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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萊博議(4)

동래박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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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01 秦穆出師襲鄭
【左傳】 僖三十二年이라 杞子自鄭使告于秦曰 鄭人使我掌其北門之管하니 若潛師以來 國可得也리이다
穆公訪諸蹇叔한대 蹇叔曰 勞師以襲遠 非所聞也니이다 師勞力竭하고 遠主備之리니 無乃不可乎所爲 鄭必知之리니 勤而無所 必有悖心이리이다 且行千里 其誰不知리잇가
蹇叔之子與師러니 哭而送之曰 리라 殽有二陵焉하니 其南陵 必死是間이리니 余收爾骨焉하리라 秦師遂東하다
21-02-02 秦師過周北門
【左傳】 僖三十三年이라 라가 이러라
王孫滿尙幼러니 觀之하고 言於王曰 秦師輕而無禮하니 必敗리이다 輕則寡謀하고 無禮則脫이니 入險而脫하고 又不能謀 能無敗乎잇가
及滑하니 曰 寡君聞將步師出於敝邑하고 敢犒從者하노이다
孟明曰 鄭有備矣 不可冀也 攻之不克하고 圍之不繼리니 吾其還也로라 滅滑而還하다
【左傳】 晉原軫曰 秦違蹇叔하고 而以貪勤民하니 니이다 奉不可失이요 敵不可縱이니이다 縱敵이면 患生하고 違天이면 不祥이니 必伐秦師하소서
欒枝曰 未報秦施어늘 而伐其師
先軫曰 秦不哀吾喪하고 而伐吾同姓하니 릿가 吾聞之하니 一日縱敵이면 數世之患也라하니이다 ㄴ저 遂發命하다
【左傳】 夏四月 敗秦師于殽하야 獲百里孟明視西乞術白乙丙以歸하다 하니 公舍之하다
秦伯素服郊次하야 鄕師而哭曰 孤違蹇叔하야 以辱二三子하니 孤之罪也 하리라
21-02-03 秦使孟明爲政
【左傳】 文元年이라 晉人旣歸秦帥하니 秦大夫及左右皆言於秦伯曰 是敗也 孟明之罪也 必殺之하소서
21-02-04 晉秦戰彭衙 復用孟明
【左傳】 文二年이라 秦孟明視帥師伐晉하야 以報殽之役하다 二月 晉侯禦之하다
甲子 及秦師戰於彭衙하야 秦師敗績이로되 秦伯猶用孟明하니 孟明增修國政하야 重施於民하다
秦師又至 懼而增德하니 不可當也 이라하니 孟明念之矣로다 念德不怠하니 其可敵乎
21-02-05 秦濟河焚舟
【左傳】 文三年이라 秦伯伐晉할새 濟河焚舟하야 取王官及郊로되 晉人不出하니 遂自茅津濟하야 封殽尸而還하야 遂覇西戎하니 用孟明也
君子是以知秦穆之爲君也 擧人之周也하고 與人之하며 孟明之臣也 其不解也하고 能懼思也하며 子桑之忠也 其知人也하야 能擧善也
로다하니 秦穆有焉이라 이라하니 孟明有焉이라 라하니 子桑有焉이라
天下之事 以利而合者 亦必以利而離 秦晉連兵而伐鄭하니
燭之武出說秦穆公하야 立談之間 存鄭於將亡하고 不惟退秦師 而又得秦置戍而去注+又得秦置戍而去:僖三十年하니 何移之速也
燭之武一言 使秦穆背晉親鄭하야 棄强援附弱國하고 棄舊恩召新怨하며 棄成功犯危難하니 非利害深中秦穆之心이면 詎能若是乎
秦穆之於晉 相與之久也 相信之深也 相結之厚也로되 一怵於燭之武之利하야 棄晉如涕唾하니 亦何有於鄭乎
他日利有大於燭之武者 吾知秦穆必飜然從之矣리라
是則杞子襲鄭之謀 實燭之武有以開之也 擧鄭國之人 咸誦燭之武退兩國之師하고 續百年之祀於頰舌之間하니 孰知危亡之釁 亦已芽於武之頰舌乎
秦穆從燭之武之言而戍鄭者 非愛鄭也 利在焉故也 從杞子之言而襲鄭者 非憎鄭也 利在焉故也
心無晉鄭이요 惟利之趨 豈有輕絶數十年締交之晉하고 而反重結數年始附之鄭者乎 燭之武以利始之하고 杞子以利終之하니
