慶曆四年五月日에 南豐曾鞏은 謹再拜上書諫院學士執事하노라
朝廷自更兩府諫官來로 言事者 皆爲天下賀得人而已라
鞏嘗靜思天下之事矣
컨대 以天子而
니 不古聖賢然者否也
아
邪人은 以不己利也則怨하고 庸人은 以己不及也則忌하니 怨且忌則造飾以行其間이라 人主不寤其然이면 則賢者必疏而殆矣라
今主上至聖하니 雖有庸人邪人이라도 將不入其間이나
然今日兩府諫官之所陳을 上已盡白而信邪아 抑未然邪아
其已盡白而信也라도 尙懼其造之未深하고 臨事而差也요
其未盡白而信也면 則當屢進而陳之하여 待其盡白而信하고 造之深하고 臨事而不差而後已也니
夫天子之所尊而聽者는 宰相也나 然接之有時하여 不得數且久矣요
惟諫官
은 隨宰相入奏事
하고 하니 蓋常然矣
라 至於諫官
하여는 出入言動相綴接
하여 早暮相親
이요 未聞其當退也
하니
如此면 則事之失得을 早思之不待暮而以言可也요 暮思之不待越宿而以言可也며 不諭則極辨之可也라
屢進而陳之는 宜莫若此之詳且實也니 雖有邪人庸人이라도 不得而間焉이라
今諫官之見也 有間矣니 其不能朝夕上下議도 亦明矣라
禁中之與居는 女婦而已爾요 捨是則寺人而已爾니 庸人邪人而已爾라
如此면 則鞏見今日兩府諫官之危요 而未見國家天下之安也라
度執事亦已念之矣리니 苟念之면 則在使諫官侍臣復其職而已니
噫라 自漢降戾後世히 士之盛이 未有若唐太宗也요 自唐降戾後世히 士之盛이 亦未有若今也라
今有士之盛하여 能行其道면 則前數百年之弊 無不除也요 否則後數百年之患이 將又興也리니 可不爲深念乎아
故로 敢布於執事하고 幷書所作通論雜文一編以獻이라
伏惟執事는 莊士也라 不拒人之言者也니 願賜觀覽하여 以其意少施焉하라
如今時所急은 雖無常人千萬이라도 不害也나 顧如安石은 此不可失也라
亦書其所爲文一編進左右하노니 庶知鞏之非妄也니이다
注
구양공歐陽公이 두 사간司諫에게 보낸 편지투로부터 변화 발전하였다.
경력慶曆 4년 5월에 남풍南豐 증공曾鞏은 삼가 재배再拜하고 간원학사諫院學士 집사執事께 글을 올립니다.
조정이 양부兩府(중서성中書省과 추밀원樞密院을 말함)의 간관諫官을 교체한 뒤로 〈정사를〉 논하는 자들이 모두 천하를 위하여 인재를 얻은 것을 축하합니다.
축하하는 것은 진실로 당연하지만, 그러나 축하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까.
제가 한번 천하의 일을 가만히 생각해보건대, 이는 천자께서 성인의 도를 행하신 것으로 옛 성현들도 그러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고금에 이것을 어렵게 여긴 것은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간사한 자는 자기에게 이롭지 않다 하여 원망하고 용렬한 자는 자기가 그 부류에 미치지 못한다 하여 꺼리니, 원망하고 꺼리면 일을 조작하고 꾸며서 〈군주에게〉 이간질을 행하는데, 군주가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현자賢者들이 반드시 소원해져서 위태롭습니다.
그러므로 성현의 도가 왕왕 행해지지 못한 것이니, 동한東漢 말기의 경우가 바로 그렇습니다.
지금 주상께서는 지극히 성스러우셔서 비록 용렬한 자와 간사한 자가 있더라도 이간질이 행해지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양부兩府의 간관諫官이 고하는 말을 주상께서 이미 모두 명백히 알아 믿고 계십니까, 아니면 그렇지 못합니까?
주상께서 이미 모두 명백히 알아 믿는다 하더라도 〈간관諫官으로서는〉 오히려 〈주상이 신정新政에 대한〉 이해와 지지가 깊지 못하지나 않을까 걱정하고, 일에 임하여 조처를 잘못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아직 모두 명백히 알아 믿지 못하신다면 마땅히 자주 나아가 아뢰어서 〈주상께서〉 모두 명백히 알아 믿으시고, 〈신정新政에 대한〉 이해와 지지가 깊고, 일에 임하여 조처를 잘못하는 일이 없는 상태가 될 때까지 기다린 뒤에 그만두어야 합니다.
