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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曾鞏(1)

당송팔대가문초 증공(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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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증공(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子固以宦遊閩徼하여 不得養母라하여 本風雅以爲陳情之案하니 而其反覆詠歎 藹然盛世之音이라
此子固之文 所以上擬劉向而非近代所及也
鞏頓首再拜上書某官하노라
竊以先王之迹 去今遠矣 其可槪見者 尙存於詩
詩存先王養士之法하니 所以撫循待遇之者 恩意可謂備矣
故其長育天下之材하여 使之成就 則如하여 無有不遂하고 其賓而接之 出於懇誠이면 則如하여 其聲音非自外至也
其燕之則有飮食之具하고 樂之則有琴瑟之音하며 將其厚意 則有幣帛筐篚之贈하니 要其大旨 則未嘗不在於得其歡心이라
其人材旣衆하여 列于庶位 則如
其以爲使臣 則寵其往也하되 必以禮樂하여 使其光華皇皇於遠近하고 勞其來也 則旣知其功하고 又本其情而敍其勤하니라
其以爲將率 則於其行也 旣送遣之하고하며 及其還也 旣休息之하고하니라
當此之時하여 后妃之於內助 又知臣下之勤勞하니하고 而志意之一 至於雖采卷耳라도 而心不在焉이라
其君臣上下 相與之際如此하니 可謂至矣
所謂必本其情而敍其勤者
在四牡之三章 曰 王事靡盬 不遑將父라하고 四章 曰 王事靡盬 不遑將母라하고 而其卒章則曰 豈不懷歸리오 是用作謌하여 將母來諗이라하니
釋者以謂 諗 告也
君勞使臣 敍述其情하여 曰 豈不誠思歸乎리오
故作此詩之謌하여 以養父母之志 來告其君也라하니 旣休息之하고 而又追敍其情如此하니라
繇是觀之컨대 上之所以接下 未嘗不恐失其養父母之心하고 下之所以事上 有養父母之心이면 未嘗不以告也
其勞使臣之辭則然하고 而推至於戍役之人하여 亦勞之以하니 則先王之政 卽人之心 莫大於此也
及其後世 或任使不均하고 或苦於征役하여 而不得養其父母하여는 則有 하고 或行役不已하여 而父母兄弟離散하면 則有
詩人皆推其意하여 見於國風하니 所謂니라
伏惟吾君有出於數千載之大志하여 方興之治하여 以上繼三代하니 吾相於時 皆同德合謀하니
則所以待天下之士者於古 士之出於是時者 豈有不得盡其志邪리오
鞏獨何人으로 幸遇玆日
鞏少之時 尙不敢飾其固陋之質하여 以干當世之用이러니 今齒髮日衰하고 聰明日耗하니 令其至愚라도 固不敢有徼進之心커든 況其少有知邪
轉走五郡 蓋十年矣로대 未嘗敢有半言片辭 求去邦域之任하여 而冀陪朝廷之儀하니
此鞏之所以自處 竊計已在聽察之日 久矣리라
今輒以其區區之腹心으로 敢布於下執事者
誠以鞏年六十이요 老母年八十有八이라
老母寓食京師어늘 而鞏守하고 仲弟守하니 二越者 天下之遠處也
於著令 有一人仕於此二邦者 同居之親當遠仕者 皆得不行이라
鞏固不敢爲不肖之身으로 求自比於是也 顧以道里之阻 旣不可御老母而南하니 則非獨省晨昏承顔色하여 不得效其犬馬之愚 至於書問往還에도 蓋以萬里 非累月踰時不通하니
此白首之母子 所以義不可以苟安이며 恩不可以苟止者也
方去歲之春 有此邦之命하여 鞏敢以情告於朝 而詔報不許하니라
屬閩有盜賊之事하여 因不敢繼請하고
