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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曾鞏(1)

당송팔대가문초 증공(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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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증공(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意見好
至治之極 敎化旣成하여 道德同而風俗一이면 言理者 雖異人殊世 未嘗不同其指 何則 理當故無二也니라
是以詩書之文 自唐虞以來 其相去千餘載 其作者非一人이며 至於其間嘗更衰亂이나 然學者尙蒙餘澤하고
雖其文數萬이나 而其所發明 更相表裏如一人之說하여 不知時世之遠 作者之衆也하니 嗚呼
上下之間 漸磨陶冶하여 至於如此하니 豈非盛哉
自三代敎養之法廢하고 先王之澤熄으로 學者人人異見하고 而諸子各自爲家하니 豈其固相反哉 不當於理 故不能一也
由漢以來 益遠於治 故學者 雖有魁奇拔出之材하여 而其文能馳騁上下하여 偉麗可喜者 甚衆이나 然是非取舍 不當於聖人之意者 亦已多矣
故其說未嘗一하여 而聖人之道 未嘗明也
士之生於是時하여 其言能當於理者 亦可謂難矣 由是觀之컨대 則文章之得失 豈不繫於治亂哉
字子直이라
少已著文數萬言하여 俱名聞天下하니 可謂魁奇拔出之材而其文能馳騁上下하여 偉麗可喜者也
讀其書하면 知其與漢以來名能文者 俱列於作者之林하여 未知其孰先孰後 考其意하면 不當於理 亦少矣
然子直 晩自以爲不足하고 而悔其少作하여
更欲窮探力取하여 極聖人之指要하여 盛行則欲發而見之事業하고 窮居則欲推而托之於文章하니 將與詩書之作者竝하여 而又未知孰先孰後也
然不幸蚤世 故雖有難得之材 獨立之志 而不得及其成就하니 此吾徒與子直之兄回字深甫 所以深恨於斯人也
子直官世行治 深父已爲之銘이요 而書其數萬言者하여 屬予爲敍
予觀子直之所自見者 已足暴於世矣 故特爲之序其志云하노라


05. 《왕자직문집王子直文集》에 쓴 서문
견해가 좋다.
훌륭한 정치가 극에 달하여 교화가 이미 이루어져서 도덕이 같아지고 풍속이 통일되면, 이치를 말함에 있어서 비록 사람이 다르고 시대가 다르더라도 항상 그 뜻이 같으니, 이는 어째서인가? 이치에 합당하기 때문에 둘이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시경詩經》, 《서경書經》의 문장이 당우唐虞 이후 나라 때에 이르기까지 그 간격이 천여 년이고 작자 또한 한 사람이 아니며, 심지어 그 사이에 여러 차례 쇠란衰亂을 겪었는데도 학자學者들이 여전히 그 유택遺澤을 입고 있다.
그리고 비록 그 글들이 수만 편이나 되지만 그 천명한 뜻은 마치 한 사람의 설인 것처럼 표리가 같아서 시대가 유구하고 작자가 많다는 것을 의식할 수 없으니, 아 훌륭하다.
전대前代후대後代에서 갈고 닦아 이와 같은 경지에 도달하였으니, 어찌 성대한 일이 아니겠는가.
삼대三代에 백성을 교화하고 기르던 법이 폐지되고 선왕先王유택遺澤이 사라진 뒤로 학자들이 사람마다 견해를 달리하고 제자諸子들이 각각 스스로 학파를 만들었으니, 어쩌면 그리도 상반되는가? 이치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로 같아지지 못하는 것이다.
나라 이래로 더욱 치세治世에서 멀어졌으므로 학자學者들이 비록 뛰어난 재주를 지녀 그 문장이 능히 고금을 종횡무진 주물러서 위대하고 아름다워 좋아할 만한 것이 매우 많았지만, 시비是非취사取捨성인聖人의 뜻에 합당하지 않게 하는 것 또한 매우 많았다.
그러므로 그 설이 일찍이 같지 않아서 성인聖人가 일찍이 밝아지지 못한 것이다.
선비가 이러한 시대에 태어나 그 말을 이치에 맞게 하는 일은 역시 어렵다고 할 만하니, 이를 통해 보건대 문장의 득실得失이 어찌 시대의 치란治亂에 달려 있지 않겠는가.
장락長樂 왕향王向자직子直이다.
젊었을 적에 이미 수만 자의 문장을 지어 그 형제들과 함께 천하에 이름을 날렸으니, ‘뛰어난 재주를 지녀 그 문장이 능히 고금을 종횡무진 주물러서 위대하고 아름다워 좋아할 만한 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글을 읽어보면, 나라 이래 이름난 문장가들과 함께 작자의 숲에 이름이 나란히 끼어들어 그 우열을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겠으며, 글의 뜻을 따져보면 이치에 합당하지 않은 것이 역시 적었다.
그러나 자직子直은 만년에 스스로 부족함을 느끼고 젊었을 때 문장을 지은 것을 후회하였다.
그리하여 다시 깊이 탐구하고 힘써 취해 성인聖人이 가르친 요지를 터득한 다음, 세상에 나가 활동하게 되면 그것을 드러내 사업에 반영하고 은거하면 그것을 확대하여 문장에 의탁하려 하였으니, 장차 《시경詩經》, 《서경書經》의 작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또 그 우열을 구분할 수 없을 판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일찍 죽었기 때문에 비록 보기 드문 재주와 굳건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뜻을 성취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우리들이 자직子直왕회王回 심보深甫와 함께 이 사람에 대하여 크게 한스러워하는 이유이다.
자직子直의 관직과 세계世系, 행사와 치적은 심보深父가 이미 묘갈명에 기재하였고, 그가 또 수만 자를 써서 나에게 보내와 서문을 부탁하였다.
내가 보건대 자직子直이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드러낸 부분이 이미 세상에 충분히 알려졌으므로 특별히 그가 지녔던 뜻만을 서술하였다.


역주
역주1 王子直文集序 : 子直 王向이 죽은 뒤에 그의 형 深父 王回의 부탁을 받고 이 글을 지었는데, 王回가 1065년에 죽은 것으로 볼 때 작자의 나이 46세 이전에 쓴 것으로 보인다. 侍御史 王平의 아들들인 이들은 潁州의 명사로 일찍이 王安石과 교제하였고, 뒤에 王安石이 작자에게 소개함으로써 서로 알게 되었다. 王向은 經學과 史學에 밝았으나 불우한 인생을 살다가 40세 이전에 죽어 사후에도 쓸쓸하였다. 작자는 이 글에서 유사 이래 전개되어 온 儒學의 盛衰得失을 거침없이 논하고 이를 통해 문집이 출현하는 사회배경을 추론하는 한편, 王向이 보기 드물게 고귀한 인물임을 부각시켰다.
역주2 秦魯之際 : 秦은 《書經》 〈周書 秦誓〉를 말하고, 魯는 《詩經》 〈魯頌〉을 말하는 것으로, 西周부터 東周의 襄王 시기까지를 말하는 것이다.
역주3 長樂王向 : 長樂은 福建路 福州로 지금의 福建省 福州市인데, 王向의 조상이 살았던 고장이다.
역주4 與其兄弟 : 형은 王回이고, 아우는 王冏이다.

당송팔대가문초 증공(1) 책은 2019.03.1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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