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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曾鞏(1)

당송팔대가문초 증공(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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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증공(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曾公此箚 欲附古作者之旨하여 陳上功德하고 宣之이요 而其結束 歸於勸戒
臣聞基厚者勢崇하고 力大者任重이라
故功德之殊 하고 舃奕繁衍하여 久而彌昌者 蓋天人之理 必至之符니이다
然生民以來 能濟登玆者 未有如大宋之隆也니이다
夫禹之績大矣 而其孫하고 湯之烈盛矣 而其孫하고 周自后稷으로 十有五世 至于文王이나 而大統未集하고 武王成王 始收太平之功이나 而康王之子하고 昭王之子하며 曁于幽厲하여 陵夷盡矣하니이다
然二世而亡하고 漢定其亂이나하고 이나以後 世故多矣하니이다
하여 天寶以還으로 綱紀微矣하니이다
至于 蓋五十有六年이로되하니 其廢興之故甚矣니이다
宋興 爲民去大殘하여 致更生하고 兵不再試로되하니
九州來同하여 復禹之跡하니이다
內輯師旅하여 而齊以節制하고 外卑藩服하여 而納以繩墨하니
所以安百姓하고 禦四夷하며 綱理萬事之具 雖創始經營이나 而彌綸已悉하니이다
莫貴於爲天子 莫富於有天下어늘하여 爲萬世策하고 造邦受命之勤으로 爲帝太祖 功未有高焉者也니이다
遹求厥寧하여 하고
作則垂憲하여 하여 保世靖民하고
丕丕之烈 爲帝太宗 德未有高焉者也니이다
繼統遵業하여 以涵煦生養하고 蕃息齊民하여 以幷容徧覆하여 擾服異類하니이다
蓋自天寶之末 宇內이라가 天下平이나 猶間入闚邊하고 至于景德 二百五十餘年하여
契丹始講和好하고 하여 而天下銷鋒灌燧하여 無鷄鳴犬吠之警하여 以迄于今하니이다
故於是時하여 薦告功德하여 以明示萬世하니
所以爲帝眞宗이니이다
寬仁慈恕하여 虛心納諫하고 愼注措하며 謹規矩하고
早朝晏退하여 無一日之懈하니이다
在位日久 明於群臣之賢不肖忠邪하여 選用政事之臣하여 委任責成하되
然公聽竝觀하여 以周知其情僞하고 其用舍之際 一稽於衆이라
故任事者亦皆警懼하고 否輒罷免하니 世以謂得馭臣之體라하니이다
春秋未高 하여 傳付惟允이라
故傳天下之日 不陳一兵하고 不宿一士하여 以戒非常이나 而上下晏然하니 殆古所未有니이다
足以附衆者 非家施而人悅之也니이다
積之以誠心 民皆有父之尊하고 有母之親이라
故棄群臣之日 天下聞之하고 路祭巷哭하여 人人感動歔欷하니 其得人之深 未有知其所繇然者
故皇祖之廟 爲帝仁宗이니이다
聰明睿智하여 言動以禮하니 上帝眷相하여 天命所集이로되 而稱疾遜避하여 至于累月하고
自踐 淵黙恭愼하여 無所言議施爲로되 而天下傳頌稱說하여 德號彰聞하니이다
及正南面 勤勞庶政하고 每延見하여 省决萬機하되 必咨詢舊章하고 考求古義하니 聞者惕然하여 皆知其志在有爲하니이다
하여 成功盛烈 未及宣究 而明識大略 足以克配前人之休
故皇考之廟 爲帝英宗이니이다
陛下 하니 可謂有不世出之姿 하니 可謂有君人之大德이라
憫自晩周秦漢以來 世主率皆不能獨見於衆人之表하여 其政治所出 大抵踵襲卑近하고 因於世俗而已
於是慨然以上追唐虞三代荒絶之迹하고 修列先王法度之政으로 爲其任在己하니 可謂有出於數千載之大志
變易因循하고 號令必信하여 使海內觀聽으로 莫不奮起하여 群下遵職하여 以後爲羞하니 可謂有能行之效
今斟酌損益하고 革敝興壞하여 制作法度之事 日以大備하니 非因陋就寡하고 拘牽常見之世所能及也
之緖하고 推而大之하니 可謂至矣로이다
蓋前世或不能附其民者 刑與之政暴也
宋興以來 所用者鞭朴之刑이나 然猶詳審反覆하여
至於緩故縱之誅하고 重誤入之辟하니 蓋未嘗用一暴刑也하며
田或二十而稅一이나 然歲時省察하여 數議寬減之宜하고 下蠲除之令하니 蓋未嘗加一暴賦也하며
民或老死不知力役이나 然猶憂憐惻怛하여 常謹復除之科하고 急擅興之禁하니 蓋未嘗興一暴役也하니
所以附民者如此
前世或失其操柄者 天下之勢或在於外戚하고 或在於近習하며 或在於大臣이나
宋興以來 戚里宦臣 曰將曰相 未嘗得以擅事也하니 所以謹其操柄者如此
而況輯師旅於內하여 天下不得私尺兵一卒之用하고於外하여 天下不得專尺土一民之力하니 其自處之勢如此
至於畏天事神 仁民愛物之際에도 未嘗有須臾懈也하니 其憂勞者又如此
蓋不能附其民하여 而至於失其操柄하고 又怠且忽 此前世之所以危且亂也 民附於下하고 操柄謹於上하여 處勢甚便하고 而加之以憂勞 此今之所以治且安也
故人主之尊 意諭色授라도震動하고 言傳號渙이라도 而萬里奔走하여
山巖窟穴之民 不待期會로되 而時輸歲送以供其職者 惟恐在後하고 航浮索引之國 非有發召로되 而籝齎槖負以致其贄者 惟恐不及하며
西北之戎 投弓縱馬하여 相與袨服而戯豫하고 東南之夷 正冠束袵하여 相與挾冊而唫誦하며
至於順敍하고 百嘉鬯遂하여 凡在天地之內含氣之屬 皆裕如也하니이다
蓋遠莫懿於三代하고 近莫盛於漢唐이나
然或三四世或一二世 而天下之變 不可勝道也
豈有若今百有二十餘年 自通邑大都至於荒陬海聚 無變容動色之慮萌於其心하고 無援枹擊柝之戒接於耳目이리오