及去秋到職하여는 閩之餘盜 或數十百爲曹伍者 往往蟻聚於山谷하고 桀黠能動衆하여 爲魁首者 又以十數
相望於州縣하여 閩之室閭莫能寧하고 而遠近聞者 亦莫不疑且駭也하니라
州屬邑 又有出於饑旱之後하니 鞏於此時 又不敢以私計自陳이라
其於寇孽 屬前日之屢敗 士氣旣奪하고 而吏亦無可屬者
其於經營 旣不敢以輕動迫之하고 又不敢以少縱玩之
一則諭以招納하고 一則戒以剪除하니
旣而其悔悟者 自相執拘以歸하고 其不變者 亦爲士吏之所係獲하며
其魁首 則或縻而致之하고 或殲而去之하니
自冬至春 遠近皆定하여 亭無之警하고 里有室家之樂하여 士氣始奮而人和始洽하며 至於風雨時若하여 田出自倍
今野行海涉 不待朋儔하고 市粟而來 價減什七하니 此皆吾君吾相 至仁元澤 覆冒所及이라
故寇旱之餘 曾未朞歲 旣安且富 至於如此하니라
鞏與斯民으로 與蒙其幸하여 方地數千里 旣無一事하고 繫官於此 又已彌年이니 則可以將母之心으로 告於吾君吾相 未有易於此時也
伏惟推古之所以待士之詳하여 思勞歸之詩 本士大夫之情하여於其親하고 逮之以卽乎人心之政하여
或還之闕下거나 或處以閑曹거나 或引之近畿하여 屬以一郡하여 使得諧其就養之心하고 慰其高年之母
則仁治之行 豈獨昏愚得蒙賜於今日이리오
其流風餘法 傳之永久하여 後世之士 且將賴此하여 無北山之怨 鴇羽之譏 陟岵之歎하리니
蓋行之甚易하고 爲德於士類者甚廣이리라
惟留意而圖之하라
不宣하노라
唐荊川曰 南豐之文 純出於道古
故雖作書亦然하니 蓋其體裁如此也라하니라


05. 복주福州에서 집정執政께 올린 편지
자고子固민월閩越 지방의 수령으로 재직하여 노모를 봉양할 수 없다는 이유로 《시경詩經》 〈국풍國風〉‧〈대아大雅〉‧〈소아小雅〉에 근거하여 자기의 실정을 토로하는 문건으로 삼았는데, 되풀이해 가면서 읊조린 것은 온화한 태평성대의 가락이었다.
이와 같은 점이 곧 자고子固의 문장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유향劉向과 견줄 만하고 근대 사람이 미쳐갈 수준이 아닌 것이다.
은 머리를 조아려 재배하고 모관某官께 글을 올립니다.
삼가 생각건대 선왕先王들의 자취는 이제 이미 멀어져 없어졌으나 대강이나마 엿볼 수 있는 것이 아직 《시경詩經》에 남아 있습니다.
시경詩經》에 선왕先王들이 인재를 배양했던 법이 있는데, 그들을 보살피고 대우한 실태를 보면 인재들에게 은혜를 베푼 뜻이 완전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하의 인재를 배양하여 그들이 성취하도록 도와주면 마치 재쑥이 큰 언덕에 뿌리를 내려 잘 자라지 않은 것이 없는 것과 같고, 성취된 뒤에 예우를 갖춰 맞아들이는 자세가 정성에서 우러나오면 마치 사슴이 애절한 울음으로 서로를 불러 그 소리가 피상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닌 경우와 같습니다.
잔치를 베풀어줄 때는 여러 가지 음식을 준비하였고 음악으로 환영해줄 때는 거문고와 비파를 연주하였으며, 후의로 우대해주는 것으로는 폐백을 광주리에 담아 증정하였으니, 그 요지를 살펴보면 모든 것이 그들의 환심을 얻자는 데에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인재가 이미 많이 확보되어 조정 백관에 배치한 것은 마치 두릅나무가 무성하게 자라 땔감이 필요할 때 그것을 사용하는 경우와 같았습니다.
