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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曾鞏(1)

당송팔대가문초 증공(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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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증공(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憫孔宗旦先儂智高之反而言이로되 而猥與不爲禦賊者 同戮而無聞이라
其爲書反覆千餘言 句句字字嗚咽涕洟하니 可與傳記相表裏
運使司封閣下하노라
竊聞儂智高未反時 已奪邕邑地而有之하되 爲吏者不能禦하고 因不以告
皇祐三年 邕有白氣起庭中하고 江水橫溢하니
司戶孔宗旦以爲兵象이라하여 策智高必反하여 以書告其將陳拱이라 拱不聽이어늘
宗旦言不已 拱怒하여 詆之曰 司戶狂邪아하니라
四年 智高出橫山하여 略其寨人하여 因其倉庫而大賑之
宗旦又告曰 事急矣 不可以不戒라하되 拱又不從하니라
凡宗旦之於拱 以書告者七이요 以口告者多至不可數
度拱終不可得意하여 卽載其家走桂州하여 曰 吾有官守不得去 吾親毋爲與死라하니라
旣行之二日 智高果反하니 城中皆應之
宗旦猶力守南門하고 爲書召隣兵하여 欲拒之
城亡 智高得宗旦하여 喜欲用之한대 宗旦怒曰 賊 汝今立死어늘 吾豈可汙邪아하고 罵不絶口하니
智高度終不可下하여 乃殺之하다
當其初 使宗旦言不廢 則邕之禍必不發이요 發而吾有以待之 則必無事
使獨有此一善이라도 固不可不旌이온 況其死節堂堂如是로되 而其事未白於天下
比見朝廷所寵贈以來仗節死難之臣 宗旦乃獨不與하니 此非所謂
使宗旦初無一言이라도 但賊至而能死不去 固不可以無賞이라
蓋先事以爲備하고 全城而保民者 宜責之陳拱이요 非宗旦事也
今猥令與陳拱同戮하니 旣遺其言이요 又負其節이라
爲天下者 賞善而罰惡이요 爲君子者 樂道人之善하고 樂成人之美어늘 豈當如是耶
凡南方之事 卒至於破十餘州하여 覆軍殺將하고 喪元元之命하며 竭山海之財者 非其變發於隱伏하고 而起於倉卒也
內外上下有職事者 初莫不知로되 或隱而不言하고 或忽而不備하여 苟且偸託하여 以至於不可禦耳
有一人先能言者로되 又爲世所侵蔽하여 令與罪人同罰하니 則天下之事 其誰復言耶
聞宗旦非獨以書告陳拱이요 當時爲使者於廣東西者 宗旦皆歷告之
今彼旣不能用하여 懼重爲己累하여 必不肯復言宗旦嘗告我也리라
爲天下者 使萬事已理하고 天下已安이라도 猶須力開言者之路하여 以防未至之患커든 況天下之事 其可憂者甚衆하고 而當世之患 莫大於人不能言與不肯言하고 而甚者或不敢言也
則宗旦之事 豈可不汲汲載之天下視聽하여 顯揚褒大其人하여 以警動當世耶
宗旦喜學易하여 所爲注有可采者
家不能有書라도 而人或質問以易이면 則貫穿馳騁 至數十家하여 皆能言其意
事祖母盡心하고 貧幾不能自存하며 好議論하고 喜功名이라
鞏嘗與之接이라 故頗知之하니 則其所立 亦非一時偶然發也
世多非其在京東時不能自重하여 至爲世所指目이나 此固一眚이라
今其所立 亦可贖矣리라
鞏初聞其死之事하고 未敢決然信也
前後得言者甚衆하고 又得其弟自言하고 而聞祖袁州在廣東 亦爲之言하니 然後知其事
使雖有小差 要其大槪不誣也
況陳拱以下 皆覆其家하되 而宗旦獨先以其親遁하니 則其有先知之效 可知也 以其性之喜事 則其有先言之效 亦可知也
以閣下好古力學하고 志樂天下之善하고 又方使南方하여 以賞罰善惡爲職이라 故敢以告
其亦何惜須臾之聽 尺紙之議 博問而極陳之리오
使其事白이면 固有補於天下리니 不獨一時爲宗旦發也
伏惟少留意焉하라
如有未合이면 願賜還答하라
不宣이라


03. 손사봉孫司封에게 보낸 편지
공종단孔宗旦농지고儂智高의 반란을 미리 알고 고하였음에도 후에 적을 막아내지 못한 자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고 그 사실이 알려지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이 글은 반복하면서 이어진 천여 마디가 구구절절 목이 메이고 눈물이 흐르게 하니 전기傳記 작품과 서로 표리가 될 만하다.
전운사轉運使 사봉司封 각하閣下께 올립니다.
삼가 들으니 농지고儂智高가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을 때에 이미 옹읍邕邑 땅을 빼앗아 소유하였으나, 관리들이 제어하지 못하고 아울러 그 사실을 고하지도 않았습니다.
