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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萊博議(1)

동래박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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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7 鄭敗燕
01-07-01 鄭敗燕
【左傳】隱五年이라 四月 鄭人侵衛牧하야 以報東門之役하니 衛人以燕師하다
祭足原繁洩駕以三軍하고 使潛軍軍其後하다
燕人畏鄭三軍而이어늘
六月以制人敗燕師于北制하다
君子曰
01-07-02 鄭敗北戎
【左傳】隱九年이라 北戎侵鄭하니 鄭伯禦之할새 患戎師曰 彼徒我車 懼其侵軼我也
公子突曰 使勇而無剛者 嘗寇而速去之하고 하소서
하야 勝不相讓하고 敗不相救하니
先者見獲이면 必務進이요 進而遇覆이면 必速奔하리이다
後者不救 則無繼矣리니 이니이다 從之하다
戎人之前遇覆者奔어어늘
祝聃逐之하야 衷戎師하고 前後擊之하야 盡殪하니 戎師大奔하다
01-07-03 楚敗鄧
【左傳】桓九年이라 巴子使告于楚하야 請與鄧爲好하니 楚子使道朔將巴客以聘於鄧하다
鄧南鄙人攻而奪之幣하고 殺道朔及巴行人하다
楚子使薳章讓於鄧하니 鄧人弗受하다
楚使鬪廉帥師及巴師圍鄾하다
鄧養甥聃甥帥師救鄾하야 三逐巴師하니 不克하다
하니 鄧人逐之하야 背巴師어늘
而夾攻之하니 鄧師大敗하고 人宵潰하다
01-07-04 商密降秦
【左傳】僖二十五年이라 秦晉伐하다
秦人過析타가 隈入而係輿人하야 以圍商密하고 昏而傅焉하야
坎血加書하고 僞與子儀子邊盟者하니 商密人懼曰 秦取析矣
戍人反矣라하고 乃降秦師하다
01-07-05 鄭敗宋
【左傳】成十六年이라 鄭子罕伐宋하니 宋將鉏樂懼敗諸汋陂하고 退하야 舍於夫渠하야 不儆이어늘 鄭人覆之하야 敗諸汋陵하고 獲將鉏樂懼하니
宋恃勝也
01-07-06 楚滅舒庸
【左傳】成十七年이라 舒庸人以楚師之敗也 道吳人圍巢하야 伐駕하고 圍釐虺하고 遂恃吳而不設備어늘 公子槖師襲舒庸하야 滅之하다
01-07-07 楚敗吳 滅舒鳩
【左傳】襄二十五年이라 吳子諸樊伐楚하야 以報舟師之役하다
門于巢어늘 巢牛臣曰 吳王勇而輕하니 若啓之 將親門하리라
我獲射之 必殪리니 是君也死 疆其少安하리라 從之하다
吳子門焉이어늘 牛臣隱於短牆以射之하니하다
○ 襄二十四年 吳人〈爲楚舟師之役故〉 召舒鳩人하니 〈舒鳩人〉叛楚하다
楚子師于荒浦하야 使沈尹壽與師犂讓之한대 舒鳩子敬逆二子하야 而告無之하고 且請受盟하다
二子復命한대 王欲伐之하다
薳子曰 不可하이다
彼告不叛하고 且請受盟이어늘 而又伐之 伐無罪也 姑歸息民하야 以待其卒하소서
卒而不貳 吾又何求릿가 若猶叛我 無辭有庸이리다 〈乃還하다
二十五年秋薳子馮卒하니 屈建爲令尹하고 〈屈蕩爲莫敖하다〉 舒鳩人卒叛이어늘 子木伐之하야 遂滅舒鳩하니
楚子以滅舒鳩賞子木한대 辭曰 先大夫蔿子之功也라하니 以與蔿掩하다
01-07-08 晉滅肥
【左傳】昭十二年이라 晉荀吳僞會齊師하야 假道於鮮虞하야 遂入昔陽하다
秋八月壬午 滅肥하고 以肥子緜臯歸하다
01-07-09 晉滅陸渾
【左傳】昭十七年이라 秋晉侯使屠蒯如周하야 請有事於雒與三塗하다
萇弘謂劉子曰 客容猛하니 非祭也 其伐戎乎ㄴ저
陸渾氏甚睦於楚하니 必是故也
君其備之하소서 乃警戎備하다
九月丁卯 晉荀吳帥師涉自棘津하야 使祭史先用牲于雒하다
陸渾人弗知하니 師從之하야 庚午 遂滅陸渾하고 數之以其貳於楚也하다 陸渾子奔楚하고 其衆奔甘鹿하니라
01-07-10 吳敗楚取餘皇
【左傳】昭十七年이라 吳伐楚할새 〈陽匃爲令尹하야
卜戰하니 不吉하다
司馬子魚曰 我得上流하니 何故不吉
且楚故 司馬令龜하니 我請改卜이라하고 令曰 魴也以其屬死之어든 楚師繼之하야 尙大克之하노라하다
戰于長岸 〈子魚先死하니 楚師繼之하야〉 大敗吳師하고 獲其乘舟餘皇하다
使隨人與後至者守之호되 環而塹之하야 及泉하고 하다
請於其衆曰 喪先王之乘舟 豈唯光之罪리오
衆亦有焉이라
請藉取之以救死하노라 衆許之하다
使者三人潛伏於舟側하고 曰 我呼餘皇이어든 則對하라
師夜從之하야 三呼하니 皆迭對하다
楚人從而殺之하다
이어늘 吳人大敗之하고 取餘皇以歸하다
01-07-11 吳敗胡沈陳三國
【左傳】昭二十三年이라 吳人伐州來한대 楚薳越帥師及諸侯之師奔命救州來하니 吳人禦諸鍾離하다
〈吳公子光曰 諸侯從於楚者衆이나 而皆小國也
畏楚而不獲已 是以來니라
吾聞之컨대 曰 作事威克其愛 雖小必濟라하니라
胡沈之君幼而狂하고 陳大夫齧壯而頑하고 頓與許蔡疾楚政하며 楚令尹死하야 其師熸이라 帥賤多寵하야 政令不壹하며
同役而不同心하며 帥賤而不能整하야 無大威命하니 楚可敗也
若分師하야 先以犯胡沈與陳이면 必先奔이요 三國敗 諸侯之師乃搖心矣리라 諸侯乖亂이면 楚必大奔하리니
請先者去備薄威하고 後者敦陳整旅하라 吳子從之하다
戊辰晦〉 戰于鷄父할새 吳子以罪人三千先犯胡沈與陳하니 三國爭之하다
吳爲三軍하야 以繫於後하되 中軍從王하고 光帥右하고 掩餘帥左하다
吳之罪人或奔或止하니 三國亂하다