이들을 사신으로 삼을 때는 외국에 나가는 것을 영예롭게 해주되 반드시 예의와 음악으로 해주어 그 영광이 원근의 이목에 환히 빛나도록 하였으며,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자를 위로할 때는 이미 그 공을 알아주고 더 나아가 그 애절한 정을 이해하면서 공적을 평정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장수로 삼을 적에는 그가 떠날 때 이미 예물을 증정하고, 또 고사리 싹이 돋아나 떠나야 할 때가 된 것을 알고 보내면서도 돌아오는 날이 혹시 늦어지지나 않을까 염려하였으며, 그가 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편히 쉬도록 하고 또 그가 국사를 위해 노심초사 걱정했던 충정을 추념追念하면서 함께 따라간 마부의 고달픔까지도 돌아보았습니다.
이 당시에 문왕文王을 내조하는 후비后妃까지도 신하의 노고를 알았으니, 그 근심 걱정이 깊은 정도는 높은 산, 돌산, 종, 말 등을 거론하는 데까지 이르렀고, 마음이 한결같기로는 비록 권이卷耳[점나도나물]를 캐더라도 마음은 나물에 있지 않고 국사를 위해 고생하고 있을 신하들을 걱정할 정도였습니다.
대체로 선왕先王의 세상에서 천하의 선비를 대할 적에 정성을 다하고 또 소홀함이 없게 하기를 이처럼 하였기 때문에 “나라 선비는 존귀하였다.” 하고, 또 “나라 선비는 거리낌이 없었다.”고 하였으며, 〈천보天保〉편에서 “군주는 능히 아랫사람에게 자신을 낮추어 이상적인 정사를 이루었고, 신하는 능히 미덕을 윗사람에게 돌려 그 군상君上의 은혜에 보답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군주와 신하 위아래가 서로 돕고 어울리기를 이와 같이 하였으니, 성대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른바 “그 애절한 정을 이해하면서 공적을 평정해주었다.”는 사례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모四牡〉편 제3장에 “임금 일 아니 굳게 못할 것이라, 우리 아비 봉양할 겨를이 없네.[왕사미고王事靡盬 불황장부不遑將父]” 하고, 제4장에 “임금 일 아니 굳게 못할 것이라, 우리 어미 봉양할 겨를이 없네.[왕사미고王事靡盬 불황장모不遑將母]” 하였으며, 마지막 장에서는 “돌아갈 생각 어찌 아니하리오. 이로 인해 이러한 노래 지어서, 어미 봉양하련다 고해 올리네.[기불회귀豈不懷歸 시용작가是用作謌 장모래심將母來諗]”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풀이한 자가 말하기를 “(심)은 고한다는 뜻이다.
군주가 사신을 위로하여 그 애절한 정을 서술하기를 ‘어찌 진심으로 고향에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이 시의 가사를 지어 부모를 봉양하겠다는 뜻으로 그 임금에게 와서 고한다.’ 라고 하였다.” 하였으니, 이미 그들을 쉬도록 하고서 또 그 애절한 정을 서술하기를 이와 같이 하였습니다.
이를 통하여 살펴보건대, 군상君上이 아랫사람을 접할 때에 그들이 부모를 봉양하고픈 뜻을 혹시라도 이루지 못할까 걱정하지 않은 적이 없고, 아랫사람이 군상君上을 섬길 때 부모를 봉양하려는 마음이 있으면 그것을 고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이는 사신을 위로하는 말이 곧 그러하였고 그 마음을 미루어 변방을 수비하는 사람들에게까지 확대하여 그들에게도 “임금 일 굳게 아니 못할 것이라, 우리네 부모님을 근심케 하네.[왕사미고王事靡盬 우아부모憂我父母]” 라는 등의 말로 위로하였으니, 선왕先王의 정사 가운데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해주는 것으로는 이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후세에 이르러서는 임무를 부여하는 것이 고르지 못하거나 혹은 정역征役(조세와 부역)에 시달려 그 부모를 봉양하지 못했을 때는 〈북산北山〉편의 유감과 〈보우鴇羽(보우)〉편의 한탄이 있었고, 혹시 행역行役(공무로 지방을 순행하거나 국경을 수비하는 일)이 끊이지 않아 부모형제가 〈살기 어려워 사방으로〉 흩어졌을 때는 〈척호陟岵(척호)〉편의 그리움이 있었습니다.
