注
及希文經略西夏時하여 辟永叔爲掌書記한대 而永叔不從이라
其書曰 吾當與公同其退요 不當同其進也라하니 何等卓犖고
幾聖之文이 今不可見이나 然平生所自見者 竝屬魏公幕府하니 則子固之所不滿而風刺之者 已見其槪矣라
幾聖은 諱至요 姓强氏요 錢塘人이니 幾聖은 字也라
旣沒에 其子浚明이 集其遺文하여 爲二十卷하고 屬予序라
幾聖少貧하여 能自謀學하여 爲進士하니 材拔出其輩類하여 出輒收其科하고 其文詞大傳於時라
然最爲相國韓魏公所知
하니 魏公旣罷政事
하고 鎭京兆
라가 及徙鎭
에 常引幾聖自助
라
魏公喜爲詩하여 每合屬士大夫賓客與游하여 多賦詩以自見하니 其屬而和之者는 幾聖獨思致逸發하여 若不可追躡하니 魏公未嘗不嘆得之晩也라
其在幕府에 魏公每上奏天子以歲時慶賀候問과 及爲書記通四方之好에 幾聖爲屬藁草하니 必聲比字屬하여 曲當繩墨이라
及爲他文若誌銘序記策問學士大夫하여는 則簡古典則하여 不少貶以就俗이라
其所長兼人일새 以此魏公數薦之朝廷하여 以謂宜在館閣이나 然未及用이라
幾聖之遺文은 在魏公幕府者 最爲多라 故序亦反復見之하니 覽者可推而考之也라
其行治官世는 已著於誌幾聖之葬者라 故此不著하노라
注
若
는 則繩趨窘武
하여 蹜蹜乎如有循矣
니 信乎
라 라하니라
注
범희문范希文(범중엄范仲淹)과 구양영숙歐陽永叔(구양수歐陽脩)은 서로 잘 아는 사이였는데 영숙永叔이 희문希文의 일에 연루되어 폄직되었다.
희문希文이 서하西夏의 경략초토안무사經略招討安撫使가 되어 영숙永叔을 불러 장서기掌書記로 삼으려 하였으나 영숙永叔은 따르지 않았다.
그 편지에 “내가 공公과 물러나는 것은 함께할 수 있지만 공公과 나아가는 것은 함께할 수 없다.”고 하였으니, 얼마나 훌륭한가.
그런데 기성幾聖의 문장을 지금 볼 수 없으나 내가 평소에 직접 접해본 것은 모두 그가 위공魏公(한기韓琦의 봉호)의 막부幕府로 재임할 때 쓴 글로써 구양영숙歐陽永叔과 같은 기개가 없으니, 자고子固가 이 점을 불만스럽게 생각하여 풍자한 점에서 이미 그 대체적인 뜻을 볼 수 있다.
이것이 곧 자고子固의 문장이 모범이라 할 수 있는 점이니 왕도사王道思가 논평한 그 내용은 옳지 않다.
기성幾聖은 이름이 지至이고 성이 강씨强氏이며 전당錢塘 사람이니, 기성幾聖은 그의 자이다.
삼사호부판관三司戶部判官, 상서사부낭중尙書祠部郞中을 지냈다.
그가 죽은 뒤에 그의 아들 준명浚明이 그의 유문遺文을 모아 20권을 만들고서 나에게 서문을 부탁하였다.
기성幾聖은 젊은 시절 가난하였는데 스스로 학문을 할 것을 도모하여 진사進士가 되었으니, 재주가 동년들보다 뛰어나서 진사進士시험에 나가 곧바로 합격하였고 그의 글이 당시에 멀리 퍼졌다.
또한 관리가 되어서는 항상 짬을 이용하여 더욱 많이 책을 읽고 글을 지었다.
시詩에 더욱 뛰어나서 그의 시구詩句가 사람들을 놀라게 하니 세상이 모두 그의 재능을 높이 샀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상국相國 한위공韓魏公에게 가장 인정을 받았으니, 위공魏公은 재상으로서의 직무를 그만둔 후 경조京兆를 다스렸고, 상위相魏로 옮겨와 다스릴 적에는 항상 기성幾聖을 불러 자기를 보좌하도록 하였다.
위공魏公이 시詩 짓는 것을 좋아하여 매양 사대부 빈객을 불러 모아 함께 놀면서 자주 시詩를 지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곤 하였는데, 거기에 화답하는 자 중에는 오직 기성幾聖의 시詩만이 의취意趣가 뛰어나서 거의 따라갈 수 없을 정도였으므로 위공魏公이 항상 그를 늦게 만난 것을 한탄하였다.
기성幾聖이 위공魏公의 막부幕府에 있을 적에 위공魏公은 천자에게 명절을 축하하고 안부를 묻는 표문을 올린다거나 사방의 친지들에게 서신書信을 보낼 때 기성幾聖에게 초고를 부탁하였는데, 기성幾聖의 글은 항상 성조聲調가 고르고 자구字句가 이어져 법도에 들어맞았다.
그러면서 그는 기질이 원만하여 모가 나지 않았으므로 먼 곳 가까운 곳 없이 모두 그를 칭송하였다.
묘지명墓誌銘, 서문序文, 기문記文과 학사대부學士大夫를 시험 보이는 책문策問 같은 종류의 글을 지을 적에도 간결하고 고아하여 법도에 맞게 하고 조금도 세속에 맞추려 하지 않았다.
그의 능력이 보통사람보다 월등하므로 이것을 가지고 위공魏公이 수차례 조정에 천거하여 “이 사람은 관각館閣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등용되지 못하였다.
결국 위공魏公이 죽은 다음 해에 기성幾聖 또한 병으로 죽었다.
기성幾聖의 유문遺文은 위공魏公의 막부幕府에 있을 때 지은 것이 가장 많았으므로 이 서문에서도 반복하여 설명하는 바이니, 그의 문집을 읽는 자들이 미루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의 행사와 치적, 관직과 세계世系에 관해서는 기성幾聖의 묘지墓誌에 이미 기재되어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적지 않는다.
注
왕준암王遵巖이 말하였다. “이 서문은 주제를 세워 논리를 전개하지는 못했으나 상당히 호방한 기운이 있다.
경전經典의 틀을 벗어나 사관史官의 문체로 들어갔기 때문에 일정한 형식을 벗어나 대범하게 쓴 것이다.
왕씨王氏 형제의 문집 서문과 같은 경우는 법도에 맞아 조심조심 정해진 길을 따라가는 것 같으니, 정말 숫돌처럼 편평한 큰 길은 군자가 아니면 밟을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