使外無弦高之謀하고 內有三子之應이면 豈復有鄭乎 是燭之武之留戍 乃所以留禍 雖免國於晉이나 而輸國於秦也 君子之重言利 其以是哉ㄴ저
秦穆旣以利輕絶晉하니 亦必以利輕絶鄭이리라 利心一開 不能自窒하니 宜其蔑蹇叔之諫하고 而取殽之敗也
殽之役 說者或歸其曲於晉하야 以謂秦所襲者鄭이요 所滅者滑이라 於晉未有朝夕之急이로되 乃冒喪而邀之하니
吾以爲晉固可責이나 秦穆亦不得無罪焉이라 孫權與劉備約同伐劉璋 備方發被髮入山之辭以拒權하고는 不旋踵而自取之하니 此權所以深怨而有荊州之師也注+孫權與劉備……而有荊州之師也:見三國志
晉與秦同圍鄭 秦獨退師留戍以背晉하고는 不旋踵而自襲之하니 此晉所以深怨而有殽之師也
前則恐人分其利하고 後則以己專其利하니 最人情之所甚惡 知權之怨備 則知晉之怨秦矣 安可獨歸曲於晉乎
然秦穆懲殽之敗하야 仍用孟明하야 增修國政하야 竟刷大恥하니라 夫子驟列其悔過之誓於二帝三王之後者 抑有意焉이라 一悔可以破百非 一善可以滌百利
秦穆在春秋中하니 朝議暮貶이요 左瑕右玷하야 雖擢髮不足以數其罪어늘 及入於書하야는 則溫然粹然하야 不見微隙하니之秦穆이요 而非復春秋之秦穆也 聖人之勸深矣
自時厥後 晉有邲之敗注+晉有邲之敗:宣十二年하고 齊有鞍之敗注+齊有鞍之敗:成二年하며 楚有鄢陵之敗注+楚有鄢陵之敗:成十六年하고 其餘敗軍者 未易槪擧로되 如秦之懲敗而悔過者 則無聞焉이라 此書之所以止於秦也
繼秦穆而有悔過自誓之擧 則夫子之序書詎終於秦耶


목공穆公출사出師하여 나라를 습격하다
희공僖公 32년, 기자杞子나라에서 사람을 보내어 나라에 하기를 “정인鄭人이 우리에게 북문北門의 열쇠를 맡겼으니, 은밀히 군사를 이끌고 온다면 나라를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목공穆公건숙蹇叔을 찾아가서 이 일에 관해 물으니, 건숙蹇叔이 말하였다. “군대를 수고롭게 하여 먼 지방의 나라를 습격襲擊한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군대는 노고勞苦에 지쳐 힘이 고갈枯渴될 것이고, 먼 나라() 임금은 이를 대비할 것이니 불가不可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군대의 계획을 나라도 반드시 알고 있을 것이니, 군대들이 고생만 하고 얻는 것이 없으면 반드시 원망하는 마음[悖心]을 가질 것입니다. 그리고 또 천리千里 길을 가는데 그 누가 모르겠습니까?”
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맹명孟明서걸西乞백을白乙을 불러 군대를 거느리고 동문東門 밖에서 출발하게 하였다.
건숙蹇叔이 울면서 “맹자孟子야, 나는 군대가 나가는 것은 보지만 들어오는 것은 보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니, 이 사람을 보내어 건숙蹇叔에게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아느냐? 네가 중수中壽만 살고 죽었더라도 네 무덤 위에 심은 나무가 이미 한 아름은 되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때 건숙蹇叔의 아들도 그 군대 속에 끼어 있었다. 건숙蹇叔은 울면서 아들을 보내며 말하였다. “진인晉人은 반드시 우리 군대를 효산殽山에서 막을 것이다. 효산殽山에는 두 언덕이 있는데 남쪽 언덕은 하후夏后 의 무덤이 있는 곳이고, 북쪽 언덕은 문왕文王풍우風雨를 피했던 곳이다. 네가 반드시 이 두 언덕 사이에서 죽을 것이니 내가 〈그곳으로 가서〉 너의 뼈를 거두리라.” 진군秦軍은 드디어 동쪽을 향해 출발出發하였다.
