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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曾鞏(1)

당송팔대가문초 증공(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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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증공(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子固諸序 竝各自爲一段大議論하니 非諸家所及이요 而此篇尤深入하여 近程朱之旨矣
劉向所敍列女傳凡八篇이라
事具漢書向列傳이어늘 而隋書及崇文總目 皆稱向列女傳十五篇라하니
以頌義考之컨대 蓋大家所注 離其七篇爲十四하여 與頌義 凡十五篇이요 而益以陳嬰母及東漢以來凡十六事하니 非向書本然也
蓋向舊書之亡 久矣러니 嘉祐中 集賢校理蘇頌 始以頌義爲篇次하여 復定其書爲八篇하고 與十五篇者 竝藏於館閣이로되
而隋書以頌義爲하니 與向列傳不合이라
今驗頌義之文컨대 蓋向之自敍 又藝文志有向列女傳頌圖하니 明非歆作也
自唐之亂으로 古書之在者 少矣 而唐志錄列女傳凡十六家하고 至大家注十五篇者하여는 亦無錄이나
然其書今在하니 則古書之或有錄而亡하고 或無錄而在者 亦衆矣 非可惜哉
今校讐其八篇及十五篇者已定하니 可繕寫
漢承秦之敝하여 風俗已大壞矣 而成帝後宮之屬 尤自放이라
向以謂王政必自內始
故列古女善惡所以致興亡者하여 以戒天子하니 此向述作之大意也
其言太任之娠文王也 目不視惡色하고 耳不聽淫聲하고 口不出敖言이라하며 又以謂古之人胎敎者 皆如此라하니
夫能正其視聽言動者 此大人之事而有道者之所畏也어늘 顧令天下之女子能之하니 何其盛也
以臣所聞으로는 蓋爲之師傅保姆之助 詩書圖史之戒 珩璜琚瑀之節 威儀動作之度
其敎之者 雖有此具라도 然古之君子 未嘗不以身化也
하고 하니 夫豈自外至哉리오
世皆知文王之所以興 能得內助하고 而不知其所以然者하니
蓋本於文王之躬化
故內則后妃有之行하고 外則群臣有二南之美하여 與之相成하니라
其推而及遠 莫不好善而不自知하니 此所謂身修 故家國天下治者也
後世自學問之士 多徇於外物하여 而不安其守하니 其室家旣不見可法이라
故競於邪侈하니 豈獨無相成之道哉리오
士之苟於自恕하여 顧利冒恥하고 而不知反己者 往往以家自累故也
故曰 라하니 信哉인저
如此人者 非素處顯也이나 去二南之風 亦已遠矣어든
況於南鄕天下之主哉리오
向之所述勸戒之意 可謂篤矣
至於式微之一篇하여는 又以謂二人之作하니 豈其所取者博 故不能無失歟
然此傳或有之而孟子所不道者 蓋亦不足道也
凡後世諸儒之言經傳者 固多如此하니
覽者采其有補而擇其是非 可也
爲之序論以發其端云하노라
王遵巖曰 宋人敍古人集及古人所著書 往往有此家數
이나 多以考訂次第 爲一篇之文而已 不能如先生更有一段大議論以成其篇也
亦不免用其體하니 蓋小集自不足以發大議論이요 又適當然耳라하니라


07. 《열녀전列女傳》에 관한 목록서
자고子固의 여러 서문이 모두 각기 하나의 큰 논변으로서 제가諸家가 미칠 수 있는 수준이 아닌데, 이 편은 더욱 깊은 경지로 들어가 정자程子주자朱子의 취지에 가깝다.
유향劉向이 지은 《열녀전列女傳》은 모두 8편이다.
이 사실이 《한서漢書》 〈유향열전劉向列傳〉에 갖춰져 있는데, 《수서隋書》와 《숭문총목崇文總目》에는 모두 ‘유향劉向열녀전列女傳》 15편, 조대가曹大家 ’라고 하였다.
송의頌義〉를 가지고 살펴보면, 조대가曹大家가 주석한 것은 7편을 분리해 14편으로 만든 것에 〈송의頌義〉까지 합쳐 모두 15편인데, 진영陳嬰의 어머니와 동한東漢 이후 16건의 일을 추가하였으니, 유향劉向의 책 본연의 모습이 아니다.
