明允은 姓은 蘇氏요 諱는 洵이니 眉州眉山人也라
居五六年에 所有旣富矣하니 乃始復爲文이라 蓋少或百字요 多或千言이니
其指事析理와 引物託諭 侈能盡之約하고 遠能見之近하며 大能使之微하고 小能使之著하며 煩能不亂하며 肆能不流라
其雄壯俊偉 若決江河而下也요 其輝光明白이 若引星辰而上也라
其略如是하니 以余之所言으로 於余之所不言을 可推而知也라
明允은 每於其窮達得喪과 憂歎哀樂에 念有所屬이면 必發之於此하며 於古今治亂興壞와 是非可否之際에 意有所擇이면 亦必發之於此하며
於應接酬酢萬事之變者에 雖錯出於外라도 而用心於內者는 未嘗不在此也라
今參知政事歐陽公脩 爲翰林學士어늘 得其文而異之하여 以獻於上이러니
旣而歐陽公이 爲禮部에 又得其二子之文하여 擢之高等이라
於是에 三人之文章이 盛傳於世하니 得而讀之者 皆爲之驚하여 或歎不可及하며 或慕而效之하여 自京師로 至於海隅障徼히 學士大夫 莫不人知其名하여 家有其書라
旣而明允召試舍人院한대 不至하니 特用爲秘書省校書郞하니라
頃之에 以爲霸州文安縣主簿하여 編纂太常禮書하고 而軾轍이 又以賢良方正策入等하니
於是에 三人者尤見於當時하여 而其名益重於天下하니라
治平三年春에 明允上其禮書호되 未報하고 四月戊申에 以疾卒하니 享年五十有八이라
所集太常因革禮者一百卷이요 更定諡法三卷은 藏於有司요 又爲易傳이나 未成이라
其年에 以明允之喪으로 歸葬於蜀地하고 旣請歐陽公爲其銘하고 又請予爲辭以哀之하여 曰 銘將納之於壙中이요 而辭將刻之於冢上也라하니
하고 하며 粲星斗兮射精光
하니 衆伏玩兮雕肺腸
이라 自京師兮洎幽荒
히 矧二子兮與翺翔
가 하여
羽峨峨兮勢方颺
이러니 孰云命兮變不常
하여 奄忽逝兮
이리오
維自著兮暐煌煌하여 在後人兮慶彌長하니 嗟明允兮庸何傷이리오
注
명윤明允의 생애를 서술한 내용이 또한 매우 생동감 있어 볼 만하다.
명윤明允은 성은 소씨蘇氏이고 이름은 순洵이니 미주眉州 미산眉山 사람이다.
처음에 진사과進士科에 응시하고 또다시 무재이등과茂才異等科에 응시하였으나 모두 합격하지 못하였다.
고향으로 돌아와 그동안 자신이 지은 글을 태워버린 뒤에 문을 닫고 책을 읽었다.
이렇게 5, 6년을 지내다가 학문이 풍부해진 뒤에 비로소 다시 글을 지었는데, 이 글들은 짧은 것은 혹 백 자가 되고 긴 것은 혹 천 마디나 되었다.
사물의 이치를 분석하거나 어떤 사물을 빌어 드러내고픈 생각을 가탁한 것을 살펴보면, 풍부한 내용을 능히 간결한 문자로 표현하고 심원한 도리를 능히 쉬운 문자로 전달하고, 큰 일을 능히 미세하게 만들고 작은 일을 능히 드러나게 하였으며, 내용이 번잡하더라도 능히 어지럽지 않게 하고 기세가 자유분방하더라도 능히 일정한 범위를 벗어나지 않게 하였다.
그 웅장하고 준수하고 위대한 기운은 마치 제방이 터진 강물이 세차게 흘러내려 가는 것 같고, 그 빛나고 밝은 논리는 마치 별들이 밤하늘에 떠오르는 것 같았다.
그 정황이 대략 이와 같으니, 내가 언급한 이 말을 통해 내가 말하지 않은 것을 미루어 알 수 있을 것이다.
명윤明允은 매양 자신의 궁달과 득실, 근심스럽거나 즐거운 일을 만났을 때 생각이 촉발된 것이 있으면 반드시 문장 속에 드러내었고, 고금의 치란과 흥망, 시비와 가부 등의 사례에 대해 내심 평가를 내리는 일이 있으면 또한 반드시 문장 속에 드러내었으며,
천만 가지로 변하는 세상사에 대응하는 것에 있어서는 그것을 외면으로 표현하는 모양이야 복잡하더라도 속으로 철저히 검토하는 과정을 거쳐 이것을 문장 속에 반영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가우嘉祐 초에 비로소 그의 두 아들 소식蘇軾, 소철蘇轍과 함께 다시 촉蜀을 떠나 도성으로 왔다.