이상은 시인이 모두 그 뜻을 추리하여 〈국풍國風〉 등에 드러낸 것으로서 이른바 “에서 우러나오고 예의禮義에 부합된다.”는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군상君上께서는 과거 수천 년에도 보기 드문 큰 뜻을 지니고 바야흐로 선왕先王의 거룩한 정치를 일으켜 저 위로 삼대三代를 계승하였는데, 우리 재상들께서 이때 모두 군상君上의 높으신 덕과 심오한 계책을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니 천하의 선비를 대우하는 수준이 어찌 옛날과 다르겠으며, 이 당시에 태어난 선비들이 어찌 자기 뜻을 다 펴지 못하는 일이 있겠습니까.
저와 같은 사람이 무슨 행운으로 이런 날을 만났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젊었을 때도 오히려 감히 제 고루한 자질을 좋게 치장하여 당대에 쓰여지기를 구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치아와 머리털이 날로 노쇠해가고 청력과 시력도 날로 줄어들고 있으니, 제가 극히 어리석다 하더라도 사실 감히 의외의 진출을 기도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조금이나마 지혜가 있는데 그럴 수 있겠습니까.
다섯 고을을 전전한 지가 지금 10년이지만 아직 감히 몇 마디 말로라도 지방수령을 그만두기를 구한다거나 중앙조정의 반열에 끼어들기를 바랐던 적이 없습니다.
이는 제가 그동안 취했던 처신으로 어쩌면 집사께서도 이에 관해 들어 알고 계신 날이 오래되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저의 속마음을 감히 집사께 말씀드릴까 하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제 나이가 지금 60세이고 노모는 나이가 88세입니다.
이러한 노모께서 도성에 계시는데 저는 민월閩越을 지키고 있고 중제仲弟남월南越을 지키고 있으니, 이 두 지역은 중국천하 안에서 먼 곳입니다.
나라의 규정에 의하면, 한 사람이 이 두 지방에서 벼슬살이를 할 경우에는 동거하는 다른 친족이 먼 지방에서 벼슬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사실 못난 사람으로 스스로 이 규례를 적용받기를 감히 요구하지 못합니다만, 길이 멀고 험난하여 이미 노모를 모시고 남쪽으로 내려오지 못하고 보니, 슬하에서 아침저녁으로 안부를 살피고 받들어 자식으로서의 정성을 바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안부편지를 주고받는 것조차 달을 넘기고 철을 넘기지 않으면 통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곧 백발이 된 모자母子가 도리상 그렁저렁 안일하게 있을 수 없고 은정을 그렁저렁 멀리해버릴 수 없는 까닭입니다.
지난해 봄 이 고을의 수령에 제수한다는 명이 있을 당시 제가 감히 저의 사정을 조정에 고하였으나 조서詔書로 허락하지 않는다고 답하였습니다.
이때 마침 민월閩越에 도적떼 사건이 발생하여 이로 인해 감히 계속 요청하지 못했습니다.
지난해 가을 임지에 부임하자 민월閩越의 도적 잔당이 수십 수백 명씩 무리 지어 여기저기 산골에 모여 있기도 하고, 교활하여 능히 군중을 선동하여 우두머리가 된 자들이 또 10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이들이 여러 주현州縣에 깔려 있어 민월閩越 지방의 민가들이 편안히 살 수가 없고, 원근 지방에서 그 소문을 들은 자들도 모두 불안해하고 두려워하였습니다.
의 산하 고을들이 또 기근과 가뭄을 치른 뒤였으므로 제가 이때 또 감히 사적인 사정을 가지고 스스로 진언하지 못했습니다.
도적으로 인한 화에 대해서는 관군이 지난날 여러 차례 그들에게 패하였기 때문에 사기가 이미 떨어져 있었고 하급관리도 일을 부탁할 만한 자가 없었습니다.
저는 이 문제를 처리할 때 이미 감히 섣불리 움직여 그들을 압박하지도 못하고 또 감히 약간 방치하여 무시해버릴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관대하게 불러들인다는 말로 타이르고, 한편으로는 소탕해버리겠다는 말로 위협하였습니다.
