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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曾鞏(1)

당송팔대가문초 증공(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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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증공(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予幼則從先生受書 然是時 方樂與家人童子嬉戱上下하여 未知好也
十六七時 闚六經之言與古今文章有過人者하여 知好之하니
則於是銳意欲與之竝이나
而是時 家事亦滋出이라
自斯以來 西北則行陳蔡譙苦睢汴淮泗하여 出于京師
東方則絶江舟漕河之渠하여하고 竝封禺會稽之山하여 出于東海上이요
南方則載大江하여 臨夏口而望洞庭하고 轉彭蠡하며 上庾嶺하고 繇眞陽之瀧하여 至南海上하니
此予之所涉世而奔走也
蛟魚洶湧湍石之川 巓崖莽林貙虺之聚 與夫雨暘寒燠風波霧毒不測之危
此予之所單遊遠寓而冒犯以勤也
衣食藥物 廬舍器用 箕筥碎細之間 此予之所經營以養也
天傾地壞하여 殊州獨哭하고 數千里之遠 抱喪而南하여 積時之勞하여 乃畢大事하니 此予之所遘禍而憂艱也
所志 與夫弟婚妹嫁 四時之祠 屬人外親之問 王事之輸 此予之所皇皇而不足也
予於是力疲意耗하고 而又多疾하니
言之所序 蓋其一二之指也
得其閒時하여 挾書以學호대 於凡爲身治人 世用之損益 考觀講解有不能至者
故不得專力盡思하고 琢彫文章하여 以載私心難見之情하고 而追古今之作者爲竝하여 以足予之所好慕하니
此予之所自視而嗟也
今天子至和之初 予之侵擾多事故益甚하니
予之力無以爲하여 乃休於家하고 而卽其旁之草舍以學이라
或疾其卑하고 或議其隘者한대
予顧而笑曰 是予之宜也
予之勞心困形하여 以役於事者 有以爲之矣
予之卑巷窮廬 冗衣礱飯 芑莧之羹으로 隱約而安者 固予之所以遂其志而有待也
予之疾則有之하여 可以進於道者 學之有不至하며 至於文章하여는 平生所好慕 爲之有不暇也
若夫土堅木好高大之觀 固世之聰明豪雋하여 挾長而有恃者所得爲
若予之拙 豈能易而志彼哉리오하고
遂歷道其少長出處 與夫好慕之心하여 以爲學舍記하니라
王遵巖曰 此亦是先生獨出一體 在韓歐未有
然大意亦自醉翁亭眞州東園二篇體中變出이나 又自不同也라하니라