曰 生民以來 未有如大宋之隆也라하노이다
竊觀於詩컨대 其在風雅 陳太王王季文王致王迹之所由 與武之所以繼代하고 而成之興하니 則美有하고 戒有이라
其所言者 蓋農夫築室治田 師旅祭祀飮尸受福으로 委曲之常務
至於하고 하여도 無不稱紀하니
所以論功德者 由小以及大하여 其詳如此
後嗣所以昭先人之功이며 當世之臣子所以歸美其上이요 非徒薦告鬼神하고 覺寤黎庶而已也
書稱하니 蓋歌其善者 所以興其嚮慕興起之意하고 防其怠廢難久之情이니 養之於聽而成之於心이라
其於勸帝者之功美 昭法戒於將來 聖人之所以列之於經하여 垂爲世敎也니이다
今大宋祖宗 興造功業 猶太王王季文王이요 陛下承之以德 猶武王成王이로되
而群臣之於考次論撰하여 列之하고 被之金石하여 以通神明하고 昭法戒者 闕而不圖하니 此學士大夫之過也
蓋周之德盛於文武 而雅頌之作 皆在成王之世하니 今以時考之컨대 則祖宗神靈 固有待於陛下니이다
臣誠不自揆하고 輒冒言其大體하니이다
至於尋類取稱하여 本隱以之顯하여 使莫不究悉
則今文學之臣 充於列位하니 惟陛下之所使니이다
至若周之積仁累善하여 至成王周公하여 爲最盛之時로되 而泂酌니라하니 所以爲成王之戒니이다
蓋履極盛之勢하되 而動之以戒懼者 明之至 智之盡也
如此者 非周獨然이라
唐虞至治之極也 其君臣相飭曰 니라하니
則處至治之極하여 而保之以祇愼 唐虞之所同也니이다
今陛下履祖宗之基하여 廣太平之祚하여
而世世治安 三代所不及이니 則宋興以來 全盛之時 實在今日이니이다
陛下仰探皇天所以親有德饗有道之意하여 而奉之以寅畏하고 俯念一日二日萬幾之不可以不察하여 而處之以兢兢하여
使休光美實 日新歲益하여 閎遠崇侈하고 循之無窮하여 至千萬世하여 永有法則이니
此陛下之素所蓄積이니이다
臣愚區區愛君之心 誠不自揆하고 하니 惟陛下之所擇이로이다
王遵巖曰 體意雖出於等門戶中來 然原本經訓하여 別出機軸이라
不爲諛悅淺制하고 而忠藎進戒之義昭然하여 與先朝比盛矣 眞作者之法也라하니라


02. 창주지주滄州知州로 전보되어 대궐을 지나다가 대전大殿에 올린
증공曾公의 이 소차疏箚는 옛 작가들이 아송雅頌을 쓴 취지에 따라 군왕의 공덕功德을 서술하고 그것을 금석金石에 올리고자 한 것이었으며, 그 마무리는 선을 힘쓰고 악을 경계하라는 것이었다.
신은 듣건대, 기초가 튼튼한 곳은 건축물의 형세가 높고 역량이 큰 자는 짊어진 짐이 무겁다고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제왕의 공덕은 특별히 위대하여 그 광채가 만천하에 비치고 은택이 후손에게 파급됨으로써 자손들이 번창하여 세월이 가면 갈수록 더욱 창성하니, 이는 천도天道인사人事의 이치상 반드시 이루어지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러나 인류가 생긴 이후 능히 이 수준까지 올라선 일은 우리 대송大宋왕조王朝처럼 융성한 경우는 없었습니다.
대체로 는 공적이 위대하였으나 그의 손자 태강太康이 결국 그 유업을 실추시켰고, 은 공업이 성대하였으나 그의 손자 태갑太甲이 군왕이 된 뒤에 혼암昏暗하여 〈국정을 다스리지 못했다.〉 나라는 후직后稷 이후 15대를 거쳐 문왕文王에게까지 이르렀으나 통일천하의 대업을 성취하지 못하였고, 무왕武王성왕成王은 비로소 천하를 태평하게 한 공을 거두었으나 강왕康王의 아들 소왕昭王은 남쪽 나라를 순행하러 나갔다가 어려운 일을 당했는가 하면 소왕昭王의 아들 목왕穆王은 변방 오랑캐 땅에서 위험에 처하였고 유왕幽王려왕厲王 때에 이르러 〈나라의 세력이〉 점점 쇠퇴해졌습니다.
나라 때에 와서는 여러 대의 지혜로 천하를 통합하였으나 두 대 만에 망하였고, 나라는 어지러운 세상을 안정시켰으나 여씨呂氏 종족과 7국의 화가 끊임없이 일어났으며, 건무建武 때에 중흥을 이루었지만 충제沖帝질제質帝 이후로 세상에 혼란한 일이 많아졌습니다.
나라의 고충은 천하가 셋으로 갈라진 것이었고, 나라와 나라의 고충은 천하가 남북으로 나누어진 것이었으며, 수 문제隋 文帝는 비로소 천하를 통일하긴 하였으나 아들까지만 전하고 잃어버렸습니다.
나라의 치세治世정관貞觀개원開元 때에 있었으나 〈이 당시〉 여인으로 인한 화가 대대로 생겨나 천보天寶(현종玄宗의 연호) 이후에는 기강이 쇠해졌습니다.
오대五代에 이르러서는 56년 동안에 8 14이 바뀌었으니 그 흥망성쇠가 유래가 없을 정도로 심하였습니다.
나라가 일어나 태조황제太祖皇帝가 백성을 위해 흉포한 자를 제거하여 다시 살아날 기회를 얻게 하고, 전쟁을 두 번도 치르지 않고서도 지역을 점거하고 있던 다섯 나라의 군장君長을 모두 사로잡아 도성으로 끌어왔습니다.
그리하여 구주九州가 통일되어 대우大禹시대의 옛 강토를 회복하였습니다.
그리고 안으로는 군대를 취합하여 군율로 견제하였고 밖으로는 변방 속국들이 자세를 낮추어 규약을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그 밖에 백성을 안정시키고 사방 오랑캐를 방어하는 등 만사를 다스릴 법도들이 비록 창업하는 초기에 준비한 것이었으나 전체적인 기준이 이미 완비되었습니다.