얼마 뒤에 잘못을 뉘우친 자는 스스로 상대를 붙잡아 돌아왔으며, 마음을 바꾸지 않은 자들은 또 관군과 관리들에 의해 잡혔습니다.
그들의 우두머리에 대해서는 포박하여 데려오기도 하고 혹은 죽여 제거해버렸습니다.
그랬더니 지난해 겨울부터 봄까지 원근 지역이 모두 안정되어 역정驛亭에는 비상사태를 알리는 북소리가 울리지 않았고, 마을에는 가정의 평화를 즐기는 낙이 있어서 사기가 비로소 일어나고 인심이 비로소 흡족해졌으며, 심지어 비바람도 순조로워 농가의 소출이 이전에 비해 갑절이나 늘었습니다.
지금은 들판을 걸어가거나 바다를 건널 적에 여럿이 무리 지어 갈 필요가 없고 곡식을 사 가지고 올 때는 값이 십분의 칠이나 떨어졌으니, 이는 모두 우리 군상君上과 우리 재상의 지극하신 인덕仁德과 크신 은택이 두루 미쳐 이루어진 결과입니다.
이 때문에 도적과 가뭄의 역경을 치른 이후 1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도 살기가 편안하고 부유해진 정도가 여기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곳 백성들과 그 은택을 입어 수천 리에 이르는 지역이 이미 문제되는 일이 하나도 없고, 이곳에 수령으로 매여 있은 지가 또 한 해가 찼으니, 노모를 받들어 모시고픈 마음을 우리 군상君上과 우리 재상께 고하는 것이 지금보다 더 용이한 때가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옛날에 선비를 잘 대우하던 뜻을 미루어 확대하여 그 당시 공무를 마치고 돌아온 관리를 위로한 사대부士大夫의 마음을 이해하여 그들의 어버이에게까지 미치고, 더 나아가 인심에 기반을 둔 정사로까지 미쳐갔다는 것을 생각해주십시오.
그리하여 대궐로 불러들여 일이 한가로운 관서로 앉히거나 혹은 도성에서 가까운 지방으로 끌어다가 한 고을을 맡김으로써, 노모를 가까이에서 봉양하고픈 마음을 이루게 하고 그 나이 많은 어미를 위안해드리게 해주십시오.
그렇게 되면 인덕仁德으로 천하를 다스리는 은혜를 오늘날 어찌 우매한 저 혼자서만 입겠습니까.
그 좋은 기풍과 제도가 영구히 전해져 후세의 선비들도 장차 이로 인해 앞서 말한바 〈북산北山과 같은 원망, 〈보우鴇羽과 같은 비난, 〈척호陟岵과 같은 한탄이 없을 것입니다.
이는 대체로 시행하기는 매우 쉽고 사류士類에게 덕이 되는 것은 매우 넓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유념하여 도모해주십시오.
이만 줄입니다.
당형천唐荊川이 말하였다. “남풍南豐의 문장은 오로지 고대의 문화를 논하는 데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비록 서간문을 지을 적에도 그러하니, 대체로 그 문장을 구성하는 체제가 이렇다.”


역주
역주1 福州上執政書 : 작자가 60세 때인 元豐 1년(1078)에 쓴 편지이다. 작자가 熙寧 2년(1069) 越州通判으로 부임한 이후 知福州軍州事로 부임할 때까지 10년 동안 지방관으로 전전하느라 洛陽에 혼자 머물고 있는 계모인 朱氏를 모시지 못하였다. 朱氏는 이때 88세의 고령이었고 둘째 아우 曾布도 南越 지방에서 知廣州로 재직 중이었다. 이 당시 吳充과 王珪가 재상으로 있었는데 이들 중 한 사람에게 이 편지를 보냈다. 그 요지는, 국가에서 사대부 각자의 처지를 감안하여 안배해주고 공로를 인정하여 표창해주는 뜻이 담긴 《詩經》의 여러 편을 인용하여 제시하면서, 자기에 대해서도 先王의 그와 같은 은혜를 베풀어 노모를 모시기에 편리하도록 중앙 관청이나 도성의 주변 고을로 전보시켜 달라는 뜻을 피력하였다.
