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元興以後로 政出宦者하니 小人挾其威福하여 相煽爲惡하고
相與發憤同心하여 直道正言하고 分別是非白黑하여 不少屈其意하니
當是之時하여 天下聞其風慕其義者 人人感慨奮激하여 至於解印綬하고 棄家族하며 骨肉相勉하여 赴死而不避하니
百餘年間에 擅彊大覬非望者相屬이로되 皆逡巡而不敢發하니
孺子於時에 豫章太守陳蕃과 太尉黃瓊이 辟皆不就하고
擧有道하여 拜太原太守하고 安車備禮하여 召皆不至하니
蓋忘己以爲人과 與獨善於隱約은 其操雖殊나 其志於仁一也라
在位士大夫 抗其節於亂世하여 不以死生動其心은 異於懷祿之臣遠矣나
孺子 嘗謂郭林宗曰 大木將顚에 非一繩所維니 何爲棲棲不皇寧處오하니
孔子稱顔回하사대 用之則行하고 捨之則藏을 惟我與爾有是夫인저하시고
孟子亦稱孔子하사대 可以進則進하며 可以止則止하시니 乃所願則學孔子로라하시고
而易於君子小人消長進退에 擇所宜處하여 未嘗不惟其時則見하며 其不可而止하니
其東爲東湖요 湖南小洲上에 有孺子宅하니 號孺子臺라
吳嘉禾中
에 太守徐熙於孺子墓隧種松
하고 太守
於墓側立碑
라
今亭尙存하나 而湖南小洲는 世不知其嘗爲孺子宅이며 又嘗爲臺也라
予爲太守之明年
에 始卽其處
하여 結茅爲堂
하고 圖孺子像
하여 祠以
하고 率州之賓屬拜焉
이라
注
第一段은 敍黨錮諸賢及孺子事하고 第二段은 比論二事하고 第三段은 敍作亭이라하니라
注
한漢나라가 망해가던 국세國勢를 보존하게 된 원인을 추론推論하면서 그 공을 유자孺子의 무리에게 돌렸다.
한漢나라 원흥元興 연간(105) 이후로 조정의 정책과 법령이 환관의 손에서 나왔는데, 소인배가 그 권세를 이용하여 함부로 상벌을 행하고 서로 선동하여 악행을 자행하였다.
이때 중등의 재능을 지닌 자들은 관망만 할 뿐 어찌할 줄 몰랐다.
한漢나라는 통치능력을 상실하고 나서 기강이 크게 무너졌다.
그러나 관직에 있던 공경대부公卿大夫 가운데 호걸스럽고 특출한 수많은 지사志士들이 많았다.
이들이 함께 떨쳐 일어나 한마음이 되어 올바른 도리를 견지하고 바른말을 하며 시비와 흑백을 분별하여, 조금도 자신들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 결과 소인배의 비위를 거스르는 지경에 이르자, 그들이 죄명을 날조하여 수백 명이 처형되거나 유배되거나 구금을 당한 당고黨錮의 화禍가 발생했다.
그러나 지사志士들의 집념은 더욱 굳건했으며 그 행동은 더욱 고무되었다.
그들의 포부는 비록 실현되지 못했지만, 그들의 충정忠情은 차고 넘쳤다.
때문에 그 지사志士들이 다 죽고 나서야 한漢나라도 이를 계기로 멸망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에 천하에서 지사志士들의 기풍氣風을 듣고 그들의 절의를 사모한 자들은 누구나 감개하고 격분한 나머지, 심지어는 관직을 내놓고 가족도 돌보지 않은 채 골육간에 서로 분발하여 뻔히 죽음을 당할 일을 하면서도 피하지 않았다.
백여 년 동안 강대한 권력을 멋대로 휘두르면서 분수를 벗어난 목적을 달성하려고 기도한 자들이 잇달아 나타났지만, 모두 머뭇거리면서 결행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한漢나라가 위태로운 가운데 계속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히 그들의 역량 때문이었다.
유자孺子는 이 당시에 예장태수豫章太守 진번陳蕃과 태위太尉 황경黃瓊이 그에게 벼슬을 주겠다고 초빙하였으나 모두 사양하고 응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를 도를 지닌 선비라는 명목으로 조정에 천거하여 그가 집에 머물러 있는 상황에서 태원태수太原太守에 제수하고 안거安車와 후한 예물을 갖추어 초빙하였으나 그는 모두 거절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자신의 존재를 잊고 남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과 유자孺子처럼 은거하여 곤궁한 처지에서 자신의 순결을 지키고 혼탁한 세속과 합류하지 않는 사람은, 그 처세하는 태도는 비록 다르지만 뜻을 세워 인仁의 도리를 실천하는 목표는 동일하다.