황우皇祐 3년(1051)에 옹읍邕邑에 흰색의 구름기운이 관청마당에서 일어나고 강물이 넘쳐흐르는 일이 있었습니다.
사호참군司戶參軍 공종단孔宗旦이 병란의 조짐이라 여겨 농지고儂智高가 반드시 반란할 것으로 예측하고 글로 그 고을 장수 진공陳拱에게 고했으나 진공陳拱이 그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공종단孔宗旦이 멈추지 않고 계속 고하자 진공陳拱이 노하여 꾸짖기를 “사호참군司戶參軍은 미쳤느냐?” 하였습니다.
4년에 농지고儂智高횡산橫山을 지나다가 성채城寨 사람들을 약탈하여 그곳 창고의 곡물로 주변 백성들에게 마구 나눠주었습니다.
그러자 공종단孔宗旦이 또 “일이 급박합니다. 경계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라고 고하였으나 진공陳拱이 또 그 말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공종단孔宗旦진공陳拱에게 글로써 고한 것이 일곱 차례였고 말로써 고한 것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습니다.
그는 진공陳拱이 끝내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을 것을 짐작하고 가족을 수레에 태워 계주桂州로 내보내며 말하기를 “나는 관직이 있어 떠날 수 없으나 나의 친족은 나와 함께 이곳에서 죽을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가족이 떠난 지 이틀 만에 농지고儂智高가 과연 반란을 일으키니, 성 안의 사람들이 모두 호응하였습니다.
하지만 공종단孔宗旦은 힘껏 남문을 지키고 글을 보내 이웃 고을의 병사들을 불러 모아 반란군을 막으려고 하였습니다.
성이 무너진 뒤에 농지고儂智高공종단孔宗旦을 잡고서는 좋아서 임용하려고 하자 공종단孔宗旦이 노하여 말하기를 “네 이놈 역적아! 네가 당장 죽을 것인데 내가 어찌 네놈의 더러운 은혜를 입을 수 있겠느냐!”고 하면서 꾸짖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농지고儂智高는 끝내 항복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마침내 그를 죽였습니다.
처음에 만일 공종단孔宗旦이 한 말이 폐기되지 않았더라면 옹읍邕邑의 화는 필시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일어난 뒤에 우리들이 제대로 대처하였더라면 필시 무사했을 것입니다.
이 중에 한 가지 잘한 일만 있더라도 진실로 표창하지 않을 수 없는데, 하물며 이처럼 당당하게 절개를 지켜 죽었는데도 그 사실이 천하에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근래에 보니 남쪽에서의 전쟁을 수행하던 당시부터 절개를 지키고 국난에 죽은 것에 대해 조정에서 포상한 신하들 가운데 유독 공종단孔宗旦만 들어 있지 않으니, 이는 이른바 “굴뚝 돌리고 땔감 옮기란 자 받은 은택 없는데, 머리 그을리고 이마 데인 자 상객이 되었다네.[곡돌사신무은택曲突徙薪無恩澤 초두란액위상객焦頭爛額爲上客]”라는 경우가 아니겠습니까?
설사 공종단孔宗旦이 애당초 한마디도 한 말이 없었다 하더라도, 다만 적이 쳐들어왔을 때 죽기를 각오하고 떠나지 않은 그것만으로도 진실로 상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방비하고 성을 온전히 지켜 백성을 보존하는 일은 마땅히 진공陳拱에게 책임 지울 일이지 공종단孔宗旦의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그릇되게 그를 진공陳拱과 함께 시신을 도륙하게 하였으니, 이는 이미 그 말을 저버리고 또 그 절개를 저버린 것입니다.
천하를 다스리는 사람은 선한 자에게 상주고 악한 자에게 벌주며, 군자가 된 이는 남의 선행을 칭찬하길 좋아하고 남의 미덕을 이루어주길 좋아하거늘, 어찌 이와 같을 수 있습니까.
남쪽의 전쟁이, 마침내 10여 고을이 파괴되어 군대가 전복되고 장수들이 죽임을 당했으며 백성들이 목숨을 잃고 산해山海의 재물이 소진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이것은 그 변란이 남이 모르는 가운데 터져나왔거나 창졸간에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내외의 상하 관리들이 애당초 모르지 않는 이가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숨기고 말을 하지 않거나, 혹은 소홀히 하여 방비하지 않으면서 그럭저럭 안일하게 지내다가 막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일 뿐입니다.
이런 가운데 사전에 과감히 말을 꺼낸 한 사람이 있었는데, 이것 또한 세상 사람들에 의해 침해당하고 엄폐되어 죄인과 같은 벌을 받게 하였으니, 천하의 일을 누가 다시 말할 수 있겠습니까.
들으니 공종단孔宗旦이 비단 글로써 진공陳拱에게 고한 것만이 아니고, 당시에 광동廣東광서廣西전운사轉運使로 있는 이들에게 공종단孔宗旦이 모두 일일이 고하였다고 합니다.