05. 학사學舍에 쓴 기문
나는 어릴 적에 선생에게 글을 배웠지만 이때 한창 가족의 어린아이들과 함께 소꿉장난도 하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면서 노느라 글 읽는 것을 좋아할 줄 몰랐다.
16, 7세 때에 육경六經에 들어 있는 말과 고금 작가들의 문장을 보고 그 안에 일반 사람을 초월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비로소 그것들을 좋아할 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이와 같은 문장을 쓴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러나 이 당시에 맡아서 해야 할 가사家事 또한 많아졌다.
이때부터 서북쪽으로 갈 때는 진주陳州채주蔡州초현譙縣고현苦縣 일대와 수수睢水변수汴水회하淮河사하泗河 유역을 경유하여 도성인 변경汴京에까지 도달하였고,
동쪽으로 갈 때는 장강長江을 건너 배로 운하의 수로를 지나 오호五湖를 넘고 봉산封山우산禺山회계산會稽山 등의 산을 지나 동해의 해변까지 도달하였으며,
남쪽으로 장강長江에 몸을 싣고 하구夏口에 도달하여 동정호洞庭湖를 바라보고 팽려호彭蠡湖로 길을 꺾은 뒤에 대유령大庾嶺을 오르고 진양현眞陽縣에서 농수瀧水의 흐름을 따라 내려가 남해에 도달하였다.
이것은 내가 세상사를 경험하고 생계를 위해 바쁘게 돌아다닌 역정이다.
상어가 출몰하고 물살이 거세게 치솟으며 급류에 바위가 구르는 하천을 건너고, 깎아지른 산비탈에 잡초와 수목이 우거져 맹수와 독사들이 우글거리는 곳을 지나가기도 하고, 또 비가 내리다가 맑았다가 추웠다가 따뜻했다 하는 변덕스러운 날씨 속에 풍파가 갑자기 일어나거나 독한 안개가 잔뜩 끼는 등 예측할 수 없는 위험을 경험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내가 집을 떠나 혈혈단신으로 멀리 돌아다니면서 겪은 고초이다.
의복‧음식‧약품과 집‧가구에서부터 〈곡식의 티끌을 골라내는〉 키와 〈밥을 담는〉 광주리 등 자질구레한 것들은 곧 내 힘으로 마련하여 가족을 부양했던 물건들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나 혼자 타향에서 통곡하고 수천 리 밖에서 영구를 모시고 남쪽으로 돌아와 장시간의 노고와 고통을 겪은 뒤에 비로소 대사大事를 마쳤으니, 이것은 내가 큰 화를 만나 어려움에 처했던 정황이다.
모친께서 바라시는 일과 아우와 누이들의 혼인, 춘추 사계절의 제사, 친족 및 외척간의 안부, 나라 세금을 납부하는 일 등을 실현하는 것은 내가 한 해 내내 바쁘게 서두르더라도 완수하지 못할 형편이다.
나는 이로 인해 기진맥진하였고 또 몸이 허약하여 병이 많았다.
이상 기술한 내용은 수많은 일 가운데 한두 가지 대략적인 정황일 뿐이다.
다만 잠시 한가로운 때가 있으면 책을 끼고 공부를 하고 있지만, 자신을 수양하고 남을 다스리는 도리와 세상의 변화에 응용할 수완에 관해서는 살펴보고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적지 않다.
그러므로 정력을 집중하고 사색을 기울여 문장을 다듬어서 내 마음속의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을 담아내고 아울러 고금의 작가를 힘껏 추격하여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함으로써 그들을 사랑하고 좋아하는 내 마음을 충족시키지를 못한다.
이것이 곧 내가 나 자신을 돌아볼 때 부족하여 탄식하는 이유이다.
지금 천자天子지화至和로 연호를 바꾼 첫해를 만났는데 내가 방해를 받는 일이 많아 의외의 문제들이 더욱 심각해졌다.
내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어 마침내 집에서 쉬며 근처 초가에 가서 글을 읽었다.
어떤 이는 이 초가집이 너무 낮은 것을 흠잡고, 어떤 이는 그곳이 협소한 것을 말하기도 한다.
나는 그들을 돌아보고 웃으며, “이곳은 나에게 매우 적합하다.
내가 심신을 괴롭히며 잡무를 위해 분주했던 것은 나름대로 그만한 역할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누추한 골목의 초라한 집에서 낡은 옷차림에 거친 밥과 쓴 나물국을 먹으며 빈궁하면서도 편안한 것은 진실로 내가 뜻을 이루기 위해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나는 몸이 허약하여 신병이 있으므로 성현의 도에 나아가는 이치를 배우지만 아직 일정한 수준에는 도달하지 못하였고, 문장을 짓는 일에 있어서는 내가 평소에 좋아하는 바이지만 그에 관해 공부할 겨를이 없었다.
단단한 흙과 좋은 목재로 지은 높고 큰 누대는, 본디 세상의 저 총명하고 준수한 호걸로서 자기의 좋은 입지조건을 의지하여 믿을 데가 있는 자들이나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나처럼 무능한 자가 어찌 분수에 맞추어 살아가는 개성을 바꿔 저들이 하는 행위를 추구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마침내 어렸을 때부터 성장해서까지의 진퇴거취에 관한 이력과 문장을 짓기를 좋아하는 심정을 낱낱이 서술하여 이 한 편의 〈학사기學舍記〉를 쓴다.
왕준암王遵巖이 말하였다. “이 또한 선생만의 독특한 한 문체로써 한유韓愈구양수歐陽脩에게는 없다.
그러나 큰 뜻은 또한 〈취옹정기醉翁亭記〉와 〈진주동원기眞州東園記〉 두 편의 문체로부터 변화되어 나온 것인데도 또 나름대로 다르다.”


역주
역주1 學舍記 : 작자가 그의 고향집에서 쉬며 글을 읽을 당시인 宋 仁宗 至和 원년(1054)에 쓴 작품으로, 이때 나이는 36세였다. 學舍는 그의 집 곁에 지은 글방이다. 작자는 가정형편이 매우 열악한 가운데 그동안 두 차례 도성에 들어가 進士試에 응시하였다가 모두 낙방하였고, 조정의 부름을 받고 도성으로 들어가던 아버지를 수행하던 중 아버지가 병이 나서 죽자 친지들의 도움을 받아 고향으로 운구하여 장례를 치렀으며, 그 뒤에 형이 죽자 나이 많은 어머니를 위시하여 4명의 아우와 9명의 여동생에 대한 생계를 혼자 도맡아 해결해나갔다. 이처럼 어려운 가운데서도 學舍를 짓고 그곳에서 苦學을 통해 고금의 유수한 명인들과 동등한 수준이 되어야겠다는 큰 뜻을 실현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다. 이 작품은 그동안 겪었던 역경의 과정을 서술하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학문에 열정을 쏟는 정신을 표현한 일종의 자서전 성격의 글이다.
역주2 五湖 : 호수 이름으로, 太湖를 가리킨다.
역주3 太夫人 : 어머니를 말한다. 아버지가 죽은 뒤 어머니를 부를 때는 ‘太’자를 붙인다. 작자의 생모 吳氏는 일찍 죽었으므로 여기서는 계모인 朱氏를 가리킨다.

당송팔대가문초 증공(1) 책은 2019.03.1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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