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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曾鞏(1)

당송팔대가문초 증공(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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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증공(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刀尺不踰
熙寧元年七月甲申 河北地大震하여 壞城郭屋室한대 灜州爲甚이러니
是日再震하여 民訛言大水且至라하니 驚欲出走
諫議大夫李公肅之 爲高陽關路都總管安撫使知灜州事하여 使人分出慰曉하니 訛言乃止러라
是日 大雨하여 公私暴露 倉儲庫積 無所覆冒러니
公開示便宜하여 使有攸處 遂行倉庫하여 經營蓋障한대
雨止 粟以石數之하니 至一百三十萬이요 兵器他物稱是하여 無壞者러라
初變作 公命援兵警備하여
訖于旣息토록 人無爭偸하여 里巷安輯이러라
維北邊 自通使契丹으로 城壁樓櫓禦守之具 寢弛不治하여 習以爲故한대
公因災變之後하여 以興壞起廢爲己任하고 知民之不可重困也
迺請於朝하여 力取於旁路之羨卒하고 費取於備河之餘材하며
又以錢千萬市木於眞定이라
旣集 迺築新城方十五里어늘 高廣堅壯하여 率加於舊
其上 爲敵樓戰屋 凡四千六百間이라
先時 州之正門 弊在狹陋러니 及是하여는 始斥而大之하고
其餘凡圮壞之屋 莫不繕理하여 復其故常이라
周而覽之하니 聽斷有所하고 燕休有次하며 食有高廩하고 貨有深藏하며 賓屬士吏 各有寧宇하고
又以其餘力으로 爲南北若干里하되 人去汚淖하여 卽于夷塗
自七月庚子始事 至十月己未落成 其用人之力 積若干萬若干千若干百工이요 其竹葦木瓦之用 積若干萬若干千若干百이라
蓋遭變之初 財匱民流하여 此邦之人 以謂役鉅用艱이라도 不累數稔이면 城壘室屋 未可以復也라하더니 至於始作踰時하여 功以告具하니
蓋公經理勸督하되 內盡其心하고 外盡其力하니 故能易壞爲成 如是之敏이라
事聞 有詔嘉獎하다
今灜地震之所摧敗 與鄭之火災衛之寇難無異어늘 公禦備構築하되 不失其方하니 亦猶古也
故灜之士大夫 皆欲刻石著公之功한대
而予之從父兄 適與軍政하여 在公幕府러니 迺以書來하여 屬予記之한대
予不得辭 故爲之記하여 尙俾來世知公之嘗勤於是邦也하노라


