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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曾鞏(1)

당송팔대가문초 증공(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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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증공(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趙公之救菑 絲理髮櫛無一遺漏하고 而曾公之記其事 亦絲理髮櫛而無一不入於機杼及其髻總이라
救菑者熟讀此文이면 則於地方之流亡 如掌股間矣리라
熙寧八年夏 大旱이라
九月 資政殿大學士右諫議大夫知越州 前民之未饑 爲書問屬縣하니
菑所被者幾鄕이며 民能自食者有幾 當廩於官者幾人이며 溝防構築可僦民使治之者幾所 庫錢倉粟可發者幾何 富人可募出粟者幾家 僧道士食之羨粟書於籍者其幾具存 使各書以對而謹其備하니라
州縣吏錄民之孤老疾弱하여 不能自食者二萬一千九百餘人以告하다
故事 歲廩窮人當給粟三千石而止로대 斂富人所輸及僧道士食之羨者하여 得粟四萬八千餘石하여 佐其費하고 使自十月朔 人受粟日一升하고 幼小半之하니라
憂其衆相蹂也하여 使受粟者男女異日하여 而人受二日之食하고 憂其且流亡也하여 於城市郊野爲給粟之所凡五十有七하고 使各以便受之하되 而告以去其家者勿給하니라
計官爲不足用也하여 取吏之不在職而寓於境者하여 給其食而任以事
不能自食者 有是具也하니라
能自食者 爲之告富人하여 無得閉糶하고 又爲之出官粟하여 得五萬二千餘石하여 平其價予民이라
爲糶粟之所凡十有八하여 使糴者自便하니 如受粟이라
又僦民完城四千一百丈하니 爲工三萬八千이라
計其傭與錢하고 又與粟再倍之
民取息錢者 告富人縱予之而待熟하여 官爲責其償이라
棄男女者 使人得收養之하니라
明年春 大疫하니 爲病坊하여 處疾病之無歸者하니 募僧二人하여 屬以視醫藥飮食하고 令無失所時
凡死者 使在處隨收瘞之하다
法廩窮人 盡三月當止로대 是歲盡五月而止
事有非便文者 公一以自任하여 不以煩其屬이라
有上請者 或便宜多輒行이라
公於此時 蚤夜憊心力不少懈하여 事鉅細必躬親하며 給病者藥食 多出私錢이라
民不幸罹旱疫이나 得免於轉死하고 雖死라도 得無失斂埋하니 皆公力也
是時旱疫被於吳越하여 民饑饉疾癘하여 死者殆半이니 菑未有鉅於此也
天子東向憂勞하니 州縣推布上恩하고 人人盡其力이로대 公所拊循 民尤以爲得其依歸
所以經營綏輯先後始終之際 委曲纖悉 無不備者
其施雖在越이나 其仁足以示天下 其事雖行于一時이나 其法足以傳後世
蓋菑沴之行 治世不能使之無 而能爲之備
民病而後圖之 與夫先事而爲計者 則有間矣 不習而有爲 與夫素得之者 則有間矣
予故采於越 得公所推行하여 樂爲之識其詳하니라
豈獨以慰越人之思리오
將使吏之有志於民者 不幸而遇歲之菑 推公之所已試하여 其科條可不待頃而具 則公之澤豈小且近乎
公元豐二年 하여 家于하다
其直道正行在於朝廷 豈弟之實在於身者 此不著
著其荒政可師者하여 以爲越州趙公救菑記云하노라


09. 월주越州 조공趙公의 구황정책에 관한 기문
조공趙公의 구황정책은 실오라기를 사리고 머리카락을 빗질하여 한 올도 빠지거나 새어나감이 없고, 증공曾公이 그 일을 기록한 글도 실오라기를 사리고 머리카락을 빗질하여 한 올도 베틀의 북과 상툿고에 들어가지 않음이 없다.
재난을 구제하는 자가 이 글을 익숙하게 읽는다면 지방의 유랑민을 구제하는 일이 손발을 움직이듯 쉬울 것이다.