로 말하면 천자보다 더 귀한 자리가 없고, 로 말하면 천하를 소유한 것보다 더 부유한 것이 없는데도, 자식을 놓아두고 아우에게 그것을 물려주어 만대의 장구한 계책을 마련하였으며, 새 나라를 세우고 천명을 받기를 부지런히 함으로써 태조황제太祖皇帝가 되셨으니, 그 공적은 전대에 더 높은 경우가 없었습니다.
태종황제太宗皇帝는 천하의 안녕을 추구하여 이미 지역을 평정한 뒤에는 전숙錢俶이 스스로 귀순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규칙을 만들고 법령을 후세에 전함으로써 황제의 대업을 계승하고 능히 선정을 행하여 천하를 보호하고 백성을 안정시켰습니다.
이와 같이 위대한 업적으로 태종황제太宗皇帝가 되셨으니, 그 덕은 그보다 더 높은 경우가 없었습니다.
진종황제眞宗皇帝는 〈선대 황제의〉 대통大統기업基業을 계승하여 만물의 생기를 함양하고 백성들이 번영하게 함으로써 천하를 포용하여 통치하고 이민족을 순종하게 하였습니다.
대체로 천보天寶 말기부터 천하가 혼란을 거듭하다가 태조太祖가 세상에 출현함에 이르러 천하가 안정되었지만, 서북방의 오랑캐는 오히려 수시로 침입하여 변경을 엿보았습니다. 그러다가 경덕景德(진종眞宗의 연호) 때까지 이르렀는데 〈안녹산安祿山의 난리 이후〉 250여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때 거란契丹은 비로소 화친을 거론하고 조덕명趙德明도 조정의 지시를 받아들여 온천하가 무기를 불에 녹여버리고 봉화불을 꺼버림으로써 닭이나 개가 놀라 울거나 짖어대는 일이 없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므로 이때 마침내 태산泰山하고 사수산社首山을 하여 상제上帝께 제물을 올리면서 그 공덕功德을 고하여 만세토록 신주를 옮기지 않고 고이 모실 사당임을 분명히 드러내 보였습니다.
이 때문에 진종황제眞宗皇帝가 되신 것입니다.
인종황제仁宗皇帝는 관대하고 인자하여 마음을 비우고 간하는 말을 받아들이며 일처리를 신중히 하고 규칙을 삼가 따랐습니다.
아침 일찍 나와서 조회를 보고 날이 저물어서야 내전으로 물러나 어느 하루도 태만히 한 적이 없었습니다.
재위한 날짜가 오래되자 뭇 신하의 어질고 불초함과 충직하고 간사함을 환히 알아 정사에 수완을 지닌 신하를 가려 써서 국사를 믿고 맡겨 책임지고 성과를 이루어내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의 의견을 널리 듣고 모두 살펴보아 그 사람의 허실을 두루 알았고, 그를 등용하거나 버릴 적에는 한결같이 많은 사람의 의중을 참고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일을 맡은 자 또한 모두 마음을 가다듬고 두려워하였으며 아니다 싶으면 그 즉시 파면하였으니, 세상 사람들이 신하를 다스리는 요령을 얻었다고 말하였습니다.
나이가 많아지기 전에 덕성德性을 지닌 사람을 태자로 세워 〈국가를 다스리는 법도를〉 전수하기를 합당하게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천하를 넘겨주는 날 한 명의 병사를 배치하거나 숙직시켜 비상사태를 경계하지 않았는데도 조정 상하가 태평하였으니, 이는 옛날에도 없었던 일입니다.
그 온화하고 단아한 행검行檢은 충분히 대중의 마음을 순종하게 할 만한 것으로서 〈의도적으로〉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은덕을 베풀거나 개개인을 만나 자기를 좋아하게 만드는 차원이 아니었습니다.
〈백성을 위하는〉 진실한 마음을 오랫동안 축적하였기 때문에 백성들이 모두 아버지처럼 존경하고 어머니처럼 친애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뭇 신하를 버리고 세상을 떠나던 날 온 세상 사람이 그 소식을 듣고 길을 가다가 제향을 올리거나 마을 안에서 곡을 하는 등 사람마다 비감에 젖어 탄식하였으니, 인심을 얻기를 그처럼 깊이한 데에 대해서는 그 유래를 안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황조皇祖묘호廟號인종황제仁宗皇帝가 된 것입니다.
영종황제英宗皇帝는 총명하고 슬기로워 언어와 행동을 예법대로 하였기 때문에 하늘이 돌보아 천명天命이 자기에게 집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신병을 이유로 〈태자의 자리를〉 사양하기를 여러 달 동안이나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태자의 자리에 앉은 이후로는 과묵하고 공손하고 신중하여 특별한 말씀이나 행동을 보이는 일이 없는데도 온 천하가 이분을 끊임없이 칭송하고 거론하여 성대한 덕을 지녔다는 평판이 크게 드러났습니다.
그러다가 황제로 즉위해서는 각종 정무에 부지런히 힘쓰고 걸핏하면 삼공三公을 접견하여 국사를 살펴 처결하되 반드시 옛 규례를 물어보고 옛사람의 도리를 상고하였으니, 〈이 때문에 그와 같은 말을〉 들은 자들은 마음을 가다듬으면서 모두 그 뜻이 거룩한 정사를 행하자는 데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비록 일찍 천하를 버림으로써 뛰어난 공과 업적을 미처 완전히 다 이루지는 못했으나 밝은 식견과 큰 계책은 충분히 옛사람의 그 거룩함과 필적할 만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황고皇考묘호廟號영종황제英宗皇帝가 된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성신문무聖神文武하시니 세상에 보기 드문 자질을 지녔다고 말할 만하고, 인효공검仁孝恭儉하시니 군주의 큰 덕을 지녔다고 말할 만합니다.
말기 나라와 이후 군주들이 대부분 일반 대중의 범주 이외의 것을 보지 못하여, 그들이 행하는 정치가 대체로 비근한 수준의 것을 답습하고 세속의 추이에 휩쓸릴 따름이었다는 것을 가엽게 여기셨습니다.