吳師擊之하니 三國敗하다
獲胡沈之君及陳大夫하다
舍胡沈之囚하야 使奔許與蔡頓曰 吾君死矣라하고 師譟而從之하다
三國奔하니 楚師大奔하다
01-07-12 越敗吳於檇李
【左傳】定十四年이라 吳伐越하니 越子禦之하야 陳于檇李하다
句踐患吳之整也하야 使死士再禽焉이로되 不動하니
使罪人三行으로 屬劒於頸하고 而辭曰 二有治 臣奸旗鼓하야 不敏於君之行前하니
不敢逃刑이라 敢歸死하노라하고 遂自 師屬之目이어늘 越子因而伐之하야 大敗之하다
靈姑浮以戈擊闔廬한대 하다
타가 卒於陘하니 夫差使人立於庭하야 苟出入 必謂己曰 夫差
而忘越王之殺而父乎아하면 則對曰 唯 不敢忘이라하다
三年乃報越하다
01-07-13 越敗吳於笠澤
【左傳】哀十七年이라 三月 越子伐吳하니 吳子禦之笠澤하야 夾水而陳하다
越子爲左右句卒하야 使夜或左或右하야 鼓譟而進하니 吳師分以禦之어늘
越子以三軍潛涉하야 當吳中軍而鼓之하니 吳師大亂이어늘
遂敗之하다
兵者 君子之所長이요 小人之所短이라
此理之必然이로되 而世未有知其然者也
吾嘗以是理試語于衆矣러니
談兵之士 勃然而見難曰
君子何爲而名君子 吾應之曰 誠而已矣니라
小人何爲而名小人 吾應之曰 詐而已矣라하니
難者曰 果如是인댄 則兵者乃小人之所長이요 而君子之所短也
萬物皆賤詐 惟兵獨貴詐니라
君臣相詐則其國危하고 父子相詐則其家敗하며 兄弟相詐則其親離하고 朋友相詐則其交疎하고 商賈相詐則其業廢로되 至于用兵하야는 小詐則小勝하고 大詐則大勝이라
小人長于詐 故其用兵亦長하고 君子短于詐 故其用兵亦短이라
自曼伯以降으로 制勝不同이나 同歸於詐
是數子者 苟以君子長者之道 處之 安能成其功乎
故儒家之小人 兵家之君子也 兵家之君子 儒家之小人也 彼區區忠信誠慤 何足稱于孫吳之門哉리오
吾應之曰 吾姑言其理耳어늘 今子擧前古之事 以攻之하니 以子之事 證吾之理兵非君子莫能用也리라
春秋諸子 所以能收一日之功 特以小人而遇小人耳ᄅ새라
若君子遇之 雖鄭楚秦晉十餘國之衆 爲一軍하고 合曼伯子突十餘人之知 爲一將이라도 吾知談笑麾之綽綽乎有餘裕矣
吾非爲大言以誇衆也 亦理之必然者也니라
蓋君子之用兵 無所不用其誠注+一篇主意이라
世未有誠而輕者注+誠則不輕動하니 敵雖欲誘之라도 烏得而誘之 世未有誠而貪者하니 敵雖欲餌之注+貪乃爲敵所餌라도 烏得而餌之 世未有誠而擾者注+誠則安靜不擾하니 敵雖欲亂之注+擾乃爲敵所亂라도 烏得而亂之리오
用是誠以撫御 則衆皆不疑注+以誠撫御士卒 則人人孚信리니 非反間之所能惑也注+敵人雖行反間 自無可乘之隙 用是誠以備禦 則衆皆不怠注+以誠備禦外患 則事事詳密리니 非詭謀之所能誤也注+敵人雖設詭謀 自無可施之術
彼向之所以取勝者注+總論春秋之時善於用兵以取勝者 因其輕而入焉이요 因其貪而入焉이며 因其擾而入焉이요 因其疑而入焉이며 因其怠而入焉注+不誠則有此五患 故爲敵人所勝이니라
一誠旣立이면 五患皆除注+用一誠而除五患하야 兕無所投其角하고 兵無所投其刄하며 曼伯子突之徒無所投其詐矣리라
豈特曼伯子突之徒哉리오
縱使盡號召自古之知兵者하야 環而攻之注+假設合聚古人善用兵者 環而攻我하고 聚而譟之하야 雖極其詐計至于百이라도 君子待之一於誠而已矣 又極其詐計至于千이라도 君子待之亦一於誠而已矣 又極其詐計至于萬注+彼之用計 雖不可勝窮이라도 君子待之一於誠而已矣注+兵只用一誠 彼自不能勝我 彼之詐 極其萬而不足注+詐雖多而無用 故云不足이요 我之誠 守其一而有餘注+誠雖約而易守 故云有餘하니 彼常勞而我常佚注+詐故勞 誠故逸이요 彼常動而我常靜注+詐故動 誠故靜이라
以佚制勞注+以我之逸 制彼之勞하고 以靜制動注+以我之靜 制彼之動 豈非天下常勝之道乎注+一誠之效 如此
然則論天下之善用兵者 不得不歸之君子 用兵之善者 固無出於君子矣注+君子常勝 故善用兵로다
而勒景鐘注+此是結尾 轉發新意 蓋上文之論 雖云正大 亦近迂闊 須要此反難 方是文字 此處設疑云 自古以戰勝 而紀攻於帝籍勒名於景鍾者 大率多形餘之人 黥 涅額也 髡 削髮也 黥髠盜販 相望于史하고 而宋襄注+見僖二十二年注+本傳之流 每以仁義爲天下笑注+宋襄公與楚人戰 不重傷 不禽二毛 不鼓不成列 而反爲楚人所敗 成安君陳餘 儒者 常稱義兵 不用詐謀 而反爲韓信所擒 然則小人之詐勝 而君子之誠敗矣 抑又何也注+設問而下文答
蓋盡小人之術者라야 方無愧於小人之名注+答云 盡小人之術 方是眞小人이요 盡君子之道者라야 方無愧於君子之名注+盡君子之道 方是眞君子 不然則僞而已이라
世之所謂小人 已極其術하야 稱小人之名者也 世之所謂君子 未得其道하야 託君子之名者也
以僞君子對眞小人注+如楚人韓信 皆眞小人 而宋襄陳餘 以僞君子對之하야 持一日之誠으로 而欲破百年之詐注+一日之誠 僞君子也 百年之詐 眞小人也하니 安得而不敗哉注+其取敗也 固宜리오
擧斧以伐木 苟不能仆焉이면 謂斧之鈍則可어니와 謂木勝斧則不可也 酌水以沃火 苟不能息焉注+息 滅也이면 謂水之微則可注+水至少 火至多 故不能滅어니와 謂火勝水則不可也注+非火能勝水也
安得以宋襄輩 遂疑君子之短於兵哉注+宋襄陳餘之誠 猶一杯之水 楚人韓信之詐 猶車薪之火 引此爲喩 極新得到리오


나라가 나라를 패배시키다
나라가 나라를 패배시키다
은공隱公 5년, 4월에 정인鄭人나라 침입侵入하여 동문東門의 전쟁을 보복하니, 위인衛人나라 군대를 거느리고 나라를 공격攻擊하였다.
