注
曾公此箚
는 欲附古作者
之旨
하여 陳上功德
하고 宣之
이요 而其結束
은 歸於勸戒
라
故功德之殊
에 하고 舃奕繁衍
하여 久而彌昌者
는 蓋天人之理 必至之符
니이다
然生民以來로 能濟登玆者는 未有如大宋之隆也니이다
夫禹之績大矣
나 而其孫
하고 湯之烈盛矣
나 而其孫
하고 周自后稷
으로 十有五世
에 至于文王
이나 而大統未集
하고 武王成王
이 始收太平之功
이나 而康王之子
하고 昭王之子
하며 曁于幽厲
하여 陵夷盡矣
하니이다
及
나 然二世而亡
하고 漢定其亂
이나 而
하고 이나 然
以後
로 世故多矣
하니이다
至于
히 蓋五十有六年
이로되 而
하니 其廢興之故甚矣
니이다
宋興
에 爲民去大殘
하여 致更生
하고 兵不再試
로되 而
하니
內輯師旅하여 而齊以節制하고 外卑藩服하여 而納以繩墨하니
所以安百姓하고 禦四夷하며 綱理萬事之具는 雖創始經營이나 而彌綸已悉하니이다
莫貴於爲天子
요 莫富於有天下
어늘 而
하여 爲萬世策
하고 造邦受命之勤
으로 爲帝太祖
니 功未有高焉者也
니이다
는 繼統遵業
하여 以涵煦生養
하고 蕃息齊民
하여 以幷容徧覆
하여 擾服異類
하니이다
蓋自天寶之末
로 宇內
이라가 及
出
에 天下平
이나 而
猶間入闚邊
하고 至于景德 二百五十餘年
하여
契丹始講和好
하고 하여 而天下銷鋒灌燧
하여 無鷄鳴犬吠之警
하여 以迄于今
하니이다
는 寬仁慈恕
하여 虛心納諫
하고 愼注措
하며 謹規矩
하고
在位日久에 明於群臣之賢不肖忠邪하여 選用政事之臣하여 委任責成하되
然公聽竝觀하여 以周知其情僞하고 其用舍之際에 一稽於衆이라
故任事者亦皆警懼하고 否輒罷免하니 世以謂得馭臣之體라하니이다
故傳天下之日에 不陳一兵하고 不宿一士하여 以戒非常이나 而上下晏然하니 殆古所未有니이다
故棄群臣之日에 天下聞之하고 路祭巷哭하여 人人感動歔欷하니 其得人之深은 未有知其所繇然者라
는 聰明睿智
하여 言動以禮
하니 上帝眷相
하여 天命所集
이로되 而稱疾遜避
하여 至于累月
하고
自踐
로 淵黙恭愼
하여 無所言議施爲
로되 而天下傳頌稱說
하여 德號彰聞
하니이다
及正南面
에 勤勞庶政
하고 每延見
하여 省决萬機
하되 必咨詢舊章
하고 考求古義
하니 聞者惕然
하여 皆知其志在有爲
하니이다
雖
하여 成功盛烈
을 未及宣究
나 而明識大略
은 足以克配前人之休
라
陛下
는 하니 可謂有不世出之姿
요 하니 可謂有君人之大德
이라
憫自晩周秦漢以來로 世主率皆不能獨見於衆人之表하여 其政治所出이 大抵踵襲卑近하고 因於世俗而已라
於是慨然以上追唐虞三代荒絶之迹하고 修列先王法度之政으로 爲其任在己하니 可謂有出於數千載之大志라
變易因循하고 號令必信하여 使海內觀聽으로 莫不奮起하여 群下遵職하여 以後爲羞하니 可謂有能行之效라
今斟酌損益하고 革敝興壞하여 制作法度之事 日以大備하니 非因陋就寡하고 拘牽常見之世所能及也라
至於緩故縱之誅하고 重誤入之辟하니 蓋未嘗用一暴刑也하며
田或二十而稅一이나 然歲時省察하여 數議寬減之宜하고 下蠲除之令하니 蓋未嘗加一暴賦也하며
民或老死不知力役이나 然猶憂憐惻怛하여 常謹復除之科하고 急擅興之禁하니 蓋未嘗興一暴役也하니
