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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萊博議(4)

동래박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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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趙盾納捷菑于邾
【左傳】 文十四年이라 邾文公元妃齊姜 生定公하고 二妃晉姬 生捷菑하다 文公卒 邾人立定公하니 捷菑奔晉하다 하다
邾人辭曰 齊出貜且長이라하니 子曰 이면 不祥이라하고 乃還하다
物固有不可竝者 一事而是非竝이면 擇一焉可也 一人而褒貶竝이면 擇一焉可也 參是於非하고 等褒於貶이면 則其論闘䦧陵奪하야 無以自立於天下리라
信矣 說之不可竝也 竝其不可竝 豈君子樂爲異論哉
天下之言 固有相反而不可相無者하니 殆未易以前說律也 是非有時而竝存하고 褒貶有時而竝立하니 異而同하고 舛而合하며 戾而順하고 睽而逆 惟君子爲能言之 君子爲能一之
晉趙盾以諸侯之師 納捷菑于邾 鳴鐘擊鼓하며 至其城下 屈於邾人長少之義하야 徒手而還하니 責之者 咎其知之晩하고 獎之者 歎其改之勇이라
論者莫能竝也 吾以爲二說要當兩行然後可
治疾欲速 愈久愈侵이요 知非欲蚤 愈久愈謬 由是說이면 則盾可責이니 遇過之尙淺者 盍以此警之리오
已成之疚 難望其瘳 已成之非 難望其革이라 由是說이면 則盾可獎이니 遇過之旣深者 盍以此誘之리오
用前說警過之淺者하야 使不敢自堅하고 用後說誘過之深者하야 使不至自棄 缺一焉可乎哉
苟徒執一說이면 沒其獎而專其責하야 以謂盾也受愬之時 弗詢弗考하고 發命之時 弗慮弗圖하야 內興車甲하고 外勤諸侯하야 跋履山川하야 傅其國都而後反하니
盾意雖回 而旣憊之力 旣費之財 終不可回也
悔於邾 不若悔於晉이요 悔於郊 不若悔於都 悔於朝 不若悔於室이라
其悔彌遠이면 其失彌多 改過雖美라도 豈如無過之可改爲快哉
嗚呼 無疾則不必醫하고 無過則不必論이라 醫爲病設이요 論爲過設이라 使盾審之於初하야 師不出하고 過不形이면 則亦何論之有리오
惟其陷而能拔하고 迷而能反하야 棄前日之勞하고 成今日之決하니 此獎之之說 所以不可偏廢也
一言之尤 一筆之誤 或者猶諱其短而遂成之 況盾以明主之令 八百乘之賦 反見阻於蕞爾小國이라
驅馳暴露之疲 餫饋屝屨之耗 侯甸男邦之訾에도 勇於從義하야 皆不暇顧하니 是豈碌碌凡子所能
하고 하니 以强脅弱 自古而然이라
盾若挾晉之威하야 援周宋之比 邾將覆亡之不暇리니 何力之敢抗이리오
今見義之大하고 而忘邾之小하며 不念前功之可惜하고 惟知今失之當除하니 盾之大過人者此也
盖嘗觀戰國之際컨대 諸子蠭起 終身蔽蒙者 置不足議 至若宋淳于髠之徒하얀 皆親嘗爲孟子之所折壘摧陣衂矣 終不肯幡然儒服하고 竟自名其家하니라
是非不知操術之誤 反顧平生肄習之勤하야 未能決然捨也
彼於呻吟佔畢間에도 尙戀戀不肯棄 況輿師之衆으로 征伐之重乎 奬盾之義 宜吾之不敢廢也로다
吾嘗歷考世變컨대 冒甚厚之名 必就甚厚之實하고 辭甚厚之實 必避甚厚之名하니 其避其就 不出名實之兩端而已
盾之退師 將以避名耶ㄴ댄 則有輕率之 將以就實耶ㄴ댄 則無錙銖之獲하니 所避非名이면 則避者果何事 所就非實이면 則就者果何物 學者嘗試思之어다


조돈趙盾첩치捷菑나라로 들여보내다
문공文公 14년, 주문공邾文公원비元妃 제강齊姜정공定公을 낳고, 이비二妃 진희晉姬첩치捷菑를 낳았다. 주문공邾文公하자 주인邾人정공定公을 세우니, 첩치捷菑나라로 도망갔다. 나라 조돈趙盾제후諸侯의 군대 800을 거느리고서 첩치捷菑를 호송해 나라로 들여보내어 〈임금으로 세우게 하였다.〉
주인邾人사절辭絶하며 말하기를 “제녀齊女가 낳은 확차貜且(정공定公)가 연장자이기 때문에 그를 임금으로 세웠다.”고 하니, 선자宣子(조돈趙盾)는 “말이 사리事理에 맞는다. 그런데도 따르지 않는다면 상서롭지 못하다.”고 하고서 환군還軍하였다.
