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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曾鞏(1)

당송팔대가문초 증공(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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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증공(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曾鞏字子固 南豐人이라
하여 甫冠 名聞四方하니라
하고 歷集賢校理하여 爲實錄檢討官하니라
出通判越州하고 知齊襄洪三州 皆有異政하니라하고
知福州 福無하여 歲鬻園蔬하여 自入常三四十萬이러니
鞏謂太守不宜與民爭利라하고 罷之할새 後至者 亦不復取也하니라
徙明亳滄三州하다
鞏久外徙하니 世頗謂偃蹇不偶라하니라
一時後生輩鋒出하되 鞏視之泊如也러라
神宗召見하고 勞問甚寵하여하니라
하니 帝稱善하니라
帝欲合累朝國史爲一書하여 加鞏史館修撰하여 專典하고 不以大臣監總이러니 旣而不克成하니라
拜中書舍人하고 하니라
하니 年六十五러라
鞏性孝友하여 奉繼母益至하고於委廢單弱中하여 宦學婚嫁 一出其力하니라
爲文章 上下馳騁하되 本原六經하고 斟酌於司馬遷韓愈하니 時鮮能過也러라
少與王安石游 安石聲譽未振이러니
鞏導之於歐陽脩하고 及安石得志하얀 遂與之異하니라
神宗嘗問安石何如人고하니 對曰 安石文學行義 不減揚雄이나 以吝故不及이니이다하고
帝曰 安石輕富貴어늘 何吝也오하니 曰勇於有爲 吝於改過耳라하니라
嘗告神宗以鞏行義不如政事하고 政事不如文章이라 故不大用云이라


문정공文定公 증공曾鞏에 관한 정사正史전기傳記
증공曾鞏은 자가 자고子固남풍南豐 사람이다.
어릴 적에 기지가 있고 민첩하여 문장을 잘 지었으므로 20세 때 이미 사방에 이름이 났다.
가우嘉祐(송 인종宋 仁宗의 연호) 2년(1057)에 진사進士에 급제하고 집현교리集賢校理를 거쳐 실록검토관實錄檢討官이 되었다.
지방관으로 나가 월주통판越州通判을 지낸 뒤에 3지주知州를 역임하면서 맡은 고을마다 선정이 있어 직용도각直龍圖閣의 직함을 받았다.
복주지주福州知州로 있을 때의 일이다. 복주福州에는 직전職田이 없어 〈지주知州가〉 해마다 농장의 채소를 팔아 그것으로 잡은 수입이 항상 3, 4십만 냥이나 되었다.
증공曾鞏이 “태수는 백성과 이익을 다투어서는 안 된다.” 하고 그 관례를 혁파하였는데, 뒤에 부임해 온 관리들도 더 이상 〈이와 같은 방법으로 이익을〉 취하지 않았다.
〈그 뒤에〉 또 3 지주知州를 역임하였다.
증공曾鞏이 오랫동안 외직으로 전전하자 세상 사람들은 그가 성품이 오만하여 선발되는 기회를 얻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시기에 후배들이 사방에서 쏟아져 나와 출세가도를 달렸지만 증공曾鞏은 그것을 담담하게 보아 넘겼다.
조정에 들렀을 때 신종神宗이 그를 불러 만나보고 위로하면서 매우 총애하여 도성에 머물러 삼반원통판三班院通判으로 제수하였다.
상소하여 국가의 재정문제를 해결하는 의견을 제출하면서 비용을 절감하는 것을 재정관리의 관건으로 삼으니 황제가 좋은 의견이라고 칭찬하였다.
황제가 나라 여러 조정의 국사國史를 합쳐 한 책으로 만들기 위해 증공曾鞏사관수찬史館修撰으로 올려 제수하여 그 일을 전담하도록 하고 대신大臣이 감독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결국 완성하지 못하였다.
때마침 새 관직제도가 시행되어 중서사인中書舍人에 제수되었고, 얼마 뒤에 연안군왕延安郡王황상皇上께 올리는 전주문箋奏文을 작성하는 임무를 담당하였다.
어머니의 상중에 있다가 죽었는데 이때 65세였다.
증공曾鞏은 품성이 효성스럽고 우애가 지극하여 아버지가 죽은 뒤에 계모를 받들어 모시기를 더 한층 극진히 하였고, 가정환경이 쇠패하여 고단한 속에서 네 아우와 아홉 누이를 부양하여 이들이 관리가 되기 위해 객지에 나가 공부를 한다거나 시집 장가를 갈 적에 필요한 뒷바라지를 모두 그가 해내었다.
그의 문장은 고금의 역사를 광범위하게 섭렵한 뒤에 육경六經에 그 근본을 두고 사마천司馬遷한유韓愈의 문법을 참고하였으니, 당시에 그 수준을 뛰어넘을 만한 자가 적었다.
젊었을 때 왕안석王安石과 종유하였는데 그때는 왕안석王安石명가名價가 아직 크지 않았었다.
증공曾鞏은 그를 구양수歐陽脩에게 소개해주었으며, 왕안석王安石이 뜻을 이룬 뒤에는 곧 그와 노선을 달리하였다.
신종神宗이 언젠가 그에게 “안석安石은 어떤 사람이오?” 하고 묻자, 대답하기를 “안석安石의 문학과 품행 도의는 양웅揚雄에게 뒤지지 않습니다만 인색하기 때문에 전체적으로는 미치지 못합니다.” 하였고,
황제가 “안석安石은 부귀를 가볍게 보는데 어째서 인색하다고 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그가 무슨 일을 하는 데에는 용감하지만 잘못을 고치는 데에는 인색하다는 것을 지적한 것일 뿐입니다.” 하였다.
여공저呂公著가 일찍이 신종神宗에게 “증공曾鞏의 품행과 도의는 정사를 다스리는 것보다 못하고, 정사를 다스리는 것은 문장을 짓는 것보다 못합니다.”라고 고한 적이 있는데, 이로 인해 크게 등용되지 못하였다.