前世或失其操柄者는 天下之勢或在於外戚하고 或在於近習하며 或在於大臣이나
宋興以來로 戚里宦臣과 曰將曰相이 未嘗得以擅事也하니 所以謹其操柄者如此라
而況輯師旅於內
하여 天下不得私尺兵一卒之用
하고 卑
於外
하여 天下不得專尺土一民之力
하니 其自處之勢如此
라
至於畏天事神과 仁民愛物之際에도 未嘗有須臾懈也하니 其憂勞者又如此라
蓋不能附其民하여 而至於失其操柄하고 又怠且忽은 此前世之所以危且亂也요 民附於下하고 操柄謹於上하여 處勢甚便하고 而加之以憂勞는 此今之所以治且安也라
故人主之尊
은 意諭色授
라도 而
震動
하고 言傳號渙
이라도 而萬里奔走
하여
山巖窟穴之民이 不待期會로되 而時輸歲送以供其職者 惟恐在後하고 航浮索引之國이 非有發召로되 而籝齎槖負以致其贄者 惟恐不及하며
西北之戎은 投弓縱馬하여 相與袨服而戯豫하고 東南之夷는 正冠束袵하여 相與挾冊而唫誦하며
至於
順敍
하고 百嘉鬯遂
하여 凡在天地之內含氣之屬
이 皆裕如也
하니이다
豈有若今
百有二十餘年
에 自通邑大都至於荒陬海聚
히 無變容動色之慮萌於其心
하고 無援枹擊柝之戒接於耳目
이리오
臣은 故로 曰 生民以來로 未有如大宋之隆也라하노이다
竊觀於詩
컨대 其在風雅
엔 陳太王王季文王致王迹之所由
와 與武之所以繼代
하고 而成之興
하니 則美有
하고 戒有
이라
其所言者
는 蓋農夫
築室治田
과 師旅祭祀飮尸受福
으로 委曲之常務
요
後嗣所以昭先人之功이며 當世之臣子所以歸美其上이요 非徒薦告鬼神하고 覺寤黎庶而已也라
書稱
하니 蓋歌其善者
는 所以興其嚮慕興起之意
하고 防其怠廢難久之情
이니 養之於聽而成之於心
이라
其於勸帝者之功美와 昭法戒於將來에 聖人之所以列之於經하여 垂爲世敎也니이다
今大宋祖宗이 興造功業은 猶太王王季文王이요 陛下承之以德은 猶武王成王이로되
而群臣之於考次論撰
하여 列之
하고 被之金石
하여 以通神明
하고 昭法戒者
는 闕而不圖
하니 此學士大夫之過也
라
蓋周之德盛於文武나 而雅頌之作은 皆在成王之世하니 今以時考之컨대 則祖宗神靈 固有待於陛下니이다
至若周之積仁累善
하여 至成王周公
하여 爲最盛之時
로되 而泂酌
에 言
니라하니 所以爲成王之戒
니이다
蓋履極盛之勢하되 而動之以戒懼者는 明之至요 智之盡也라
則處至治之極하여 而保之以祇愼은 唐虞之所同也니이다
而世世治安은 三代所不及이니 則宋興以來로 全盛之時는 實在今日이니이다
陛下仰探皇天所以親有德饗有道之意하여 而奉之以寅畏하고 俯念一日二日萬幾之不可以不察하여 而處之以兢兢하여
使休光美實로 日新歲益하여 閎遠崇侈하고 循之無窮하여 至千萬世하여 永有法則이니
臣愚區區愛君之心
에 誠不自揆
하고 하니 惟陛下之所擇
이로이다
注
王遵巖曰 體意雖出於
與
等門戶中來
나 然原本經訓
하여 別出機軸
이라
不爲諛悅淺制
하고 而忠藎進戒之義昭然
하여 與先朝
比盛矣
니 眞作者之法也
라하니라
02. 창주지주滄州知州로 전보되어 대궐을 지나다가 대전大殿에 올린 소疏
注
증공曾公의 이 소차疏箚는 옛 작가들이 아송雅頌을 쓴 취지에 따라 군왕의 공덕功德을 서술하고 그것을 금석金石에 올리고자 한 것이었으며, 그 마무리는 선을 힘쓰고 악을 경계하라는 것이었다.
