爲尉之三月에 斥其四垣爲射亭하고 旣成에 敎士於其間而名之曰飮歸之亭이라하니라
其先之以禮樂以辨德
은 記之所謂
是也
요 其貴力而尙技以立武
는 記之所謂
是也
라
古者海內洽和면 則先禮射나 而弓矢以立武도 亦不廢於有司라
及三代衰王政缺하여 禮樂之事相屬而盡壞하고 揖讓之射滋亦熄이라
에 天下嘗集
하고 國家嘗閒暇矣
라 先王之禮
의 其節文皆在
하여 其行之不難
이라
然自秦漢以來千有餘歲
에 衰微絀塞
하여 空見於
之文
하여 而莫有從事者
하니 由世之苟簡者勝也
라
爭奪興而戰禽攻取之黨奮하면 則强弓疾矢巧技之出하여 不得而廢는 其不以勢哉아
其衆雖小
나 然其
之器
를 便習之利
와 與夫行止步趨遲速之節
이 皆宜有法
하니 則其所敎亦非獨射也
라
其幸而在乎無事之時엔 則得以自休守境而塡衛百姓하고
其不幸殺越剽攻하여 駭驚閭巷하여 而竝逐於大山長谷之間이면
則將犯晨夜에 蒙霧露하여 陷阨馳危하여 不避矢石之患과 湯火之難하리니 出入千里하여 而與之有事면 則士其可以不素敎哉아
汪君又謂古者師還에 必飮하고 至於廟하여 以紀軍實하니 今廟廢不設이라도 亦欲士勝而歸則飮之於此하여
或謂汪君儒生이요 尉는 文吏이니 以禮義禁盜면 宜可止어늘 顧乃習鬪而喜勝이 其是歟아하니
夫治固不可以不兼文武나 而施澤於堂廡之上하여 服冕搢笏하여 使士民化하고 奸宄息者는 固亦在彼而不在此也라
然而天下之事能大者는 固可以兼小하니 未有小不治而能大也라
故汪君之汲汲於斯로대 不忽乎任小하니 而非所謂有志者耶아
注
혼후하고 씩씩한 가운데 아울러 법도가 있는 것을 엿볼 수 있다.
현위縣尉로 부임한 3개월에 사방의 담을 없애고 활터에 정자를 지었는데, 완성된 후에 그곳에서 선비들에게 활쏘기를 가르치고 이름을 음귀정飮歸亭이라 지었다.
임천臨川에 있는 나에게 서한을 보내 기문을 부탁했는데 여러 번 거절했는데도 부탁이 계속되었다.
왕군汪君이 공연히 나에게 간절히 바란 것일 뿐이다.
예악이 제정되기 이전에 활쏘기로 덕을 변별한 것은 《예기禮記》의 이른바, 빈사賓射, 연사燕射, 향사鄕射, 대사大射의 ‘사례射禮’가 이것이요, 힘을 중시하고 기술을 숭상해 무예를 성취하는 것은 《예기禮記》의 이른바, 계절마다 군사들에게 가죽을 뚫어 힘을 겨루는 활쏘기를 가르친다는 것이 이것이다.
옛날에 천하가 평화로우면 예사禮射를 우선시하되 활쏘기를 통해 무예 성취를 담당하는 유사有司도 없애지 않았다.
삼대三代가 쇠하고 왕도정치가 사라짐에 이르러 예악禮樂이 서로 연이어 모두 무너졌고 사례射禮 또한 차츰 소멸되었다.
후세에 이르러 천하가 태평하고 국가가 안정되었는데 선왕先王이 행했던 예禮가 그 절차와 의식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시행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그러나 진秦‧한漢 이래로 천여 년 동안 활쏘기 행사를 전혀 하지 않아 육예六藝의 문헌에만 나와 있을 뿐 실제로 행하는 자는 없었으니, 이는 세상에 예禮를 소홀히 하는 자들이 우세하였기 때문이다.
쟁탈전이 일어나 적을 사로잡고 남의 땅을 빼앗는 무리가 판을 치면 강한 활과 빠른 화살, 숙련된 기술이 출현하여 활을 쏘는 일이 폐지되지 않았으니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이 아니었겠는가.
지금 현위縣尉가 활쏘기를 가르치는 것은 예악禮樂을 익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기술과 힘을 배양하기 위해서이다.
거기에 참여하는 무리는 비록 적으나 군중에서 사용하는 깃발, 쇠방울, 북 및 다섯 가지 무기의 기능을 익히기가 용이하고, 행군의 속도를 적절히 조절하는 등의 일이 모두 적절하여 규범이 있으니, 그 가르침은 또 다만 활을 쏘는 기술만이 아니다.
다행히 전쟁 등 특별한 일이 없는 때는 휴식을 취하면서 경내를 지켜 백성을 보호하고,
불행히 살인과 침범, 위협과 공격이 있어 민간 마을을 놀라게 하면서 떼를 지어 큰 산과 긴 골짜기 등지에 출몰하게 되면,
이른 새벽이건 깊은 밤이건 안개‧이슬을 무릅쓰고 힘겹고 위험한 상황에서 화살과 투석의 역경과 끓는 물과 불길의 어려움을 피하지 않을 것이니, 천 리를 드나들며 적들과 함께 교전하려면 군사들을 평소에 가르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금 정자를 지은 것은 군사를 가르치기 위해서이니,
왕군汪君의 의도는 또 ‘옛날에 군대가 개선하면 반드시 주연을 베풀고 종묘에 이르러 잔여 무기와 전리품을 점검했는데, 지금 종묘에서 행하는 그와 같은 의식이 폐해져 시행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군사가 이겨 돌아오면 여기에서 술을 마시게 해야겠다.’고 하여
마침내 음귀飮歸로 그 정자를 명명했으니 왕군汪君의 뜻과 현판 이름이 부합된다고 할 만하다.
혹자는 말하기를 “왕군汪君은 유생이고 위尉는 문관이니 예의로 도적을 금지하면 당연히 사라질 터인데 도리어 싸우는 기술을 익혀 이기기를 좋아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라 하였다.
대체로 백성을 다스리는 것은 본디 문무를 겸비하지 않을 수 없으나, 묘당廟堂 위에서 어려운 백성들에게 은택을 베풀어 관복 차림에 홀을 띠에 꽂고서 사민士民을 교화시키고 악한 무리들이 사라지게 하는 것은 진실로 또한 문치文治에 있지 무치武治에 있지 않다.
그러나 천하의 일에 대해 큰 것을 잘하는 자는 진실로 작은 것도 잘할 수 있으니, 작은 일을 다스리지 못하면서 큰 일을 다스릴 수 있는 자는 없다.
그러므로 왕군汪君은 문치文治에 급급해하면서도 작은 임무를 소홀히 하지 않았으니 이른바 뜻이 있는 자가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