진사秦師나라 북문北門을 지나다
희공僖公 33년, 진군秦軍나라의 북문北門을 지날 적에 〈천왕天王경의敬意를 표하기 위해〉 좌우左右가 투구를 벗고 수레에서 내렸다가 다시 뛰어올라 타는 그 수레의 수가 300이었다.
이때 아직 어린 왕손王孫 滿이 이 광경을 보고 에게 말하였다. “진군秦軍은 가볍고 무례無禮하니 반드시 패전敗戰할 것입니다. 가벼우면 계책計策이 부족하고 무례無禮하면 생각이 치밀하지 못하니, 험한 곳에 들어가면서 치밀하지 못하고 또 계책도 없다면 어찌 패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진군秦軍에 이르니 나라 상인商人 현고弦高나라로 장사하러 가다가 진군秦軍을 만났다. 현고弦高는 먼저 네 장의 가죽으로 〈진군秦軍에게 를 표한 뒤에〉 소 열두 마리를 주어 진군秦軍호궤犒饋하며 말하기를 “과군寡君께서 오자吾子(맹명孟明)가 군대를 거느리고 우리나라로 온다는 말을 들으시고 저를 보내어 종자從者(진군秦軍)를 호궤犒饋하게 하셨습니다.”라고 하였다.
맹명孟明이 말하기를 “나라가 대비하고 있으니 승리勝利를 바랄 수 없다. 공격하여도 이기지 못할 것이고, 포위하더라도 받쳐줄 후속부대가 없으니 나는 돌아갈 것이다.” 하고서, 을 격멸하고 환군還軍하였다.
나라 원진原軫이 말하였다. “ 목공穆公건숙蹇叔의 말을 듣지 않고 이익을 탐하여 백성을 수고롭게 하니, 하늘이 우리에게 기회를 준 것입니다. 하늘이 준 기회를 놓쳐서도 안 되고, 을 놓아주어서도 안 됩니다. 적을 놓아주면 화환禍患이 생기고 하늘의 뜻을 어기면 상서祥瑞롭지 못하니 반드시 진군秦軍을 토벌하소서.”
난지欒枝가 말하였다. “나라의 은혜를 아직 갚지 못했는데 진군秦軍을 토벌한다면 어찌 돌아가신 임금님(문공文公)을 위하는 것이겠습니까?”
선진先軫이 말하였다. “나라는 우리의 애도哀悼하지 않고 우리의 동성국同姓國을 토벌하였습니다. 나라가 이처럼 무례한데 은혜를 말할 게 뭐 있습니까? 내가 듣건대 ‘하루에 적을 놓아주면 몇 의 화환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나라를 치는 일은〉 자손子孫을 위한 계책이니 돌아가신 임금님을 배반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양공襄公은 드디어 명을 내렸다.
여름 4월에 〈진후晉侯는〉 효산殽山에서 진군秦軍패배敗北시키고서 백리맹명시百里孟明視서걸술西乞術백을병白乙丙을 잡아 데리고 돌아왔다. 문영文嬴이 세 장수의 방면放免을 요청하니, 은 이들의 방면을 허락하였다.
진백秦伯소복素服을 입고 교외郊外에서 기다리다가 〈맹명孟明 등이 이끌고 돌아온〉 군대를 향해 곡하며 말하기를 “내[]가 건숙蹇叔의 말을 듣지 않아 그대들에게 치욕恥辱을 끼쳤으니 나의 이다. 맹명孟明교체交替하지 않은 것도 나의 허물이니 대부大夫들에게 무슨 죄가 있는가? 그리고 나는 한 번의 과오過誤로 큰 공덕功德엄폐掩蔽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진백秦伯맹명孟明집정執政으로 삼다
문공文公 원년, 효산殽山의 전쟁이 끝난 뒤에 진인晉人이 포로로 잡은 나라의 장수將帥들을 돌려보내자 나라 대부大夫와 좌우의 신하들이 모두 진백秦伯에게 “이번 전쟁의 패배는 맹명孟明이니 반드시 그를 죽이소서.”라고 하였다.
