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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曾鞏(1)

당송팔대가문초 증공(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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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증공(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以內字論佛之旨 頗非是
蓋佛 原非以吾儒之外하고
而彼自識其內也 彼只見自家本來原無一物이라 故欲了當本性耳 欲見本性이라 故將一切聲色臭味香法 多爲丢去耳而非以徇內故也
梁書六本紀 五十列傳으로 合五十六篇이니 唐貞觀三年 詔右散騎常侍하니라
思廉者 梁史官察之子 推其父意하여 又頗采諸儒等所記하여 以成此書
臣等旣校正其文字하고 又集次爲目錄一篇하고 而敍之曰
自先王之道不明으로 百家竝起
佛最晩出하여 爲中國之患하니 而在梁爲尤甚이라 故不得而不論也니라
蓋佛之徒 自以謂吾之所得者內라하여늘 而世之論佛者皆外也 故不可絀이라
雖然이나 彼惡覩聖人之內哉리오
이라하니
蓋思者 所以致其知也
能致其知者 察三才之道하고 辯萬物之理하여 小大精粗 無不盡也니라
此之謂窮理 知之至也
知至矣 則在我者之足貴 在彼者之不足玩 未有不能明之者也
有知之之明而不能好之 未可也 故加之誠心以好之하고 有好之之心而不能樂之 未可也 故加之至意以樂之하니
能樂之則能安之矣니라
如是則萬物之自外至者 安能累我哉
萬物之所不能累 故吾之所以盡其性也 能盡其性이면 則誠矣
誠者 成也 不惑也
旣誠矣 必充之하여 使可大焉하고 旣大矣 必推之하여 使可化焉이라
能化矣 則含智之民 肖翹之物 有待於我者 莫不由之以至其性하고 遂其宜하여 而吾之用與天地參矣니라
德如此其至也 而應乎外者 未嘗不與人同하니 此吾之道 所以爲天下之達道也
故與之爲衣冠飮食 冠昏喪祭之具하여 而由之以敎 其爲君臣父子兄弟夫婦者 莫不一出乎人情하고 與之同其吉凶而防其憂患者 莫不一出乎人理
故與之處而安且治之所集也 危且亂之所去也
與之處者 其具如此하고 使之化者 其德如彼하니 可不謂聖矣乎
旣聖矣 則無思也 其至者 循理而已 無爲也 其動者 應物而已
是以 覆露乎萬物하고 鼓舞乎群衆하되 而未有能測之者也 可不謂神矣乎
神也者 至妙而不息者也 此聖人之內也
聖人者 道之極也
佛之說 其有以易此乎
求其有以易此者하니 固其所以爲失也
夫得於內者 未有不可行於外也 有不可行於外者 斯不得於內矣
라하니 此聖人所以兩得之也니라
智足以知一偏이나 而不足以盡萬事之理하고 道足以爲一方이나 而不足以適天下之用 此百家之所以兩失之也
佛之失 其不以此乎
則佛之徒 自以謂得諸內者 亦可謂妄矣로다
夫學史者 將以明一代之得失也
臣等故因梁之事하여 而爲著聖人之所以得 及佛之所以失以傳之者
使知君子之所以距佛者 非外而有志於內者하니
庶不以此而易彼也리라
唐荊川曰 通篇俱說聖人之內하여 而所以攻佛者 不過數句라하니라
王遵巖曰 文字 雄健傑特하여 亘古無倫矣 然說佛之失處 不能如是其稱하고 吾道大旨 亦不能如是精也라하니라


03. 《양서梁書》에 관한 목록서
’자로 불가의 교리를 논한 것은 매우 옳지 않다.
대체로 불가는 본디, 우리 유가儒家의 도는 외면을 추구하고 그들은 스스로 그 내면을 알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다만 자기 몸에는 본디 아무것도 없다고 보았기 때문에 본성本性을 알려고 한 것일 뿐이고, 본성本性을 알려고 하였기 때문에 소리, 빛깔, 냄새, 맛, 향 등 모든 외부의 것들을 대부분 떨쳐버리자는 것일 뿐이지 내면만을 추구하자는 것은 아니다.
양서梁書》는 6편의 〈본기本紀〉와, 50편의 〈열전列傳〉으로 모두 56편인데, 정관貞觀 3년(629)에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 요사렴姚思廉이 편찬하였다.