신은 듣건대, 기초가 튼튼한 곳은 건축물의 형세가 높고 역량이 큰 자는 짊어진 짐이 무겁다고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제왕의 공덕은 특별히 위대하여 그 광채가 만천하에 비치고 은택이 후손에게 파급됨으로써 자손들이 번창하여 세월이 가면 갈수록 더욱 창성하니, 이는 천도天道와 인사人事의 이치상 반드시 이루어지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러나 인류가 생긴 이후 능히 이 수준까지 올라선 일은 우리 대송大宋의 왕조王朝처럼 융성한 경우는 없었습니다.
대체로 우禹는 공적이 위대하였으나 그의 손자 태강太康이 결국 그 유업을 실추시켰고, 탕湯은 공업이 성대하였으나 그의 손자 태갑太甲이 군왕이 된 뒤에 혼암昏暗하여 〈국정을 다스리지 못했다.〉 주周나라는 후직后稷 이후 15대를 거쳐 문왕文王에게까지 이르렀으나 통일천하의 대업을 성취하지 못하였고, 무왕武王과 성왕成王은 비로소 천하를 태평하게 한 공을 거두었으나 강왕康王의 아들 소왕昭王은 남쪽 나라를 순행하러 나갔다가 어려운 일을 당했는가 하면 소왕昭王의 아들 목왕穆王은 변방 오랑캐 땅에서 위험에 처하였고 유왕幽王과 려왕厲王 때에 이르러 〈나라의 세력이〉 점점 쇠퇴해졌습니다.
진秦나라 때에 와서는 여러 대의 지혜로 천하를 통합하였으나 두 대 만에 망하였고, 한漢나라는 어지러운 세상을 안정시켰으나 여씨呂氏 종족과 7국의 화가 끊임없이 일어났으며, 건무建武 때에 중흥을 이루었지만 충제沖帝와 질제質帝 이후로 세상에 혼란한 일이 많아졌습니다.
위魏나라의 고충은 천하가 셋으로 갈라진 것이었고, 진晉나라와 송宋나라의 고충은 천하가 남북으로 나누어진 것이었으며, 수 문제隋 文帝는 비로소 천하를 통일하긴 하였으나 아들까지만 전하고 잃어버렸습니다.
당唐나라의 치세治世는 정관貞觀과 개원開元 때에 있었으나 〈이 당시〉 여인으로 인한 화가 대대로 생겨나 천보天寶(현종玄宗의 연호) 이후에는 기강이 쇠해졌습니다.
오대五代에 이르러서는 56년 동안에 8성姓 14군君이 바뀌었으니 그 흥망성쇠가 유래가 없을 정도로 심하였습니다.
송宋나라가 일어나 태조황제太祖皇帝가 백성을 위해 흉포한 자를 제거하여 다시 살아날 기회를 얻게 하고, 전쟁을 두 번도 치르지 않고서도 월粤‧촉蜀‧오吳‧초楚 지역을 점거하고 있던 다섯 나라의 군장君長을 모두 사로잡아 도성으로 끌어왔습니다.
그리하여 구주九州가 통일되어 대우大禹시대의 옛 강토를 회복하였습니다.
그리고 안으로는 군대를 취합하여 군율로 견제하였고 밖으로는 변방 속국들이 자세를 낮추어 규약을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그 밖에 백성을 안정시키고 사방 오랑캐를 방어하는 등 만사를 다스릴 법도들이 비록 창업하는 초기에 준비한 것이었으나 전체적인 기준이 이미 완비되었습니다.