역주2 蘿蒿之在大陵 : 《詩經》 〈小雅 菁菁者莪〉의 “무성한 재쑥이 많이도 자라 저기 저 큰 언덕에 깔려 있구나. 내 이미 여러 군자 만나고 보니 이들이 거둥 좋아 즐겁고 말고.[菁菁者莪 在彼中阿 旣見君子 樂且有儀]”를 인용한 것이다. 훌륭한 爲政者가 인재를 배양하는 환경을 잘 조성하여 성취해내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蘿蒿’는 ‘莪’를 설명한 것으로 십자화과의 두해살이 풀인 재쑥이다.
역주3 鹿鳴之相呼召 : 《詩經》 〈小雅 鹿鳴〉의 “들사슴이 어우우 짝을 부르며 저 들녘에 자란 쑥 뜯어먹누나. 나는야 아름다운 빈객들 있어 비파 치고 피리 불며 맞이하노라.[呦呦鹿鳴 食野之苹 我有嘉賓 鼓瑟吹笙]”를 인용한 것이다. 사슴이 좋은 풀을 만나 소리 내어 울어서 짝을 불러 함께 먹는 것을 가지고, 周나라 왕이 훌륭한 인재를 갈망하여 아름다운 음악으로 융숭하게 환영하는 것을 비유한 시인데, 여기서는 정성으로 인재를 초빙한다는 뜻을 취하였다.
역주4 棫樸之盛 得而薪之 : 《詩經》 〈小雅 菁菁者莪〉의 “두릅나무 무성히 많이 자라니 땔감으로 쓰고 또 쌓아둔다네. 기풍이 엄숙하신 군왕께서는 좌우에서 이들을 인도하시네.[芃芃棫樸 薪之槱之 濟濟辟王 左右趣之]”를 인용한 것으로, 어진 군주가 인재를 많이 양성하여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아울러 예비인력으로 비축해둔다는 뜻이다.
역주5 識薇蕨之始生 而恐其歸時之晩 : 《詩經》 〈小雅 采薇〉의 “고사리 꺾자구나. 고사리 꺾어 고사리 싹 이제 막 돋아났거니. 고향에 돌아오소. 고향 돌아와 자칫하면 한 해가 저물어버려.[采薇采薇 薇亦作止 曰歸曰歸 歲亦莫止]”를 인용한 것이다. 周나라 文王이 해마다 고사리가 돋아나는 봄에 군사를 변방으로 보내지만, 이는 국경의 수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취하는 조처이니 임무를 잘 수행한 뒤에 부디 돌아와야 할 기한을 넘기지 말라고 당부하는 군주의 진실한 애정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역주6 追念其悄悄之憂 而及於僕夫之瘁 : 《詩經》 〈小雅 出車〉의 “나라를 지키려는 걱정 깊었고 전차를 모는 마부 또한 고달파.[憂心悄悄 僕夫況瘁]”를 인용한 것으로, 周나라 왕이 힘겨운 전쟁을 치르고 개선한 장수의 입장에서 그의 노고를 위로한 것이다.
역주7 憂思之深 至於山脊石砠僕馬之間 : 《詩經》 〈周南 卷耳〉의 “높디높은 저 산을 오르려 해도 내 말이 비실비실 오르지 못해.[陟彼崔嵬 我馬虺隤]”와 “높디높은 저 돌산 오르려 해도 내 말이 병이 나서 가지 못하고, 내 종도 병을 앓아 가지 못하니, 아, 어이 탄식하게 한단 말인고.[陟彼砠矣 我馬瘏矣 我僕痡矣 云何吁矣]”에서 인용한 것이다. 山脊은 시에서의 ‘高岡’을 뜻하고, 石砠는 흙이 덮인 돌산으로 시에서의 ‘砠’를 뜻한다. 文王의 后妃 太似가 변방에 출정한 장수의 입장에서 그의 노고를 걱정하는 뜻으로 쓴 작품이다.