이때 지금의 참지정사參知政事인 구양수歐陽脩가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있었는데 명윤明允의 글을 읽고는 뛰어나다고 여겨 황상皇上에게 올렸다.
얼마 후에 구양공歐陽公이 예부禮部의 고시考試를 주관하면서 또 그의 두 아들의 문장을 읽고 그들을 높은 등수로 발탁하였다.
이에 이들 부자 세 사람의 문장이 세상에 성대하게 전해지니, 그것을 읽은 자들이 모두 경탄하여 어떤 이는 그 미칠 수 없는 경지에 감탄하고 어떤 이는 그를 경모하고 본받아서, 도성에서부터 해변과 변방에 이르기까지 학사대부學士大夫가 모두 이들의 이름을 알았고 집집마다 이들의 글을 소장하였다.
얼마 후에 명윤明允이 부름을 받아 사인원舍人院 고시考試에 응시할 기회가 있었지만 응하지 않자, 그를 특별히 비서성교서랑秘書省校書郞으로 등용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패주霸州 문안현文安縣의 주부主簿가 되어 태상시太常寺 예서禮書를 편찬하였고, 소식蘇軾과 소철蘇轍이 또 현량방정과賢良方正科의 책문策問에 응시하여 합격 등수에 들었다.
그리하여 이들 세 사람이 당시에 더욱 알려져 그 명성이 더욱 드러났다.
치평治平 3년(1066) 봄에 명윤明允이 그가 편찬한 예서禮書를 황상皇上께 올렸으나 답을 얻지 못하였고, 4월 무신일戊申日에 병으로 죽으니 향년 58세였다.
천자 측근의 대신들로부터 시골의 선비들에 이르기까지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가 슬퍼하였다.
명윤明允이 저술한 문집이 20권 있는데 세상에 유포되었다.
그리고 그가 편집한 《태상인혁례太常因革禮》라는 책은 1백 권이며, 개정한 《시법諡法》은 관부官府에 보관하고 있으며, 또 《역전易傳》을 편찬하였으나 완성되지 못했다.
그의 글을 읽은 사람은 곧 그의 학문수준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명윤明允은 사람됨이 총명하고 지혜로웠으며 남을 대할 때 기운이 온화하고 낯빛이 따뜻하였다.
그리고 계책을 강구하기를 좋아하여 오로지 자기만의 독창적인 견해를 애써 내놓고 옛사람의 낡은 자취를 따르려 하지 않았다.
군사軍事에 대해 논변하기를 몹시 좋아하였으니 그는 심지가 강개 격앙하고 공명功名에 뜻을 둔 사람이었다.
두 아들 중에 식軾은 전중승殿中丞과 직사관直史館이 되고, 철轍은 대명부大名府의 추관推官이 되었다.
그해에 명윤明允의 죽음으로 인해 촉蜀으로 돌아가 장사를 지낸 뒤에 구양공歐陽公에게 명銘을 써줄 것을 부탁하고 또 나에게 사辭를 지어 애도해줄 것을 부탁하면서, “명銘은 무덤 속에 넣을 것이고 사辭는 돌에 새겨 무덤 위에 세울 예정이다.” 하였다.
나는 사양하였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마침내 그 글을 다음과 같이 짓는다.
아, 명윤明允이여 나라에서 뛰어난 인물로기품은 온화하고 의지는 꿋꿋하였네.
고금의 문헌 섭렵하여 흥망의 원인 가려내고 독보적인 문장으로 한 세상을 놀라게 했네.
여섯 필 용마 몰아 끝없이 치닫고 큰 강물 터져 흘러 부상扶桑까지 밀려가듯 밤하늘 별 되어 찬란한 빛 쏘아대니 폐장 찌른 문장에 뭇사람이 감복하여 도성에서 변방까지 하나같이 칭송했고 게다가 두 아들과 한가로이 소요하며 율려律呂로 선창하고 궁상宮商으로 화답하였네.
두 나래 높이 들고 힘차게 날으려더니 그 누가 알았으랴. 운명이란 무상하여 변수汴水의 북쪽에서 갑자기 떠날 줄을.
하지만 스스로 찬란한 빛 드러내어 후인에게 남겨서 그 복이 무한하니, 아, 명윤明允이여 슬퍼할 게 뭐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