귀貴로 말하면 천자보다 더 귀한 자리가 없고, 부富로 말하면 천하를 소유한 것보다 더 부유한 것이 없는데도, 자식을 놓아두고 아우에게 그것을 물려주어 만대의 장구한 계책을 마련하였으며, 새 나라를 세우고 천명을 받기를 부지런히 함으로써 태조황제太祖皇帝가 되셨으니, 그 공적은 전대에 더 높은 경우가 없었습니다.
태종황제太宗皇帝는 천하의 안녕을 추구하여 이미 진晉 지역을 평정한 뒤에는 전숙錢俶이 스스로 귀순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규칙을 만들고 법령을 후세에 전함으로써 황제의 대업을 계승하고 능히 선정을 행하여 천하를 보호하고 백성을 안정시켰습니다.
이와 같이 위대한 업적으로 태종황제太宗皇帝가 되셨으니, 그 덕은 그보다 더 높은 경우가 없었습니다.
진종황제眞宗皇帝는 〈선대 황제의〉 대통大統과 기업基業을 계승하여 만물의 생기를 함양하고 백성들이 번영하게 함으로써 천하를 포용하여 통치하고 이민족을 순종하게 하였습니다.
대체로 천보天寶 말기부터 천하가 혼란을 거듭하다가 태조太祖가 세상에 출현함에 이르러 천하가 안정되었지만, 서북방의 오랑캐는 오히려 수시로 침입하여 변경을 엿보았습니다. 그러다가 경덕景德(진종眞宗의 연호) 때까지 이르렀는데 〈안녹산安祿山의 난리 이후〉 250여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때 거란契丹은 비로소 화친을 거론하고 조덕명趙德明도 조정의 지시를 받아들여 온천하가 무기를 불에 녹여버리고 봉화불을 꺼버림으로써 닭이나 개가 놀라 울거나 짖어대는 일이 없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므로 이때 마침내 태산泰山에 봉封하고 사수산社首山에 선禪을 하여 상제上帝께 제물을 올리면서 그 공덕功德을 고하여 만세토록 신주를 옮기지 않고 고이 모실 사당임을 분명히 드러내 보였습니다.
인종황제仁宗皇帝는 관대하고 인자하여 마음을 비우고 간하는 말을 받아들이며 일처리를 신중히 하고 규칙을 삼가 따랐습니다.
아침 일찍 나와서 조회를 보고 날이 저물어서야 내전으로 물러나 어느 하루도 태만히 한 적이 없었습니다.
재위한 날짜가 오래되자 뭇 신하의 어질고 불초함과 충직하고 간사함을 환히 알아 정사에 수완을 지닌 신하를 가려 써서 국사를 믿고 맡겨 책임지고 성과를 이루어내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의 의견을 널리 듣고 모두 살펴보아 그 사람의 허실을 두루 알았고, 그를 등용하거나 버릴 적에는 한결같이 많은 사람의 의중을 참고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일을 맡은 자 또한 모두 마음을 가다듬고 두려워하였으며 아니다 싶으면 그 즉시 파면하였으니, 세상 사람들이 신하를 다스리는 요령을 얻었다고 말하였습니다.
나이가 많아지기 전에 덕성德性을 지닌 사람을 태자로 세워 〈국가를 다스리는 법도를〉 전수하기를 합당하게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천하를 넘겨주는 날 한 명의 병사를 배치하거나 숙직시켜 비상사태를 경계하지 않았는데도 조정 상하가 태평하였으니, 이는 옛날에도 없었던 일입니다.
그 온화하고 단아한 행검行檢은 충분히 대중의 마음을 순종하게 할 만한 것으로서 〈의도적으로〉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은덕을 베풀거나 개개인을 만나 자기를 좋아하게 만드는 차원이 아니었습니다.
