注
子固於
之中
에 獨取徐幹
하니 得之
요 而序文
도 亦屬典刑
이라
臣始見館閣及世所有徐幹中論二十篇하여 以謂盡於此러니
及觀
하여 怪太宗稱嘗見幹中論復三年喪篇而今書此篇闕
이라
因考之魏志하여 見文帝稱幹著中論二十餘篇하고 於是知館閣及世所有幹中論二十篇者 非全書也라
魏文帝稱幹懷文抱質하고 恬澹寡欲하여 有箕山之志라하고
魏太祖特旌命之한대 辭疾不就하고 後以爲上艾長한대 又以疾不行이라하다
蓋漢承周衰及秦滅學之餘하여 百氏雜家 與聖人之道竝傳하니 學者罕能獨觀於道德之要而不牽於俗儒之說라
至於治心養性去就語默之際하여는 能不悖於理者 固希矣어든 況至於魏之濁世哉아
求其辭에 時若有小失者나 要其歸는 不合於道者少矣요 其所得於內者도 又能信而充之하여 逡巡濁世하여 有去就顯晦之大節이라
臣始讀其書察其意而賢之하고 因其書以求其爲人하여 又知其行之可賢也라
蓋迹其言行之所至하고 而以世俗好惡觀之면 彼惡足以知其意哉리오
因校其脫謬하여 而序其大略하니 蓋所以致臣之意焉이라
注
자고子固가 건안칠자建安七子 가운데 서간徐幹만을 취하였으니, 그 안목이 옳고 서문의 문장 또한 표준에 속한다.
내가 처음 관각館閣과 세간에 있는 서간徐幹의 《중론中論》 20편을 보고서 이것이 전부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다가 《정관정요貞觀政要》를 보게 되었을 때 태종太宗이 일찍이 서간徐幹의 《중론中論》 〈복삼년상復三年喪〉편을 보았다고 하였는데, 지금 책에는 이 편이 없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다.
그래서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를 훑어보다가 문제文帝가 서간徐幹이 《중론中論》 20여 편을 저술하였다고 한 말을 보고서야 관각館閣과 세간에 있는 서간徐幹의 《중론中論》 20편이라는 것이 완전한 책이 아님을 알았다.
서간徐幹은 자字가 위장偉長이고 북해北海 사람인데 한漢나라와 위魏나라 시대에 걸쳐 살았다.
위 문제魏 文帝는 “서간徐幹은 우아하면서도 질박하고 담박하고 욕심이 적어 세상을 피해 은거하려는 뜻이 있다.”고 하였다.
《선현행장先賢行狀》에도 “서간徐幹은 행실을 독실하게 하고 도道를 체득하였으며 세상의 영화를 즐기지 않았다.
위魏 태조太祖가 특별히 표창하여 불렀으나 질병을 핑계대며 나아가지 않았고, 뒤에 상애현上艾縣 수령으로 삼았으나 또 질병을 이유로 부임하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한漢나라가 주周나라는 쇠망하고 진秦나라가 학문을 없애버린 뒤를 이어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학설이 성인의 도道와 함께 전해지니, 학자들 가운데 도덕의 핵심을 혼자 보고 속유俗儒의 설에 이끌리지 않는 이가 드물었다.
심성心性을 다스리고 기르며 나아가거나 물러나며 말하거나 침묵하는 부분에 능히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 이가 참으로 드물었으니, 더구나 위魏나라의 혼탁한 세상에 있어서이겠는가.
그런데 서간徐幹은 홀로 육예六藝를 고찰하여 중니仲尼와 맹가孟軻의 뜻을 추존하여 서술하고 논하였다.
그의 말을 보면 가끔 작은 실수가 있는 것 같지만 그 핵심을 추구해보면 도道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 적었고 내면에 터득한 것도 능히 진실하고 충실하여 혼탁한 세상에서 뒤로 물러남으로써 거취去就와 현회顯晦를 도리에 맞게 한 큰 절개가 있었다.
내가 처음에 그의 글을 읽어 그의 뜻을 살펴보고서 내용이 좋다고 여겼으며, 그의 글을 통해 그의 인품을 따져보고는 더욱 그 행실이 훌륭하게 여길 만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가 세상을 교화하는 데에 보탬이 될 것인데도 아는 이가 적은 것이 아쉬웠다.
그의 말과 행실이 진행되는 노선을 따라가면서 세속 사람의 호오好惡로 살펴본다면 저들이 어떻게 그의 뜻을 충분히 알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나의 역량이 어찌 그의 글에 무게를 실어 배우는 이들이 존중하여 믿도록 할 수 있겠는가.
그저 탈자와 오자를 교감하고 그 글의 개요를 서술하였으니, 이는 이 서문을 통해 나의 생각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