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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曾鞏(1)

당송팔대가문초 증공(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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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증공(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千年鄢水 本末如掌이요
而通篇措注 一一有法이라
荊及康狼 楚之西山也 水出二山之間하여 東南而流
春秋之世曰鄢水 左丘明傳魯桓公十有三年 楚屈瑕伐羅하고 及鄢하여 亂次以濟是也
其後曰夷水 水經所謂是也
又其後曰蠻水 酈道元所謂夷水避桓溫父名하여 改曰蠻水是也
秦昭王三十八年 使白起將하여 攻楚한대
去鄢百里 立堨하고 壅是水爲渠하여 以灌鄢이어늘
楚都也로되 遂拔之하니
秦旣得鄢 以爲縣하니라 漢惠帝三年 改曰宜城이라
宋孝武帝永初元年 築宜城之大隄爲城하니 今縣治 是也
而更謂鄢曰故城이라
鄢入秦하고 而白起所爲渠因不廢하여 引鄢水以灌田한대
田皆爲沃壤하니 今長渠是也
長渠至宋至和二年하여는 久隳不治하여 而田數苦旱하고 川飮者無所取
率民田渠下者하여 理渠之壞塞하고 而去其淺隘하여 遂完故堨하여 使水還渠中이라
自二月丙午始作하여 至三月癸未而畢하니 田之受渠水者 皆復其舊
曼叔又與民爲約束하되 時其蓄泄하고 而止其侵爭하니 民皆以爲宜也러라
蓋鄢水之出西山하여 初棄於無用이라가
及白起資以禍楚하여 而後世顧賴其利하니
至今千有餘年 而曼叔又擧衆力而復之하여
使幷渠之民으로 足食而甘飮하고 其餘粟散於四方이라
蓋水出於西山諸谷者其源廣하고 而流於東南者其勢下하여
至今千有餘年 而山川高下之形勢無改하니
故曼叔得因其故迹하여 興於旣廢
使水之源流 與地之高下 一有易於古런들 則曼叔雖力이나 亦莫能復也리라
夫水莫大於이로되 而河蓋數徙하여 失禹之故道하고
至於濟水하여는 又王莽時而絶하니 況於衆流之細 其通塞 豈得如常이리오
而後世欲行水漑田者 往往務躡古人之遺迹하고 不考夫山川形勢古今之同異
故用力多而收功少하나니 是亦其不思也歟인저
曼叔之復此渠 白其事於知襄州事한대
公聽之不疑하고 沮止者不用이라 故曼叔能以有成하니
則渠之復 自夫二人者也
方二人者之有爲 蓋將任其職이요 非有求於世也
及其後言渠堨者蜂出이나 然其心 蓋或有求
故多詭而少實하고 獨長渠之利較然하니 而二人者之志 愈明也
熙寧六年 余爲襄州하여 過京師할새
曼叔時爲開封이어늘 訪余於東門하여 爲余道長渠之事하고
而諉余以考其約束之廢擧
予至而問焉한대 皆以謂賢君之約束이라하고 相與守之하여 傳數十年 如其初也러니
予爲之定著令하여 上司農하니라
八年 曼叔去開封하여 爲汝陰할새 始以書告之하니
而是秋大旱이로되 獨長渠之田無害也러라
夫宜知其山川與民之利害者 皆爲州者之任이니
故予不得不書以告後之人하고 而又使之知夫作之所以始也하노라
曼叔 今爲尙書兵部郞中龍圖閣直學士하니라
八月丁丑曾鞏記하노라
王遵巖曰 二堂及此記 皆絶佳하니라


08. 양주襄州 의성현宜城縣장거長渠에 관한 기문
천 년에 걸친 언수鄢水의 역사가 손바닥 안처럼 환히 보인다.
그리고 전편全篇에 걸쳐 배치 하나하나에 이 있다.
형산荊山강랑산康狼山 지역 서쪽에 있는 산인데, 두 산 사이에서 한 물줄기가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흘러간다.
춘추시대春秋時代에는 언수鄢水라 하였는데,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노 환공魯 桓公 13년(B.C. 699) 기사의 “초국楚國굴하屈瑕나국羅國을 공격하였다. 언수鄢水에 이르러 군대의 대오를 흐트러뜨린 채 물을 건넜다.”는 부분에 등장하는 언수鄢水가 여기이다.
그 후에는 이수夷水로 불렀는데, 《수경주水經注》에서 이른바 “한수漢水가 또 남쪽으로 흘러 의성현宜城縣 동쪽을 지나며, 이수夷水한수漢水로 흘러든다.”는 부분의 이수夷水가 여기이다.
또 그 뒤에는 만수蠻水로 불렀는데, 역도원酈道元이 이른바 “환온桓溫의 아버지 이름을 피휘避諱하여 이수夷水만수蠻水로 개칭했다.”는 부분에 등장하는 만수蠻水가 여기이다.