요사렴姚思廉나라 사관史官 요찰姚察의 아들로 그의 아버지 뜻을 추구하여, 또 기타 유생들과 사오謝吳가 편찬한 기록을 많이 채집하여 이 책을 완성한 것이다.
우리들은 이미 이 책의 문자를 교정한 다음, 또 이것을 모아 순차대로 배열하여 목록 1편을 만들고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성왕聖王도술道術이 희미하여 밝아지지 않은 뒤로 백가百家의 학술이 경쟁적으로 일어났다.
불교는 가장 늦게 출현하여 중국의 재해가 되었는데, 나라 때 그 정도가 더욱 심하였으므로 이 점을 논하지 않을 수 없다.
대체로 불교도들은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깨달은 것은 내면의 마음에서 얻은 것”이라고 하는데도, 불교를 논의하는 세상 사람들은 모두 그것은 외부의 표상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라고 하기 때문에 그들을 굴복시킬 수 없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그들이 어찌 성인의 내면 마음을 볼 수 있겠는가.
서경書經》에 “사고思考는 통달하도록 해야 한다. 사고가 통달해지면 곧 성스러워진다.” 하였다.
대체로 사고는 곧 지식을 구해 얻기 위한 것이다.
능히 지식을 구해 얻은 사람은 삼재三才의 규율을 관찰하고 세상만물의 사리를 변별하여, 크거나 작거나 거칠거나 미세한 모든 이치를 완전히 이해하지 않는 것이 없다.
이것을 일러 궁리窮理라고 하는 것이니 이는 구하여 아는 극치이다.
구하여 안 것이 극치에 도달하게 되면 내가 확보한 지식은 충분히 진귀한 것이 되고, 다른 곳에 있는 지식은 거들떠볼 만한 것이 못 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구하여 아는 능력은 지녔으면서도 그것을 좋아하는 감정을 갖지 못하면 안 되기 때문에 진심으로 좋아하는 단계가 요구되고, 구하여 아는 것을 좋아하는 마음은 있으면서도 그것을 즐거워하는 감정을 갖지 못하면 안 되기 때문에 마음을 다해 즐거워하는 단계가 요구되는 것이다.
능히 즐거움을 느낀다면 곧 마음이 편안해질 수 있다.
만일 이렇게 된다면 외면으로부터 오는 세상만물이 어찌 나에게 피해를 끼치겠는가.
세상만물이 나에게 피해를 끼치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자기의 본성에 순응할 수 있는 것이니, 능히 자기의 본성에 순응하게 되면 곧 에 도달하게 된다.
이란 곧 이루어진 것으로 다른 어떤 것에도 현혹되지 않는다.
이미 한 뒤에는 반드시 그 범위를 확충하여 크게 되도록 해야 할 것이고, 이미 범위가 커진 뒤에는 반드시 그것을 더 확대하여 인심과 풍속이 변화되게 할 수 있다.
인심과 풍속을 능히 변화시키면 위로 지혜를 지닌 백성에서부터 아래로 허공을 날아다니는 미세한 생물에 이르기까지, 나에게서 감화받기를 기다리는 것들이 이로 말미암아 자기의 본성을 보전하고 자기의 본분을 완수하지 않은 것들이 없어, 나의 작용이 천지와 함께 나란히 서서 셋이 될 것이다.
도덕은 이와 같이 성대한 것이지만 외면으로 드러난 것은 보통 사람과 같지 않은 것이 없으니, 이것이 곧 나의 도가 천하에 통행하는 도가 되는 이유이다.
그러므로 천하를 위해 의관‧음식과 관혼상제冠婚喪祭 등에 관한 방법을 설립하여, 모두 이것을 가지고 그들이 군신君臣부자父子형제兄弟부부夫婦 등의 관계를 형성하되 하나같이 사람의 정서와 의리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이 없게 하고, 그들이 길흉사를 함께하고 걱정과 환난을 방비할 적에도 하나같이 사람의 도리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이 없게 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머물러 살아갈 적에 편안하고 안정된 요소가 함께 모여 있고 위험하고 혼란한 요소가 제거되어 있는 것이다.
그들이 머물러 살아갈 수 있도록 마련해준 장치가 이와 같고 그들이 풍속을 바꾸게 하는 덕이 그와 같으니, 성인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미 성인의 경지에 도달하면 어떤 의도적인 사고란 없고 오로지 이치를 따를 뿐이며, 어떤 의도적인 행위란 없고 행하는 것은 오로지 사물에 순응할 뿐이다.