역주
역주1 曾文定公本傳 : 本傳은 正史에 나온 인물의 傳記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南豐先生 曾鞏의 傳記인 《宋史》 〈曾鞏傳〉을 말한다. 이 글은 그 내용 중에서 중요한 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역주2 幼警敏能文 : 曾鞏이 어릴 적에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매우 총명하여 수백, 수천 자의 글을 한 번 읽고 암송하였고, 12세 때는 매일 여섯 편의 論을 시험 삼아 지으면서 붓을 잡고 단숨에 완성하였는데 그 문장이 매우 훌륭하였다 한다. 《曲阜集 子固先生行狀》
역주3 登嘉祐二年進士第 : 嘉祐는 宋 仁宗의 연호이고 2년은 1057년인데, 曾鞏이 여러 번 進士試에 낙방하다가 이때 39세의 나이로 다시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역주4 直龍圖閣 : 곧 龍圖閣直學士이다. 宋나라 제도에서 외직으로 있는 관원에게 주는 명예직이다.
역주5 職田 : 職分田과 같다. 隋나라 때 처음 만든 제도로, 관직의 품계에 따라 나눠주는 公田이다. 관리가 임직하는 동안 그 수입으로 녹봉을 충당한다.
역주6 過闕 : 元豐 3년(1080)에 曾鞏이 滄州知州로 전보되어 그곳으로 부임하던 길에 도성에 들렀던 일을 가리킨다. 闕은 궁궐, 조정, 도성 등의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역주7 判三班院 : 三班院通判을 말한다. 三班은 供奉官‧殿直‧殿前承旨인데, 雍熙 4년(987)에 三班院을 설치하여 武官과 三班使臣의 추천‧승진‧전보‧포상 등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게 하였다.
역주8 疏議經費以節用爲理財之要 : 元豐 3년 11월에 曾鞏이 神宗에게 〈議經費箚子〉를 올려 국가를 잘 다스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재정비용을 절감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역주9 會官制行 : 會는 ‘때마침’이란 뜻으로 適과 같다. 元豐 5년(1082) 5월에 《大唐六典》에 실린 규정에 따라 관직제도를 개정한 일을 말한다. 그 골자는 조정의 일을 처리할 때 中書省이 황제의 윤허를 받고 門下省이 재차 심의하고 尙書省이 집행하는 방식이다.
역주10 尋掌延安郡王箋奏 : 尋은 ‘얼마 뒤에, 오래지 않아’ 등의 뜻이다. 延安郡王은 神宗의 아들 趙煦이다. 元豐 5년에 王에 봉해지고 8년에 즉위하였는데 이 사람이 哲宗이다. 《元豐類藁》 〈表〉에 〈代皇子免延安郡王 第一表〉, 〈代皇子免延安郡王 第二表〉, 〈代皇子延安郡王謝表〉, 〈代皇子延安郡王謝皇太后表〉, 〈代皇子延安郡王謝皇后箋〉 등 황태자를 대신하여 지은 다섯 편의 表와 箋이 있다.
역주11 居母憂卒 : 元豐 5년 9월에 曾鞏이 92세인 계모 朱氏의 상을 당해 관직을 떠났다가 이듬해 4월 11일에 江寧府에서 죽었다.
역주12 父亡 : 曾鞏의 나이 29세 때인 慶曆 7년(1047)에 그의 아버지 曾易占이 59세로 죽었다.
역주13 四弟九妹 : 曾鞏의 형제는 자신을 포함하여 6남 9녀로 모두 15명인데, 10년 연상인 형 曾曅은 皇祐 5년(1053)에 45세로 죽었다. 네 아우는 曾牟‧曾宰‧曾布‧曾肇이다. 아홉 누이는 첫째는 關氏의 아내, 둘째는 王氏의 아내이고, 여덟째는 이름이 德耀이며 나머지는 알 수 없다.
역주14 呂公著 : 1018~1089. 御史中丞으로 있던 중에 王安石이 주도하여 추진한 靑苗法 시행을 반대하고, 呂惠卿은 간사하여 임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일로 穎州知州로 좌천되었다가, 元豐 3년(1080)에 同知樞密院事로 발탁되었다. 曾鞏을 크게 등용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 것은 그 이후의 일로, 그의 정적인 王安石이 曾鞏의 고모 河東縣太君의 외손자였다는 점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당송팔대가문초 증공(1) 책은 2019.03.1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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