진백秦伯이 말하기를 “이것은 나의 죄이다. 나라 예양부芮良夫에 ‘대풍大風이 지나는 곳에 〈온갖 물건 다 망가져〉 길이 생기듯이 탐욕스런 사람이 선한 사람을 해친다. 허튼 소리 들으면 기뻐하며 대답하나 좋은 말을 해주면 술에 취한 듯이 듣지 않는다. 양신良臣의 말을 듣지 않아 도리어 나로 하여금 패란悖亂한 짓을 하게 한다.’고 하였다. 이는 탐욕 때문이니 바로 나의 경우를 말한 것이다. 내가 실로 탐욕을 부려 부자夫子에게 를 끼친 것이니 부자夫子에게 무슨 죄가 있는가?”라고 하고서, 다시 그를 집정執政으로 삼았다.
팽아彭衙에서 전쟁할 때 진백秦伯이 다시 맹명孟明을 등용하다
문공文公 2년, 나라 맹명시孟明視가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나라를 토벌하여 효산殽山전쟁戰爭을 보복하였다. 2월에 진후晉侯(양공襄公)가 진군秦軍을 방어하였다.
갑자일甲子日팽아彭衙에서 진군秦軍교전交戰하여 진군秦軍대패大敗하였으되, 진백秦伯이 오히려 맹명孟明을 임용하니 맹명孟明은 더욱 국정을 닦아 백성들에게 두터운 은덕恩德을 베풀었다.
조성자趙成子대부大夫들에게 말하였다. “진군秦軍이 다시 오면 반드시 피해야 할 것이다. 〈패전敗戰의〉 두려움으로 인해 더욱 덕을 닦고 있으니, 이런 사람은 당할 수가 없다. 에 ‘너의 조상을 생각하여 그 덕을 닦으라.’고 하였는데, 맹명孟明이 이 를 염두에 두고 있다. 덕 닦기를 생각해 게을리 하지 않고 있으니, 그런 사람을 어찌[] 당할 수 있겠는가?”
진백秦伯황하黃河를 건넌 뒤에 배를 다 불태우다
문공文公 3년, 진백秦伯나라 토벌할 때 황하黃河를 건넌 뒤에 배를 다 불태우고서 왕관王官을 취하고 나라의 근교近郊에까지 갔으나 진군晉軍출전出戰하지 않자, 드디어 모진茅津에서 황하黃河를 건너 효산殽山의 전쟁에서 죽은 진군秦軍시신屍身을 수습해 매장埋葬하고서 환군還軍하였다. 〈이로부터 나라가〉 드디어 서융西戎패주覇主가 되었으니 이는 맹명孟明중용重用하였기 때문이다.
군자君子는 이로 인해 다음과 같은 것을 알았다고 하였다. “ 목공穆公이 임금 노릇 함에 있어 인재人才거용擧用함에는 모든 것을 두루 보고 거용한 인재를 신임信任[]하기를 한결같이 하였으며, 맹명孟明이 신하 노릇 함에 있어 게을리 하지 않고 〈지난 패전敗戰을〉 두려워하여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였으며, 자상子桑이 충성함에 있어 사람을 알아보고서 인재人才[]를 천거薦擧하였다.
에 ‘어디에서 쑥을 뜯는가? 연못가와 물가이지, 어디에 쓰는가? 공후公侯제사祭祀이지.’라고 하였는데 목공穆公에게 이런 점이 있고, 에 ‘밤낮으로 게을리 하지 않고서 한 사람만을 섬긴다.’고 하였는데 맹명孟盟에게 이런 점이 있고, 에 ‘후손을 위해 좋은 계모計謀를 남겨 자손을 편안하도록 도왔다.’고 하였는데, 자상子桑에게 이런 점이 있다.”
천하의 일은 이익으로 인해 서로 결합한 자는 또한 반드시 이익으로 인해 서로 분리된다. 나라와 나라가 군대를 연합해 나라를 토벌하니 정나라는 거의 망하게 되었다.