이러므로 천지가 만물에게 은혜를 베풀고 백성이 즐겁게 살아가게 하되 자연에 일임하여 그 위대한 공을 측량할 수 없게 하니, 이것을 신묘한 경지에 도달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신묘한 경지란 가장 오묘하고 또 정지하는 일이 없는 경지에 도달한 것이니, 이것이 곧 성인의 내면 마음이다.
성인이란 도의 극치이다.
불교의 설법에 과연 이것을 바꿀 만한 것이 있는가.
그런데 그들이 이것을 바꿀 부분을 찾으려다 보니 착오가 생기게 되었던 것이다.
내면의 마음으로부터 얻어진 것은 외면에 시행하지 못할 것이 없는 법이니, 외면에 시행하지 못할 것이 있다면 이는 내면의 마음에서 얻어진 것이 아니다.
역경易經》에 “지혜는 만물에 두루 미치고 도덕은 천하를 구제한다. 그러므로 행하는 일이 착오가 없다.” 하였으니, 이것은 성인이 내면과 외면이 다 완벽하다는 것이다.
지혜가 족히 어느 한쪽은 알지만 만사의 이치를 충분히 다 알지 못한다거나, 도술이 족히 한쪽 부분에는 적용할 수 있지만 천하 운용에 충분히 적용할 수 없는 경우가 있으니, 이것은 백가百家가 내면과 외면이 다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불교의 잘못이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불교도가 스스로 도를 마음에서 얻었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를 배우는 것은 장차 한 시대의 잘잘못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이 때문에 우리들이 양대梁代의 역사사실을 통해 성인은 완벽하게 되고 불교는 잘못되게 된 까닭을 드러내어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군자가 불교를 거절하는 이유가 그들의 교리가 일체의 외물을 부정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내면의 수양에 뜻을 둔 사람은 아마 성인의 도를 저들의 것과 바꾸지 않을 것이다.
당형천唐荊川이 말하였다. “전편全篇이 다 성인의 내면 마음에 관해 설명하였다. 이 때문에 불교를 공격한 부분은 몇 구절에 지나지 않는다.”
왕준암王遵巖이 말하였다. “〈원도原道〉의 문자는 웅장하고 걸출하여 고금에 필적할 만한 것이 없다. 그러나 불교의 잘못된 점을 설파한 점은 이처럼 정확하게 하지 못하였고, 우리 유가儒家의 도에 대한 요지도 이처럼 정밀하게 설명하지 못하였다.”


역주
역주1 梁書目錄序 : 작자가 《梁書》를 교정하고 아울러 목록을 정리한 뒤에 지은 서문이다. 梁나라 때 佛敎에 경도된 폐단에 대해 논하였다. 佛家가 스스로 도를 깨달은 것은 내면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허망한 것이라고 논박하였다. 역사를 배우는 것은 한 시대의 잘잘못을 밝히기 위해서라는 기본적인 시각으로 불교 배척의 필요성을 설명하였다.
역주2 姚思廉 : 557~637. 唐 雍州 萬年(지금의 陝西 西安) 사람으로 이름은 簡인데 字로 행세하였다. 어릴 적에 아버지 姚察 밑에서 《漢書》를 읽어 家學을 전수받았다. 아버지가 梁‧陳의 史書를 편찬하다가 마무리하지 못하고 그에게 뒤를 이어 편찬할 것을 유언으로 당부하였는데, 唐 太宗 때 황제의 명을 받고 秘書監 魏徵과 梁‧陳의 두 史書를 편찬하면서 그의 집에 보관해오던 옛 초고와 기타 서적을 채집하여 두 시대의 史書를 완성하였다.
역주3 謝吳 : 吳는 ‘昊’로 쓰기도 한다. 南朝 梁代 사람이다. 梁 元帝 때 中書郞을 지냈으며, 《梁書》를 저술하였는데 이미 유실되었다.
역주4 思曰睿 睿作聖 : 《書經》 〈周書 洪範〉에 나오는 말이다.
역주5 易曰……故不過 : 《易經》 〈繫辭傳〉에 나오는 말이다.
역주6 原道 : 唐나라 韓愈가 儒家의 도를 옹호하고 佛家의 교리를 논박한 글이다.

당송팔대가문초 증공(1) 책은 2019.03.1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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