歿而民生不見先王之治
하여 日入於亂
이라가 以至於秦
하여는 盡除前聖數千載之法
하니 天下旣攻秦而亡之
하고 以歸於漢
이라
漢之爲漢에 更二十四君하고 東西再有天下하여 垂四百年이라
然大抵多用秦法하고 其改更秦事에도 亦多附己意하니 非放先王之法而有天下之志也라
然而天下之材不足이라 故仁聞雖美矣라도 而當世之法度 亦不能放於三代라
漢之亡에 而强者遂分天下之地어늘 晉與隋雖能合天下於一이나 然而合之未久而已亡하니 其爲不足議也라
代隋者唐이니 更十八君하여 垂三百年이어늘 而其治莫盛於太宗之爲君也라
以租庸任民하고 以府衛任兵하며 以職事任官하고 以材能任職하며 以興義任俗하고 以尊本任衆이라
賦役有定制하며 兵農有定業하며 官無虛名하며 職無廢事라
人習於善行하고 離於末作하니 使之操於上者면 要而不煩하고 取於下者면 寡而易供이라
民有農之實에 而兵之備存하며 有兵之名에 而農之利在라
事之分有歸하니 而祿之出不浮하며 材之品不遺하니 而治之體相承이라
其廉恥日以篤하고 其田野日以闢하여 以其法修則安且治하며 廢則危且亂하니 可謂有天下之材라
行之數歲에 粟米之賤이 斗至數錢하니 居者有餘蓄하고 行者有餘資하여 人人自厚하여 幾致刑措하니 可謂有治天下之效라
然而不得與先王竝者는 法度之行이 擬之先王未備也하며 禮樂之具와 田疇之制와 庠序之敎 擬之先王未備也일새니라
躬親行陣之間하여 戰必勝하고 攻必克하여 天下莫不以爲武로되 而非先王之所尙也요
四夷萬里古所未及以政者 莫不服從하여 天下莫不以爲盛로되 而非先王之所務也라
由唐虞之治五百餘年而有湯之治하고 由湯之治五百餘年而有文武之治하고 由文武之治千有餘年而始有太宗之爲君이어늘 有天下之志요 有天下之材요 又有治天下之效나
是則人生於文武之前者 率五百餘年而一遇治世하고 生於文武之後者 千有餘年而未遇極治之時也하니 非獨民之生於是時者之不幸也라
士之生於文武之前者 如舜禹之於唐
과 之於舜
과 伊尹之於湯
과 太公之於文武
하여 率五百餘年而一遇
하고
生於文武之後千有餘年은 雖孔子之聖과 孟軻之賢而不遇하고 雖太宗之爲君而未可以必得志於其時也하니 是亦士民之生於是時者之不幸也라
故述其是非得失之迹하니 非獨爲人君者可以考焉이요 士之有志於道而欲仕於上者 可以鑑矣리라
注
문장의 품격이 약한 듯하나 그 논변은 정당하다.
성왕成王과 강왕康王이 죽자 백성들이 선왕先王의 다스림을 받지 못하여 날이 갈수록 혼란에 빠지다가 진秦에 이르러서는 이전의 성군들이 수천 년간 시행한 법을 모두 없애버리니, 천하 사람들이 진秦을 공격하여 패망시키고 한漢에 귀의歸依하였다.
한漢나라는 24명의 군주君主가 대를 이어갔고 동한東漢과 서한西漢이 거듭 천하를 소유하여 4백 년 가까이 이어졌다.
그러나 대체로 진秦나라의 법을 많이 적용하였고 진秦나라의 정사政事를 고칠 적에도 자의적인 뜻을 많이 덧붙였으니, 선왕先王의 법法을 본받고 천하를 잘 다스리려는 뜻을 가진 것이 아니었다.
천하를 잘 다스리려는 뜻을 가진 자는 문제文帝뿐이었다.
하지만 천하를 잘 다스릴 재능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비록 인자하다는 칭송이 대단하였지만 그 당시의 법도가 또한 삼대三代와는 견줄 수 없었다.
한漢나라가 망하자 강한 자들이 마침내 천하의 땅을 나누었는데, 진晉나라와 수隋나라가 비록 능히 천하를 통일하였으나 통일한 지 오래지 않아 패망하였으니 그들이 한 일은 논할 만한 것이 못 된다.
수隋나라를 대체한 것은 당唐나라이니 18명의 군주가 이어가서 3백 년 가까이 이어졌는데 그 치적이 태종太宗이 군주로 있을 때보다 성대한 적이 없었다.
그는 자기를 굽히고 간언諫言을 따르며 인자한 마음으로 사람들을 사랑하였으니, 천하를 잘 다스리려는 뜻을 지녔다고 할 만하다.