유향의 옛 책이 없어진 지가 오래였는데, 가우嘉祐(송 인종宋 仁宗의 연호) 연간에 집현교리集賢校理 소송蘇頌이 처음으로 〈송의頌義〉를 정리하여 다시 이 책을 8편으로 정하고 15편으로 된 것과 함께 관각館閣에 보관하였다.
그런데 《수서隋書》에서는 〈송의頌義〉를 유흠劉歆의 작품으로 여겼으니 〈유향열전劉向列傳〉의 내용과는 부합하지 않는다.
지금 〈송의頌義〉의 글로 살펴보면 유향劉向 본인이 쓴 것이고 또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유향劉向의 《열녀전송도列女傳頌圖》가 있으니, 유흠劉歆의 작품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나라의 난리 이후로 남아 있는 고서가 적은데, 《당서唐書》 〈경적지經籍志〉에 《열녀전列女傳》이라는 이름으로 모두 16인의 저술이 기록되어 있고 조대가曹大家가 주석한 15편에 대해서는 역시 기록이 없다.
그러나 이 책이 지금 있는 것으로 볼 때 고서 중에 혹 기록은 있는데 없어지거나 혹 기록은 없는데 존재하는 것이 또한 많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닌가.
지금 그 8편과 15편을 교정하여 이미 정본을 확정하였으니, 이제 정서淨書해도 될 것이다.
처음에 나라가 낡은 나라를 이어받아 풍속이 이미 크게 무너졌었는데, 성제成帝의 후궁이었던 조비연趙飛燕위첩여衛婕妤 등은 더욱 방종하였다.
유향劉向왕정王政은 반드시 내조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흥성과 멸망을 초래하였던 옛 여인들의 선과 악을 열거하여 천자를 경계하였으니, 이것이 유향劉向이 이 책을 저술하게 된 큰 뜻이다.
그가 “태임太任문왕文王을 임신하였을 때 눈으로는 나쁜 색을 보지 않고 귀로는 음란한 소리를 듣지 않고 입으로는 오만한 말을 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또 “옛사람의 태교가 모두 이와 같았다.”고 하였다.
대체로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이처럼 바르게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대인大人의 일로써 도덕이 있는 이조차 제대로 하지 못할까 두려워하는 바인데, 도리어 천하의 여인들로 하여금 이것을 실천하도록 요구하였으니, 얼마나 대단한가.
내가 들은 바로는, 옛사람은 여자를 위해 사부師傅보모保姆를 선택하여 그들을 돕기도 하고, 《시경詩經》과 《상서尙書》 및 그림과 역사서 속에 기재된 여자의 사적을 가지고 그들을 경계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패옥을 허리춤에 차거나 머리에 장식하여 그들의 자세를 절제하기도 하고, 규정화된 동작과 의식으로 그들의 행동을 제한하기도 하였다.
여자를 가르칠 때 비록 이처럼 다양한 방법이 있긴 하였으나, 옛날의 군자는 모두 자기 몸이 본보기가 되는 방법으로 그녀들을 감화시키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가인괘家人卦가 천명하는 큰 의의는 자신을 돌이켜보는 데로 귀결되고, 이남二南에서 노래한 그 치적은 문왕文王에게 그 근본을 두었으니, 이것들이 어찌 자기 몸을 벗어난 외부로부터 얻어진 것이겠는가.
세상 사람들은 모두 문왕文王의 업적이 흥성한 것은 후비后妃의 내조를 잘 얻었기 때문이라는 것만 알고 그렇게 된 소이연은 알지 못한다.
그 근본적인 원인은 곧 문왕文王이 자기 몸으로 본보기를 삼아 감화시킨 데에 있었다.
이 때문에 안으로는 후비后妃가 〈관저關雎〉의 노래와 같은 품행이 있었고, 밖으로는 뭇 신하가 이남二南에서 칭송한 그와 같은 아름다운 덕이 있게 되어 안팎에서 서로 도와 이루어주었다.
이와 같은 감화가 확대되어 그 범위를 넓히자 나라 임금 시기에 음탕했던 혼인의 풍속과 장강長江한수漢水 유역의 작은 나라와 그물을 쳐놓고 토끼를 잡는 들판 사람까지 모두 을 좋아하면서 왜 그런지 스스로 알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대학大學》에서 이른바 “몸이 닦여지므로 집안과 국가와 천하가 다스려진다.”는 것이다.