나라 대부大夫촉지무燭之武을 빠져나와 목공穆公에게 유세遊說하여 잠깐 동안 담론하는 사이에 거의 망해가는 나라를 보존시켰고, 진군秦軍을 물러가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 나라가 나라를 위수衛戍하는 군대를 남겨두고 돌아가게 하였으니,注+≪春秋左氏傳≫ 僖公 30년에 보인다. 어쩌면 정세를 전환시킴이 그리도 빨랐는가!
촉지무燭之武의 한 마디 말이 목공穆公으로 하여금 나라를 배반하고 나라를 가까이하여, 강한 원조국援助國을 버리고 약한 나라에 붙으며, 옛 은덕을 버리고 새로운 원한을 부르며, 성공을 포기하고 위난危難을 범하게 하였으니, 〈촉지무燭之武가 말한〉 이해利害 목공穆公의 마음에 깊이 부합하지 않았다면 어찌 이와 같이 할 수 있었겠는가.
목공穆公나라와 서로 사이좋게 지낸 지가 오래이며 서로 신임한 것이 깊으며, 서로 맺은 정이 두터웠는데도 한 번 촉지무燭之武가 말하는 이해에 유인[怵]되어 나라를 침 뱉듯이 버렸으니, 〈그런 나라가〉 어찌 나라에 관심을 두겠는가.
〈만약〉 후일에 촉지무燭之武가 말한 것보다 더 큰 이익이 있으면 목공穆公은 반드시 즉시 마음을 바꾸고서 그 이익을 쫓아갈 것을 나는 알겠다.
이로 보면 기자杞子나라를 습격한 음모는 실제로 촉지무燭之武가 인도한 것이다. 온 나라 사람은 모두 촉지무燭之武가 말재간으로 두 나라의 군대를 물리쳐 백년의 제사를 존속시킨 것을 칭송하니, 위망危亡의 조짐이 이미 촉지무燭之武의 말에서 싹튼 줄을 누가 알겠는가.
목공穆公촉지무燭之武의 말에 따라 군대를 보내어 나라를 지키게 한 것은 나라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이로웠기 때문이고, 기자杞子의 말에 따라 나라를 습격한 것은 나라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이로웠기 때문이다.
마음에는 나라나 나라에 대한 관심이 없고 오직 이익을 쫓을 생각뿐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찌 수십 년 동안 교분을 맺어온 나라와의 관계를 가볍게 끊어버리고, 도리어 몇 해 전에 비로소 귀부歸附나라와 거듭 관계를 맺을 리가 있었겠는가? 촉지무燭之武는 이익으로써 〈두 나라() 사이의 우호友好를〉 시작하게 하였고, 기자杞子는 이익으로써 〈두 나라 사이의 우호를〉 끝내게 하였다.
가령 밖으로 현고弦高나라 군대를 퇴각시킨 계모計謀가 없고 세 대부大夫나라 군대와 접응接應함이 있었다면 어찌 다시 나라가 있었겠는가. 이렇고 보면 촉지무燭之武진군秦軍을 남겨 나라를 위수衛戍하게 한 것은 바로 를 남긴 것이다. 비록 나라가 나라에 멸망하는 것은 면하였으나 나라를 나라에 바친 꼴이다. 군자君子를 말하기 어려워하는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인 듯하다.
목공穆公이 이미 이익으로 인해 가벼이 나라와의 관계를 끊었으니 또한 반드시 이익으로 인해 나라와의 관계도 가벼이 끊을 것이다. 이익을 탐하는 마음이 한 번 열리자 스스로 막을 수가 없었으니, 목공穆公건숙蹇叔간언諫言을 무시하여 효산殽山의 패전을 자초한 것이 당연하다.
효산殽山의 전쟁에 대해 논평하는 자 중에 혹자는 그 잘못을 나라에 돌려 “나라가 습격한 것은 나라이고 격멸擊滅한 것은 나라이며, 나라에 대해서는 당장의 위급한 상황도 없었는데 〈나라는〉 도리어 상중喪中을 무릅쓰고 진군秦軍을 요격하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나라도 응당 꾸짖어야 하지만, 목공穆公도 죄가 없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손권孫權유비劉備와 함께 유장劉璋을 치기로 약속하려 하자, 유비劉備는 “〈종실宗室동성同姓을 치느니〉 머리를 풀어 헤치고 산중으로 들어가겠다.”는 말로 손권孫權의 요구를 거절하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가서 을〉 취하였으니, 이것이 손권孫權유비劉備를 깊이 원망해 〈후일에〉 형주荊州를 습격해 탈취하는 전쟁이 있게 된 원인이 되었다.注+≪三國志≫에 보인다.