조용조租庸調로써 백성에게 세금을 거두고, 부병제府兵制로써 군대를 편제하였으며, 직무를 적절한 관리에게 맡기고 재능을 기준으로 관직을 맡겼으며, 도덕을 진작시키는 것으로써 세속을 다스렸으며, 농업을 중시하는 것으로써 백성을 다스렸다.
부역賦役은 일정한 제도가 있었고 군사와 농민은 일정한 생업이 있었으며, 관리는 부실하게 임용하는 일이 없고 직무는 유기되는 일이 없었다.
사람들이 선행에 익숙해지고 말업末業인 상공업을 멀리하니 윗자리를 맡은 사람은 그 직무가 간단하여 복잡하지 않도록 하고, 아래 백성으로부터 징수하는 것은 적어서 백성들이 바치기 용이하게 하였다.
백성들이 실제로는 농사에 치중하면서도 군사장비를 유지하였으며, 사병士兵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농사에 치중한 것으로 인한 이익이 있었다.
각종 직무를 맡아 수행하는 사람이 있어 국록이 부실하게 지출되는 일이 없으며, 재능이 각기 다른 인재를 폐기하지 않아 선왕先王이 나라를 다스리는 체계가 유기적으로 서로 이어졌다.
예의염치가 날로 두터워지고 전야田野가 날로 개간되어 그 법이 행해지면 나라가 편안하고 다스려졌으며 폐해지면 위태롭고 혼란스러웠으니, 천하를 잘 다스릴 재능을 지녔다고 할 만하다.
그와 같은 법을 시행한 지 몇 년 만에 곡물이 지천으로 많아져서 한 말 값이 몇 돈까지 내려갔으니, 한곳에 머물러 사는 사람은 넉넉히 쌓아둔 곡물이 있고 여행하는 사람은 충분한 돈이 있어 사람들이 스스로 언행을 신중히 하여 거의 형벌을 쓸 일이 없게 되니, 천하를 잘 다스린 성과가 있었다고 할 만하다.
무릇 천하를 잘 다스리려는 뜻을 지니고 천하를 잘 다스릴 재능을 지녔으며 또 천하를 잘 다스린 성과가 있었다.
그런데도 선왕先王과 더불어 어깨를 나란히 하지 못한 것은 법도法度의 시행이 선왕先王에 비해 갖추어지지 못했으며 예악의 시행과 농토의 제도와 학교의 교육이 선왕先王에 비해 갖추어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몸소 전쟁에 참여하여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공격하면 반드시 무찔러 천하 사람들이 모두 용맹하다고 여겼으나 이는 선왕先王이 지향하던 바가 아니었고,
사방 만 리 밖의 오랑캐로서 옛날에는 다스림이 미치지 못했던 자들이 복종하지 않는 자가 없어서 천하 사람들이 모두 성대하다고 여겼으나 이는 선왕先王이 힘쓰던 바가 아니었다.
태종太宗이 천하를 다스린 것이 그 득실이 이와 같았다.
요堯임금과 순舜임금의 치세治世로부터 5백여 년이 지나 탕왕湯王의 치세治世가 있었고, 탕왕湯王의 치세治世 이후 5백여 년이 지나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의 치세治世가 있었고,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의 치세治世로부터 천여 년이 지나 비로소 태종太宗이 군주君主가 되어 천하를 잘 다스리려는 뜻을 지니고 천하를 잘 다스릴 재능을 지니고 또 천하를 잘 다스린 성과가 있었다.
그러나 또한 제도 등이 갖추어지지 못했기에 선왕先王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이상적인 정치가 이루어진 시기라고 말할 수 없다.
이로 보면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의 이전에 태어난 사람은 대체로 5백여 년이 지나 한 번 치세治世를 만나고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의 이후에 태어난 사람은 천여 년이 지나도 치세治世를 만나지 못하였으니, 단지 이 치세治世가 아닌 때에 태어난 백성들만 불행한 것이 아니다.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의 이전에 태어난 선비들은, 요堯임금 시대의 순舜과 우禹, 순舜임금시대의 팔원八元과 팔개八凱, 탕왕湯王시대의 이윤伊尹,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시대의 태공太公과 같은 경우들은 대체로 5백여 년이 지나 한 번 만났을 뿐이며,
문왕文王과 무왕武王 이후 천여 년 사이에 태어난 사람은 비록 공자孔子 같은 성인聖人과 맹자孟子 같은 현인賢人이더라도 만나지 못하였고, 비록 태종太宗 같은 군주가 재위한 때라도 반드시 그 당시에 뜻을 얻지는 못하였으니, 이는 또한 이때 태어난 선비와 백성들의 불행이었다.
그러므로 그 시비와 득실의 자취를 서술하였으니 군주 된 자가 살펴볼 만한 자료가 될 뿐이 아니라, 도道에 뜻을 두고 윗자리에서 벼슬하고자 하는 선비도 이를 거울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