注
不論着李白詩하고 而獨詳白生平蹤跡하니 此其變調也라
李白詩集二十卷 舊七百若干篇 今九百若干篇者
는 知制誥常山宋敏求
之所廣也
라
次道旣以類廣白詩하고 自爲序로되 而未考次其作之先後라 余得其書하여 乃考其先後而次第之하니라
雲夢許氏者
는 時宰相圉師之家也
니 以女妻白
하니 因留雲夢者三年
이라
入吳
하여 至長安
이러니 聞其名
하고 召見以爲翰林供奉
이라
北抵趙魏燕晉하고 西扺岐邠하며 歷商於하여 至洛陽하니 游梁最久라
復之齊魯하여 南浮淮泗하고 再入吳하여 轉徙金陵하고 上秋浦潯陽이라
天寶十四載에 安祿山反하니 明年에 明皇在蜀하고 永王璘節度東南이라
璘軍敗丹陽하니 白奔亡至宿松이라가 坐繫潯陽獄이라
宣撫大使崔渙과 與御史中丞宋若思 驗治白하여 以爲罪薄宜貰러니 而若思軍赴河南하여 遂釋白囚하고
使謀其軍事하고 上書肅宗하여 薦白材可用이로되 不報하니 是時白年五十有七矣라
乾元元年에 終以汚璘事로 長流夜郞하여 遂泛洞庭하고 上峽江하여 至巫山하여
久之에 復如潯陽하고 過金陵하여 徘徊於歷陽宣城二郡이라
其族人陽冰이 爲當塗令하니 白過之라가 以病卒하니 年六十有四니 是時寶應元年也라
范傳正이 爲白墓誌하여 稱白호되 偶乘扁舟하면 一日千里하고 或遇勝景하면 終年不移라하니 則見於白之自敍者 蓋亦其略也라
舊史에 稱白호되 山東人이요 爲翰林待詔라하고 又稱永王璘節度揚州에 白在宣城謁見하여 遂辟爲從事라하며 而新書에 又稱白호되 流夜郞하고 還潯陽이라가 坐事下獄이어늘 宋若思釋之者는
白之詩는 連類引義하여 雖中於法度者寡나 然其辭閎肆雋偉하여 殆騷人所不及이요 近世所未有也라
舊史에 稱白호되 有逸才하고 志氣宏遠하여 飄然有超世之心이라하니
余以爲實錄이어늘 而新書不著其語라 故錄之하여 使覽者得詳焉하노라
注
이백李白의 시를 평론하지 않고 다만 이백李白의 평생 종적을 상세히 기록하였으니 이것은 특별한 격식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격식으로 쓰게 된 시발점은 여산廬山에 은둔해 있었다는 것과 영왕永王 이린李璘이 그를 강제로 데려갔다고 한 것에 있었다.
작자가 이와 같이 설명함으로써 이백李白이 야랑夜郞에 유배된 일과 심양潯陽에서 옥살이한 정황이 분명하게 밝혀져 부끄러울 것이 없게 되었다.
《이백시집李白詩集》 20권은 구본舊本이 700여 편이었는데 현재는 900여 편이니, 이는 지제고知制誥 상산常山 송민구宋敏求 차도次道가 확충한 것이다.
차도次道가 종류에 따라 이백李白의 시를 확충하고서 스스로 서문序文을 지었으나 지은 시기의 선후는 고증하여 차례 매기지 않았기에 내가 그 책을 얻고서 마침내 선후를 고증하여 차례를 매겼다.
이백李白은 촉군蜀郡 사람이니, 처음에 민산岷山에서 은거하였다.
촉군蜀郡을 떠난 뒤에는 양양襄陽과 한수漢水 일대에서 거처하였고 남쪽으로 장강長江과 회수淮水 일대를 유람하였으며 초楚 지방에 이르러 운몽택雲夢澤을 구경하였다.
운몽현雲夢縣의 허씨許氏는 고종高宗 때의 재상 어사圉師의 집안인데 자신의 딸을 이백李白에게 시집보냈으니, 이백李白은 이 일로 인하여 운몽雲夢에서 3년간 머물렀다.
운몽雲夢을 떠나 제齊, 노魯 지방으로 갔으며 조래산徂徠山 죽계竹溪에 머물렀다.
오吳 지방에 들어가 장안長安에 도착하였는데 명황明皇이 그의 명성을 듣고서 불러다가 한림공봉翰林供奉으로 삼았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뜻이 맞지 않으므로 떠나갔다.
