起童子하여 入秘閣讀書하여 遂贊名하니 命入爲翰林學士라
眞宗特寵待之하여 每進見勞問하고 及所以任屬之者 群臣莫能及이라
皇太子就書學에 公以選入侍러니 太子卽皇帝位하니 是爲仁宗이라
其在朝廷五十餘年에 常以文學謀議爲任하니 所爲賦頌銘碑制詔冊命書奏議論之文이 傳天下하고 尤長於詩하여 天下皆吟誦之라
當眞宗之世하여 天下無事하여 方輯福應하여 推功德하여 修封禪하고 及后土山川老子諸祠하여 以報禮上下라
左右前後之臣이 非工儒學하여 妙於語言하고 能討論古今하여 潤色太平之業者면 不能稱其位라 公於是時에 爲學者宗하니 天下慕其聲名이라
人見公應於外者之不窮하고 而不知公之得於內者何也라
及得公所爲類要上中下秩總七十四篇凡若干門하니 皆公所手抄이라
迺知公於
之言
과 之文章
과 至於
之衆說
과 旁及九州之外
荒忽詭變奇跡之序錄
에 皆披尋紬繹
하여
而於三才萬物變化情僞와 是非興壞之理와 顯隱細鉅之委曲을 莫不究盡라
公之得於內者 在此也니 公之所以光顯於世者有以哉인저
觀公之所自致者如此하면 則知士不素學而處從官大臣之列하여 備文儒道德之任에 其能不餒且病乎아
以書屬予序하니 予與公仕不竝時나 然皆臨川人이라 故爲之論次하여 以爲公書諸首하노라
注
이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이 본디 천근하여 공公이 서문序文을 쓸 때 또한 문장을 배치하기가 어려웠다.
동자童子일 때 발탁되어 비각秘閣에 들어가 독서하였고, 마침내 관리명단에 이름을 올려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임명되었다.
진종眞宗이 특별히 그를 총애하고 우대하여 진현進見할 적마다 위문하였고, 그에게 임무를 맡기는 것은 다른 신하들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황태자가 서법書法을 배우기 시작할 때 공公이 선발되어 입시入侍하였었는데, 태자가 황제에 즉위하니 그가 바로 인종仁宗이다.
그리하여 공公이 마침내 국가의 중대사를 관장해서 정사政事를 맡아 재상의 자리에 올랐다.
공公이 조정에 있던 50여 년 동안에 항상 문학文學과 모의謀議를 맡았는데, 그가 지은 부賦, 송頌, 명銘, 비碑, 제制, 조詔, 책冊, 명命, 서書, 주奏, 의議, 논論 등의 문장이 천하에 전파되었고, 특히 시詩에 뛰어나서 천하 사람들이 모두 그의 시詩를 읊었다.
진종眞宗 때에 천하가 별탈이 없음으로 인해 사방이 안정되어 상서祥瑞가 나타나자, 그 공덕功德을 찬양하기 위해 봉선封禪을 거행하고 아울러 토신土神, 산신山神, 하신河神과 노자老子의 여러 사당 등에 제사를 행하여 천지의 여러 신들에게 보답했다.
이때 주위의 신하들은 유학儒學을 전공하여 언어를 잘 구사하고, 고금古今을 토론하여 태평의 사업을 윤색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면 그 지위에 걸맞게 직무를 수행하지 못하였는데, 그때 공公이 학자學者의 종주宗主가 되었으니 천하 사람들이 그의 명성을 흠모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공公이 외적外的으로 대응하는 일이 무궁한 줄만 알고, 공公이 내면에 얻은 것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지 못하였다.
후에 공公이 편집한 《유요類要》 상上, 중中, 하질下秩 총 74편 약간 문門을 얻어 보았는데 이는 모두 공公이 손수 초록抄錄한 것이었다.
그제야 비로소 공公이 육예六藝, 태사太史, 백가百家의 말과 소인騷人, 묵객墨客의 문장, 심지어 지지地志, 족보族譜, 불로佛老, 방기方伎 등의 중설衆說과 구주九州 밖 만이蠻夷의 황당하고 이상하며 기이한 일을 기록한 것들까지 모두 손수 찾고 상세히 연구해서
삼재三才 만물이 변화하는 실정과, 시비是非‧흥패興敗의 이치와, 현은顯隱‧거세鉅細의 곡절을 빠짐없이 섭렵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공公이 내면에 얻은 것이 여기에 있었으니, 공公이 세상에 찬연히 드러난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공公이 자득한 것이 이와 같음을 본다면, 평소에 학문하지 않은 선비가 시종관侍從官, 대신大臣의 반열에 처하여 문유文儒와 도덕道德의 임무를 맡았을 때 어찌 부족하고 근심하지 않을 수 없겠는가.
이것이 공公의 책이 세상에 전해질 만한 까닭이다.
공公의 아들 지지知止는 그 집안을 잘 지키는 자이다.
내게 편지를 보내어 서문을 부탁했는데, 내 비록 공公과 같은 시기에 벼슬하지는 않았으나 공公과 내가 모두 임천臨川 사람이므로 평론하여 공公의 책 첫머리에 서문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