나라와 나라가 함께 나라를 포위할 적에 나라가 홀로 군사를 물리면서 나라를 위수衛戍하는 군사를 남겨두어 나라를 배반하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가서 나라를〉 습격하였으니, 이것이 나라가 나라를 깊이 원망해 효산殽山의 전쟁이 있게 된 원인이 되었다.
먼저는 다른 사람과 그 이익이 나뉠 것을 두려워하고, 뒤에는 그 이익을 자기가 독점하는 것이 인정에 가장 심히 미워할 바이다. 손권孫權유비劉備를 원망한 〈까닭을〉 안다면 나라가 나라를 원망한 까닭을 알 것이니 어찌 그 잘못을 유독 나라에게만 돌려서야 되겠는가?
劉備가 직접 益州牧을 점령하다[劉備自領益州牧]劉備가 직접 益州牧을 점령하다[劉備自領益州牧]
그러나 목공穆公효산殽山에서의 패전을 교훈으로 삼아 맹명孟明을 계속 임용해 국정國政을 더욱 닦아 마침내 대패했던 치욕을 씻었다. 공자孔子께서 〈≪상서尙書≫를 정리하실 때에 목공穆公이〉 허물을 뉘우친 서사誓辭이제삼왕二帝三王의 뒤에 갑작스레 열기列記하신 것은 아마도 뜻이 있는 듯하다. 한 번의 뉘우침이 백 가지 잘못을 제거할 수 있고, 한 번의 착한 생각이 백 가지 이욕을 씻어낼 수 있기 때문이리라.
춘추春秋≫ 가운데 실린 목공穆公의 〈기록을 보면〉 아침저녁으로 당하는 것이 비평과 폄척貶斥이고 좌우가 온통 흠투성이여서 비록 머리털을 다 뽑아도 그 죄를 세기에 부족한데, ≪상서尙書≫에 기입記入됨에 미쳐서는 온후溫厚하고 순정純正하여 털끝만한 흠도 볼 수 없다. 이는 〈요전堯典〉․〈대우모大禹謨〉․〈탕고湯誥〉․〈진서秦誓〉에 기록된 목공穆公이고, 다시 ≪춘추春秋≫에 기록된 목공穆公이 아니니 성인께서 후인後人을 권면하신 뜻이 깊다.
효산殽山의 전쟁〉 이후로부터 나라는 의 패전이 있었으며,注+≪春秋左氏傳≫ 宣公 12년에 보인다. 나라는 의 패전이 있었으며,注+≪春秋左氏傳≫ 成公 2년에 보인다. 나라는 언릉鄢陵의 패전이 있었으며,注+≪春秋左氏傳≫ 成公 16년에 보인다. 이 밖의 나라들도 패전한 경우를 다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았으되,〉 목공穆公처럼 패전을 교훈삼아 허물을 뉘우친 자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이것이 ≪상서尙書≫가 〈진서秦誓〉에서 끝난 까닭이다.
목공穆公의 뒤를 이어 허물을 뉘우치고서 스스로 맹서하는 일이 있었다면 공자孔子께서 ≪상서尙書≫를 정리하신 것이 어찌 〈진서秦誓〉에서 끝났겠는가?


역주
역주1 : 저본에는 ‘知’로 되어 있으나, ≪春秋左氏傳≫에 의거하여 ‘之’로 바로잡았다.
역주2 : 孟明은 百里孟明視이고, 西乞은 西乞術이고, 白乙은 白乙丙이다.〈杜注〉
역주3 : 蹇叔이 孟明을 불러 “나는 그대가 군대를 거느리고 나가는 것만을 볼 뿐, 그대가 군대를 거느리고 들어오는 것은 보지 못할 것이다.”고 말한 것이다.〈附注〉
역주4 : 穆公은 蹇叔이 출동하는 군대를 향해 곡한 것에 노하여 사람을 보내 그를 꾸짖은 것이다.〈附注〉 蹇叔이 出征하는 장수에게 不吉한 말을 하였다 하여 사람을 보내어 꾸짖은 것이다.