그리하여 의기에 북받쳐 저 위로 당요唐堯우순虞舜삼대三代()의 요원한 자취를 소급하고, 선왕先王들이 행했던 법도가 있는 정사를 차례대로 정리하는 것을 자신에게 맡겨진 책임으로 삼으셨으니, 수천 년의 세월을 초월한 큰 뜻을 지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고식적인 폐습을 개혁하고 명령을 반드시 실행하게 하여 온 나라의 보고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떨쳐 일어나지 않는 자가 없게 함으로써 많은 관료들이 각자의 직무를 잘 수행하여 남에게 뒤처지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으니, 〈원대하신 포부를〉 능히 행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해를 헤아리고 〈옛 법을 가감하여〉 폐단을 고치고 허물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는 등 법도를 만들어내는 일이 나날이 크게 갖춰지고 있으니, 구차한 것에 만족하여 개선해나가려 하지 않고 범상한 소견에 얽매어 있는 세상 사람들이 미칠 수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
한 분 태조太祖와 네 분 선대 제왕의 유업을 계승하고 더 확대하셨으니 뛰어나다고 말할 만합니다.
대체로 이전 시대에 간혹 자기 나라의 백성을 복속시키지 못했던 원인은 형벌과 부역賦役에 관한 정사가 혹독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라가 일어난 이후로는 벌을 가할 때 사용한 것이라고는 채찍과 곤장 정도의 형구刑具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신중히 살피고 따져보았습니다.
심지어 〈죄인을 심리하는 관리 중에 마땅히 죄를 심판해야 할 것인데도〉 고의로 심판하지 않은 잘못을 범한 자에 대해서는 문책을 관대히 하고, 〈죄를 마땅히 심판하지 말아야 할 것인데도 심판을 한〉 잘못을 범한 자에 대해서는 징벌을 엄하게 하는 등 대체로 일찍이 한 번도 중형을 사용한 적이 없었습니다.
농토에 대해서는 간혹 수확의 20분의 1로 세를 정하기는 하였으나 해마다 철마다 〈과중한 부과는 없는가〉 살펴 적절하게 줄여주는 조치를 자주 논의하고 면제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니, 대체로 일찍이 한 번이라도 과중한 조세를 부과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간혹 늙어죽을 때까지 노역勞役을 몰랐으나 그런데도 황제께서는 이들을 걱정하고 가엽게 여겨 부역賦役을 면제해주는 법을 항상 염두에 두고 토목공사를 함부로 일으키지 못하도록 금하는 조치를 우선시하였으니, 대체로 일찍이 한 번이라도 가중한 부역賦役을 일으킨 적이 없었습니다.
백성들이 복속하게 된 원인은 이와 같은 일들이었습니다.
이전 시대에서 간혹 그 권력을 잃었던 자는 천하의 권세가 외척에게 있거나 혹은 군주와 친근한 사람에게 있거나 혹은 대신에게 있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라가 일어난 뒤로는 외척이나 환관, 장수나 재상들이 국가대사를 함부로 독단하게 한 적이 없으니, 권력을 잡는 일을 신중히 하기를 이와 같이 하였습니다.
더구나 안에서 군대를 통솔하여 천하에 누구도 무기 하나, 군사 하나를 사적으로 이용하지 못하게 하였고, 밖으로는 번복藩服의 위상을 낮추어 천하에 누구도 토지 한 자, 백성 하나의 힘을 마음대로 점유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스스로 대처하신 형세가 이와 같았습니다.
그리고 하늘을 경외하고 신령을 섬기는 일이며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고 만물을 애호하는 부분에도 일찍이 잠시라도 태만히 하신 적이 없으니, 〈나라를 위해〉 노심초사하신 것이 또 이와 같았습니다.
대체로 자기 백성을 복속시키지 못하여 그 권력을 잃는 상황에까지 이르거나, 또 국사를 게을리 하고 소홀히 했던 일은 곧 이전 시대가 위태롭거나 혼란에 빠지게 된 까닭이고, 백성이 아래에서 복속하고 권력을 위에서 신중히 행사하여 처한 상황이 매우 온당한데에다 〈국사를 위해〉 노심초사하시는 정성까지 들인 일은 곧 오늘날 국가가 다스려지고 안정된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존엄하신 군주께서 어떤 기색만 살짝 보이더라도 육복六服이 진동하고, 말이 전달되고 호령이 떨어지면 만리가 분주해집니다.
산골 바위틈이나 토굴 속에 사는 백성들로서 정해진 기한을 기다리지 않고 공물을 철마다 보내고 해마다 보내어 그들의 의무를 수행하는 자들은 오직 남보다 뒤처지지나 않을까 염려하고, 배로 운반하고 밧줄로 끌어오는 나라들로서 들어오라고 부르는 명을 내리지 않았는데도 상자에 담고 보따리를 꾸려 짊어지고 그 예물을 보내오는 자들은 오직 제때에 미치지 못하지나 않을까 걱정합니다.
서북방의 오랑캐는 활을 던져버리고 말을 풀어놓은 채 서로 어울려 고운 옷을 차려입고 즐거움을 누리고 있으며, 동남방의 오랑캐는 갓을 똑바로 쓰고 옷매무새를 단정히 한 〈경건한 자세로〉 서로 더불어 책을 끼고 〈성현의 말씀을〉 읊조리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육부六府가 순조롭게 운영되고 온갖 상서로운 일들이 성대하게 이루어져 천지 안에서 숨을 쉬는 모든 생명이 다 만족해하고 있습니다.
대체로 먼 옛날로는 삼대三代보다 더 아름다운 경우가 없고, 가깝게는 보다 성대한 경우가 없습니다.
그러나 3, 4대 혹은 1, 2대 만에 천하에 변란이 일어나 이루 다 거론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로 볼 때〉 오세육성五世六聖이 천하를 다스려온 120여 년 동안, 교통이 발달한 고을과 큰 도회지에서부터 먼 변방과 해변 마을에 이르기까지 〈불만스러워〉 기색이 달라지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가 마음속에서 싹트는 일이 없었고, 〈변란으로〉 인해 북을 쳐 〈군사를 지휘한다거나 야경을 도느라〉 딱다기를 치는 사례를 이목에 접하는 일이 없는 것이 지금과 같은 때가 과연 언제 있었습니까.
신은 이 때문에 이 세상에 인류가 생긴 이후 대송大宋처럼 거룩한 나라는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삼가 《시경詩經》을 살펴보건대, 〈국풍國風〉과 〈대아大雅〉‧〈소아小雅〉에 있어서는 태왕太王왕계王季문왕文王이 제왕의 공업功業을 이루어낸 연유와 무왕武王이 선대를 계승하고 성왕成王이 일어난 일을 개진하였으니, 찬미한 시로는 〈가락假樂〉과 〈부예鳧鷖〉가 있고 경계한 시로는 〈공류公劉〉와 〈형작泂酌〉이 있습니다.
