注
此記與醒心亭記는 所謂說理之文이니 子固於諸家尤擅所長이라
嘉祐六年
에 尙書虞部員外郞梅君
이 하여 改作其治所之東亭
하여 以爲燕息之所
하고 而名之曰淸心之亭
이라하니라
是歲秋冬
에 來請記於京師
하니 屬余有亡
殤
之悲
하여 不果爲
하고 明年春
에 又來請
하니 屬予有
之悲
하여 又不果爲
러니
夫人之所以神明其德하여 與天地同其變化者는 夫豈遠哉아
若夫極天下之知하고 以窮天下之理하여 於夫性之在我者를 能盡之하고 命之在彼者를 安之면 則萬物自外至者 安能累我哉리오
萬物不能累我矣로대 而應乎萬物하여 與民同其吉凶者도 亦未嘗廢也니
於是有法誡之設과 邪僻之防하니 此君子之所以齊其心也라
虛其心者는 極乎精微하여 所以入神也요 齊其心者는 由乎中庸하여 所以致用也니
今梅君之爲是亭에 曰 不敢以爲遊觀之美요 蓋所以推本爲治之意하고 而且將淸心於此라하니 其所存者 亦可謂能知其要矣라
注
이 기문과 〈성심정기醒心亭記〉는 이른바 도리를 설명하는 글이니 자고子固가 다른 문장가와 견주어볼 때 독보적이라 할 수 있다.
가우嘉祐 6년에 상서우부원외랑尙書虞部員外郞 매군梅君이 서주徐州 소현蕭縣의 수령이 되어서 관아 동쪽의 정자를 개수하여 편안히 휴식하는 장소로 만들고 이름을 청심정淸心亭이라 하였다.
그해의 가을과 겨울에 도성에 있는 나에게 기문을 부탁해왔는데 그때 마침 내게 누이와 딸을 잃은 슬픔이 있어 결국 짓지 못했고, 다음 해 봄에 다시 청해왔는데 그때도 마침 나에게 아내를 잃은 슬픔이 있어 또 끝내 짓지 못하였다.
그런데도 그 부탁이 계속되어 겨울에 이르러 마침내 기문을 지었다.
대체로 사람이 그 덕을 신묘하고 밝게 수양하여 천지와 그 변화를 함께하는 것이 어찌 멀리 있겠는가.
천하의 지식을 극대화하고 천하의 이치를 모두 궁구하여, 나에게 있는 천성을 잘 간직하고,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을 편안히 여긴다면, 밖으로부터 이르는 만물이 어찌 나에게 부담을 줄 수 있겠는가.
만물이 이미 나에게 부담을 줄 수 없는 경지가 되었다 하더라도 만물에 호응하여 백성과 길흉을 함께하는 것 또한 그만둘 수 없다.
그러므로 법과 경계를 제정하고 간사함과 편벽됨을 막는 일이 있게 되니 이것이 군자가 그 마음을 다스리는 까닭이다.
그 마음을 비우는 것은 정밀한 이치를 깊이 궁구하여 신묘한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요, 그 마음을 다스리는 것은 중용의 도를 따라 실용을 다하는 것이다.
이것으로 본다면 군자가 자기 자신을 수양하고 그 국가와 천하를 다스리고자 할 때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 것이다.
지금 매군梅君이 이 정자를 지을 적의 의도는 놀고 구경할 만한 좋은 경관을 위해서가 아니고, 백성을 다스리는 근본적인 의미를 추구하고 아울러 이곳에서 마음을 깨끗하게 하자는 것이었으니, 그 소견이 또한 요점을 잘 알았다고 이를 만하다.
11월 5일에 남풍南豐 증공曾鞏은 기문을 짓노라.
注
당형천唐荊川이 말하였다. “정자程子와 주자朱子 이전에는 이 같은 의논이 또한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