역주5 : 두 손을 벌려 껴안을 둘레를 ‘拱’이라 한다. 蹇叔이 지나치게 늙어 정신이 昏亂하니 그의 말이 쓸 만하지 못하다는 말이다.〈杜注〉 人生의 上壽는 120세, 中壽는 100세이고 下壽는 80세이다. 穆公은 그를 헐뜯어 “네가 中壽만 살고 죽었더라도 네 무덤 위의 나무가 이미 한 아름 굵기로 자랐을 것이다.”고 한 것이니, 곧 죽음이 이를 것이라는 말이다.〈附注〉 中壽에 관해서는 說이 분분하다. 孔疏에는 “上壽는 120세, 中壽는 100세, 下壽는 80세이다.”고 하였고, ≪莊子≫ 〈盜跖篇〉에는 “上壽는 100세, 中壽는 80세, 下壽는 60세이다.”고 하였고, ≪論衡≫ 〈正說篇〉에는 “上壽는 90세, 中壽는 80세, 下壽는 70세이다.”고 하였다. 여기에 말한 中壽는 80세 이하 60세 이상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楊注〉 이 말은 蹇叔은 老妄한 늙은이이므로 그 말을 신용할 수 없다는 뜻이다.
역주6 : 殽山은 弘農 澠池縣 서쪽에 있다.〈杜注〉 殽山은 지금의 函谷關이다.〈附注〉
역주7 : 皐는 夏桀의 祖父이다.〈杜注〉
역주8 : 이곳의 길이 두 언덕 사이의 南谷 가운데로 나 있는데, 골짜기가 깊고 꼬불꼬불하며 두 山이 서로를 향해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風雨를 피할 수 있다. 옛날에는 이 길을 經由하였는데, 魏 武帝(曹操)가 서쪽으로 巴漢(蜀漢)을 討伐할 때 이 길이 험한 것을 꺼려 다시 北山에 高道를 내었다.〈杜注〉
역주9 : 王城의 北門이다. 冑는 투구이다. 大將의 兵車가 아닌 경우에 御者는 가운데 앉아 수레를 몰기 때문에 左右만 내리고 御者는 내리지 않은 것이다.〈杜注〉 수레에는 세 사람이 타는데, 가운데 앉아 수레를 모는 사람을 ‘御’라 하고, 활을 들고 오른쪽에 탄 사람을 ‘車右’라 하고, 槍劍을 들고 왼쪽에 탄 사람을 ‘車左’라 한다. 左右는 바로 車左와 車右이다.
역주10 : 超乘은 수레로 뛰어올라 타는 것이다. 左右가 투구를 벗고 내렸다가 수레로 뛰어올라 탄 것은 수레에 속히 오르고자 해서인 듯하다.〈附注〉
역주11 : 商은 돌아다니며 장사하는 사람이다. 乘은 네 장의 가죽이다. 먼저 가죽을 주고 나서 소를 준 것이다. 옛날에 남에게 물건을 줄 때에는 반드시 작은 물건부터 먼저 주었다.〈杜注〉 弦은 姓이고 高는 이름이다. 周나라로 장사하러 가는 길이었다.
네 마리의 말을 ‘乘’이라 하기 때문에 乘을 四의 數로 사용한다. 남에게 물건을 줄 때에는 가벼운 물건을 중요한 물건에 앞서 먼저 주기 때문에 弦高가 秦軍을 犒饋할 때 먼저 네 장의 가죽을 준 뒤에 소 열 두 마리를 준 것이다.〈附注〉 犒饋는 군대에게 음식을 주어 위로함이다.
역주12 : 상대를 친숙하게 부르는 말인데, 여기서는 秦軍의 將帥 孟明 등을 이른 말이다.
역주13 : 奉은 與(줌)이다.〈杜注〉
역주14 : 임금이 죽었다 하여 秦나라의 은혜를 잊는다는 말이다.〈杜注〉 楊伯峻의 ≪春秋左傳注≫에는 兪樾의 말을 인용해 爲를 有(無視의 반대)로 보아, ‘文公이 입은 秦나라의 은혜를 보답하지 않고 도리어 秦나라를 치는 것은 先君(文公)을 무시하는 것’이라는 뜻으로 해석하였다.
