데, 이 책도 분명 元帝가 시켜서 지은 것이다.[盧文弨]
《唐書》 〈藝文志〉의 도서목록 중에 蕭淑의 《新文要集》 10卷이 나온다. 蕭淑은 蘭陵 사람으로서, 《南齊書》 〈蕭介傳〉에 나온다. 西府는 江陵을 가리키는데 당시 荊州가 陝 지역을 가르는 요충지였으므로 江陵을 西府라 불렀다. 이는 東晉 때에 歷陽을 西府라 한 것과 같다. 《西府新文》은 아마도 梁 元帝가 蕭淑으로 하여금 여러 신료들의 문장을 모아서 만들게 한 듯하다. 당시 顔之推의 부친인 顔協이 鎭西府諮議參軍으로 있었음에도 이 책에 收錄되지 못하였으므로, 顔之推가 이 이야기를 끄집어내어 유감스럽다고 한 것이다.[王利器]
역주4 鄭衛之音 : 당시의 실속없이 겉만 화려한 문학을 가리킨다. 《南史》 〈蕭惠基傳〉에 “宋 大明(457~464) 이래로 노래꾼들은 다들 鄭‧衛의 노래를 숭상하였고 雅樂의 正聲은 좋아하는 이가 드물었다.”라 하였다.[王利器]
역주5 : 뢰
역주6 草土 : 거적자리와 흙베개라는 뜻으로, 喪中임을 뜻한다.[盧文弨]
역주7 梁史文士傳 : 《梁書》 〈文學傳〉에서 “顔協은 字가 子和이다. 7대조 顔含은 晉에서 侍中, 國子監祭酒, 西平靖侯 등을 지냈다. 부친 顔見遠은 박학하면서도 지조와 행실이 올곧았고, 齊나라에서 治書侍御史 겸 中丞을 지냈는데, 高祖가 帝位를 선양받자 단식을 하다 죽었다. 顔協은 어려서 부친을 잃고 외삼촌 손에 컸는데, 많은 책들을 두루 읽었고 草書와 隷書를 잘 썼다. 처음 벼슬은 湘東王의 國常侍 겸 記室로 시작하였고, 蕭繹이 荊州의 번진으로 나가면서 正記室로 전보되었다. 당시 吳郡의 顧協도 번진에 있었는데, 재주와 학문이 서로 버금가므로 官府에서는 二協이라 불렀다. 외삼촌 謝暕이 죽자 顔協은 喪中에 그를 伯父나 叔父와 같은 예로써 모셨는데, 評者들이 이를 대단하게 보았다. 또 가문의 사업을 思念하여 현달을 추구하지 않았으며, 벼슬을 주려고 부르는 것도 늘 사양하였다. 大同 5년에 죽었다. 그가 지은 《晉伯傳》 5卷과 《日月災異圖》 2卷은 전란으로 멸실되었다. 두 아들로 之儀와 之推가 있었다.”라 하였다.[趙曦明] 여기서 말하는 《梁史》란 아마도 陳의 領軍大著作郎 許亨이 지은 《梁史》 53卷을 말할 것이다.(《隋書》 〈經籍志〉 참조.) 顔之推는 〈唐代 사람〉 姚思廉의 《梁史》는 보지 못했을 것이므로, 분명하게 구별해야 한다.[劉盼遂]
역주8 懷舊志 : 《隋書》 〈經籍志〉에 의하면 《懷舊志》 9卷은 梁 元帝가 지은 것이다.[趙曦明]元帝의 《懷舊志》 1秩 1卷이 《金樓子》 〈著書〉篇에 나온다. 또 《北周書》 〈顔之儀傳〉에서 “부친 顔協은 顔見遠이 義理를 따르고자 시대를 거스른 일로 인해 끝내 벼슬에 나서지 않았는데, 湘東王이 그를 끌어다 藩府의 記室參軍으로 삼으니 顔協은 부득이 명에 응하였다. 梁 元帝가 뒤에 《懷舊志》 및 詩를 지으면서 이 미담을 칭송하였다.”라고 한 것은, 아마도 이 《顔氏家訓》의 이야기에 근거했을 것이다.[劉盼遂]

안씨가훈(1)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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