북쪽으로 조趙, 위魏, 연燕, 진晉 지방에 갔고 서쪽으로 기岐, 빈邠 지방에 갔으며, 상오商於를 경유하여 낙양洛陽에 도착하였으니, 양梁 지방에 있었던 기간이 가장 길었다.
다시 제齊, 노魯 지방으로 가서 남쪽으로 회수淮水, 사수泗水를 건넜고, 다시 오吳 지방에 들어가 금릉金陵으로 옮겨갔으며, 장강長江을 거슬러 올라가 위쪽으로 추포秋浦, 심양潯陽에 도착하였다.
천보天寶 14년(755)에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키니 이듬해 명황明皇은 촉蜀 지방에 있었고 영왕永王 인璘은 동남東南 지역에서 군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이백李白은 이때에 여산廬山에 머물고 있었는데 인璘이 그를 강제로 불러 오게 하였다.
인璘의 군대가 단양丹陽에서 패하자 이백李白은 도망하여 숙송宿松에 이르렀다가 이 일에 연좌되어 심양옥潯陽獄에 갇히게 되었다.
이때 선무대사宣撫大使 최환崔渙과 어사중승御史中丞 송약사宋若思가 이백李白의 사건을 맡아 신중하게 따져보고는 그의 죄가 가벼워 사면해주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송약사宋若思가 군대를 거느리고 하남河南으로 가던 중 마침내 이백李白을 석방하였다.
송약사宋若思가 이백李白을 군대의 참모로 삼고 숙종肅宗에게 상소하여 쓸 만한 인재라고 추천하였으나 답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때 이백李白의 나이 57세였다.
건원乾元 원년(758)에 끝내 인璘의 일에 연루되어 멀리 야랑夜郞으로 유배 가서 마침내 동정호洞庭湖를 건너 협강峽江을 거슬러 올라가 무산巫山에 도착하였다.
이때 대사면으로 인해 석방되어 악양岳陽, 강하江夏로 가서 머물렀다.
얼마 후에 다시 심양潯陽으로 가서 금릉金陵을 경유하여 역양歷陽, 선성宣城 두 군郡 사이를 왕래하였다.
그의 친족 양빙陽冰이 당도현當塗縣의 수령을 맡고 있었는데 이백李白이 그곳을 들렀다가 병으로 죽었으니 그의 나이 64세였으며 이때는 보응寶應 원년(762)이었다.
그가 일생 동안 겪은 일들이 이와 같으니, 이는 이백李白이 자신의 시詩, 서書에 쓴 내용들을 통해 상고할 수 있는 것들이다.
범전정范傳正이 이백李白의 묘지墓誌를 지으면서 이백李白에 대하여 말하기를 “우연히 조각배 타면 하루에 천 리를 가고 혹 아름다운 경치를 만나면 1년이 지나도록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라고 하였는데, 이백李白이 스스로 쓴 데에서 본 것이 역시 소략한 것이다.
《구당서舊唐書》에서 이백李白에 대하여 말하기를 “산동山東 사람이며, 한림대조翰林待詔가 되었다.”라고 하였고, 또 “영왕永王 인璘이 양주揚州에서 군대를 지휘하고 있을 적에 이백李白은 선성宣城에 머물고 있다가 알현하여 마침내 부름을 받아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다.”고 하였으며, 《신당서新唐書》에서 또 이백李白에 대해서 말하기를 “야랑夜郞으로 유배를 갔고 심양潯陽으로 돌아와 사건에 연좌되어 하옥되었는데 송약사宋若思가 풀어주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이백李白이 스스로 서술한 것과 합치되지 않으니, 사관史官이 잘못 기재한 것이다.
이백李白의 시詩는 유사한 사물과 의미를 인용하여 〈그가 의도하는 바를 표현하는 데에 있어서는〉 비록 법도에 맞는 것이 적지만, 그의 말은 자유분방하고 웅장하여 여느 시인이 미칠 수 있는 수준이 아닌데 근세에는 그와 같은 시인이 없었다.
《구당서舊唐書》에 이백李白에 대하여 말하기를 “뛰어난 재주가 있고 지기志氣가 웅대하여 초연히 세상을 초탈하는 마음이 있었다.”라고 하였다.
나는 이 말이 사실을 잘 표현한 기록이라고 여기는데 《신당서新唐書》에는 이 내용을 기재하지 않았으므로, 이 말을 기록하여 읽는 자들이 이백李白을 상세히 알 수 있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