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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曾鞏(1)

당송팔대가문초 증공(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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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증공(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辨証的確하여 得太守體
齊濱하니 而初無使客之館이러니
使客至어든 則常發民調材木하여 爲舍以寓하고 去則撤之하니
旣費且陋일새 乃爲徙官之廢屋하여 爲二堂於濼水之上以舍客하고
因考其山川而名之하니라
蓋史記五帝紀 謂舜耕歷山하시고 漁雷澤하시며 陶河濱하시고 作什器於壽丘하시며 就時於負夏라한대
鄭康成釋호대 歷山在河東하고 雷澤在濟陰하고 負夏衛地라하고 皇甫謐釋호대 壽丘在魯東門之北하고 河濱濟陰이요 定陶西南陶丘亭是也라하니라
以予考之컨대 耕稼陶漁 皆舜之初 宜同時인대
則其地不宜相遠이니
二家所釋雷澤河濱壽丘負夏 皆在魯衛之間하여 地相望이니
則歷山不宜獨在河東也리라
孟子又謂舜東夷之人이라하니
則陶漁在濟陰하고 作什器在魯東門하고 就時在衛하고 耕歷山在齊하니 皆東方之地 合於孟子하니라
按圖記컨대 皆謂禹貢所稱雷首山 在河東한대 嬀水出焉하고 而此山有九號하니 歷山其一號也
予觀虞書及五帝紀하니 蓋舜娶堯之二女하여 迺居嬀汭 則耕歷山으로 蓋不同時 而地亦當異어늘
世之好事者 迺因嬀水出於雷首하여 遷就附益하고 謂歷山爲雷首之別號라하니 不考其實矣니라
由是言之컨대 則圖記皆謂齊之南山爲歷山이요 舜所耕處 故其城名歷城 爲信然也로다
今濼上之北堂 其南則歷山也
故名之曰 歷山之堂이라하니라
按圖컨대 泰山之北與齊之東南諸谷之水 西北匯于黑水之灣하고 又西北匯于柏厓之灣하여 而至于渴馬之厓하니
蓋水之來也衆이로되 其北折而西也 悍疾尤甚이라
及至於厓下하여는 則泊然而止하고 而自厓以北으로 至于歷城之西 蓋五十里
而有泉湧出하니 高或至數尺이어늘 其旁之人名之曰 趵突之泉이라하니라
齊人皆謂嘗有棄糠於黑水之灣者하여 而見之於此라하니
蓋泉自渴馬之厓 潛流地中이라가 而至此復出也
趵突之泉冬溫하여 泉旁之蔬甲 經冬常榮하니 故又謂之溫泉이라하니라
其注而北 則謂之濼水 達于淸河하여 以入于海하니
舟之通于濟者 皆於是乎出也
齊多甘泉하여 冠于天下어늘
其顯名者以十數 而色味皆同이라
以予驗之컨대 蓋皆濼水之旁出者也
濼水嘗見於春秋하니 魯桓公十有八年 公及齊侯會于濼이라하여늘
杜預釋호대 在歷城西北하고 入濟水라하니라
濟自王莽時 不能被河南이요 而濼水之所入者淸河也 預蓋失之
今濼上之南堂 其西南則濼水之所出也
故名之曰 濼源之堂이라하니라
夫理使客之館而辨其山川者 皆太守之事也
故爲之識하여 使此邦之人尙有考하니라
熙寧六年二月己丑記하노라


