出通判越州
하고 知齊襄洪三州
에 皆有異政
하니라 加
하고
知福州
에 福無
하여 歲鬻園蔬
하여 自入常三四十萬
이러니
鞏謂太守不宜與民爭利라하고 罷之할새 後至者 亦不復取也하니라
帝欲合累朝國史爲一書하여 加鞏史館修撰하여 專典하고 不以大臣監總이러니 旣而不克成하니라
鞏性孝友
하여 에 奉繼母益至
하고 撫
於委廢單弱中
하여 宦學婚嫁
를 一出其力
하니라
爲文章에 上下馳騁하되 本原六經하고 斟酌於司馬遷韓愈하니 時鮮能過也러라
鞏導之於歐陽脩하고 及安石得志하얀 遂與之異하니라
神宗嘗問安石何如人고하니 對曰 安石文學行義는 不減揚雄이나 以吝故不及이니이다하고
帝曰 安石輕富貴어늘 何吝也오하니 曰勇於有爲요 吝於改過耳라하니라
嘗告神宗以鞏行義不如政事
하고 政事不如文章
이라 故不大用云
이라
문정공文定公 증공曾鞏에 관한 정사正史의 전기傳記
증공曾鞏은 자가 자고子固니 남풍南豐 사람이다.
어릴 적에 기지가 있고 민첩하여 문장을 잘 지었으므로 20세 때 이미 사방에 이름이 났다.
가우嘉祐(송 인종宋 仁宗의 연호) 2년(1057)에 진사進士에 급제하고 집현교리集賢校理를 거쳐 실록검토관實錄檢討官이 되었다.
지방관으로 나가 월주통판越州通判을 지낸 뒤에 제齊‧양襄‧홍洪 3주州의 지주知州를 역임하면서 맡은 고을마다 선정이 있어 직용도각直龍圖閣의 직함을 받았다.
복주지주福州知州로 있을 때의 일이다. 복주福州에는 직전職田이 없어 〈지주知州가〉 해마다 농장의 채소를 팔아 그것으로 잡은 수입이 항상 3, 4십만 냥이나 되었다.
증공曾鞏이 “태수는 백성과 이익을 다투어서는 안 된다.” 하고 그 관례를 혁파하였는데, 뒤에 부임해 온 관리들도 더 이상 〈이와 같은 방법으로 이익을〉 취하지 않았다.
〈그 뒤에〉 또 명明‧박亳‧창滄 3주州 지주知州를 역임하였다.
증공曾鞏이 오랫동안 외직으로 전전하자 세상 사람들은 그가 성품이 오만하여 선발되는 기회를 얻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시기에 후배들이 사방에서 쏟아져 나와 출세가도를 달렸지만 증공曾鞏은 그것을 담담하게 보아 넘겼다.
조정에 들렀을 때 신종神宗이 그를 불러 만나보고 위로하면서 매우 총애하여 도성에 머물러 삼반원통판三班院通判으로 제수하였다.
상소하여 국가의 재정문제를 해결하는 의견을 제출하면서 비용을 절감하는 것을 재정관리의 관건으로 삼으니 황제가 좋은 의견이라고 칭찬하였다.
황제가 송宋나라 여러 조정의 국사國史를 합쳐 한 책으로 만들기 위해 증공曾鞏을 사관수찬史館修撰으로 올려 제수하여 그 일을 전담하도록 하고 대신大臣이 감독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결국 완성하지 못하였다.
때마침 새 관직제도가 시행되어 중서사인中書舍人에 제수되었고, 얼마 뒤에 연안군왕延安郡王이 황상皇上께 올리는 전주문箋奏文을 작성하는 임무를 담당하였다.
어머니의 상중에 있다가 죽었는데 이때 65세였다.
증공曾鞏은 품성이 효성스럽고 우애가 지극하여 아버지가 죽은 뒤에 계모를 받들어 모시기를 더 한층 극진히 하였고, 가정환경이 쇠패하여 고단한 속에서 네 아우와 아홉 누이를 부양하여 이들이 관리가 되기 위해 객지에 나가 공부를 한다거나 시집 장가를 갈 적에 필요한 뒷바라지를 모두 그가 해내었다.
그의 문장은 고금의 역사를 광범위하게 섭렵한 뒤에 육경六經에 그 근본을 두고 사마천司馬遷과 한유韓愈의 문법을 참고하였으니, 당시에 그 수준을 뛰어넘을 만한 자가 적었다.
젊었을 때 왕안석王安石과 종유하였는데 그때는 왕안석王安石의 명가名價가 아직 크지 않았었다.
증공曾鞏은 그를 구양수歐陽脩에게 소개해주었으며, 왕안석王安石이 뜻을 이룬 뒤에는 곧 그와 노선을 달리하였다.
신종神宗이 언젠가 그에게 “안석安石은 어떤 사람이오?” 하고 묻자, 대답하기를 “안석安石의 문학과 품행 도의는 양웅揚雄에게 뒤지지 않습니다만 인색하기 때문에 전체적으로는 미치지 못합니다.” 하였고,
황제가 “안석安石은 부귀를 가볍게 보는데 어째서 인색하다고 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그가 무슨 일을 하는 데에는 용감하지만 잘못을 고치는 데에는 인색하다는 것을 지적한 것일 뿐입니다.” 하였다.
여공저呂公著가 일찍이 신종神宗에게 “증공曾鞏의 품행과 도의는 정사를 다스리는 것보다 못하고, 정사를 다스리는 것은 문장을 짓는 것보다 못합니다.”라고 고한 적이 있는데, 이로 인해 크게 등용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