〈백성을 위하는〉 진실한 마음을 오랫동안 축적하였기 때문에 백성들이 모두 아버지처럼 존경하고 어머니처럼 친애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뭇 신하를 버리고 세상을 떠나던 날 온 세상 사람이 그 소식을 듣고 길을 가다가 제향을 올리거나 마을 안에서 곡을 하는 등 사람마다 비감에 젖어 탄식하였으니, 인심을 얻기를 그처럼 깊이한 데에 대해서는 그 유래를 안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황조皇祖의 묘호廟號가 인종황제仁宗皇帝가 된 것입니다.
영종황제英宗皇帝는 총명하고 슬기로워 언어와 행동을 예법대로 하였기 때문에 하늘이 돌보아 천명天命이 자기에게 집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신병을 이유로 〈태자의 자리를〉 사양하기를 여러 달 동안이나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태자의 자리에 앉은 이후로는 과묵하고 공손하고 신중하여 특별한 말씀이나 행동을 보이는 일이 없는데도 온 천하가 이분을 끊임없이 칭송하고 거론하여 성대한 덕을 지녔다는 평판이 크게 드러났습니다.
그러다가 황제로 즉위해서는 각종 정무에 부지런히 힘쓰고 걸핏하면 삼공三公을 접견하여 국사를 살펴 처결하되 반드시 옛 규례를 물어보고 옛사람의 도리를 상고하였으니, 〈이 때문에 그와 같은 말을〉 들은 자들은 마음을 가다듬으면서 모두 그 뜻이 거룩한 정사를 행하자는 데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비록 일찍 천하를 버림으로써 뛰어난 공과 업적을 미처 완전히 다 이루지는 못했으나 밝은 식견과 큰 계책은 충분히 옛사람의 그 거룩함과 필적할 만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황고皇考의 묘호廟號가 영종황제英宗皇帝가 된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성신문무聖神文武하시니 세상에 보기 드문 자질을 지녔다고 말할 만하고, 인효공검仁孝恭儉하시니 군주의 큰 덕을 지녔다고 말할 만합니다.
말기 주周나라와 진秦‧한漢 이후 군주들이 대부분 일반 대중의 범주 이외의 것을 보지 못하여, 그들이 행하는 정치가 대체로 비근한 수준의 것을 답습하고 세속의 추이에 휩쓸릴 따름이었다는 것을 가엽게 여기셨습니다.
그리하여 의기에 북받쳐 저 위로 당요唐堯‧우순虞舜과 삼대三代(하夏‧은殷‧주周)의 요원한 자취를 소급하고, 선왕先王들이 행했던 법도가 있는 정사를 차례대로 정리하는 것을 자신에게 맡겨진 책임으로 삼으셨으니, 수천 년의 세월을 초월한 큰 뜻을 지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고식적인 폐습을 개혁하고 명령을 반드시 실행하게 하여 온 나라의 보고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떨쳐 일어나지 않는 자가 없게 함으로써 많은 관료들이 각자의 직무를 잘 수행하여 남에게 뒤처지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으니, 〈원대하신 포부를〉 능히 행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해를 헤아리고 〈옛 법을 가감하여〉 폐단을 고치고 허물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는 등 법도를 만들어내는 일이 나날이 크게 갖춰지고 있으니, 구차한 것에 만족하여 개선해나가려 하지 않고 범상한 소견에 얽매어 있는 세상 사람들이 미칠 수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
한 분 태조太祖와 네 분 선대 제왕의 유업을 계승하고 더 확대하셨으니 뛰어나다고 말할 만합니다.
대체로 이전 시대에 간혹 자기 나라의 백성을 복속시키지 못했던 원인은 형벌과 부역賦役에 관한 정사가 혹독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송宋나라가 일어난 이후로는 벌을 가할 때 사용한 것이라고는 채찍과 곤장 정도의 형구刑具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신중히 살피고 따져보았습니다.