희령熙寧 8년(1075) 여름 오월吳越 지역에 큰 가뭄이 들었다.
9월에 자정전대학사資政殿大學士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지월주知越州 조공趙公이 백성들이 굶주리기 이전에 문서를 작성하여 속현屬縣에 묻기를 다음과 같이 하였다.
기근이 든 마을이 몇 군데이며, 백성들 중 식량을 자급할 수 있는 자가 얼마나 있으며, 마땅히 관부 창고에서 식량을 공급해줘야 될 사람이 얼마이며, 백성을 고용하여 도랑에 제방 쌓기를 할 만한 곳이 몇 군데나 있으며, 나눠줄 만한 창고의 돈과 곡물이 얼마나 있으며, 곡물을 기부할 만한 부자는 몇 가구이며, 승려와 도사들이 먹을 식량 외에 장부에 기록되어 있는 비축분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에 대해 각 항목을 글로 써서 대답하되 실수 없도록 하라고 하였다.
주현州縣의 관리들이 백성들 중 고아, 노인, 병약하여 식량을 자급할 수 없는 자 2만 1,900여 명을 기록하여 보고하였다.
옛 규례에 한 해 관부의 곡창을 열어 곤궁한 사람들에게 지급하는 곡식은 3천 석을 넘지 않았는데, 은 부자들이 상납한 곡식과 승려, 도사들의 비축식량을 거두어 얻은 4만 8천여 석으로 그 비용을 보조하고, 10월 초하루부터 어른은 하루에 곡식 한 되를, 어린아이는 그 반을 받도록 하였다.
은 사람들이 서로 짓밟으며 다투는 것을 우려해서 곡식을 받는 남녀가 찾아오는 날을 다르게 하여 한 사람이 이틀분의 식량을 받도록 했고, 장차 집 떠나 유랑하지나 않을까 걱정하여 성 안과 교외의 들녘에 식량 제공처 57개소를 만들고 각각 편한 곳에서 받게 하되, 자기 집을 떠난 자에게는 지급하지 말도록 고시告示하였다.
부릴 만한 관리가 부족할 것을 헤아려 실직實職에 있지 않은 관리 중 경내에 거주하는 자들을 모아서 먹을 것을 주고 사무를 맡겼다.
식량을 자급할 수 없는 자들에게 이런 조처가 베풀어진 것이다.
식량을 사 먹을 능력이 있는 자들을 위해 부자들에게 경고하여 곡식판매를 거부함이 없도록 하고, 또 그들을 위해 관부의 곡식을 내어 5만 2천여 석을 낮은 가격으로 백성에게 공급하였다.
곡식 판매처 18개소를 만들어 곡식을 제공받는 자들처럼 사는 자들도 편하도록 하였다.
또 백성을 고용해 4천 1백 을 쌓았는데 인부가 3만 8천 명에 이르렀다.
작업 일수를 헤아려 돈을 지급해주고 또 곡물을 일반인의 배로 주었다.
백성들이 만일 곡식을 빌리려고 할 경우에는 부자들에게 고하여 마음 놓고 빌려주도록 하고, 가을에 추수한 뒤에 관청에서 책임지고 빌려간 자들이 갚도록 유도하였다.
버려진 남녀 아이들은 사람들에게 거두어 기르도록 하였다.
이듬해 봄에 역병이 크게 돌자 환자를 접수하는 장소를 설치하여 병이 들었어도 돌아갈 집이 없는 자들을 수용하게 하였는데, 승려 두 사람을 초청하여 그들의 치료와 음식을 맡아보게 함으로써 치료할 시기를 놓치는 일이 없게 하였다.
죽은 자들은 모두 시신이 있는 곳에서 즉시 거두어 매장하게 하였다.
법에 따라 곤궁한 사람을 구제하는 것은 3개월을 넘어가지 않았으나 이해에는 5개월까지 지속하였다.
어떤 일이 규정에 부합되지 않는 경우가 있을 때는 이 전적으로 그 책임을 지고 부하관리에게 연루시키지 않았다.