역주15 : 秦나라가 우리에게 無禮한 짓을 하였으니 은혜를 돌아볼 것이 없다는 말이다.〈杜注〉
역주16 : 죽은 임금에 대한 背叛이라고 할 수 없다는 말이다.〈杜注〉
역주17 : 文嬴은 晉 文公이 처음 秦나라에 갔을 때 秦 穆公이 文公에게 아내로 준 夫人으로 襄公의 嫡母이다. 三帥는 孟明 등 세 사람이다.〈杜注〉 세 將帥의 放免을 요청한 것이다.〈附注〉
역주18 : 孟明을 버리지 않고 등용했다가 실패를 자초한 것도 나의 과실이라는 말이다.〈附注〉
역주19 : 한 번 敗戰한 작은 허물로 평생동안 세운 큰 功德을 掩蔽하지 않겠다는 말이다.〈附注〉
역주20 : 殽山의 전쟁은 僖公 33년에 있었다.
역주21 : 詩는 ≪詩經≫ 〈大雅 桑柔篇〉이다. 隧는 작은 길이다. 周나라 大夫 芮伯이 厲王을 풍자하여, 탐욕스런 사람이 善類를 해치는 것이 마치 大風이 지나가는 곳에는 衆物이 파괴되어 가는 곳마다 길이 생기는 것과 같다고 말한 것이다.〈杜注〉
역주22 : 昏亂한 임금은 經典을 외는 말을 좋아하지 않아, 이를 들으면 마치 술에 취한 듯이 행동하고, 근거 없는 허튼 소리를 들으면 좋아하며 대답한다는 말이다.〈杜注〉
역주23 : 覆은 反(도리어)이고, 俾는 使(하여금)이다. 良臣의 말을 채용하지 않아, 도리어 나로 하여금 悖亂한 짓을 하게 한다는 말이다.〈杜注〉
역주24 : 夫子는 孟明을 가리킨 것이다.〈附注〉
역주25 : 이것이 다음해에 秦나라가 晉나라와 彭衙에서 전쟁한 傳의 배경이다.〈杜注〉
역주26 : 成子는 趙衰이다.〈杜注〉
역주27 : 將은 當의 뜻으로 쓰였다.
역주28 : 詩는 ≪詩經≫ 〈大雅 文王篇〉이다. 그 祖考를 생각한다면 의당 祖考를 이어 덕을 닦아서 祖考를 빛나게 해야 한다는 말이다. 毋念은 念이다.〈杜注〉
역주29 : ≪春秋左氏傳≫에는 ‘壹’로 되어 있으니, 통용이다.
역주30 : 詩는 ≪詩經≫ 〈召南 采蘩篇〉이다. 연못가와 물가의 쑥은 지극히 보잘것없는 물건인데도 그것을 뜯어다가 公侯의 제사에 썼듯이 秦 穆公이 작은 장점[小善]도 버리지 않은 것을 비유한 것이다.〈杜注〉
역주31 : 詩는 ≪詩經≫ 〈大雅 蒸民篇〉인데 仲山甫를 讚美한 詩이다. 一人은 天子이다.〈杜注〉
역주32 : 詒는 遺이고 燕은 安이고 翼은 成이다. 詩는 ≪詩經≫ 〈大雅 文王有聲篇〉인데, 武王이 그 자손을 위해 훌륭한 計謀를 남겨 자손에게 安寧이 이루어지게 한 것을 찬미하였다. 子桑에게 인재를 천거한 計謀가 있음을 말한 것이다.〈杜注〉 “以燕翼子”는 〈杜注〉에는 翼을 成으로 해석하였으나, 譯者는 輔(도움)의 뜻으로 飜譯하였다.
역주33 : 將은 ‘거의’의 뜻으로 쓰였다.
역주34 : ≪尙書≫의 〈堯典〉․〈大禹謨〉․〈湯誥〉․〈秦誓〉 등을 이른다.

동래박의(4) 책은 2022.12.2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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