심지어 〈죄인을 심리하는 관리 중에 마땅히 죄를 심판해야 할 것인데도〉 고의로 심판하지 않은 잘못을 범한 자에 대해서는 문책을 관대히 하고, 〈죄를 마땅히 심판하지 말아야 할 것인데도 심판을 한〉 잘못을 범한 자에 대해서는 징벌을 엄하게 하는 등 대체로 일찍이 한 번도 중형을 사용한 적이 없었습니다.
농토에 대해서는 간혹 수확의 20분의 1로 세를 정하기는 하였으나 해마다 철마다 〈과중한 부과는 없는가〉 살펴 적절하게 줄여주는 조치를 자주 논의하고 면제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니, 대체로 일찍이 한 번이라도 과중한 조세를 부과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간혹 늙어죽을 때까지 노역勞役을 몰랐으나 그런데도 황제께서는 이들을 걱정하고 가엽게 여겨 부역賦役을 면제해주는 법을 항상 염두에 두고 토목공사를 함부로 일으키지 못하도록 금하는 조치를 우선시하였으니, 대체로 일찍이 한 번이라도 가중한 부역賦役을 일으킨 적이 없었습니다.
백성들이 복속하게 된 원인은 이와 같은 일들이었습니다.
이전 시대에서 간혹 그 권력을 잃었던 자는 천하의 권세가 외척에게 있거나 혹은 군주와 친근한 사람에게 있거나 혹은 대신에게 있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송宋나라가 일어난 뒤로는 외척이나 환관, 장수나 재상들이 국가대사를 함부로 독단하게 한 적이 없으니, 권력을 잡는 일을 신중히 하기를 이와 같이 하였습니다.
더구나 안에서 군대를 통솔하여 천하에 누구도 무기 하나, 군사 하나를 사적으로 이용하지 못하게 하였고, 밖으로는 번복藩服의 위상을 낮추어 천하에 누구도 토지 한 자, 백성 하나의 힘을 마음대로 점유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스스로 대처하신 형세가 이와 같았습니다.
그리고 하늘을 경외하고 신령을 섬기는 일이며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고 만물을 애호하는 부분에도 일찍이 잠시라도 태만히 하신 적이 없으니, 〈나라를 위해〉 노심초사하신 것이 또 이와 같았습니다.
대체로 자기 백성을 복속시키지 못하여 그 권력을 잃는 상황에까지 이르거나, 또 국사를 게을리 하고 소홀히 했던 일은 곧 이전 시대가 위태롭거나 혼란에 빠지게 된 까닭이고, 백성이 아래에서 복속하고 권력을 위에서 신중히 행사하여 처한 상황이 매우 온당한데에다 〈국사를 위해〉 노심초사하시는 정성까지 들인 일은 곧 오늘날 국가가 다스려지고 안정된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존엄하신 군주께서 어떤 기색만 살짝 보이더라도 육복六服이 진동하고, 말이 전달되고 호령이 떨어지면 만리가 분주해집니다.
산골 바위틈이나 토굴 속에 사는 백성들로서 정해진 기한을 기다리지 않고 공물을 철마다 보내고 해마다 보내어 그들의 의무를 수행하는 자들은 오직 남보다 뒤처지지나 않을까 염려하고, 배로 운반하고 밧줄로 끌어오는 나라들로서 들어오라고 부르는 명을 내리지 않았는데도 상자에 담고 보따리를 꾸려 짊어지고 그 예물을 보내오는 자들은 오직 제때에 미치지 못하지나 않을까 걱정합니다.
서북방의 오랑캐는 활을 던져버리고 말을 풀어놓은 채 서로 어울려 고운 옷을 차려입고 즐거움을 누리고 있으며, 동남방의 오랑캐는 갓을 똑바로 쓰고 옷매무새를 단정히 한 〈경건한 자세로〉 서로 더불어 책을 끼고 〈성현의 말씀을〉 읊조리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육부六府가 순조롭게 운영되고 온갖 상서로운 일들이 성대하게 이루어져 천지 안에서 숨을 쉬는 모든 생명이 다 만족해하고 있습니다.