정나라 채족祭足원번原繁설가洩駕삼군三軍을 거느리고서 연군燕軍의 전면을 공격하는 한편, 만백曼伯자원子元을 시켜 군사를 은밀히 이동하여 그 후면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러자 연인은 앞에 있는 정나라의 삼군만을 두려워할 뿐, 배후背後제인制人에 대해서는 전혀 예측豫測도 하지 못하였다.
6월에 정나라의 두 공자公子가 제인을 거느리고서 연군을 북제北制에서 패배시켰다.
이에 대해 군자는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의외意外의 사태를 대비하지 않으면 군대를 지휘指揮할 수 없다.”
나라가 북융北戎을 패배시키다
은공隱公 9년, 북융北戎나라를 침공하니 정백鄭伯이 군사를 거느리고 방어할 때 북융의 군대를 근심하여, “저들은 보병步兵이고 우리는 거병車兵이니 저들이 뒤에서 갑자기 우리를 침공할까 두렵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공자公子 이 말하기를 “용감하되 한 의지가 없는 전사戰士를 시켜 을 시험해보고는 속히 후퇴하게 하시고, 께서는 세 곳에 군대를 매복埋伏하고서 을 기다리소서.
북융의 군대는 경솔하여 질서가 정연整然하지 않고 탐욕스러워 서로 친목親睦하지 않으므로, 승리해도 전공戰功을 서로 사양하지 않고 패전해도 서로 구원하지 않습니다.
전면에 있는 자가 노획虜獲하는 것을 보면 반드시 힘을 다해 전진前進할 것이고, 전진하다가 복병伏兵을 만나면 반드시 신속히 도망갈 것입니다.
후면後面융병戎兵이 구원하지 않는다면 융병은 후속부대後屬部隊가 없을 것이니, 우리가 통쾌하게 승리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니, 정백이 그의 건의를 따랐다.
〈과연 공자 돌의 말처럼〉 전진하던 융병이 복병을 만나자 도망갔다.
축담祝聃(鄭나라 대부大夫)이 추격追擊하여 융병을 가운데 두고서 전후에서 공격攻擊하여 모두 죽이니, 〈후방後方에 있던〉 융병도 모두 도망하였다.
나라가 나라를 패배시키다
환공桓公 9년, 파자巴子한복韓服나라에 보내어 나라와 우호友好를 맺도록 주선해주기를 요청하게 하니, 초자楚子도삭道朔(초나라 대부大夫)을 시켜 파객巴客(韓服)을 데리고 등나라를 빙문聘問하게 하였다.
그런데 등나라 남쪽 변방의 우인鄾人이 그 일행을 공격하여 폐백幣帛탈취奪取하고 도삭道朔행인行人을 살해하였다.
초자가 등나라에 위장薳章을 보내어 문책하니 등인鄧人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라가 투렴鬪廉을 시켜 초사楚師파사巴師를 거느리고 가서 를 포위하게 하였다.
등나라의 양생養甥담생聃甥이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구원救援하기 위해 파사를 세 차례 추격하니 초사가 승리할 수가 없었다.
투렴이 초사를 파사 사이에 횡렬橫列배치排置하고서 등사鄧師교전交戰하다가 패전敗戰가장假裝하여 도망하니, 등사가 파사를 배후背後에 두고 초사를 추격하였다.
그러자 〈초사가 발길을 돌려〉 파사와 협공挾攻하니 등사가 대패大敗하고 우인鄾人도 밤에 모두 흩어져 도망하였다.
상밀商密나라에 항복하다
희공僖公 25년, 나라와 나라가 나라를 토벌하였다.
진인秦人초병楚兵을 피해 대로大路를 버리고〉 으로 길을 잡아 통과通過하다가 후미진 물굽이로 들어가 많은 사람을 결박結縛해 끌고 가서 상밀商密을 포위하고, 날이 어두워지자 성하城下로 가까이 다가갔다.
밤이 되자 구덩이를 파고 희생犧牲을 잡아 피를 마시고는 맹서盟書를 희생 위에 올려놓고서 자의子儀자변子邊결맹結盟하는 것처럼 위장僞裝하니, 상밀인商密人이 두려워하며 말하기를 “진군이 이미 을 취하였다.
수인戍人이 우리를 배반背叛하였다.”라고 하고, 진군秦軍투항投降하였다.
나라가 나라를 패배시키다
성공成公 16년, 나라 자한子罕나라를 토벌討伐하니, 송나라 장서將鉏악구樂懼작피汋陂에서 정군鄭軍패배敗北시키고서 퇴각退却부거夫渠주둔駐屯하여 방비防備설치設置하지 않으니, 정인鄭人복병伏兵으로 습격襲擊작릉汋陵에서 송군宋軍을 패배시키고서 장서와 악구를 사로잡았다.
이는 송군宋軍승리勝利를 믿고 〈방비防備설치設置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라가 서용舒庸을 멸망시키다
성공成公 17년, 서용인舒庸人초군楚軍패전敗戰한 기회를 이용해 오인吳人인도引導소읍巢邑을 포위하고, 가읍駕邑토벌討伐하고 이읍釐邑훼읍虺邑을 포위하고는 드디어 나라를 믿고 방비防備설치設置하지 않으니, 나라 공자公子 탁사槖師서용舒庸을 습격해 멸망시켰다.