국풍國風〉과 〈대아大雅〉‧〈소아小雅〉에 언급한 것은 대체로 농부와 여공女工들이 집을 짓거나 농사를 짓는 내용과, 군대를 일으키고 제사를 지내고 시동尸童에게 술을 올리고 〈신령으로부터〉 복을 받는 내용 등 작고 세세한 일상적인 일들입니다.
더 나아가 토끼 그물을 얽는 무부武夫가 드러나지 않은 처지에서도 덕행을 수양하고, 소와 양을 기르는 사람이 미물微物에게도 사랑이 미쳤다는 내용까지 기록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공덕功德을 논하는 자는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까지 포괄하여 그 자세한 정도가 이와 같은 법입니다.
이는 자손이 선조의 공을 드러내기 위함이자 당대의 신하가 그 윗사람에게 찬미를 돌리기 위한 것이지, 그저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며 사유를 고하고 백성들의 의식을 일깨우기 위한 의도만은 아닙니다.
서경書經》에 “백성들을 〈구가九歌〉로 격려하여 덕정德政이 무너지지 않게 하십시오.” 하였는데, 대체로 제왕의 선정善政을 노래하게 한 이유는 백성으로 하여금 그 덕을 흠모하여 분발하는 뜻을 일으키고 태만하면 오래 지속하기 어렵게 되는 정서를 예방하게 하는 한편, 그 가사를 익히 듣고 그 속에 담긴 뜻이 마음속에 젖어들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제왕의 아름다운 공을 권면하고 〈따라야 할〉 법과 경계를 후세에 밝히는 내용을 성인이 경전經典에 기록해두어 세상의 교훈으로 남긴 것입니다.
지금 대송大宋 조종祖宗들께서 공업功業을 일으킨 일은 나라 태왕太王왕계王季문왕文王과 같고, 폐하께서 그것을 덕으로 계승한 일은 무왕武王성왕成王과 같습니다.
그런데도 뭇 신하가 〈그 공업功業과 덕을〉 상고‧정리하고 토론‧편찬하여 그것을 서책에 나열하고 금석金石에 올림으로써, 〈위로 하늘의〉 신명神明과 감응하고 〈아래로 천하에〉 모범과 경계를 드러내 보이는 일에 있어서는 빠뜨리고 꾀하지 않고 있으니, 이는 학사學士 대부大夫들의 잘못입니다.
대체로 나라의 덕은 문왕文王무왕武王 때 성대하였으나 작품은 모두 성왕成王의 시대에 이루어졌으니, 지금 〈그에 견주어〉 시기를 살펴보면 조종祖宗의 신령이 진정 폐하에게 기대하는 뜻이 있는 것입니다.
이에 신은 진정 자신의 역량을 헤아리지 못하고 감히 이 일에 대한 요점을 말씀드립니다.
〈찬양하는 문장을 서술하는 과정에 비유할 만한〉 특정 사례를 찾아가며 찬양할 점을 취하여 본디 숨겨져 있는 부분을 겉으로 드러냄으로써 〈마땅히 표현해야 할 것들을〉 심도 있게 표현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일은 지금 문학에 종사하는 시종신들이 여러 관직에 가득하니 폐하께서 그저 분부를 내리시기만 하면 됩니다.
나라가 인덕과 선행을 쌓아오다가 성왕成王주공周公에게 이르러 가장 성대한 시기가 되었으나, 《시경詩經》 〈형작泂酌〉시에 “하늘은 덕 있는 〈군주를〉 가까이하고 도를 지닌 〈군주의〉 제사를 흠향한다.”는 뜻을 말하였으니, 이것을 성왕成王에 대한 경계로 삼았습니다.
대체로 매우 성대한 입장에 처해 있는데도 경계하고 조심하는 말로 마음을 감동시켰으니, 이는 총명과 지혜의 정점이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경우는 나라만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당요唐堯우순虞舜은 태평한 세상의 최고 경지였으나 그 군신君臣들이 서로 경계하기를 “조심하고 두려워하소서. 하루나 이틀 사이에도 〈처리해야 할 작은 일들이〉 만 가지나 됩니다.”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태평한 세상의 최고 경지에 처해 있으면서도 삼가고 두려워하는 자세로 그것을 보호했던 일은 요순堯舜시대도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조종祖宗들이 이루어놓은 기업基業 위에서 천하태평의 국운을 더 확대해나가고 계십니다.
대대로 천하가 잘 다스려지고 안정된 것은 삼대三代 때도 미치지 못하였으니 나라가 일어난 이후 전성시기는 확실히 오늘입니다.
폐하께서는 위로 저 하늘이 ‘덕 있는 〈군주를〉 가까이하고 도를 지닌 〈군주의〉 제사를 흠향한다.’는 뜻을 탐지하시고, 아래로 ‘하루나 이틀 사이에도 일어나는 만 가지나 되는 〈작은 정무를〉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을 생각하시되 삼가고 두려워하는 태도로 처리하셔야 합니다.
그리하여 아름다운 광채와 좋은 성과가 날마다 더 새롭고 해마다 더 축적되어 그 범위가 넓어지고 규모가 성대해져서 이것을 후대에 물려주어 자손만대에까지 내려가 영원히 법칙이 되도록 하셔야 합니다.
이는 폐하께서 평소에 계속 가슴에 품고 계셔야 할 〈이념입니다.〉
우매한 신은 임금을 사랑하는 변변치 않은 마음으로 인해 사실 자신의 역량을 스스로 헤아리지 못하고 고대의 시인이 《시경詩經》을 짓던 대의大義에 근접했으면 하고 희망할 뿐입니다. 다만 폐하의 취택을 바랍니다.
왕준암王遵巖이 말하였다. “문장의 체제와 내용은 비록 〈봉선문封禪文〉‧〈극진미신劇秦美新〉 같은 제가諸家의 문장과 한퇴지韓退之(한유漢愈)‧유자후柳子厚(유종원柳宗元)의 진당아서進唐雅序 등의 문파로부터 나왔으나, 기본적으로 경전經典의 가르침에 근본을 두고 따로 억양반복의 변화를 구사하였다.
아첨하거나 비속하지 않고 충성으로 경계를 올리는 뜻이 드러난 것으로 상고적의 주아周雅와 그 성대함을 견줄 만하니, 참으로 문장가의 바른 법이다.”