역주8 稱周之士也貴 又稱周之士也肆 : 《揚子法言》 권6에 “周나라 선비는 존귀하고 秦나라 선비는 미천하였으며, 周나라 선비는 거리낌이 없고 秦나라 선비는 법에 구속을 받았다.”라고 한 것을 말한다.
역주9 天保亦稱君能下下……以報其上 : 〈天保〉는 《詩經》 〈小雅〉의 한 편명이다. 《詩序》 卷下에서 〈天保〉篇의 요지를 설명한 내용을 인용하였다.
역주10 王事靡盬憂我父母 : 이와 같은 가사가 《詩經》 〈小雅〉의 〈杕杜〉편과 〈北山〉편 두 곳에 출현하는데, 여기서는 위정자가 변방에서 수비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병사의 입장에서 그동안에 겪었던 그의 노고를 위로하는 뜻으로 노래한 〈杕杜〉편의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역주11 北山之感 : 〈北山〉은 《詩經》 〈小雅〉의 한 편명이다. 제1장에 “광활한 푸른 하늘 덮인 아래에 왕가에 소속되지 않은 땅 없고, 육지에서 저 멀리 바닷가까지 왕가의 신하 아닌 사람 없건만, 대부들 맡는 일이 고르지 않아 나 혼자만 노역에 수고롭구나.[溥天之下 莫非王土 率土之濱 莫非王臣 大夫不均 我從事獨賢]”라고 하여, 관리가 직무를 부담하는 일이 고르지 않아 자기만 고생하는 것에 따른 유감을 노래하였다.
역주12 鴇羽之嗟 : 〈鴇羽〉는 《詩經》 〈唐風〉의 한 편명이다. 제1장에 “푸득푸득 기러기 날개를 치며 도토리나무 위에 내려 앉누나. 임금 일 아니 굳게 못할 것이라 찰기장과 매기장 심지 못하니 우리 부모 무엇을 믿을 것인고. 너무도 무심하다 저 푸른 하늘 어느 제나 안정을 찾을 것인고.[肅肅鴇羽 集于苞栩 王事靡盬 不能蓺稷黍 父母何怙 悠悠蒼天 曷其有所]”라고 하여, 백성이 조세와 부역에 시달리느라 농사를 짓지 못해 부모에게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하늘을 원망하였다.
역주13 陟岵之思 : 〈陟岵〉는 《詩經》 〈魏風〉의 한 편명이다. 제1장에 “저기 저 민둥산에 올라가서는 아버님 계신 곳을 바라보노라. 아버님은 내 자식 부역하느라 주야로 쉬지 않고 고생할 텐데, 아무쪼록 탈 없이 지내고 있다 어서 빨리 오기를 고대하겠지.[陟彼岵兮 瞻望父兮 父曰嗟予子行役 夙夜無已 上愼旃哉 猶來無止]”라고 하여, 변방에서 복역하는 자식이 고향에서 자식을 고대할 부모를 그리워하는 심정을 노래하였다.
역주14 發乎情 止乎禮義者 : 《詩序》 卷上에 “變風은 情에서 우러나오고 禮義에 부합된다. 情에서 우러나오는 것은 백성의 心性이고 禮義에 부합된 것은 先王의 은택이다.” 하였다.
역주15 先王 : 여기서는 周 文王을 가리킨다.
역주16 : 저본에 ‘易’으로 된 것을 《元豐類藁》를 근거로 수정하였다.
역주17 閩越 : 오늘날의 福建으로 福州를 가리킨다.
역주18 南越 : 廣州를 가리킨다. 이 지역은 본디 남방의 越人이 거주하였다 하여 廣州의 별칭으로 쓰인다.
역주19 枹鼓 : 도적이 갑자기 일어나면 대중을 경계하기 위해 치는 북을 말한다.
역주20 : 저본에 ‘反’으로 된 것을 《元豐類藁》를 근거로 수정하였다.
역주21 : 저본에 ‘其’로 된 것을 《文編》과 《唐宋八大家讀本》을 근거로 수정하였다.

당송팔대가문초 증공(1) 책은 2019.03.1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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