이 아름다움을 이루는 일이 어찌 간관에게 달려 있지 않겠습니까.
천자께서 존경하여 말을 듣는 자는 재상이지만, 접하는 것이 일정한 때가 있어서 자주 보거나 오래 볼 수 없습니다.
오직 간관만 재상을 따라 들어가 국사를 아뢰는데, 아뢰기를 마치면 재상은 물러나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으로 돌아가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간관의 경우는 천자 곁에 출입하면서 말하고 행동하는 일이 이어져 아침저녁으로 서로 가깝게 있어야지 반드시 물러나야 한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이와 같다면, 국사의 잘잘못에 대해 아침에 생각이 들면 저녁까지 기다리지 않고도 말하는 것이 가능하고, 저녁에 생각이 들면 날이 바뀌기를 기다리지 않고도 말하는 것이 가능하며, 이해하지 못하시면 그 내용을 확실하게 설명하는 일이 가능합니다.
자주 나아가 아뢰는 것은 당연히 이처럼 자세하고 확실한 것만 한 게 없으니, 〈이렇게 되면〉 비록 간사한 자와 용렬한 자가 있더라도 이간질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아름다움을 이루는 일이 어찌 간관에게 있지 않겠는가.’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간관이 알현하는 것은 끊기는 때가 있으니 〈주상과〉 아침저녁으로 의논하지 못하고 있을 것 또한 분명합니다.
〈주상이〉 궁궐에서 함께 지내는 사람들은 부녀자들일 뿐이고 그들을 제외하면 환관일 뿐이니, 이들은 용렬한 사람이고 간사한 사람일 뿐입니다.
〈그러니 간관이 없는〉 밤중에 의논하는 사이 임금께 이간질하기가 쉽지 않겠습니까.
〈현 상황이〉 이와 같다면, 저는 오늘날 양부兩府 간관諫官들의 위태로움만 볼 뿐이겠고 천하국가의 안정은 보지 못하겠습니다.
집사執事께서도 이미 이와 같은 생각을 하고 계실 것으로 사료되는데, 만일 생각을 하고 계신다면 〈이를 실행하는 것은〉 간관諫官과 시신侍臣들로 하여금 그들의 직책을 회복하게 하는 것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자신의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서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 어찌 있겠습니까.
아, 한漢나라로부터 후세에 이르기까지 인재가 많았던 때는 당 태종唐 太宗 때만 한 적이 없었고, 당唐나라로부터 후세에 이르기까지 인재가 많았던 때는 지금만 한 적이 또 없었습니다.
당 태종唐 太宗은 많은 인재로 인해 훌륭한 정치의 공적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지금 많은 인재를 통해 훌륭한 치도治道를 행한다면 지난 수백 년의 폐단을 모두 제거할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이후 수백 년의 환란이 장차 또 일어날 것이니, 이 점을 깊이 염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외지고 먼 지역에서 태어나 살면서 부모님을 봉양할 의식衣食이 없어 곤란을 겪고 있었는데 이제는 또 향학鄕學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성군聖君과 현신賢臣의 시대에 태어났으면서도 경사京師에 들어가 한마디 말도 올리지 못하는 신세입니다.
이 때문에 감히 집사께 〈저의 뜻을〉 말씀드리고 아울러 제가 지은 통론通論, 잡문雜文 한 권을 써서 보내드립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집사께서는 엄정한 사람이므로 다른 사람의 말을 거절할 분이 아니니, 부디 한번 살펴보시고 제 의견을 다소나마 시행해보시길 바랍니다.
저의 벗 왕안석王安石은 문풍文風이 매우 예스럽고 행실도 그 문풍에 꼭 맞습니다.
비록 이미 과거에 급제하긴 했으나 지금 사람 중에 왕안석을 아는 이는 여전히 적습니다.
저 사람은 진실로 〈언행을〉 신중히 하는 사람인지라 남에게 알려지길 원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사람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흔히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늘날의 급선무는 〈인재를 구하는 일이니〉 보통 사람이야 천만 명이 없어도 무방하나 안석安石과 같은 이를 잃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 집사께서 만일 그를 조정에 진출시키신다면 천하에 보탬이 있을 것입니다.
그가 지은 글 한 권도 써서 집사께 올리니, 제가 함부로 말씀드리는 것이 아님을 아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