역주
역주1 移滄州過闕上殿疏 : 작자의 나이 62세 때인 神宗 元豐 3년(1080)에 올린 소이다. 亳州知州로 있던 작자가 滄州知州로 전보되어 부임하던 길에 도성에 들러 이 疏를 썼는데, 神宗이 대궐로 불러 만나보고는 작자가 비범한 인물임을 알고 도성에 머물러 三班院의 직무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본편의 요지는 宋나라 역대 황제의 功德을 찬양하면서 옛날 周나라 聖君들의 功德을 기린 雅頌과 같은 글이 아직 지어지지 않은 것을 개탄한 것이다.
역주2 雅頌 : 본디 《詩經》의 내용과 악곡을 분류하는 명칭이다. 雅는 조정에서 연주하는 음악이고, 頌은 종묘제사 때 연주하는 음악으로, 선대 임금의 공덕을 찬양하는 뜻으로 된 음악들을 말한다.
역주3 金石 : 鍾鼎과 碑碣로, 큰 공덕이나 업적을 후세에 오래도록 전하기 위해 그것을 찬양하는 문자를 새겨 넣는다.
역주4 垂光錫祚 : 垂光은 《後漢書》 〈班固傳〉에 “和氏의 옥은 천 년토록 빛을 전한다.[和氏之璧 千載垂光]”에서 인용한 것으로, 제왕이 기초를 다져놓은 업적을 가리키고, 錫祚는 《詩經》 〈大雅 旣醉〉에 “군자는 만세토록 장수 누리고 자손에게 길이길이 복을 준다네.[君子萬年 永錫祚胤]”에서 인용한 것으로, 큰 공을 세운 제왕의 자손이 오랫동안 은혜를 입는 것을 말한다.
역주5 太康 乃墜厥緖 : 太康은 湯王의 손자이자 啓의 아들이다. 啓의 뒤를 이어 즉위한 뒤에 정사를 돌보지 않고 사냥을 즐기다가 有窮后羿에게 나라를 빼앗겼다. 그러자 그의 다섯 아우들이 〈五子之歌〉를 지었는데, 그 안에 “선왕의 업적을 실추하여 종족을 멸망시키고 제사를 단절시켰다.[荒墜厥緖 覆宗絕祀]”는 내용이 있다. 《史記 夏本紀》 《尙書 夏書 五子之歌》
역주6 太甲 旣立不明 : 殷나라 太甲이 군왕으로 즉위하여 정치가 혼암하자, 伊尹이 그를 湯王의 무덤이 있는 桐宮으로 추방하여 반성하도록 하였다. 《史記 殷本紀》
역주7 昭王 難於南狩 : 周나라 昭王의 이름은 瑕이다. 남쪽으로 楚나라 지역의 각 종족을 정벌하던 중 즉위한 지 51년이 되던 기원전 1002년에 漢水를 건너가다가 익사하였다. 《史記 周本紀》
역주8 穆王 殆於荒服 : 周나라 穆王의 이름은 滿이다. 신하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멀리 나가 서쪽으로는 犬戎을 정벌하고 동쪽으로는 徐戎을 공격함으로써 국경지대가 불안해지는 상황을 초래하였는데, 후세에 전해오는 전설은 그가 여덟 마리 준마를 타고 천하를 두루 돌아다녔다고 한다. 荒服은 王畿로부터 사방 2,500리 떨어진 지역으로 五服 가운데 가장 먼 곳이다. 《穆天子傳》 《國語 周語》
역주9 秦以累世之智 幷天下 : 累世는 秦나라의 孝公‧惠文王‧武王‧昭襄王‧孝文王‧莊襄王 등 여섯 왕을 가리킨다. 秦始皇이 역대의 이 선왕들이 이루어놓은 부국강병을 기반으로 삼아 천하를 통일하였다.
역주10 諸呂七國之禍相尋以起 : 諸呂는 漢나라 呂太后의 일족인 呂産‧呂祿 등으로, 漢 高祖가 죽고 그의 아들 惠帝가 즉위하자 기원전 180년에 이들이 呂太后의 세력을 믿고 권력을 독단하여 劉氏 황실을 전복하려 하였다가 太尉 周勃에 의해 처단되었다. 七國은 漢 景帝 때 吳‧楚‧趙‧膠西‧膠東‧濟南‧菑川 등 일곱 개의 諸侯國으로, 기원전 145년에 이들이 동시에 무장반란을 일으켰다가 역시 周勃에 의해 평정되었는데, 역사에서는 이것을 ‘七國之亂’이라 부른다. 《史記 袁盎晁錯列傳》
역주11 建武中興 : 建武는 後漢 光武帝의 연호이다. 漢나라 皇族인 劉秀, 곧 光武帝가 王莽에 의해 유린당한 漢나라를 되찾아 도성을 長安에서 洛陽으로 옮기고 東漢의 창업주가 되었다.
역주12 沖質 : 漢나라 沖帝 劉炳과 質帝 劉纘을 말한다. 沖帝는 順帝의 아들로 나이 두 살 때 즉위하여 6개월 뒤에 병사하였는데, 이때 梁太后가 수렴청정하고 大將軍 梁冀가 권력을 독단하였으며 揚州와 徐州 등지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등 정세가 매우 불안하였다. 質帝는 勃海孝王 劉鴻의 아들로 여덟 살 때 梁太后와 梁冀에 의해 황제로 옹립된 뒤 이듬해에 梁冀에게 독살되었다.
역주13 魏之患 天下爲三 : 魏‧蜀‧吳가 천하를 삼등분하여 鼎立한 것을 말한다.
역주14 晉宋之患 天下爲南北 : 元熙 2년(420)에 東晉이 멸망한 이후 開皇 9년(589) 隋 文帝 楊堅이 陳을 멸망시킬 때까지 170년 동안 천하가 남북으로 대치국면을 형성했던 것을 말한다. 南朝는 宋‧齊‧梁‧陳이고 北朝는 北魏‧東魏‧西魏‧北齊‧北周이다.
역주15 隋文始一海內 然傳子而失 : 隋 文帝 楊堅이 남북으로 분열된 천하를 통일하여 隋 왕조를 세웠으나 그의 아들 楊廣이 아비를 시해하고 왕위를 빼앗은 뒤에 정사를 도외시하고 돈을 허비하다가 617년 唐나라에 의해 멸망하였다.