지금 그들은 이전에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에게 해가 될까 두려워, 필시 공종단孔宗旦이 자신에게 고한 적이 있었다는 것을 다시 말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천하를 다스리는 자는 설사 만사가 이미 다스려지고 천하가 이미 안정되었더라도 오히려 힘을 다해 말하는 이들의 길을 열어주어 앞으로 일어날 우환을 막아야 하는 것인데, 더군다나 천하의 일은 걱정할 만한 것들이 매우 많고 당세의 걱정거리는 사람들이 할 말을 하지 못하거나 말을 하려고 하지 않거나, 심한 경우에는 감히 말을 하지 못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음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공종단孔宗旦의 일을 어찌 서둘러 천하가 보고 듣게 해서 그를 드러내고 포상하여 당세 사람들을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공종단孔宗旦은 《역경易經》을 배우길 좋아하여 그가 풀이한 것 중에는 채택할 만한 것들이 있습니다.
자기 집에 책을 가지고 있는 것이 없었지만 혹 어떤 사람이 《역경易經》에 대해 질문하면 수십 명의 유가儒家 학설을 거침없이 꿰뚫어 모두 그 뜻을 설명하였습니다.
조모를 섬기되 정성을 다하였고 가난하여 거의 생활을 꾸려가지 못할 정도였으며 논변하기를 좋아하고 공명 세우기를 좋아하였습니다.
제가 일찍이 그와 교제하였기 때문에 비교적 잘 알고 있으니, 그가 한 일들이 또한 일시에 우연히 나온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는 그가 경동京東 지방에 관리로 있을 때에 자중하지 못했음을 비난하는 이들이 많아 세상 사람들의 지적을 받고는 있으나 이는 다만 하나의 과실일 뿐입니다.
지금 그가 세운 공이 그 허물을 갈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처음 그가 절개를 지켜 죽었다는 일을 듣고 감히 확실하게 믿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앞뒤로 말하는 이들이 매우 많고 그의 아우가 직접 한 말도 들었으며, 광동廣東에 있는 원주지주袁州知州 조무택祖無擇이 그에 관해 한 말을 들은 뒤에야 그 일이 사실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혹시 그것이 조금 차이가 있을지라도 대략적인 정황은 거짓이 아닙니다.
더구나 진공陳拱 이하 관리들은 모두 집안이 전복되었으나 공종단孔宗旦은 홀로 미리 친족을 도피시켰으니 그가 선견지명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의 성품이 세상일을 빈틈없이 처리하기를 좋아한 것으로 보면 그가 미래의 일을 남보다 먼저 말할 수 있다는 것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각하閣下께서는 옛 것을 좋아하고 학문에 힘쓰시며 뜻은 천하의 선을 즐거워하시는데, 또 마침 남쪽 지역에 전운사轉運使로 계시면서 선한 자는 상주고 악한 자는 벌하는 것을 직분으로 삼고 계시기에 감히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잠시 귀를 열어 그 내용을 널리 들어보고 짧은 종이에 서술하여 조정에 힘껏 보고하는 것을 망설일 수 있겠습니까.
만약 이 일이 밝혀진다면 진실로 천하에 도움이 있을 것이니, 유독 한때 공종단孔宗旦만을 위해서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조금이나마 고려해주십시오.
만일 수긍되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부디 답서를 주십시오.
이만 줄입니다.


역주
역주1 與孫司封書 : 작자의 나이 35세 때인 皇祐 5년(1053)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孫司封은 尙書司封員外郞을 지낸 孫抗(998~1053?)이다. 송나라에 반기를 들고 大曆國을 세운 儂智高를 정벌할 때 廣南西路轉運使로 있던 孫抗이 관리를 독촉하여 군량을 수송하고 성곽을 쌓고 무기를 정비하는 공을 세웠다. 이때 邕州의 司戶參軍 孔宗旦이 처음에는 儂智高의 반란을 예고하였고 뒤에 儂智高에게 잡혀 그의 회유를 거절하고 절개를 지켜 죽었는데, 그의 억울한 사정을 변론하고 천하의 治亂得失에 관한 사리를 진술하였다.
역주2 : 《宋史》, 《元豐遺藁》 등 이 부분을 설명한 대본에는 ‘此’, ‘比’, ‘也’ 등으로 각기 다르게 되어 있다. ‘此’와 ‘比’는 ‘也’의 오자로 보인다.
역주3 南兵 : 남쪽 지방에서 군대를 부린다는 뜻으로, 儂智高의 반란을 평정한 전쟁을 가리킨다.
역주4 曲突徙薪無恩澤 焦頭爛額爲上客 : 西漢 宣帝 때에 徐福이 霍光의 친족들인 霍氏의 권력이 지나친 것을 보고 상소하여 이들을 미리 제어해야 한다고 건의한 적이 있었다. 나중에 霍禹가 주동이 되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한 뒤에 공신들을 포상하면서 徐福을 제외하였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徐福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글을 올렸는데, 그 내용 속에서 徐福의 억울함을 비유한 뜻으로 말한 것이다. 《漢書 霍光傳》

당송팔대가문초 증공(1) 책은 2019.03.1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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