대체로 먼 옛날로는 삼대三代보다 더 아름다운 경우가 없고, 가깝게는 한漢‧당唐보다 성대한 경우가 없습니다.
그러나 3, 4대 혹은 1, 2대 만에 천하에 변란이 일어나 이루 다 거론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로 볼 때〉 오세육성五世六聖이 천하를 다스려온 120여 년 동안, 교통이 발달한 고을과 큰 도회지에서부터 먼 변방과 해변 마을에 이르기까지 〈불만스러워〉 기색이 달라지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가 마음속에서 싹트는 일이 없었고, 〈변란으로〉 인해 북을 쳐 〈군사를 지휘한다거나 야경을 도느라〉 딱다기를 치는 사례를 이목에 접하는 일이 없는 것이 지금과 같은 때가 과연 언제 있었습니까.
신은 이 때문에 이 세상에 인류가 생긴 이후 대송大宋처럼 거룩한 나라는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삼가 《시경詩經》을 살펴보건대, 〈국풍國風〉과 〈대아大雅〉‧〈소아小雅〉에 있어서는 태왕太王‧왕계王季‧문왕文王이 제왕의 공업功業을 이루어낸 연유와 무왕武王이 선대를 계승하고 성왕成王이 일어난 일을 개진하였으니, 찬미한 시로는 〈가락假樂〉과 〈부예鳧鷖〉가 있고 경계한 시로는 〈공류公劉〉와 〈형작泂酌〉이 있습니다.
〈국풍國風〉과 〈대아大雅〉‧〈소아小雅〉에 언급한 것은 대체로 농부와 여공女工들이 집을 짓거나 농사를 짓는 내용과, 군대를 일으키고 제사를 지내고 시동尸童에게 술을 올리고 〈신령으로부터〉 복을 받는 내용 등 작고 세세한 일상적인 일들입니다.
더 나아가 토끼 그물을 얽는 무부武夫가 드러나지 않은 처지에서도 덕행을 수양하고, 소와 양을 기르는 사람이 미물微物에게도 사랑이 미쳤다는 내용까지 기록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공덕功德을 논하는 자는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까지 포괄하여 그 자세한 정도가 이와 같은 법입니다.
이는 자손이 선조의 공을 드러내기 위함이자 당대의 신하가 그 윗사람에게 찬미를 돌리기 위한 것이지, 그저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며 사유를 고하고 백성들의 의식을 일깨우기 위한 의도만은 아닙니다.
《서경書經》에 “백성들을 〈구가九歌〉로 격려하여 덕정德政이 무너지지 않게 하십시오.” 하였는데, 대체로 제왕의 선정善政을 노래하게 한 이유는 백성으로 하여금 그 덕을 흠모하여 분발하는 뜻을 일으키고 태만하면 오래 지속하기 어렵게 되는 정서를 예방하게 하는 한편, 그 가사를 익히 듣고 그 속에 담긴 뜻이 마음속에 젖어들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제왕의 아름다운 공을 권면하고 〈따라야 할〉 법과 경계를 후세에 밝히는 내용을 성인이 경전經典에 기록해두어 세상의 교훈으로 남긴 것입니다.
지금 대송大宋 조종祖宗들께서 공업功業을 일으킨 일은 주周나라 태왕太王‧왕계王季‧문왕文王과 같고, 폐하께서 그것을 덕으로 계승한 일은 무왕武王‧성왕成王과 같습니다.
그런데도 뭇 신하가 〈그 공업功業과 덕을〉 상고‧정리하고 토론‧편찬하여 그것을 서책에 나열하고 금석金石에 올림으로써, 〈위로 하늘의〉 신명神明과 감응하고 〈아래로 천하에〉 모범과 경계를 드러내 보이는 일에 있어서는 빠뜨리고 꾀하지 않고 있으니, 이는 학사學士 대부大夫들의 잘못입니다.