역주16 唐之治 在於貞觀開元之際 : 貞觀은 唐 太宗의 연호(627~649)이고, 開元은 唐 玄宗의 연호(713~741)이다. 唐 太宗 李世民이 隋의 멸망을 귀감으로 삼아 백성을 보살피고 인재를 선발하는 정책에 치중하고 경제회복에 속도를 가하였으므로 역사에서 이를 ‘貞觀之治’라 부르고, 唐 玄宗 李隆基는 姚崇과 宋璟을 재상으로 삼아 武周(690~705) 후기의 피폐한 정사를 정돈하여 사회와 경제가 번영하였으므로 역사에서 이를 ‘開元之治’라 부른다.
역주17 女禍世出 : 唐 高宗妃 武則天이 高宗이 죽고 中宗이 즉위하자 皇太后가 되어 정권을 독단하다가, 690년에 국호를 周로 바꾸고 자칭 聖神皇帝가 되어 15년 동안 강압정책을 써 수많은 唐 宗室과 옛 대신들이 억울하게 죽었다. 그 뒤에 中宗妃 韋后가 권력을 독단하여 공신인 王同皎‧敬暉‧桓彦範 등을 죽이고 安樂公主와 공모하여 中宗을 독살하였는가 하면, 唐 高宗과 武則天 사이에서 태어난 太平公主가 唐隆 元年(710)에 李隆基와 공모하여 韋后와 安樂公主를 죽이고 睿宗을 옹립하는 등 권세가 천하를 뒤흔들었으며, 玄宗이 즉위한 뒤에 또 정변을 꾀하다가 발각되어 賜死되었다.
역주18 五代 : 907년 朱溫이 唐을 멸망시키고 後梁을 세운 뒤에 後唐‧後晉‧後漢‧後周 등이 연이어 출현하였는데, 이를 五代라 부른다. 趙匡胤이 後周를 멸망시키고 宋나라를 세웠다.
역주19 更八姓十有四君 : 八姓은 五代 때 後梁의 朱氏와 後唐의 莊宗 李存勗‧明宗 李嗣源(본디 胡人인데 李克用의 양자가 되었음)‧閔宗 李從厚(明宗의 양자로 본성은 王氏임)‧後晉 石氏‧後漢 劉氏‧後周 太祖 郭威‧世宗 柴榮(郭威의 양자임)이고, 十四君은 梁 3君, 唐 4君, 晉 2君, 漢 2君, 周 3君이다.
역주20 太祖皇帝 : 이름은 趙匡胤(927~976)으로, 宋 王朝를 창건한 사람이다. 後周 恭宗 때 歸德軍節度使로 있던 중 陳橋에서 政變을 일으켜 宋나라를 세웠다. 재위기간은 960~976년이다.
역주21 粤蜀吳楚五國之君 生致闕下 : 宋 太祖가 군대를 파견하여 荊南‧湖南(楚)‧後蜀‧南漢(粵)‧南唐(吳) 지역을 점거하고 있던 정권을 멸망시키거나 평정한 일을 가리킨다.
역주22 舍子傳弟 : 宋 太祖 趙匡胤이 그의 아우 趙光義에게 왕위를 물려주어 그가 太宗이 되었다.
역주23 太宗皇帝 : 北宋 제2대 황제 趙炅(939~997)으로, 宋 太祖 趙匡胤의 아우이며, 재위기간은 976~997년이다.
역주24 旣定晉疆 : 宋 太宗이 군대를 파견하여 太原, 곧 晉 지역을 수중에 넣고 北漢을 멸망시킨 일을 가리킨다.
역주25 錢俶自歸 : 宋 太宗이 즉위한 뒤에 吳越 國王 錢俶이 국호를 취소하고 땅을 헌납하여 宋나라에 귀순하였다.
역주26 克紹克類 : 紹는 繼와 같고, 類는 善과 같다.
역주27 眞宗皇帝 : 北宋 제3대 황제 趙恒(968~1022)으로, 太宗의 셋째 아들이며, 재위기간은 998~1022년이다.
역주28 板蕩 : 《詩經》 〈大雅〉 가운데 〈板〉과 〈蕩〉 두 편이 있는데, 이 시들은 모두 周 厲王이 무도하여 사회의 혼란을 조성한 것을 책망한 것으로, 상황이 혼란한 것을 뜻한다.
역주29 眞人 : 聖人과 같은 뜻으로 宋 太祖를 지칭한다.
역주30 西北之虜 : 遼와 西夏를 가리킨다.
역주31 德明亦受約束 : 西夏의 군주 元昊(趙德明)가 景德 3년(1006)에 表文을 받들고 귀순하였다.
역주32 封泰山 禪社首 : 옛날 帝王이 천지의 신에게 제사하는 큰 행사이다. 泰山 위에 壇을 쌓아 하늘에 제사 지내 天神의 공에 보답하는 것을 封이라 하고, 泰山 아래 梁父山, 혹은 社首山 위에 壇을 쌓아 땅에 제사 지내 地神의 덕에 보답하는 것을 禪이라 한다.
역주33 不祧之廟 : 神主를 다른 곳으로 옮겨 폐기하지 않는 사당이란 뜻이다. 祧는 대수가 먼 조상의 사당을 말한다. 사당의 제도에, 代數가 차면 그때마다 神主를 차례대로 먼 조상의 사당으로 옮겨 기타의 조상과 함께 제사를 지내거나 폐기하지만, 始祖나 국가에 지대한 공덕을 끼친 조상의 神主는 영원히 옮기지 않는다.
역주34 仁宗皇帝 : 北宋 제4대 황제 趙禎(1010~1063)으로, 眞宗의 여섯째 아들이다. 재위기간은 1023~1063년이다.
역주35 援立有德 : 仁宗이 아들이 없어 嘉祐 7년(1062)에 그의 형 濮王 趙允讓의 아들인 趙宗實을 양자로 삼아 이름을 曙로 바꾸고 태자로 세웠다. 이때 인종의 나이가 52세였다.
역주36 豈(개)弟之行 : 豈弟는 愷悌와 같은 것으로, 덕이 있어 마음이 즐겁고 평온한 군자를 가리킬 때 흔히 쓰인다. 곧 그와 같은 군자의 바른 행실을 말한다.
역주37 英宗皇帝 : 北宋 제5대 황제 趙曙(1032~1067)로, 재위기간은 1063~1067년이다.
역주38 東朝 : 東宮과 같은 것으로, 태자를 말한다.