일에는 본래 함께 거론할 수 없는 것이 있다. 한 가지 일에 옳은 것도 있고 그른 것도 있다면 그중 하나를 선택해서 〈확정하는 것이〉 옳고, 한 사람에게 포장褒獎할 것도 있고 폄훼할 것도 있다면 그중 하나를 선택해서 〈결정하는 것이〉 옳다. 만약 옳고 그름을 뒤섞고 포장褒獎할 일과 폄훼할 일을 대등하게 논한다면 그 논평은 서로 모순되고 서로 공격적이어서 천하에 스스로 논리를 세울 수 없을 것이다.
진실이로다! 논설에는 시비是非를 함께 들어 논해서는 안 됨이여! 함께 거론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함께 거론하는 것이 어찌 군자가 논의를 달리하기를 즐겨서이겠는가.
그러나 천하의 언론에는 본래 서로 반대이지만 서로 없어서는 안 될 것이 있으니, 아마도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한〉 앞의 말로 쉽게 기준을 삼아서는 안 될 듯하다. 때로는 옳고 그름과 포장과 폄훼가 함께 존재하니, 다르면서 같고, 어긋나면서 부합하며, 사나우면서 순응하고, 반목하면서 맞이하는 것은 오직 군자만이 이 이치를 말할 수 있으며 군자만이 이를 동일하게 볼 수 있다.
나라 조돈趙盾제후諸侯의 군대를 거느리고서 첩치捷菑를 호송해 나라로 들여보낼 때 종을 울리고 북을 치며 성 아래에 이르렀으나, 주인邾人의 ‘적장자를 임금으로 세운다는 의리[長少之義]’에 굴복하여 빈손으로 돌아왔으니, 그를 질책하는 자는 그가 잘못을 늦게 안 것을 허물하고 그를 칭찬하는 자는 그가 잘못을 고친 용기에 감탄한다.
논평하는 자는 누구도 〈질책과 칭찬 두 설을〉 병합해 논하지 못하였으나, 나는 이 두 설이 양행兩行(어느 쪽도 편들지 않고 사리를 따져 동시에 논급論及함)한 뒤에야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병을 빨리 치료하고자 하는 것은 오래될수록 병이 더욱 심해지기 때문이고, 잘못을 빨리 알고자 하는 것은 오래될수록 더욱 잘못되기 때문이다. 이로써 논하면 조돈趙盾은 질책할 만하니 허물이 아직 경미한 자를 만나면 어찌 이것으로 경계하지 않겠는가?
이미 생긴 고질병은 쾌유를 기대하기 어렵고 이미 조성된 잘못은 고치기를 기대하기 어렵다. 이로써 말하면 조돈趙盾은 칭찬할 만하니 허물이 이미 심각한 자를 만나면 어찌 이것으로 인도하지 않겠는가?
전설前說을 가지고 허물이 경미한 자를 경계하여 그로 하여금 감히 스스로 고집을 부리지 못하게 하고, 후설後說을 가지고 허물이 심각한 자를 인도하여 그로 하여금 자포자기하지 못하게 해야 하니, 이 두 가지 중에 한 가지라도 없으면 되겠는가.
만일 한 가지 기준만을 고집한다면 칭찬할 만한 일은 묻어두고 오로지 질책할 점만을 들어 이렇게 비난한다. 조돈趙盾은 처음 〈첩치捷菑의〉 하소연을 들었을 때에 묻지도 않고 조사도 하지 않았고 출병을 명할 때도 깊은 생각과 원대한 계모計謀도 없이, 안으로 거마와 갑병을 일으키고 밖으로 제후의 군대를 근로勤勞시켜 산을 넘고 내를 건너 〈나라〉 국도國都에 다다른 뒤에 〈빈손으로〉 돌아왔다.
조돈趙盾이 비록 생각을 바꾸어 회군하였으나, 이미 지친 병력과 이미 허비한 재물은 끝내 만회할 수 없다.
나라에 가서야 후회하는 것이 나라에 있을 때 후회하는 것만 못하고, 원교遠郊에 가서야 후회하는 것이 국도國都에 있을 때 후회하는 것만 못하며, 조정에서 후회하는 것이 실내室內에 있을 때 후회하는 것만 못하다.
후회하는 장소가 멀어질수록 실수가 더욱 많아지니, 허물을 고치는 것이 설령 아름다운 일이라 해도 어찌 고칠 만한 허물이 없는 상쾌함만 하겠는가.
아! 병이 없으면 의원이 필요치 않고 허물이 없으면 논평이 필요치 않다. 의료醫療는 병 때문에 마련되고 논평은 허물 때문에 마련된 것이다. 가령 조돈趙盾이 초기에 잘 살펴서 군대가 출동하지 않고 허물이 형성되지 않았다면 또한 무슨 논평할 것이 있겠는가.
오직 그가 허물에 빠졌으나 스스로 벗어나고 미로를 헤맸으나 능히 돌아와서 전일의 노고를 버리고 오늘의 결단을 이루었으니, 이것이 그를 칭찬하는 말을 편폐偏廢(이것만 거론하고 저것은 버림)할 수 없는 이유이다.
한마디 말의 허물이나 짧은 한 문단의 오류에 대해서도 어떤 이는 오히려 그 결점을 숨기고서 마침내 허물로 만드는데, 하물며 조돈趙盾이 현명한 군주의 명령으로 800의 군대를 거느리고도 도리어 보잘것없는 작은 나라에 저지를 당한 것이겠는가.