대체로 주周나라의 덕은 문왕文王과 무왕武王 때 성대하였으나 아雅‧송頌 작품은 모두 성왕成王의 시대에 이루어졌으니, 지금 〈그에 견주어〉 시기를 살펴보면 조종祖宗의 신령이 진정 폐하에게 기대하는 뜻이 있는 것입니다.
이에 신은 진정 자신의 역량을 헤아리지 못하고 감히 이 일에 대한 요점을 말씀드립니다.
〈찬양하는 문장을 서술하는 과정에 비유할 만한〉 특정 사례를 찾아가며 찬양할 점을 취하여 본디 숨겨져 있는 부분을 겉으로 드러냄으로써 〈마땅히 표현해야 할 것들을〉 심도 있게 표현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일은 지금 문학에 종사하는 시종신들이 여러 관직에 가득하니 폐하께서 그저 분부를 내리시기만 하면 됩니다.
주周나라가 인덕과 선행을 쌓아오다가 성왕成王과 주공周公에게 이르러 가장 성대한 시기가 되었으나, 《시경詩經》 〈형작泂酌〉시에 “하늘은 덕 있는 〈군주를〉 가까이하고 도를 지닌 〈군주의〉 제사를 흠향한다.”는 뜻을 말하였으니, 이것을 성왕成王에 대한 경계로 삼았습니다.
대체로 매우 성대한 입장에 처해 있는데도 경계하고 조심하는 말로 마음을 감동시켰으니, 이는 총명과 지혜의 정점이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경우는 주周나라만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당요唐堯‧우순虞舜은 태평한 세상의 최고 경지였으나 그 군신君臣들이 서로 경계하기를 “조심하고 두려워하소서. 하루나 이틀 사이에도 〈처리해야 할 작은 일들이〉 만 가지나 됩니다.”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태평한 세상의 최고 경지에 처해 있으면서도 삼가고 두려워하는 자세로 그것을 보호했던 일은 요순堯舜시대도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조종祖宗들이 이루어놓은 기업基業 위에서 천하태평의 국운을 더 확대해나가고 계십니다.
대대로 천하가 잘 다스려지고 안정된 것은 삼대三代 때도 미치지 못하였으니 송宋나라가 일어난 이후 전성시기는 확실히 오늘입니다.
폐하께서는 위로 저 하늘이 ‘덕 있는 〈군주를〉 가까이하고 도를 지닌 〈군주의〉 제사를 흠향한다.’는 뜻을 탐지하시고, 아래로 ‘하루나 이틀 사이에도 일어나는 만 가지나 되는 〈작은 정무를〉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을 생각하시되 삼가고 두려워하는 태도로 처리하셔야 합니다.
그리하여 아름다운 광채와 좋은 성과가 날마다 더 새롭고 해마다 더 축적되어 그 범위가 넓어지고 규모가 성대해져서 이것을 후대에 물려주어 자손만대에까지 내려가 영원히 법칙이 되도록 하셔야 합니다.
이는 폐하께서 평소에 계속 가슴에 품고 계셔야 할 〈이념입니다.〉
우매한 신은 임금을 사랑하는 변변치 않은 마음으로 인해 사실 자신의 역량을 스스로 헤아리지 못하고 고대의 시인이 《시경詩經》을 짓던 대의大義에 근접했으면 하고 희망할 뿐입니다. 다만 폐하의 취택을 바랍니다.
注
왕준암王遵巖이 말하였다. “문장의 체제와 내용은 비록 〈봉선문封禪文〉‧〈극진미신劇秦美新〉 같은 제가諸家의 문장과 한퇴지韓退之(한유漢愈)‧유자후柳子厚(유종원柳宗元)의 진당아서進唐雅序 등의 문파로부터 나왔으나, 기본적으로 경전經典의 가르침에 근본을 두고 따로 억양반복의 변화를 구사하였다.
아첨하거나 비속하지 않고 충성으로 경계를 올리는 뜻이 드러난 것으로 상고적의 주아周雅와 그 성대함을 견줄 만하니, 참으로 문장가의 바른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