후세에는 학문을 하는 선비부터 대부분 자기 몸 이외의 것을 추구하여 자신이 지켜야 할 도덕규범을 도외시하였으므로, 그들의 가족이 이미 본받을 만한 본보기를 보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서로 앞다투어 사악한 짓을 행하였던 것이니, 어찌 서로 도와 이루어주는 도만 없을 뿐이겠는가.
이와 같은 선비들은 편의에 따라 자신에게 관대하여 이익을 보면 염치를 돌아보지 않아 자기가 글을 읽은 선비임을 반성할 줄을 모르는데, 이는 대부분 가정을 자기의 부담으로 간주하여 멀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맹자孟子가 “자기가 도에 따라 행동하지 않으면 도가 처자에게도 행해지지 않는다.” 하였으니, 참으로 그러하다.
이러한 사람은 평소에 남들에게 드러나는 높은 지위에 있지 않아 〈겉치레를 중시하는 자가 아닌데도〉 개인의 내면의 덕을 노래한 이남二南에서의 교화와는 그 거리가 너무 멀다.
그런데 더구나 남쪽을 향해 앉아 있는 천하의 군주의 경우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유향劉向이 서술하여 천자에 대해 권면하고 경계한 뜻은 매우 진지하다고 말할 만하다.
그러나 유향劉向은 여러 가지 책을 많이 읽었다고 알려졌는데, 이 《열녀전列女傳》에서 《시경詩經》의 〈부이芣苢〉‧〈백주柏舟〉‧〈대거大車〉 등 편에 대한 해설은 지금 《시경詩經》을 해석한 자의 설명과 크게 어긋나니,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식미式微〉 한 편의 경우에는 또 두 사람의 합작이라고 하였으니, 어쩌면 자료를 고르는 범위가 넓었기 때문에 실수가 없을 수 없었던 것은 아닌가.
을 죽이려고 계획한 것과 이 어떻게 자기가 빠져나왔는가에 관한 내용은 대부분 《孟子》에 기재된 것과 부합한다.
그러나 《열녀전列女傳》에는 기재되어 있고 《孟子》에는 언급하지 않은 경우가 있는데, 이와 같은 것은 강론할 만한 가치가 없다.
후대에 경전을 설명하는 일부 유자儒者들에게 본디 이러한 경우가 많다.
독자는 그 시비를 구별하여 경전에 대해 도움이 되는 내용을 취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서론을 써서 그 첫머리를 여는 바이다.
왕준암王遵巖이 말하였다. “나라 사람이 옛사람의 문집과 옛사람이 저술한 책에 서문을 쓸 때에 이와 같은 기법을 많이 사용하였다.
그러나 대부분 그 차례를 고증하여 교정하는 것으로 한 편의 글을 작성할 뿐, 선생처럼 한 편의 큰 논변을 만들지는 못하였다.
다만 뒤에 보이는 《포용집鮑溶集》과 《이백집李白集》에 대해 쓴 서문의 경우는 다른 사람이 사용하는 그 체제를 따르는 것을 면치 못하였으니, 이는 분량이 적은 문집은 큰 논변을 제기할 만한 것이 못 되기 때문에 그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역주
역주1 列女傳目錄序 : 작자가 漢나라 劉向이 쓴 《列女傳》을 교감하고 손질한 뒤에 쓴 서문이다. 《列女傳》이 전해 내려온 경로를 자세히 고증하고 아울러 “왕도정치는 반드시 家庭으로부터 시작된다.”는 劉向의 관점을 드러내어 제왕이 몸소 실천하는 문제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列女傳》은 부녀자를 위해 傳을 세운 최초의 전문서로, 후세 사람이 편찬한 《列女傳》과 구분하기 위해 《古列女傳》으로 불린다. 劉向이 편찬한 여러 서적이 대부분 유실되거나 불완전한 상태인 것에 비해, 이 책만은 그런대로 완전한 편이라고 한다.