06. 제주齊州에 있는 두 에 쓴 기문
변증이 정확하여 태수로서의 기본 도리를 지녔다.
제주齊州낙수濼水가에 자리잡은 곳으로, 본디 사자使者나 빈객을 접대할 관사館舍가 없었다.
사자使者나 빈객이 제주齊州로 오면 언제나 백성들을 징발하고 재목材木을 조달하여 임시 관사館舍를 지어 머무르게 하고, 그들이 떠나면 곧 철거하였다.
이러한 방식으로는 비용이 많이 들고 관사를 지어보아야 형편없었기에, 마침내 이전 관리가 사용하던 폐가를 정리하여 낙수濼水가에 건물 두 채를 지어 빈객을 접대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주변의 산천山川을 고증하여 두 건물의 이름을 짓게 되었다.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역산歷山에서 농사를 지으시고 뇌택雷澤에서 고기를 잡으셨으며, 하빈河濱에서 질그릇을 구우시고 수구壽丘에서 집기什器들을 만드셨으며, 부하負夏에서 때를 기다리셨다.”
이 말을 두고 정강성鄭康成(정현鄭玄)은 풀이하기를 “역산歷山하동군河東郡에 있었고 뇌택雷澤제음군濟陰郡에 있었으며, 부하負夏나라에 위치해 있었다.” 하고, 황보밀皇甫謐은 풀이하기를 “수구壽丘나라 도성都城 동문東門의 북쪽에 있었고, 하빈河濱제음군濟陰郡 정도현定陶縣 서남쪽에 있는 도구정陶丘亭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내가 살펴보건대, 농사짓고 질그릇을 구우며 고기 잡는 일은 모두 임금이 초년에 했던 일로, 당연히 같은 시기에 했던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활동무대들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을 리가 없다.
두 학자가 풀이했던 뇌택雷澤, 하빈河濱, 수구壽丘, 부하負夏는 모두 나라와 나라 일대에 있어 지대地帶가 서로 인접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역산歷山만 유독 하동군河東郡에 있었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
《孟子》에 또 이르기를 “동이東夷 사람이다.” 하였다.
그렇다면 질그릇을 굽고 고기를 잡았던 곳은 제음군濟陰郡에 있었고, 집기什器들을 만들던 곳은 나라 도성都城 동문東門에 있었고, 때를 기다리던 곳은 나라에 있었고, 농사를 짓던 역산歷山나라에 있었으니, 이들은 모두 동쪽 지방에 있는 지역으로서 《孟子》에 나온 말과 일치한다.
제주도齊州圖》와 《제주기齊州記》를 살펴보면, 모두 “《서경書經》 〈하서夏書 우공禹貢〉에서 언급된 뇌수산雷首山하동군河東郡에 있는데 규수嬀水가 이 산에서 발원發源하며, 뇌수산雷首山에는 아홉 가지 명칭이 있는데 역산歷山이 그 중 하나이다.” 하였다.
내가 《서경書經》 〈우서虞書〉와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를 보니, 아마도 임금이 임금의 두 딸에게 장가를 들어 규수嬀水가에 살았던 때는 역산歷山에서 농사를 짓던 때와 시기가 다르고 지역도 당연히 다를 것이다.
세상의 호사가好事家들이 마침내 규수嬀水뇌수산雷首山에서 발원發源한다는 사실을 가지고 점점 부회하여 역산歷山뇌수산雷首山의 별칭이라고 하였으니, 그 실체를 살피지 않은 것이다.
이를 통하여 말하자면, 《제주도齊州圖》와 《제주기齊州記》에서 모두 나라의 남쪽에 있는 산이 역산歷山이며, 임금이 농사를 지었던 곳이기 때문에 여기에 있는 역성歷城으로 명명命名했다는 말은 신빙성이 있다.
현재 낙수濼水가에 지은 북쪽 건물의 남쪽이 역산歷山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북쪽 건물을 역산당歷山堂이라 이름하였다.
제주도齊州圖》에 따르면, 태산泰山의 북쪽과 제주齊州의 동남쪽에 있는 여러 골짜기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서북쪽으로 흘러 흑수만黑水灣으로 모이고, 거기서 또 서북쪽으로 흘러 백애만柏厓灣에 모여 갈마애渴馬厓까지 흘러간다고 한다.
이처럼 물이 흘러 들어오는 경로가 많은데도 이 물줄기들이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서쪽으로 흘러가면 유난히 거세게 흐른다.
이렇게 물줄기가 갈마애渴馬厓에 도달하면 잔잔하게 흘러 요동치지 않는데, 갈마애渴馬厓 북쪽으로부터 역성歷城 서쪽에 이르기까지 대략 50이다.
그리고 그곳에 높이가 몇 자나 솟구쳐 오르는 샘이 있는데, 그 주변에 사는 주민들이 그 샘을 표돌천趵突泉으로 명명命名했다.
나라 사람들은 모두, 어떤 사람이 흑수만黑水灣에 지게미를 버렸는데 그것이 이 샘에서 나타났다고 말한다.
표돌천趵突泉갈마애渴馬厓에서부터 눈에 띄지 않게 지하로 흐르다가 이 지점에서 다시 솟아나오는 것이다.
표돌천趵突泉이 겨울에는 따뜻하여 샘 주변의 채소들은 겨울을 나고도 늘 무성하기 때문에 또 온천溫泉이라고도 부른다.
이 물이 흘러 북으로 유입流入되는 물줄기를 낙수濼水라 하는데, 청하淸河에 이르러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제수濟水로 통하는 선박들은 모두 여기에서 나온다.
제주齊州에는 물맛이 단 샘물이 많아 천하에 으뜸이다.
그 가운데 유명한 곳은 수십 군데나 되는데, 물의 빛깔과 맛이 모두 똑같다.
내가 조사해보건대, 이들은 모두 낙수濼水 옆에서 솟아나온 물이다.
낙수濼水는 일찍이 《춘추春秋》에 보이는데, 여기에 따르면 나라 환공桓公 18년(B.C. 694)에 환공桓公제후齊侯낙수濼水에서 회합을 가졌다고 한다.
이를 두고 두예杜預는 “낙수濼水역성歷城 서북쪽에 있고 제수濟水로 흘러 들어간다.”고 주석했다.
그러나 제수濟水왕망王莽나라 때 이후로 황하黃河 남쪽으로 흐르지 않았고 낙수濼水가 흘러 들어가는 물줄기는 청하淸河이니, 두예杜預는 아마도 잘못 본 듯하다.
현재 낙수濼水가에 지은 남쪽 건물의 서남쪽이 낙수濼水의 발원지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남쪽 건물을 낙원당濼源堂이라 이름하였다.
사자使者나 빈객이 유숙하는 관사館舍를 짓고 그 주변의 산천山川을 고증하는 것은 모두 태수의 일이다.
때문에 그에 관한 내용을 기록하여 이 지방 사람들로 하여금 참고할 곳이 있도록 하였다.
희령熙寧 6년 2월 기축일에 기록하다.


역주
역주1 齊州二堂記 : 작자 55세 때인 熙寧 6년(1073)에 齊州의 歷山堂과 濼源堂 두 건물을 두고 쓴 記文이다. 齊州는 지금의 山東省 濟南이다. 작자는 熙寧 5년 1월에 知齊州로 부임한 후 그 지역에 客館이 없는 것을 아쉬워하던 차에, 이전의 관원이 사용하던 폐가를 활용하여 건물 두 채를 만들어 客館으로 삼았다. 이 글에서는 이 두 당의 이름을 命名한 계기를 밝히는 동시에 역사지리적인 고증도 함께 다루고 있다.
역주2 濼水 : 물 이름이다. 濟南市 서남쪽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흘러 小淸河가 되고, 다시 북쪽으로 흘러 濟水로 들어간다. 근원의 주변에 舜의 두 妃 娥皇과 女英의 사당이 있기 때문에 속칭 娥姜水라고 한다.

당송팔대가문초 증공(1) 책은 2019.03.1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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