역주39 三事 : 《詩經》 〈小雅 雨無正〉의 “삼사와 대부들이 주야로 국사에 힘쓰는 자가 없네.[三事大夫 莫肯夙夜]”에서 나온 말로, 조정의 대신인 三公을 뜻한다.
역주40 早遺天下 : 英宗이 재위한 기간이 짧아 겨우 3년(1064~1067)이었으며 향년 36세였다.
역주41 聖神文武 : 《書經》 〈虞書 大禹謨〉에 “황제의 덕은 광대하고 널리 파급되어 성스럽고 신묘하고 위엄이 있고 기풍이 아름답다.[帝德廣運 乃聖乃神 乃武乃文]”라고 한 데서 인용한 것으로, 제왕이나 걸출한 인물을 칭송하는 말로 쓰인다.
역주42 仁孝恭儉 : 아랫사람에게는 인자하고 부모에게는 효도하고 상대방에게 공손하고 생활을 검소하게 한다는 덕목으로, 흔히 제왕이나 학덕이 높은 인물을 칭송하는 말로 쓰인다.
역주43 一祖四宗 : 宋 太祖와 太宗‧眞宗‧仁宗‧英宗을 가리킨다.
역주44 賦役 : 賦는 賦稅로 국가에서 민가에 부과하는 호구세이고, 役은 徭役으로 국가에서 인부를 징발하는 것을 말한다.
역주45 藩服 : 옛날 九服의 하나이다. 고대에 王畿 사방 천 리를 중심으로 하여 그 둘레를 원형으로 각 500리씩 9등분하였는데, 맨 끝의 국경 지역을 藩服이라 한다.
역주46 六服 : 九服 중에서 王畿와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는 侯服‧甸服‧男服‧采服‧衛服‧蠻服 등 여섯 지역으로, 전국 각지를 가리킨다.
역주47 六府 : 司土‧司木‧司水‧司草‧司器‧司貨 등 국가의 재물을 관장하는 여섯 관청을 말한다.
역주48 五世六聖 : 5대 여섯 임금이란 뜻이다. 宋 太祖부터 神宗까지 임금이 모두 여섯이고, 太祖와 太宗은 형제로서 한 대이다.
역주49 假樂鳧鷖 : 모두 《詩經》 〈大雅〉의 편명으로, 周 成王이 선조들이 이루어놓은 업적을 잘 지킨 것을 기리는 노래이다.
역주50 公劉泂酌 : 모두 《詩經》 〈大雅〉의 편명으로, 섭정을 하던 周公이 成王에게 정권을 돌려주려 할 때, 召公이 成王에게 백성을 돌보는 일에 힘쓰라는 것과, 하늘은 덕을 지닌 인물을 친애한다는 것을 일러주는 노래이다.
역주51 女工 : 베를 짜고 수를 놓고 바느질을 하는 등의 작업에 종사하는 부녀자를 가리킨다.
역주52 免罝之武夫 行修於隱 : 《詩經》 〈國風 免罝〉의 “토끼 잡을 그물을 촘촘히 얽고, 말뚝 박는 소리가 쩡쩡 울리네. 씩씩하고 용감한 무사들이여, 공후 위험 막아줄 방패막일레.[肅肅免罝 椓之丁丁 赳赳武夫 公侯干城]”를 가리킨 것으로, 文王과 그의 后妃 太姒의 德化가 널리 파급되어 현인이 많아짐으로써 산골에 은거하여 토끼를 잡는 野人까지도 어진 덕을 지녔다는 것이다.
역주53 牛羊之牧人 愛及微物 : 《詩經》 〈大雅 行葦〉의 “수북하게 자라는 길가의 갈대, 소와 양 너희들아 밟지를 마라. 이제 막 싹이 트고 형체 이루어, 잎들이 보드랍고 싱그럽나니.[敦彼行葦 牛羊勿踐履 方苞方體 維葉泥泥]”를 가리킨 것으로, 周나라 왕실의 忠厚한 영향을 받아 소를 먹이는 사람의 어진 마음이 초목에게까지 미쳤다는 것이다.
역주54 勸之以九歌俾勿壞 : 《書經》 〈虞書 大禹謨〉의 내용으로, 禹가 舜에게 한 말이다. 〈九歌〉는 아홉 가지 덕에 관한 노래이다. 水‧火‧木‧金‧土‧穀 등 財用이 생산되는 근본인 六府와, 덕을 단정히 하고[正德] 사용하는 물건을 편리하게 하고[利用] 생활을 풍족하게 한다[厚生]는 三事는 사람이 마땅히 추구해야 할 일이다. 禹가 舜에게, 이들 아홉 가지 덕을 이상적으로 잘 성취한 다음 이것을 노래로 지어 사람들을 격려시키라고 하였다.
역주55 簡冊 : 여기서는 史書를 가리킨다.
역주56 皇天親有德 饗有道 : 《詩經》 〈大雅 泂酌〉의 毛序에 나오는 말이다.
역주57 兢兢業業 一日二日萬幾 : 《書經》 〈虞書 皐陶謨〉에 나오는 말이다.
역주58 欲以庶幾詩人之義也 : 작자 자신의 이와 같은 논의가 周나라 召康公이 〈泂酌〉편을 지어 成王을 경계했던 뜻과 부합되었으면 하고 바란다는 것이다.
역주59 封禪美新諸家 : 漢나라 司馬相如가 〈封禪文〉을 지어 천자의 공덕을 칭송하였고, 王莽이 漢나라를 찬탈하고 천자가 되어 국호를 新으로 바꿨을 때 揚雄이 〈封禪文〉의 사례를 본떠 〈劇秦美新〉을 지어 新나라를 칭송하여 王莽의 환심을 샀다. 후대에 제왕의 공덕을 칭송하고 아첨하는 문장이란 뜻으로 인용된다.
역주60 韓柳進唐雅序 : 唐 憲宗 때 吳元濟의 반란이 진압된 뒤에 韓愈가 〈進撰平淮西碑文表〉를 짓고, 柳宗元이 〈上裴晉公度獻唐雅詩啓〉를 지어 천자와 재상 裴度의 공덕을 칭송하였는데, 이것을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역주61 周雅 : 《詩經》의 〈大雅〉와 〈小雅〉를 가리킨다. 周는 《詩經》의 작품이 모두 周나라 때 나왔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당송팔대가문초 증공(1) 책은 2019.03.1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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