나라가 나라를 패배시키고 서구舒鳩를 멸망시키다
양공襄公 25년, 오자吳子 제번諸樊나라를 토벌討伐하여 지난번 초나라 수군水軍이 쳐들어왔던 전쟁戰爭보복報復하였다.
오군吳軍소읍巢邑성문城門을 공격하자, 소우신巢牛臣이 말하기를 “오왕吳王용감勇敢하나 경솔輕率하니 만약 우리가 성문을 연다면 오왕은 친히 성문 안으로 쳐들어올 것이다.
내가 그 틈을 타 활을 쏘면 반드시 죽을 것이니, 이 오군吳君이 죽으면 우리의 변경邊境이 조금 안정安定될 것이다.”라고 하니, 초인楚人이 그의 말을 따랐다.
과연 오자가 성문 안으로 쳐들어오자, 우신이 낮은 담 뒤에 숨어 활을 쏘니, 오자가 그 화살에 맞아 죽었다.
양공襄公 24년에 오인이 〈초나라가 수군으로 쳐들어왔던 일로 인해〉 서구인舒鳩人을 부르니 〈서구인이〉 초나라를 배반하였다.
초자楚子황포荒浦에 군대를 주둔駐屯시키고서 침윤沈尹 사기리師祁犂를 보내어 서구舒鳩를 꾸짖자, 서구자舒鳩子가 두 사람을 경건히 맞이하여 배반한 일이 없다고 하고 또 맹약盟約을 받아들이겠다고 하였다.
두 사람이 복명復命하자 강왕康王은 서구를 치고자 하였다.
위자薳子가 말하기를 “옳지 않습니다.
저들이 배반하지 않았다고 하고 또 맹약을 받아들이겠다고 청하는데, 저들을 친다면 이는 없는 나라를 치는 것이니, 우선 귀국歸國하여 백성들을 휴식休息시키면서 그 결과結果[卒]를 기다리소서.
끝내 저들이 두마음을 품지 않는다면 우리가 다시 무엇을 바라겠습니까만, 만약 저들이 배반한다면 저들은 변명辨明할 말이 없어 우리가 을 세울 수 있습니다.”라고 하니, 〈초자는 이에 환군還軍하였다.〉
25년 가을에 위자빙薳子馮이 죽으니 굴건屈建영윤令尹이 되고 〈굴탕屈蕩막오莫敖가 되었다.〉 서구인이 마침내 초나라를 배반하자 영윤令尹 자목子木토벌討伐하여 서구를 멸하였다.
겨울에 초자가 서구를 격멸擊滅으로 자목子木에게 서구를 으로 주자, 자목이 사양하며 말하기를 “선대부先大夫 위자蔿子(薳子馮)의 입니다.”라고 하니, 〈초자는 서구를 위자蔿子의 아들〉 위엄蔿掩에게 으로 주었다.
나라가 나라를 멸망시키다
소공昭公 12년, 나라 순오荀吳제군齊軍과 만나기 위해 가는 것처럼 위장僞裝하여, 선우鮮虞에게 길을 빌려 드디어 석양昔陽으로 쳐들어갔다.
가을 8월 임오일壬午日나라를 격멸擊滅하고서 비자肥子 면고緜臯를 잡아 가지고 돌아왔다.
나라가 육혼陸渾을 멸망시키다
소공昭公 17년, 가을에 진후晉侯도괴屠蒯나라에 보내어 낙수雒水삼도산三塗山제사祭祀 지낼 수 있도록 길을 빌려주기를 청하였다.
장홍萇弘유자劉子에게 말하기를 “용모容貌가 사나우니 제사를 지내기 위함이 아니라, 아마도 육혼陸渾융인戎人을 치기 위함인 듯합니다.
육혼씨陸渾氏나라와 매우 화목和睦하니, 반드시 이 때문일 것입니다.
(劉子)께서는 대비對備하소서.”라고 하니, 유자는 이에 융인에 대한 방비防備강화强化하도록 경계警戒하였다.
9월 정묘일丁卯日나라 순오荀吳가 군대를 거느리고 극진棘津에서 도하渡河한 뒤에 제사祭史(제사를 주관하는 관원官員)를 보내어 먼저 희생犧牲을 잡아 낙수雒水에 제사 지내게 하였다.
그런데도 육혼인陸渾人은 〈진인晉人이 자기들을 치려 한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니, 진군晉軍은 그 뒤를 따라가서 경오일庚午日에 드디어 육혼을 격멸擊滅하고서 초나라에 붙어 진나라를 배반背叛를 꾸짖으니, 육혼자陸渾子는 초나라로 도망가고 그 무리들은 감록甘鹿으로 도망갔다.
나라가 초군楚軍을 패배시키고서 여황餘皇탈취奪取하다
소공昭公 17년, 나라가 나라를 토벌討伐하니, 〈이때 양개陽匃영윤令尹이었다.
영전迎戰하는 것이 어떤지에 대해 을 치니 그 점조占兆불길不吉하였다.
사마司馬 자어子魚가 말하기를 “우리가 상류에 있는데 불길할 까닭이 뭐 있습니까?
그리고 또 우리 초나라의 구례舊例[故]에는 사마司馬가 거북에게 명하였으니, 내가 다시 점을 치기를 청합니다.”라고 하고서, 거북에게 명하기를 “내가 나의 사병私兵[其屬]을 거느리고 나아가 싸우다가 죽거든 초군楚軍이 그 뒤를 이어 진격하여 대승大勝하기를 바란다.”라고 하고서 점을 치니 점조가 길하였다.〉
장안長岸에서 교전하다가 〈자어子魚가 먼저 전사하니 초군이 그 뒤를 이어 진격하여〉 오군吳軍대패大敗시키고서 나라의 승선乘船 여황餘皇노획鹵獲하였다.
수인隨人과 뒤따라온 군사에게 여황을 지키되, 그 주위에 참호를 깊이 파서 지하수地下水[泉]가 솟는 데에 이르게 하고, 그 참호의 출입구出入口[隧]에 숯을 채우고서 포진하여 명을 기다리게 하였다.
나라 공자公子 이 그 군중軍衆에게 청하기를 “선왕先王승주乘舟를 잃은 것이 어찌 나의 죄일 뿐이겠는가?