역주2 曹大家 : 班昭(45~117?)로, 자는 惠班이다. 《漢書》의 편찬자 班固와 西域 경영에 활약한 무장 班超의 누이동생으로 박학다식하였는데, 班固가 《漢書》를 완성하지 못하고 죽자, 和帝의 명을 받고 그 일을 계승하여 《漢書》 가운데 8편의 〈表〉와 〈天文志〉를 완성함으로써 《漢書》 편찬을 완결하였다. 曹世叔에게 출가하였으나 남편과는 일찍 사별하였는데, 和帝가 자주 궐내에 불러들여 皇后와 貴人들에게 그를 스승으로 삼아 섬기게 하고 大家라고 불렀기 때문에 曹大家라고 한다. 《後漢書 卷84 列女傳 曹世叔妻》
역주3 劉歆 : B.C. 53?~A.D. 23. 劉向의 아들로, 부자가 함께 六藝의 서적들을 7종으로 분류하여 《七略》을 만들었다.
역주4 趙衛 : 趙는 趙飛燕이고 衛는 衛婕妤인데, 모두 成帝의 총애를 받았던 여인들이다. 趙飛燕의 본명은 趙宜主였으나 몸이 가볍고 늘씬하여 ‘나는 제비’라는 뜻인 ‘飛燕’이란 별명이 붙어 흔히 그대로 불리며 뒤에 孝成皇后가 되었다. 衛婕妤의 본명은 李平이다. 班婕妤의 추천으로 婕妤가 된 뒤에 그가 후궁이 된 내력이 漢 武帝 때의 衛皇后와 비슷하다 하여 衛氏 성을 하사받았다.
역주5 家人之義 歸於反身 : 家人은 《周易》 64괘 가운데 하나이다. 家人卦의 上九 爻辭에 “上九는 믿음을 지니고 위엄으로 대하면 마침내 길하리라.[上九 有孚威如 終吉]” 하였는데, 이것을 풀이한 象傳에 “위엄으로 대하면 길하다는 것은 자신을 돌이켜보는 것을 말한다.[威如之吉 反身之謂也]” 하였다.
역주6 二南之業 本於文王 : 二南은 《詩經》 〈國風〉의 〈周南〉과 〈召南〉을 가리키는 것으로, 周公과 召公이 통치하는 구역의 노래이다. 業은 업적 또는 성과의 뜻으로, 이 두 구역이 잘 다스려지는 성과가 있게 된 것은 앞서 文王의 교화와 后妃의 덕이 그 기반이 되었다는 것이다.
역주7 關雎 : 《詩經》 〈周南〉의 첫 편의 편명으로, 后妃의 덕을 노래한 작품이다.
역주8 商辛之昏俗 : 辛은 商나라 마지막 군주인 紂王의 이름이다. 昏俗은 혼인하는 풍속이라는 뜻인데, 그가 통치하던 시기에 혼인하는 풍속이 음란하였다고 한다. 《詩經》 〈召南〉의 〈行露〉와 〈野有死麕〉 등은 천하가 周 文王의 교화에 감회되어 商辛 당시의 혼인풍속을 바꾼 것을 노래한 것이라 한다.
역주9 江漢之小國 : 長江과 漢水 유역의 작은 나라라는 뜻이다. 《詩經》 〈周南 漢廣〉 시를 말하는 것으로, 〈毛詩序〉에 “文王의 도가 남쪽 나라에까지 파급되어 아름다운 교화가 長江과 漢水 사이에 행해졌다.” 하였다.
역주10 免罝之野人 : 그물을 펼쳐 토끼를 잡는 산야의 사람이라는 뜻이다. 《詩經》 〈周南 免罝〉 시를 말하는 것으로, 〈毛詩序〉에 “〈免罝〉는 后妃의 덕을 노래한 것이다. 〈關雎〉의 교화가 행해지자 덕을 좋아하지 않는 이가 없어 현인이 많아졌다.” 하였다. 그 의미는 后妃의 덕이 백성을 감화시켜 토끼를 잡는 사람까지도 겸손하고 덕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역주11 身不行道 不行於妻子 : 《孟子》 〈盡心 下〉에 나오는 말이다.