03. 영주灜州의 건설공사에 관한 기문
법도를 벗어나지 않았다.
희령熙寧 원년 7월 갑신일에 하북河北에 큰 지진이 발생하여 성곽과 가옥들이 무너졌는데, 영주灜州의 피해가 가장 심각하였다.
이날 지진이 다시 발생하자, 백성들 사이에 앞으로 홍수가 들이닥칠 것이라는 유언비어가 나돌아 그들이 놀란 나머지 살던 지역을 이탈하여 도망가려 하였다.
간의대부諫議大夫 이공李公 숙지肅之고양관로도총관안무사高陽關路都總管安撫使 지영주사知灜州事가 되어, 각 지역으로 사람들을 보내 백성들을 위로하고 이해시키자, 유언비어가 마침내 종적을 감추었다.
이날 큰 비가 와서 바깥에 노출되어 있는 관청과 민간의 곡물과 창고에 쌓아둔 물건들을 감싸 덮을 수가 없었다.
이공李公은 관리들에게 그 임무를 알려주며 각자 최선을 다해 조치하게 함으로써 마침내 각처의 창고에 지붕을 덮고 터진 곳을 막았다.
비가 그친 뒤에 곡식을 섬 단위로 세어보았더니 130만 석이나 되었고, 병기兵器 등 다른 물건들도 곡식과 같이 잘 간수하여 축난 것이 없었다.
변고가 막 발생했을 때, 이공李公은 병사들을 출동시켜 경계를 서도록 명했다.
그리하여 변고가 끝날 때까지 사람들이 서로 다투거나 물건을 훔쳐가는 일이 발생하지 않아 고을이 안정되었다.
북쪽 변경에서는 거란契丹과 사신이 오고 간 뒤로부터, 성벽과 망루 등 방어시설들이 차츰 훼손된 채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여기에 익숙한 나머지 오래된 일로 여겼다.
이공李公은 재변이 발생한 뒤를 계기로 파괴된 시설을 복구하는 것을 자신의 책무로 삼고 백성들이 거듭 곤욕을 겪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조정에 요구하여 주변 에서 남는 사졸士卒들을 극력 모집하고, 황하黃河의 치수공사에 사용하고 남은 재료들을 비용을 들여가며 모았다.
또 천만 을 들여 진정眞定에서 나무를 구입했다.
목재들을 다 모으고 나서는 마침내 사방 15리가 되는 새로운 성을 쌓았는데, 높고 넓고 견고하고 커서 대체로 예전의 규모보다 확장되었다.
그 위에 방어용 구조물을 총 4,600칸으로 지었다.
이전에는 영주灜州정문正門이 퇴락하여 비좁은 채로 방치되어 있었는데, 이때에 와서야 비로소 그 문을 크게 지었다.
그 외에 무너진 모든 가옥들을 모두 수선하여 원상태로 복구하였다.
두루 살펴본 결과, 수령이 정무를 처결할 처소와 평소에 휴식을 취할 자리가 있었으며, 식량을 많이 쌓아둘 곳간과 재물을 깊이 보관할 창고를 확보했고, 빈객과 관리들이 각기 편하게 머무를 집을 보유하게 되었다.
또 그 여력으로 남북으로 통하는 용도甬道를 만들었는데, 사람들을 동원하여 진흙탕을 제거하고 평탄한 길로 바꾸었다.
7월 경자일에 공사를 시작하여 10월 기미일에 준공하기까지 투입한 인력이 총 몇만 몇천 몇백 에 달하고, 사용한 대나무, 갈대, 목재, 기와가 총 몇만 몇천 몇백에 달한다.
갓 변고를 당했을 때에는 재화가 동이 나고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져 이 지역 사람들은, 노동력과 비용을 많이 들여도 몇 년을 투자하지 않으면 성루城壘와 가옥들을 복원할 수 없을 것이라 여겼으나 공사를 시작한 지 3개월이 지나 복원이 완료되었다.
이는 이공李公이 복원사업을 경영하고 독려하면서 안으로는 심혈을 기울이고 밖으로는 역량을 총동원하였기 때문에, 파괴된 시설들을 완성된 상태로 복구하기를 이와 같이 신속하게 할 수 있었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지자, 조서詔書를 내려 칭찬하고 격려하였다.
옛날 나라에 화재가 발생하자, 자산子産이 재난을 구제하고 파괴된 시설들을 수리하는 데 있어 적절하면서도 이치에 합당하게 처리하자 사관史官이 마침내 그 사실을 사서史書에 기록하였고, 나라가 오랑캐의 침략을 받자 문공文公이 훼손된 성곽, 저자, 궁실을 복구할 때 계절과 제도에 맞추어 하자, 시인詩人이 그 사실을 노래하였다.
지금 영주灜州가 지진으로 황폐해진 상황은 나라의 화재, 나라의 외적침입의 경우와 다를 게 없고, 이공李公이 외적을 방비하고 시설을 건립하는 데 있어 적절한 방법을 택한 것 역시 고대古代의 경우와 같다.
그렇기 때문에 영주灜州사대부士大夫들이 모두 의 공적을 비석에 새겨 현양하고자 했다.
나의 종형從兄이 마침 군정軍政에 참여하느라 막부幕府에 있었는데 나에게 편지를 보내와 기문記文을 써달라고 부탁하였다.
나는 사양할 수 없었으므로 기문記文을 써서 후세 사람들이 이공李公께서 이 지역에 노고가 있었다는 점을 알도록 하였다.


역주
역주1 灜州興造記 : 작자 50세 때인 熙寧 원년(1068)에 쓴 글이다. 灜州(지금의 河北省 河間縣)에 큰 지진이 난 후, 李肅之라는 사람이 知灜州事가 되어 재난 구조와 복구 작업에 몸담은 일련의 과정을 서술하였다. 李肅之의 자는 公議로, 仁厚하다는 명성이 있었다. 이 글에서는 그의 善政을 찬미하는 뜻을 담았다. 興造는 건설과 같은 말로, 공사를 하고 구조물을 세운다는 뜻이다.
역주2 甬道 : 길 양옆으로 벽이 세워진 車道나 人道를 말한다.
역주3 昔鄭火災……史實書之 : B.C. 524년 鄭나라에 화재가 발생하자, 子産이 화재를 진압하고 도적질을 엄금하는 조치를 취했다. 화재 후에는 백성들의 부세를 경감하고 시설들을 복구하는 데 힘썼다. 《春秋左氏傳 昭公 18年》
역주4 衛有狄人之難……詩人歌之 : 여기에서 노래한 시는 《詩經》 〈鄘風 定之方中〉을 말한다. 衛 文公이 楚丘로 천도하여 城市를 만들고 宮室을 영건할 때 계절에 맞게 사람들을 동원하고 제도에 맞게 짓자, 이를 찬미한 시이다.

당송팔대가문초 증공(1) 책은 2019.03.1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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