군중에게도 죄가 있다.
그러니 그대들의 힘을 빌려 승주를 탈취하여 죽음을 면하기를 청하노라.”고 하니 군중이 허락하였다.
그러자 공자 광은 수염이 긴 세 사람을 보내어 배 곁에 잠복해 있게 하며 말하기를 “내가 ‘여황아’라고 부르거든 너희들은 즉시 대답하라.”고 하였다.
오군吳軍이 밤에 그들을 따라가서 ‘여황아’라고 세 번 부르니 세 사람이 번갈아 대답하였다.
초인楚人이 소리가 난 곳으로 가서 세 사람을 모두 죽였다.
초군楚軍이 크게 혼란하니 오인吳人이 초군을 대패大敗시키고서 여황을 탈취해 돌아갔다.
나라가 삼국三國을 패배시키다
소공昭公 23년, 오인吳人주래州來침공侵攻하자, 나라 위월薳越초왕楚王을 받고 군대를 거느리고서 제후諸侯의 군대와 함께 주래州來구원救援하기 위해 달려가니, 오인이 이들을 종리鍾離에서 막았다.
이때 자하子瑕가 죽으니 초군楚軍사기士氣가 떨어졌다.
나라 공자公子 이 말하기를 “초나라를 따르는 제후諸侯가 많으나 모두 소국小國들입니다.
초나라가 두려워 마지못해 온 것입니다.
내 듣건대 ‘일을 하는 데 있어 위엄威嚴이 사랑하는 마음을 이기면 비록 적은 병력兵力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성공成功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나라와 나라의 임금은 나이가 어려 조급躁急[狂]하고, 나라 대부大夫 장년壯年이지만 어리석고, 나라‧나라‧나라는 초나라의 정치政治를 미워하고, 초나라는 영윤令尹이 죽어서 그 군대의 사기가 떨어졌고, 초군의 장수將帥지위地位비천卑賤하고 초군 중에는 총신寵臣이 많아서 정령政令(軍令)이 한 곳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일곱 나라가 함께 출전出戰하였으나 그 마음이 같지 않고, 장수가 비천해 군대를 정돈整頓하지 못하여 크게 위명威命이 없으니 초나라를 패배敗北시킬 수 있습니다.
만약 군대를 나누어 먼저 호군胡軍심군沈軍진군陳軍을 치면 저들은 반드시 먼저 도망갈 것이고, 이 세 나라 군대가 패주敗走하면 제후군諸侯軍은 마음이 흔들릴 것이고, 제후군이 혼란混亂하면 초군은 반드시 대패大敗할 것입니다.
그러니 선발부대先發部隊방비防備철거撤去군위軍威를 줄이고, 후속부대後續部隊군진軍陣감독監督[敦]하여 군대를 정돈하게 하소서.”라고 하니, 오자吳子가 그의 말을 따랐다.
그믐날 무신일戊辰日에〉 계보鷄父에서 교전交戰할 때 오자가 죄인罪人 3천 명을 보내어 먼저 나라 군대를 치게 하니, 세 나라 군대가 이들을 잡으려고 서로 다투었다.
이때 나라는 3편성編成하여 죄인의 뒤에 붙였는데, 중군中軍오왕吳王을 따르고, 우군右軍을 거느리고, 엄여掩餘좌군左軍을 거느렸다.
오나라의 죄인들이 혹은 도망가기도 하고 혹은 정지停止하기도 하니 세 나라 군중軍中혼란混亂하였다.
오군吳軍공격攻擊하니 세 나라 군대가 패배敗北하였다.
의 임금과 나라 대부大夫를 포로로 잡았다.
오군이 포로捕虜석방釋放진영陣營으로 보내며 “우리 임금님이 죽었다.”라고 하게 하고서 오군이 고함을 치며 그 뒤를 따라갔다.
세 나라 군대가 도망가니 초군楚軍대패大敗해 달아났다.
나라가 나라를 취리檇李에서 패배시키다
정공定公 14년, 나라가 나라를 침벌侵伐하니, 월자越子 구천句踐오군吳軍방어防禦하기 위하여 취리檇李을 쳤다.
구천은 오군의 군용軍容엄정嚴整한 것을 근심하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사勇士(死士)들을 보내어 두 차례나 오군을 생포生捕해 오게 하였으되, 오군이 동요動搖하지 않으니,
구천은 또 죄인罪人 삼행三行으로 하여금 을 목에 대고서 오군 앞으로 가서 “두 나라 임금께서 작전作戰하시는데, 우리들은 군령軍令을 범하여 임금님의 행진行陣 앞에서 민첩하지 못하였습니다.
감히 형벌刑罰을 피할 수 없으니 감히 죽겠습니다.”라고 하고서 드디어 스스로 목을 베어 죽게 하니, 오군이 이를 괴상히 여겨 주목注目하자, 월자는 그 틈을 이용해 공벌攻伐하여 오군을 대패시켰다.
영고부靈姑浮(越나라 대부)가 창으로 합려闔廬를 치니 합려는 엄지발가락에 상처를 입어 〈신발을 잃으니,〉 영고부가 합려의 한쪽 신발을 하였다.
합려는 돌아가다가 에서 하였으니, 부차夫差는 사람을 궁정宮庭에 세워놓고서 자기가 들고날 때에 반드시 자기에게 “부차야!
너는 월왕越王이 너의 아버지를 죽인 일을 잊었느냐?”고 말하게 하고서, 〈그 사람이 그렇게 말하면〉 부차는 “예, 감히 잊을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렇게 한 지 3년 만에 나라에 원수를 갚았다.
나라가 나라를 입택笠澤에서 패배시키다
애공哀公 17년, 3월에 월자越子나라를 토벌하니 오자吳子입택笠澤에세 월군越軍방어防禦하면서 을 끼고 을 쳤다.
월자는 좌우左右구졸句卒편성編成하여 밤에 혹은 좌구졸左句卒 혹은 우구졸右句卒을 보내어 북을 울리고 고함을 치면서 진격進擊하게 하니, 오군吳軍이 군대를 나누어 방어防禦하였다.
월자는 〈이 틈을 이용해〉 삼군三軍을 거느리고 몰래 강을 건너 오나라 중군中軍에 당도하여 북을 치니, 오군吳軍이 크게 혼란하였다.
드디어 오군을 패배시켰다.
용병用兵군자君子의 장기이고, 소인小人의 장기가 아니다.