마땅히 상급관청에 보고한 뒤에 진행해야 하는 일도 공무를 집행하기에 편하고 백성의 사정에 적합할 경우, 회신을 기다리지 않고 즉시 시행하였다.
공은 이 기간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심력을 다해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아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반드시 직접 처리하였으며, 환자를 구제하는 약품과 식량 등 비용은 사재私財를 많이 지출하였다.
백성들이 불행히도 이와 같은 한재旱災와 역병을 만났으나 이리저리 떠돌다 죽는 상황을 면하였고, 비록 죽더라도 시신을 거두어 장사 지내주는 일이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하지 않았으니 이는 모두 공의 역량이었다.
이때 오월吳越 지역에 가뭄이 들고 역병이 돌아 백성들이 기근과 질병에 죽는 자가 태반이었으니 재해가 이보다 컸던 적이 없었다.
천자께서 동쪽의 오월吳越 지역을 걱정하시자 주현州縣의 관리들이 황제의 은덕을 받들어 백성들에게 베풀고 저마다의 역량을 다하였는데, 이 다스리는 지역의 백성들은 다른 지역의 백성들보다 더 보살핌을 받았다고 여겼다.
이는 구황정책으로 백성을 안정시킬 때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하여 미진한 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구황정책은 월주越州에서 시행되었으나 그 인애仁愛는 천하에 보일 만하였고, 그 일은 비록 한 시기에 시행됐으나 그 법은 후세에 전할 만하였다.
대체로 자연재해의 유행은 태평성대에도 면할 수 없으나 능히 대비할 수는 있다.
백성들이 병든 뒤에 해결책을 도모하는 것과 일이 일어나기 전에 대책을 세우는 것에는 차이가 있고, 익히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우연히 무슨 일을 하는 사람과 평소에 의식을 갖고 경험을 쌓은 사람은 차이가 있다.
내가 월주越州에 들렀을 때 공이 시행한 구제조치의 정황을 알고 즐거운 나머지 그를 위해 자세한 내용을 기록하였다.
이 글은 공을 흠모하는 월주越州 백성들의 생각을 위로해줄 뿐이겠는가.
백성을 위해 좋은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관리로 하여금 불행히 재앙을 만났을 때 공이 시행했던 방법을 행하여 그에 관한 조목을 허둥지둥 준비하지 않을 수 있게 할 것이니, 이로 보면 공의 은택이 어찌 작고 천근하다 하겠는가.
원풍元豐 2년(1079)에 대학사大學士태자소보太子少保에 제수되어 치사致仕하여 구현衢縣의 자택에서 안거하였다.
그가 조정에 있을 때에 원칙을 견지한 올바른 사적과 그 몸에 드러난 너그럽고 후덕한 품덕에 관해서는 여기서 일일이 다 기술하지 않는다.
그의 구황정책 가운데 후대 사람이 본받을 만한 정책과 조치만을 기록하여 이 〈월주조공구치기越州趙公救菑記〉를 쓴 것이다.


역주
역주1 越州趙公救菑記 : 작자의 나이 60세 때인 宋 神宗 元豐 2년(1079)에 지은 기문이다. 작자가 越州를 지나갈 적에 趙抃(1008~1084)이 越州의 수령으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그가 시행했던 구황정책을 듣고서 그 전체 과정을 기술하고 公의 뛰어난 치적과 청렴을 서술하였다. 趙公의 구황방법은 후대에 모범이 될 만하다는 것이 본문의 주제이다.
역주2 吳越 : 春秋時代의 吳國과 越國 지역으로 지금의 江蘇 남부와 浙江 북부 일대이다.
역주3 趙公 : 趙公은 趙抃으로 衢州 西安(현재 浙江 衢縣) 사람이다.
역주4 以大學士加太子少保致仕 : 宋의 제도에 관직이 僕射나 樞密使에 이르지 않고서 致仕하면 관직의 고하에 따라 太子 少師, 少傅, 少保에 제수되었다.
역주5 : 지금의 浙江 衢縣을 말한다.

당송팔대가문초 증공(1) 책은 2019.03.1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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