分寧人勤生而嗇施하고 薄義而喜爭하니 其土俗然也라
其人修農桑之務하여 率數口之家에 留一人守舍行饁하고 其外盡在田이라
田高下磽腴에 隨所宜雜植五穀하여 無廢壤하고 女婦蠶杼하여 無懈人이라
茶鹽蜜紙竹箭材葦之貨를 無有纖鉅히 治咸盡其身力하니 其勤如此라
然視捐一錢을 可以易死하여 寧死無所捐하니 其於施何如也오
其間利害不能以稊米하여 父子兄弟夫婦 相去若奕碁然이라
意嚮小戾
면 則相告訐
하고 結黨詐張
하며 事
以動視聽
이라
甚者畫刻金木爲章印하여 摹文書以紿吏라가 立縣庭下로대 變僞一日千出하고
景德三年에 邑僧道常이 治其院而侈之하니 門闥靚深하고 殿寢言言하며
棲客之廬와 齋庖庫庾 序列兩旁하고 浮圖所用鐃鼓魚螺鐘磬之編과 百器備完이라
吾聞道常氣質偉然하여 雖索其學하여 其歸未能當於義나 然治生事不廢하여 其勤亦稱其土俗하며
至有餘하여는 輒斥散之하여 不爲黍累計惜하고 樂淡泊無累하니 則又若能勝其嗇施喜爭之心하여 可言也라
或曰 使其人不汩溺其所學하여 其歸一當於義면 則傑然眎邑人者는 必道常乎인저하니 此予未敢必也라
慶曆三年九月에 與其徒謀曰 吾排蓬藋治是院할새 不自意成就如此라
今老矣에 恐泯泯無聲畀來人하니 相與圖文字하고 買石刻之하여 使永永與是院俱傳이 可不可也오하니 咸曰 然하다하고
予不讓하여 爲申其可言者寵嘉之하여 使刻示邑人하니 其有激也리라
注
내용은 운봉원雲峰院과 관계가 없지만 뜻이 매우 기발하다.
분녕현分寧縣 사람들은 생업에 부지런하고 남에게 베푸는 데 인색하며, 인정과 의리를 경시하고 다투기를 좋아하니 그곳의 습속이 본디 그렇다.
홍주洪州 치소治所에서 현縣까지의 거리는 5백 리로 산골짜기 궁벽한 곳에 있다.
그 사람들은 농사일과 잠업蠶業에 종사하는데 일반적으로 식구가 5, 6명 정도 되는 가정에서 한 사람은 남아 집을 지키면서 밭에서 작업하는 사람에게 점심을 나르고 나머지 사람은 모두 밭에 나가 있다.
농지 형세의 고하高下와 토질이 척박하고 기름진 정도에 따라 거기에 적합한 오곡을 섞어 심어 버려진 땅이 없고 부녀자는 누에 치고 베를 짜 게으른 사람이 없다.
녹차‧소금‧꿀‧종이‧화살‧갈대 등의 재물을 많고 적은 것을 가리지 않고 모두 자기의 역량을 다해 생산하니, 그들은 이처럼 부지런하다.
부유한 자는 농지를 천 묘畝까지 소유하고 창고 속에 돈을 가득 저장해두고 심지어 여러 해가 지나도 창고를 열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돈 한 푼 쓰는 것을 죽음과 맞바꿀 정도로 아까워하여 차라리 죽을지언정 베푸는 일이 없으니, 남에 대한 그들의 마음상태가 과연 어떠한가.
그들 상호간의 이해관계는 좁쌀 하나까지 따질 정도여서 아비와 자식, 형과 아우, 남편과 아내가 상호간에 매정하기가 마치 장기나 바둑을 둘 때와 같다.
그들의 친족에 대해서도 이러하니 정분과 의리의 후박厚薄에 대해 미루어 알 만하다.
나이가 많고 적은 한 가족이 마을에 모여 앉아 서로 주고받는 대화도 법률에 관한 것들이다.
자기의 의견과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서로 남의 숨은 비위사실을 고발하고 작당하여 속이며, 남몰래 뇌물을 뿌려 주위 사람들의 이목을 현혹시킨다.
심한 경우는 금속이나 나무에 새겨 가짜 도장을 만들어 공문서를 위조해 관리를 속이다가 관아에 섰는데도 하루에도 거짓말을 수없이 반복한다.
비록 곤장을 치고 귀양을 보내고 사형에 처하는 형벌이 가해지더라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들이 소송을 좋아하는 정도가 어찌 다른 고을과 비교될 수 있겠는가.
백성은 근면하지만 습속이 이러하여 점차 그들의 골수에까지 깊이 스며들었다.
그러므로 유능한 수령과 그를 보좌하는 관리들이 즐비하더라도 이 지방의 백성을 다스리고 교화시켜 그 습속을 바꾸는 일이 쉽지 않음을 항상 고심하였다.
운봉원雲峰院은 분녕현分寧縣의 가장 서쪽 경계에 있는데, 그에 관련된 문헌이 없어서 어느 때 세워졌는지 모른다.
경덕景德(송 진종宋 眞宗의 연호) 3년(1006)에 이 고을 승려 도상道常이 운봉원雲峰院을 수리하고 확장했는데, 크고 작은 문들은 정숙하고 건물들은 높고 크다.
빈객을 접대하는 집과 재실‧주방‧창고가 양쪽에 줄지어 있고, 승려들이 사용하는 징‧북‧목탁‧법라‧편종‧편경 등의 악기와 온갖 기물이 모두 완비되어 있다.
내 듣건대, 도상道常은 기질이 비범하여 비록 불학佛學을 탐구하여 그의 기본 사고가 예의禮義와 부합되지는 못하지만, 생계를 꾸려가는 일을 폐하지 않아 그 근면함이 또한 그 지방의 습속과 걸맞았다.
재물이 여유가 있으면 곧 주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자질구레하게 따지거나 아까워하지 않았으며 담박한 것을 좋아하여 세속의 일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하니, 그렇다면 또 남을 위해 베푸는 데에 인색하고 다투기를 좋아하는 그 지방의 습성을 벗어난 것 같아 언급할 만하였다.
어떤 사람은 “만약 그 사람이 불학佛學에 빠지지 않아 그 기본 사고가 오로지 예의禮義와 부합된다면, 걸출한 자질로 그 고을 사람들을 인도할 자는 반드시 도상道常일 것이다.”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내가 감히 단정할 수가 없다.
경력慶曆 3년 9월에, 도상道常이 그의 제자들과 상의하기를 “내가 잡초를 제거하고 이 절을 만들 적에 이렇게까지 성취되리라고 생각지 못했다.
지금 나는 늙었다. 앞으로 모든 것이 다 사라진 이후 후세 사람들에게 들려줄 말이 없어질까 염려되니, 너희들과 함께 이에 관한 문자를 받아올 것을 도모하여 그것을 비석을 사 새겨서 영구히 이 사원과 함께 전해가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자, 모두 좋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제자 자사子思를 보내 기문記文을 청하기로 하여 마침내 그가 찾아왔다.
나는 사양하지 못하여 도상道常에 대해 칭찬할 만한 점을 서술하고 그것을 찬양하여 비석에 새겨 이 고을 사람들에게 보이게 하였으니, 그들이 격려되어 분발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