이것은 이치의 필연인데도 세상에는 그런 줄을 아는 자가 아직까지 없었다.
내가 일찍이 이 이치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말하였더니,
용병用兵을 담론하는 인사가 화를 내며 힐난하는 기색을 보이면서 말하기를
“군자를 무엇 때문에 군자라고 명칭하는가?”라고 하기에, 내가 “성실하기 때문이다.”라고 하니,
또 “소인은 무엇 때문에 소인이라 명칭하는가?”라고 하기에, 내가 “속이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하였다.
논란하는 자가 말하기를 “과연 이와 같다면 용병은 바로 소인의 장기이고 군자의 장기가 아니다.
만사에 모두 속임을 천하게 여기지만 오직 용병에서만은 속임을 귀하게 여긴다.
군신君臣이 서로 속이면 그 나라가 위태롭고, 부자父子가 서로 속이면 집안이 망하고, 형제兄弟가 서로 속이면 친한 정이 떨어지고, 친구親舊가 서로 속이면 관계가 소원해지고, 장사꾼이 서로 속이면 사업이 망하지만, 용병에 있어서는 작게 속이면 작게 이기고, 크게 속이면 크게 이긴다.
소인은 속임이 장기이기 때문에 그의 용병 또한 뛰어나고, 군자는 속임이 장기가 아니기 때문에 용병 또한 뛰어나지 못하다.
만백曼伯 이하 몇몇 사람들이 승리를 거둔 방법은 같지 않으나 속임수를 쓴 것은 같았다.
이 몇몇 사람들이 만약 군자君子장자長者로 대처하였다면 어찌 그 을 이룰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유가儒家의 소인은 병가兵家의 군자이고 병가의 군자는 유가의 소인이니, 저 보잘것없는 충신忠信성실誠實이 어찌 손자孫子오기吳起의 문하에서 칭송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내가 대답하기를 “나는 우선 그 이치를 말한 것일 뿐인데 지금 그대는 전고前古의 일을 들어 나를 공박하니, 그대가 들어 말한 일로써 내가 말한 이치를 증험한다면, 군자가 아니면 용병을 잘할 수 없다는 것을 더욱 잘 알게 될 것이다.
춘추시대에 여러 장수들이 일시의 전공戰功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단지 소인小人으로서 소인을 만났기 때문이다.
만약 군자君子를 만났다면 비록 등 십여 국의 군사들을 모아 하나의 군대로 삼고, 만백曼伯자돌子突 등 10여 인의 지혜를 합쳐 한 장수에게 몰아주었더라도, 나는 군자가 여유작작하게 담소하며 지휘하였을 것을 안다.
내가 큰소리를 치며 사람들에게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 또한 이치의 필연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군자君子용병用兵에 있어 성심誠心을 다하지 않음이 없다注+이 한 주의主意이다..
세상에는 성심을 다하면서 경솔한 자는 있지 않으니注+성실하면 경거망동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적이 비록 유인하고자 한들 어찌 유인할 수 있으며注+탐욕을 부리면 적의 미끼에 걸린다는 말이다., 세상에는 성심을 다하면서 탐욕스러운 자는 있지 않으니注+성실하면 안정되고 어지럽지 않다는 말이다. 적이 비록 미끼로 유인하고자 한들 어찌 유인할 수 있으며注+어지러우면 적에게 교란당한다는 말이다., 세상에는 성심을 다하면서 요란한 자는 있지 않으니 적이 비록 교란시키고자 한들 어찌 교란시킬 수 있겠는가?
이 성심을 가지고서 군대를 위무한다면 군사들이 모두 의심하지 않을 것이니注+성심으로 사졸士卒을 어루만지면 사람마다 모두 진심으로 믿는다는 말이다.반간反間이 현혹시킬 수 없고注+적군敵軍이 비록 반간反間을 보내더라도 틈을 탈 기회가 없다는 말이다., 이 성심을 가지고서 방비한다면 군사들이 모두 태만하지 않을 것이니注+성실로 외환外患을 방비하여 막는다면 일마다 자세하고 정밀해진다는 말이다. 속임수가 그르칠 수 없을 것이다注+적군이 비록 속임수를 쓰려 해도 속임수를 시행할 방법이 없다는 말이다..
저들이 전에 승리를 거둔 것은注+춘추시대에 용병用兵을 잘하여 승리를 거둔 자들을 총론總論한 것이다. 적이 경솔한 틈을 이용해 쳐들어가고, 탐욕스러운 틈을 이용해 쳐들어가며, 요란한 틈을 이용해 쳐들어가고, 의심하는 틈을 이용해 쳐들어가며, 태만한 틈을 이용해 쳐들어갔기 때문이다注+성실하지 않으면 이 다섯 가지의 환난이 있으므로 적군이 승리하였다는 말이다..
하나의 이 확립되면 다섯 가지 환해患害가 모두 제거되어注+하나의 성심誠心만을 써서 다섯 가지 환해患害를 제거하는 것을 말한 것이다. 코뿔소가 그 뿔을 쓸 곳이 없고, 병사가 그 칼날을 찌를 곳이 없으며, 만백曼伯자돌子突의 무리가 그 속임수를 쓸 곳이 없었을 것이다.
어찌 만백‧자돌의 무리뿐이겠는가?
비록 예로부터 병법兵法을 안다고 하는 자들을 다 불러서 나의 을 포위하여 공격하게 하고注+고인古人 중에 용병을 잘했던 자를 모아서 〈그들로 하여금〉 우리를 포위하여 공격하게 한다는 것을 가정해 말한 것이다. 모여서 시끄럽게 떠들게 하여 백 가지 속임수를 쓰게 하더라도, 군자君子는 한결같이 에 마음을 다하여 대처할 뿐이며, 또 천 가지 속임수를 쓰게 하더라도 군자는 역시 한결같이 에 마음을 다하여 대처할 뿐이며, 또 만 가지 속임수를 쓰게 하더라도注+‘저들의 계책이 비록 무궁하더라도’의 뜻이다. 군자는 역시 한결같이 에 마음을 다하여 대처할 뿐이니注+용병에 다만 하나의 성심만을 쓸 뿐인데도 적군이 우리를 이길 수 없다는 말이다., 저들은 만 가지 속임수를 다 써도 승리할 수 없고注+속임수가 비록 많아도 쓸데가 없다. 그러므로 〈승리하기에〉 부족하다고 한 것이다., 나는 하나의 만을 지켜도 넉넉하니注+성심은 비록 간략하지만 지키기가 쉽다. 그러므로 넉넉하다고 한 것이다., 저들은 항상 수고롭고 나는 항상 편안하며注+속임수를 쓰기 때문에 수고롭고, 성심을 지키기 때문에 편안하다는 말이다. 저들은 항상 움직이고 나는 항상 고요하다注+속임수를 쓰기 때문에 움직이고, 성심을 지키기 때문에 고요하다는 말이다..