진 소왕秦 昭王 38년(B.C. 269)에 백기白起를 시켜 군대를 이끌고 나라를 공격하도록 했다.
백기는 에서 100 되는 지점에 보를 세워 이 물줄기를 막고 도랑을 만들어 땅에 수몰작전水沒作戰을 개시했다.
나라의 수도인데도 마침내 함락시켰다.
나라가 을 손에 넣고 나서는 으로 삼았고, 한 혜제漢 惠帝 3년(B.C. 192)에는 의성宜城으로 개칭했다.
남조南朝 송 무제宋 武帝 영초永初 원년(420)에 의성宜城에 있던 큰 제방을 성곽으로 수축하였으니, 현재 현치縣治가 이곳이다.
그리고 다시 고성故城이라 불렀다.
땅이 나라에 편입되고 나서 백기白起가 만들었던 도랑은 여전히 철거되지 않아, 언수鄢水의 물을 끌어 농지로 물을 대어왔다.
그래서 농지들이 모두 비옥해졌으니, 현재의 장거長渠가 이곳이다.
장거長渠나라 지화至和 2(1055)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허물어진 채 관리되지 않아 농지들이 자주 가뭄에 시달렸으며, 도랑에서 식수食水를 얻으려는 사람도 얻을 물이 없었다.
현령縣令 손영孫永 만숙曼叔이 도랑 아래에서 농지를 일구는 백성들을 이끌고 무너지고 막혀 있던 도랑을 수리하여 수심이 얕고 좁은 곳을 제거함으로써 마침내 옛 보를 온전히 복원하여 물이 도랑 안으로 다시 유입하도록 했다.
2월 병오일부터 시작하여 3월 계미일에 끝마쳤는데, 도랑의 물을 받게 된 농지들이 모두 원래의 모습을 회복했다.
만숙曼叔이 또 백성들과 함께 규칙을 만들어 제때에 물을 저장하고 방류함으로써 관개灌漑에 따른 침탈과 분쟁을 금지하자, 백성들이 모두 합당하게 여겼다.
언수鄢水가 서쪽 산에서 흘러나와 처음에는 사람들이 사용하지 않아 방치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백기白起가 이 물줄기를 이용하여 나라에 타격을 가했으나 후세에는 이로 인해 도리어 언수鄢水의 혜택을 입게 되었다.
이를 두고 역도원酈道元은 “3,000여 에 달하는 농지에 물을 댄다.” 하였다.
그 이후 천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 이르러 만숙曼叔이 또 여러 사람들의 노동력을 동원하여 장거長渠를 복원시켰다.
그래서 도랑 주변에 사는 백성들은 양식을 풍족하게 먹고 식수食水를 확보하며 잉여 곡물을 사방 지역에 나눠주게 되었다.
서쪽 산 여러 계곡에서 흘러나온 물줄기는 그 수원水源이 넓고, 동남쪽으로 물이 흘러가는 곳은 그 지세가 낮다.
천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산천山川의 높고 낮은 형세形勢에는 변화가 없었다.
때문에 만숙曼叔이 그 옛 자취를 따라 이미 폐기된 장거長渠를 복구할 수 있었다.
만약 물줄기의 원류와 지대의 높낮이에 조금이라도 옛날의 모습에서 바뀐 데가 있었다면, 만숙曼叔이 아무리 공력을 들인다 하더라도 복원하지 못했을 것이다.
물줄기는 사독四瀆보다 큰 것이 없으나, 황하黃河는 여러 차례 위치가 바뀌어 임금이 치수治水했던 옛 물길은 찾아볼 수 없다.
제수濟水의 경우, 또 왕망王莽 때에 물줄기가 끊어졌으니, 하물며 자잘한 여러 물줄기들이 흘렀다가 끊긴 상태가 어찌 일정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후세에 치수治水사업을 통해 농지에 관개灌漑를 하려는 사람들은 간혹 옛사람들이 남긴 흔적을 쫓아가기에만 바빠, 산천山川형세形勢고금古今에 걸쳐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살피지 않았다.
그 때문에 들인 공력은 많지만 거둔 효과는 적으니, 이 또한 깊이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에 만숙曼叔장거長渠를 복원할 적에 그 일을 지양주사知襄州事장괴張瓌 당공唐公에게 보고했다.
장공張公은 그 보고를 듣고서 의심하지 않고 복원공사를 저지하는 자들의 의견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만숙曼叔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그러한즉 장거長渠가 복원된 것은 저 두 사람 덕분이다.
두 사람이 이 큰 사업을 할 때에는 자신의 직분을 다하려 했을 뿐, 세상에 따로 명예를 바라는 게 있지 않았다.
그 이후에 도랑과 보를 만들자고 말하는 사람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간혹 따로 바라는 게 있었기 때문에 허위가 많아 내실이 적었고 오로지 장거長渠로 인한 이익이 크게 드러났으니, 두 사람의 본의本意가 더욱 명확해졌다.