말을 달리며 야영하는 피곤과 군수품을 운반하고 사용하는 소모와 여러 제후들의 비난에도 용감하게 를 따르고 〈나머지는〉 모두 돌아볼 겨를을 두지 않았으니, 이것이 어찌 평범한 사람이 할 수 있는 바이겠는가.
선왕宣王은〉 를 세워 을 대신하게 하고, 〈나라는〉 을 세워 의 자리를 빼앗게 하였으니, 강한 형세를 이용해 약한 자를 위협하는 것은 예로부터 그러했다.
만약 조돈趙盾나라의 위세를 믿고 나라와 나라가 했던 일을 끌어다가 비교해서 처리하였다면 나라는 망하기에도 겨를이 없을 것인데 무슨 힘이 있어 감히 반항하였겠는가.
그런데 지금 의 위대함만 보고 나라의 약소함은 잊었으며, 전공前功이 애석한 것은 생각지 않고 오직 지금의 잘못을 제거함이 마땅한 줄만 알았으니, 조돈趙盾이 사람들보다 크게 뛰어난 점이 바로 이것이다.
일찍이 전국시대戰國時代를 살펴보건대 제자백가諸子百家가 벌떼처럼 일어났으나 종신토록 사설邪說에 속은 자들은 의론할 가치도 없다. 그러나 〈변설가인〉 송경宋牼이나 순우곤淳于髡 같은 무리로 말하면 모두 일찍이 직접 맹자孟子에게 성루가 무너지고 전진戰陣이 꺾이는 패배를 당하였으되, 끝까지 자신의 주장을 바꾸어 유자儒者의 옷으로 갈아입으려 하지 않고, 마침내 스스로 학파를 명명命名하였다.
이는 자기의 학술이 옳지 않음을 모른 것이 아니라, 자신이 평생동안 부지런히 익혀온 것을 회고하며 결연히 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저들은 간편簡編을 읽고 읊조리는 사이에도 오히려 연연해하며 버리려 하지 않았는데, 하물며 많은 군대를 거느리고 정벌하는 중대한 일은 〈그 결정을 번복함이〉 어떠하였겠는가. 그러므로 조돈趙盾의 의로움을 칭찬하는 것을 내가 감히 폐기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내가 일찍이 세상의 변화를 두루 고찰하건대 두터운 명성을 가모假冒하는 자는 반드시 두터운 이익을 구하고, 두터운 이익을 사양하는 자는 반드시 두터운 명성을 피한다. 피함과 구함은 두 가지에서 벗어나지 않을 뿐이다.
조돈趙盾이 군대를 물린 것이 혹시[] 명성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경솔하다는 비난을 받았을 것이고, 혹시 실리를 취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한 푼의 수확도 없었을 것이다. 피한 것이 명성이 아니라면 피한 것이 과연 무슨 일이며, 구한 것이 실리實利가 아니라면 취한 것이 과연 무슨 일이란 말인가. 학자學者는 한번 생각해볼지어다.


역주
역주1 : 800乘은 60,000人이니, 힘이 넉넉함을 말한 것이다.〈杜注〉
역주2 : 저본에는 ‘宣’이 없으나, ≪春秋左氏傳≫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역주3 : 年長者를 嫡子로 세웠기 때문에 ‘辭順’이라고 한 것이다.〈杜注〉
역주4 : 저본에는 ‘辨’으로 되어 있으나, 三民書局本에 의거하여 ‘辦’으로 바로잡았다.
역주5 : 戱와 括은 魯나라 武公의 두 아들로 括이 형이고 戱가 동생이다. 魯 武公이 두 아들을 데리고 周 宣王을 알현하니 宣王이 주변의 간언에도 불구하고 戱를 세우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동생인 戱가 魯君이 되었으니, 이가 懿公이다. 뒤에 魯人이 懿公을 시해하고 장자인 括을 세우니 이가 魯 孝公이다.
역주6 : 突과 忽은 춘추시대 鄭 莊公의 두 아들로 忽이 형이고 突이 동생이다. 莊公이 죽자 太子 忽이 즉위하였으니, 이가 昭公이다. 突은 宋나라의 외손이다. 宋나라는 鄭나라 卿 祭仲이 忽을 세웠다는 말을 듣고, 祭仲을 宋나라로 유인해와서 잡아가두고는 突을 세우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하였다. 이때 宋나라는 강하고 鄭나라는 약했으므로 祭仲은 부득이 突을 세웠으니, 이가 厲公이다. 이 소식을 들은 昭公은 衛나라로 망명하였다. ≪史記≫ 〈鄭世家〉에 자세히 보인다.
역주7 : 저본에는 ‘硜’으로 되어 있으나, 四庫全書本에 의거하여 ‘牼’으로 바로잡았다.
역주8 : 저본에는 ‘機’로 되어 있으나, 四庫全書本에 의거하여 ‘譏’로 바로잡았다.

동래박의(4) 책은 2022.12.2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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