편안한 군대로써 수고로운 군대를 제압하고注+아군의 편안함으로 적군의 수고로움을 제압한다는 말이다. 고요히 지낸 군대로써 움직이는 군대를 제압하는 것이注+아군의 고요함으로 적군의 움직임을 제압한다는 말이다. 어찌 천하에 항상 승리할 수 있는 방도가 아니겠는가注+하나의 의 효과가 이와 같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천하에서 가장 용병을 잘하는 자를 논한다면 군자에게 돌리지 않을 수 없으니, 용병을 잘하는 자로는 본래 군자보다 뛰어난 자가 없다注+군자는 항상 승리하기 때문에 용병을 잘한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예부터 제적帝籍에 기록되고 경종景鍾에 새겨진注+이는 글의 결미結尾에 문장을 전환하여 신의新意를 일으킨 것이다. 대체로 상문上文의 논의가 비록 공명정대公明正大하다고 할 수 있으나 오활한 데에 가까우니, 모름지기 이렇게 반증하여야 바야흐로 문장이 문장다워진다. 〈이러므로〉 여기에 의문을 제기하여 ‘예로부터 전쟁에 승리하여 제적帝籍에 공적이 기록되고 경종景鐘에 이름이 새겨진 자들이 대부분 형벌을 받았던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은 이마에 검은 물을 들이는 것이고, 은 머리를 깎는 것이다. 자들 중에 이미 자자형刺字刑이나 체발형剃髮刑을 받고 도적이거나 장사치였던 자가 사책史冊에 수없이 기록되었고, 양공襄公注+희공僖公 22년에 보인다.진여陳餘注+사기史記》 〈진여열전陳餘列傳〉에 보인다. 무리가 매번 인의仁義로 인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된 것은注+ 양공襄公나라와 싸울 때에 부상당한 적에게 거듭 상처를 입히지 않았고 노인을 사로잡지 않았으며 적이 전열戰列을 이루기 전에 진격하지 않았다가 도리어 초나라에 패배당하였고, 성안군成安君 진여陳餘유자儒者로서 항상 의병義兵이라 칭하고 속임수를 쓰지 않았다가 도리어 한신韓信에게 사로잡혔다. 그렇다면 소인小人의 속임수가 승리한 것이고 군자君子의 성심이 패전한 것이다. 또 어째서인가?注+의문을 제기하고 아랫글에 답하였다.
대체로 소인小人의 술수를 다한 자라야 소인이라는 이름에 부끄러움이 없고注+소인小人의 술수를 다하는 자라야 바야흐로 진짜 소인이라고 답한 것이다., 군자君子를 다한 자라야 군자라는 이름에 부끄러움이 없다注+군자君子의 도를 다하는 자라야 바야흐로 진짜 군자이다. 그렇지 않다면 거짓 군자일 뿐이다..
세상에서 이른바 소인은 이미 소인의 술수를 다하여 소인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자이고, 세상에서 이른바 군자는 군자의 도는 얻지 못하고 군자라는 이름만 가탁假託한 자이다.
가짜 군자로서 진짜 소인을 상대하여注+초인楚人한신韓信 같은 진짜 소인小人 양공襄公진여陳餘 같은 가짜 군자君子가 상대하였다는 말이다. 하루 동안 지킨 성심을 가지고 백 년 동안 쌓은 속임수를 깨뜨리고자 하였으니注+하루 동안 성심을 지킨 것은 가짜 군자君子이고, 백 년 동안 속임수를 쌓은 것은 진짜 소인小人이다., 어찌 실패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注+그들이 패배를 취한 것이 당연하다는 말이다.
도끼를 들고 나무를 벨 때에 나무가 쓰러지지 않으면注+은 ‘불끄다’의 뜻이다. 도끼가 무디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만 나무가 도끼를 이긴다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으며, 한 잔의 물로 불을 끌 때에 불이 꺼지지 않으면注+물은 매우 적고 불이 난 곳은 매우 넓으므로 불을 끌 수 없는 것이다. 물의 양이 적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만 불이 물을 이긴다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注+불이 물을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찌 양공襄公의 무리로 인하여 드디어 군자君子용병用兵에 서툴다고 의심해서야 되겠는가?注+ 양공襄公진여陳餘성심誠心은 한 잔의 물과 같고, 초인楚人한신韓信의 속임수는 한 수레의 섶에 붙은 불과 같다. 이것을 인용하여 비유하였으니 매우 참신하다.


역주
역주1 [역주] (代)[伐] : 저본에는 ‘代’로 되어 있으나, 《春秋左氏傳》에 의거하여 ‘伐’로 바로잡았다.
역주2 [역주] 軍其前 : 그 전면을 공격하는 것이다.
역주3 [역주] 曼伯與子元 : 曼伯은 鄭 昭公 忽의 字이고, 子元은 鄭 厲公의 아들인데, 이들은 모두 鄭 莊公의 아들이다.
역주4 [역주] 不虞制人 : 制人은 曼伯과 子元의 군대이다. 不虞는 예측하지 못한 것이다.
역주5 [역주] 二公子 : 두 公子는 曼伯과 子元이다.
역주6 [역주] 不備不虞 不可以師 : 防禦策을 준비하지 않거나 不意의 災難을 미리 생각하지 않으면 군대를 거느리고 전쟁을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역주7 [역주] 君爲三覆以待之 : 覆은 伏兵이다. 먼저 세 곳에 군대를 埋伏하고서 戎兵의 추격을 기다리라는 말이다.
역주8 [역주] 戎輕而不整 貪而無親 : 戎兵은 경솔하여 그 隊伍가 整然하지 않고, 戎은 天性이 이익을 탐하여 서로 親睦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역주9 [역주] 乃可以逞 : 逞은 解結함이다. 통쾌하게 보복할 수 있다는 말이며, 이렇게 한 뒤에야 患難을 풀 수 있다는 말이다.