관직에 있는 사대부士大夫가 난세亂世에 자신의 고상한 절조를 견지하여 생사로 인해 그들의 신념을 바꾸지 않는 것은, 오로지 공명과 이록利祿을 탐하는 관료와는 크게 다르다.
세상이 어지러운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벼슬을 버리고 떠나기를 원하지 않는 까닭은 세상과 백성을 구제하는 것을 자기의 책임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유자孺子가 일찍이 곽림종郭林宗에게 “큰 나무가 쓰러지려 할 때에는 밧줄 하나로 버텨낼 수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분주하게 지내면서 단 며칠이라도 편한 날을 보내지 못합니까?” 하였다.
이로 볼 때 유자孺子는 또한 산림에 은거하는 것에 만족하고 인간세상을 초탈하여 돌아보지 않는 사람은 아니었다.
공자孔子께서 안회顔回를 칭찬하기를 “나를 임용해주면 나가서 벼슬하고 나를 써주지 않으면 물러나 은거하는 것은 오직 나와 너만이 이렇게 할 수 있다.” 하였고,
맹자孟子께서도 공자孔子를 칭송하기를 “벼슬할 만한 상황이면 벼슬하시고 물러나 은거할 만한 상황이면 물러나 은거하셨다. 내가 원하는 것은 공자孔子를 배우는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역경易經》에서 군자君子의 도와 소인小人의 도가 소멸되고 신장하는 것에 따라 나아가고 물러나는 문제에 관해 말한 것은 사람들에게 시기와 상황을 고려하여 적절하게 대처하도록 한 것으로써, 시기와 상황이 양호하면 세상에 나가고 시기와 상황이 좋지 않으면 물러나 피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은 적이 없다.
이것이 곧 유자孺子가 당고제현黨錮諸賢이 취한 원칙으로 자기의 처세태도를 바꾸지 못한 이유이다.
유자孺子의 성姓은 서씨徐氏이고 이름은 치穉이며 유자孺子는 그의 자字인데, 예장豫章 남창南昌 사람이다.
《도기圖記》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장수章水는 북쪽으로 남창성南昌城 서쪽을 경유하고 백사白社를 지나간다.
그 동쪽은 동호東湖인데, 동호東湖 남쪽 작은 모래섬 위에 유자孺子가 살던 집이 있어 유자대孺子臺라고 부른다.
오吳나라 가화嘉禾 연간(232~238)에 태수太守 서희徐熙가 유자孺子의 묘역에 소나무를 심고, 태수太守 사경謝景이 무덤가에 비석을 세웠다.
그리고 진晉나라 영안永安 연간(304)에 태수太守 하후숭夏侯嵩이 비석 옆에 사현정思賢亭을 세웠고 그 이후 대대로 수리해왔다.
탁발씨拓跋氏의 북위北魏 때에는 사현정思賢亭을 빙군정聘君亭이라 했다.”
현재 정자가 아직도 남아 있으나, 동호東湖 남쪽 작은 모래섬의 경우에는 세상 사람들이 그곳이 유자孺子가 살던 집이었다는 것을 모르고 유자대孺子臺였다는 것도 모른다.
내가 태수로 부임한 이듬해에 처음으로 그곳에 가서 띠풀을 엮어 사당을 짓고 유자孺子의 초상을 그리고는 중뢰中牢로 제사를 지내면서 홍주洪州의 빈객들을 거느리고 가서 절을 올렸다.
한漢나라 때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거의 천 년이 된다.
그동안 부귀를 누리고 사라져간 사람들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유자孺子는 자기 마을을 벗어나지 않았는데도 유독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칭송과 사모를 받는다.
그렇다면 세상 사람 중에 지혜와 용력으로 승리를 얻는 사람은 어리석은 자가 아니겠는가.
유자孺子의 묘지는 이미 그 위치를 알 수 없으나, 유자대孺子臺는 다행스럽게도 고찰하여 알 수 있다.
유자孺子의 사당을 세운 것은 이 지역 사람들에게 덕을 숭상하도록 가르치기 위해서이다.
때문에 내가 유자孺子의 출처관出處觀을 같이 채록採錄하여 이 기문記文을 짓는다.
注
당형천唐荊川이 말하였다. “이 작품은 세 단락으로 되어 있다.
첫 번째 단락에서는 당고黨錮의 화를 당했던 여러 현인賢人과 유자孺子에 얽힌 이야기를 서술하고, 두 번째 단락에서는 벼슬하고 은거하는 두 가지 문제를 비교 논의하였으며, 세 번째 단락에서는 정자亭子를 짓게 된 경위를 서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