희령熙寧 6년(1073)에 나는 지양주知襄州가 되어 경사京師에 들렀다.
그때 만숙曼叔은 당시 지개봉知開封으로 있었는데, 개봉성開封城 동문東門에서 나를 방문하여 나에게 장거長渠에 관한 일을 말해주었다.
그러면서 나에게 자신이 만들었던 규칙이 그대로 잘 실현되고 있는지 살펴보아 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양주襄州로 부임해서 장거長渠의 운영현황을 탐문한 결과, 백성들은 모두 어진 수령의 규칙으로 여겨 서로가 그 규칙을 준수하여 수십 년에 걸쳐 처음과 같이 그대로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내가 그 규칙을 명백한 법령으로 규정하여 사농시司農寺에 보고했다.
희령熙寧 8년(1075)에 만숙曼叔개봉開封을 떠나 여음汝陰을 다스리게 되자, 나는 비로소 이 사실을 편지로 써서 그에게 알려주었다.
그리고 이해 가을에 큰 가뭄이 들었으나, 유독 장거長渠에서 물을 대는 농지들은 피해가 없었다.
자기가 다스리는 고을의 지리적 특성과 이에 따른 백성들의 이해관계를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은 모두 를 다스리는 자의 책임이다.
그러므로 내가 부득불 이 글을 써서 후세 사람들에게 저간의 경위를 일러주고, 또 장거長渠개축改築한 공역을 시작하게 된 이유를 알린다.
만숙曼叔은 지금 상서병부랑중尙書兵部郞中 용도각직학사龍圖閣直學士가 되었다.
8월 정축일에 증공曾鞏기문記文을 쓴다.
왕준암王遵巖이 말하였다. “〈제주이당기齊州二堂記〉와 이 〈양주의성현장거기襄州宜城縣長渠記〉가 모두 매우 훌륭하다.”


역주
역주1 襄州宜城縣長渠記 : 작자 57세 때인 熙寧 8년(1075) 8월에 쓴 記文이다. 長渠는 긴 도랑을 말한다. 작자는 2년 전 知襄州가 되었는데, 이 작품을 쓴 해까지 襄州에 잇달아 가뭄이 들었다. 그때 長渠를 끼고 있던 농지만 피해가 없던 것을 목도하고는, 작자는 長渠의 중요성을 주목하게 된다. 그리고 襄州로 부임했을 당시 長渠의 복구를 담당했던 전임 宜城縣令 孫永으로부터 長渠를 복구하게 된 내력을 들었던 작자는 부임 후 長渠에 관한 연혁 및 현황 등을 조사하여 이 문장을 썼다. 이 작품에서는 또 水利가 백성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도 밝히고 있다.
역주2 漢水又南過宜城縣東 夷水注之 : 《水經注》 권28의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夷水注之’는 본문에 “夷水가 房陵縣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흘러 들어간다.[夷水出自房陵 東流注之]”라고 된 것을 작자가 임의로 생략한 것이다.
역주3 孫永曼叔 : 曼叔은 孫永(1019~1086)의 자이다. 襄陽尉와 宜城縣令 등을 역임하고 進密直學士, 知開封府를 거쳐 吏部尙書까지 지냈다. 宋 神宗 때 靑苗法, 助役法 등 新法이 백성의 부담을 가중시킨다는 이유로 반대하였고, 哲宗 때는 工部尙書가 되어 保馬法, 保甲法, 免役法을 혁파하고 이전 법을 환원할 것을 요구하기도 하는 등 민생을 살리는 데에 주력하였다.
역주4 酈道元以謂漑田三千餘頃 : 酈道元은 北魏의 인물로, 《水經注》의 작자이다. 그가 鄢水를 설명하는 과정에 “漢南郡太守 王寵이 木里溝를 파 鄢水를 끌어와서 농지 700頃에 물을 대었고, 白起가 판 도랑으로는 3,000여 경에 물을 대었다.”고 하였는데, 이것을 말한다. 《水經注》
역주5 四瀆 : 독립적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 네 줄기의 큰 강으로, 長江, 黃河, 淮水, 濟水를 말한다. 唐代에 이르러 방위에 따라 長江을 南瀆, 黃河를 西瀆, 淮水를 東瀆, 濟水를 北瀆이라 하였다.
역주6 張瓌唐公 : 唐公은 張瓌(1004~1073)의 자이다. 宋 仁宗 天聖 2년(1024)에 進士에 급제하고 兩浙轉運使와 潁州, 揚州 등 지방관을 역임하고 英宗 때 左諫議大夫와 翰林侍學士 등을 지냈는데, 바른말을 거침없이 함으로써 권력자의 비위를 거슬러 여러 차례 좌천되었으나 후회하지 않았다 한다.

당송팔대가문초 증공(1) 책은 2019.03.1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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