역주10 [역주] 韓服 : 巴國의 行人(使者)이다. 巴國은 巴郡 江州縣에 있다.
역주11 [역주] 鄾(우) : 지금의 鄧縣 남쪽에 위치한 沔水 북쪽에 있었다.
역주12 [역주] 鬪廉衡陳其師於巴師之中 以戰而北(배) : 衡은 橫이다. 巴師를 두 부대로 나누어 鬪廉이 그 사이에 楚師를 橫列로 배치하고 鄧師와 교전하다가 패전을 가장해 거짓으로 도망한 것이다. 北는 敗走하는 것이다.
역주13 [역주] (鄧)[鄾] : 저본에는 ‘鄧’으로 되어 있으나, 《春秋左氏傳》에 의거하여 ‘鄾’로 바로잡았다.
역주14 [역주] 鄀 : 鄀나라는 본래 商密에 있는 秦나라와 楚나라의 경계 사이의 小國이었는데, 뒤에 南郡 鄀縣으로 옮겼다.
역주15 [역주] (是)[楚] : 저본에는 ‘是’로 되어 있으나, 《春秋左氏傳》에 의거하여 ‘楚’로 바로잡았다.
역주16 [역주] (祈)[祁] : 저본에는 ‘祈’로 되어 있으나, 《春秋左氏傳》에 의거하여 ‘祁’로 바로잡았다.
역주17 [역주] (省)[者] : 저본에는 ‘省’으로 되어 있으나, 《春秋左氏傳》에 의거하여 ‘者’로 바로잡았다.
역주18 [역주] 盈其隧炭 陳以待命 : 隧는 出入하는 길이고, 炭은 불을 피운 숯이다. 불을 피운 숯을 隧道 사이에 두고서, 군대는 陣을 치고서 楚나라의 命을 기다리게 한 것이니, 그 守備가 嚴密했음을 말한 것이다.
역주19 [역주] 吳公子光 : 諸樊의 아들 闔廬이다.
역주20 [역주] 長鬣 : 수염이 많은 자이다. 吳人과 形狀이 다른 사람을 보내어 楚人으로 僞裝한 것이다.
역주21 [역주] 楚師亂 : 夜戰이라서 虛實을 알 수 없었고, 단지 吳人이 이미 배 옆에 潛伏한 것만을 보았다. 그러므로 楚軍이 混亂해진 것이다.
역주22 [역주] 子瑕卒 楚師熸 : 子瑕는 바로 令尹이다. 앓던 병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죽은 것이다. 吳나라와 楚나라 사이에서는 불이 꺼지는 것을 ‘熸’이라 하였다. 군대의 重責을 맡은 主將이 죽었기 때문에 그 軍人들의 氣勢(士氣)가 없어진 것이다.
역주23 [역주] 七國 : 楚‧頓‧胡‧沈‧蔡‧陳‧許이다.
역주24 [역주] 句踐 : 越王 允常의 아들이다.
역주25 [역주] (軍)[君] : 저본에는 ‘軍’으로 되어 있으나, 《春秋左氏傳》에 의거하여 ‘君’으로 바로잡았다.
역주26 [역주] (頸)[剄]〈也〉 : 저본에는 ‘頸’로 되어 있으나, 《춘추좌씨전》에 의거하여 ‘剄’으로 바로잡았다. 저본에는 ‘也’가 없으나, 《춘추좌씨전》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역주27 [역주] 闔廬傷將指 取其一屨 : 闔廬의 엄지발가락이 잘려나가 드디어 신발을 잃으니, 靈姑浮가 그 신발을 취한 것이다.
역주28 [역주] (之)[知] : 저본에는 ‘之’로 되어 있으나, 사고전서본에 의거하여 ‘知’로 바로잡았다.
역주29 [역주] 〈亦〉 : 저본에는 없으나, 사고전서본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역주30 [역주] 帝籍 : 황제의 功臣錄이다.
역주31 [역주] 景鐘 : 춘추시대 晉 景公이 주조한 鐘이다. 晉나라 대부 魏顆가 秦나라 장수 杜回를 사로잡은 전공을 그 종에 새겼으므로, 후세에 영원히 기념할 만한 大功의 뜻으로 쓰인다.
역주32 [역주] 宋襄 : 宋 襄公은 仁義를 행하는 군자로 자처하여 楚나라와 泓水에서 전쟁할 때에 선제공격할 수 있었는데도 인의를 지켜 공격하지 않았다가 楚軍에게 패전하였다. 송 양공이 楚人과 홍수에서 싸울 때 宋人은 이미 戰列을 이루었으나 楚人은 아직 홍수를 다 건너지 못하니 司馬가 攻擊하자고 하였으나 宋公은 허락하지 않았고, 초군이 홍수를 다 건너고 아직 전열을 이루지 못하였을 때 사마가 또 공격하자고 하였으나 송공은 허락하지 않았다. 초군이 전열을 이룬 뒤에 공격하였다가 송군이 大敗하자 國人이 모두 송공을 탓하니, 송공은 “君子는 상처 입은 敵을 거듭 찌르지 않고, 二毛(半白의 노인)를 포로로 잡지 않으며, 험한 地形을 이용해 적을 공격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는데, 송 양공의 일이 전쟁의 속성과 너무 맞지 않으므로 세상에서는 이를 비웃어 宋襄之仁이라고 한다. 《春秋左氏傳 僖公 22년》
역주33 [역주] 陳餘 : 韓信과 張耳가 병사 수만을 거느리고, 동으로 井陘에서 趙를 공격하였다. 趙王과 진여는 漢나라 군대가 쳐들어온다는 말을 듣고 정형에서 군사를 모아 대항코자 하였는데, 廣武君 李左車가 진여에게 ‘한신의 군대가 멀리 와서 싸우는지라 직접 싸우기보다는 후미의 군량미를 끊고, 수비만 하면서 버티면 결국 한신의 군대는 열흘이 못 되어 패주할 것’이라고 유세했다. 그러나 진여는 점잖은 사람이라 늘 의로운 군대라 칭하고 적을 속여서 기습하는 계책을 쓰지 않음을 자부하며 광무군의 말을 듣지 않았다. 한신이 이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하고는 곧 背水陣의 전술로 진여의 군대를 크게 패퇴시켰다. 《史記 張耳陳餘列傳》

동래박의(1) 책은 2023.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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