역주12 此傳稱詩芣苢柏舟大車之類……又以謂二人之作 : 今序詩者之說은 ‘지금 남아 있는 《詩經》을 풀이한 자의 설’이란 뜻으로, 西漢의 經學家 毛亨이 썼다고 하는 〈毛詩序〉를 가리킨다. 〈毛詩序〉는 각 시의 창작배경과 그 의미를 해설한 글이다. 《詩經》의 일부 작품에 대한 설명이 〈毛詩序〉와 《列女傳》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芣苢〉에 대해 〈毛詩序〉에는 “〈芣苢〉는 后妃의 아름다운 덕을 찬양한 노래이다. 천하가 평화로우면 부인이 자식을 두는 것을 즐거워한다.” 하였는데, 《列女傳》 〈貞順〉에는 “宋나라 사람의 딸이 蔡나라로 시집을 갔는데 남편에게 악질이 있었다. 그의 친가 어머니가 개가할 것을 권하였으나 그 말을 따르지 않고 〈芣苢〉를 지었다.” 하였고, 〈柏舟〉에 대해 〈毛詩序〉에는 “〈柏舟〉는 어진 덕을 지녔으나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을 한탄한 노래이다. 衛 頃公 때 어진 사람은 때를 만나지 못하고 소인이 군주의 곁에 있었다.” 하였는데, 《列女傳》 〈貞順〉에는 “衛 宣公의 夫人은 본디 齊侯의 딸인데 衛나라로 시집가 도성 문앞에 당도하자마자 신랑인 衛나라 임금이 죽어버렸다. 그의 保姆가 齊나라로 도로 돌아가자고 하였으나 듣지 않고 성 안으로 들어가 삼년상을 지켰다. 새 임금이 즉위하여 그를 아내로 삼고자 하고 형제들도 개가할 것을 권하였으나 끝내 받아들이지 않고 〈柏舟〉를 지었다.” 하였다. 〈大車〉에 대해 〈毛詩序〉에는 “〈大車〉는 周나라 대부를 풍자한 시이다. 예의가 해이해져 남녀들이 간통하였기 때문에 옛날의 좋은 풍속을 개진하여 지금의 대부가 남녀에 관한 일을 잘 처리하지 못한 것을 풍자하였다.” 하였는데, 《列女傳》 〈貞順〉에는 “楚나라가 息나라를 정벌하여 息君과 그의 夫人을 사로잡았다. 楚王이 息君에게 문지기 노릇을 하게 하고 장차 息君의 夫人을 아내로 삼으려 하자, 夫人은 楚王이 궁궐을 나간 틈에 息君을 만나보고 〈大車〉를 지은 뒤에 자살하였다.”고 하였다. 〈式微〉에 대해 〈毛詩序〉에는 “〈式微〉는 黎侯가 衛나라에 머물러 있자 그의 신하가 돌아갈 것을 권한 노래이다.” 하였는데, 《列女傳》 〈貞順〉에는 “이 시는 黎 莊公의 夫人이 그의 傅姆와 공동으로 창작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역주13 其曰象計謀殺舜……蓋亦不足道也 : 象은 舜의 이복 아우이다. 《列女傳》 〈母儀〉에 의하면, 舜의 아버지가 象과 함께 舜을 죽일 생각으로 세 번 계책을 꾸몄다. 첫 번째는 舜에게 창고를 수리하라고 명하여 舜이 지붕 위로 올라가자 사다리를 치우고 불을 질렀고, 두 번째는 舜에게 우물을 파게 한 뒤에 위에서 우물 입구를 막아버렸는데, 舜이 두 번 모두 대책을 세워 빠져나왔다. 세 번째는 舜에게 술을 마시게 하여 그가 취했을 때 죽이려고 하였는데, 舜의 두 아내인 娥皇과 女英이 하루 종일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는 약을 주어 화를 면하였다고 하였다. 앞의 두 가지 일은 《孟子》 〈萬章 上〉에도 기재되어 있다.
역주14 如後敍鮑溶李白集 : 〈鮑溶詩集目錄序〉와 〈李白詩集目錄序〉를 가리킨다. 〈李白詩集目錄序〉는 茅坤의 《唐宋八大家文抄》 〈宋大家曾文定公文抄 卷5〉의 두 번째에 있는 작품으로 본 역서의 뒤쪽에 보이고, 〈鮑溶詩集目錄序〉는 《元豐類藁》 권11에 있는데 《唐宋八大家文抄》에는 채록되지 않았다.

당송팔대가문초 증공(1) 책은 2019.03.1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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