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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萊博議(3)

동래박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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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박의(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15-04 周公閱聘魯
[左傳]僖三十年이라 王使周公閱來聘하다 하니
辭曰 則有備物之享하야 以象其德하고
薦五味하며 하야 하나니 吾何以堪之릿가
身者寄也 者身之寄也 是道家者流之論也 人自送丞相長史로되厭其勞注+張君嗣厭其勞:見本傳하고
魯自待宰周公이나 而姬閱辭其享하야 認而有之하니 非惑耶
信如是言이면 則有宰周公而又有姬閱이니 是身與位爲二也
視身與位爲二 故指飮故人 按故人者爲兩事注+蘇孺文視身與位爲二……按故人者爲兩事:見本傳
道將視身與位爲二 故指殺弟哭弟者爲兩人注+(荀)[苟]道將視身與位爲二 故指殺弟哭弟者爲兩人:見本傳이라 傷恩敗敎하야 其禍有不可勝言者 非二之罪耶
儒者之論則進是矣 居其位而無其德이면 爲身之羞 居其位而黜其禮 爲位之羞
身者 一夫之私也 位者 萬世之公也 周公閱以德薄自하야 不敢受魯之享하니
抑不思所居者上宰之官이요 所持者天子之節이요 所享者先王之禮
今徒以一夫之無德으로 而廢萬世之常尊하니 是避身之羞而爲位之羞也
是知身之當其禮 而不知身之不足當其位也 如愧之인댄 莫若亟去其位
位則受之하고 禮則辭之 受其大而辭其細하니 豈不甚可責耶
以儒者之論으로 而責周公閱이면 固無所逃罪 然吾有所矜焉이로라
周公之位 自周文公之沒 居其位者不知其幾人也 使于四方하야 享昌歜白黑形鹽之享者 又不知其幾人也어늘
彼豈皆德與禮稱하야 受之而無愧耶 晏然居之하고 欣然樂之 未聞有一人以德薄辭者
至周公閱之居此官受此享 怵惕內愧하야 對大賓大客之前 痛自羞薄하야 不敢少安하니
其不能辭位固可責이나 吾未嘗不獨矜其愧心之猶在也로라
其視前後數公 旣不辭位하고 又不辭禮하야 驕泰奢侈者컨대 豈不賢耶
其視道家者流 傲誕荒唐하야 視身與位爲二物者컨대 豈不賢耶
范鞅一陪臣이로되 猶索十牢於禮之外注+范鞅一陪臣 猶索十牢於禮之外:하고 周公閱以天子之宰 乃肯辭備物於禮之內어늘
儒者不矜其愧心而責其迹하니 吾(切)[竊]恨儒者之不恕也로라
然旣曰 知愧矣라하니 不愧其大而愧其細 獨何歟 吾又未見儒者之不恕也로라


周公 나라로 와서 聘問하다
僖公 30년, 겨울에 周公 나라로 보내어 와서 聘問하였다. 그를 접대하는 에 창포김치[昌歜]‧흰쌀[]‧검은 기장[]‧호랑이 모양으로 깎은 소금[形鹽]이 올라 있으니,
周公 이 사양하며 말하였다. “國君文治四方에 드러날 만하고, 武功이 사람들을 畏服시킬 만하면, 여러 가지 음식을 갖추어 접대하여 그의 文德象徵하고,
五味嘉穀과 호랑이 모양으로 깎은 소금을 올려 武功을 상징하는 것이니, 내가 어찌 이를 감당하겠습니까?”
몸은 寄託하는 것이고, 軒冕은 몸이 기탁하는 것이라는 말은 바로 道家者流論說이다.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丞相長史를 전송하는데도 張君嗣는 전송하는 빈객을 접대하는 노고를 싫어하였고,注+三國志≫ 〈蜀志 張裔傳〉에 보인다.
나라가 자발적으로 宰周公을 접대하는데도 姬閱은 그 宴享을 사양하여, 응당 그렇게 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였으니 이것은 迷惑이 아닌가?
진실로 이 말대로라면 宰周公이라 하고 또 姬閱이라 하였으니, 이는 몸과 職位를 나누어 둘로 여긴 것이다.
蘇孺文은 몸과 職位를 나누어 둘로 보았기 때문에 故人(벗)에게 술을 접대한 것과 故人의 죄를 심문한 것을 두 가지의 일로 여긴 것이다.注+後漢書≫ 〈蘇章傳〉에 보인다.
苟道將은 몸과 職位를 나누어 둘로 보았기 때문에 아우를 죽인 자와 아우의 죽음을 곡하는 자를 兩人으로 여긴 것이다.注+晉書≫ 〈苟晞傳〉에 보인다. 은혜를 해치고 교화를 망쳐 災禍가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 몸과 직위를 나누어 둘로 여긴 죄가 아니겠는가?
儒者의 도리로 논하면 仕進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그 職位에 있으면서 그에 걸맞는 이 없으면 몸의 치욕이 되고, 그 직위에 있으면서 그에 걸맞는 를 물리치면 직위의 치욕이 된다.
몸은 한 사람의 私有物이지만 직위는 만세의 公有物이다. 周公 은 자기의 淺薄한 것을 스스로 부끄럽게 여겨 감히 나라의 饗宴을 받지 않았으니,
이는 자기가 있는 자리가 上宰官位이고 가지고 있는 것이 天子가 내린 符節이고 받는 饗宴이 선왕의 제정한 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지금 단지 한 사람이 無德하다 하여 만세토록 영원히 높여야 할 爵位를 폐기하였으니, 이는 몸의 치욕을 피하기 위해 직위의 치욕으로 돌린 것이고,
이는 몸이 그 를 담당하기에 부족한 것만을 알고, 몸이 그 직위를 담당하기에 부족한 것은 모른 것이다. 만약 부끄러워한다면 즉시 그 직위를 버려야 한다.
직위는 받아들이고 饗禮는 사양하는 것은 큰 것(직위)은 받아들이고 작은 것(향례)은 사양한 것이니, 어찌 매우 책망할 일이 아니겠는가?
儒者의 논리를 가지고 周公 을 꾸짖는다면 진실로 그 죄를 피할 길이 없다. 그러나 나는 마음속으로 존경함이 있다.
周公職位周文公(姬旦)이 사망한 뒤로 그 직위에 있었던 자가 얼마인지 알 수 없을 만큼 많았고, 사방의 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창포김치‧흰 쌀‧검은 기장‧호랑이 모양으로 깎아 만든 소금의 饗宴을 받은 자가 또 얼마인지 알 수 없을 만큼 많았는데,
저들이 가 어찌 모두 서로 걸맞아서 그 향연을 부끄럼 없이 받아들일 만하였겠는가? 그런데도 편안한 마음으로 그 직위를 차지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그 향례를 즐겼고, 한 사람도 淺薄하다는 이유로 사양한 자가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
그런데 周公 은 이 관직에 있고 이 향례를 받을 때에 두렵고 부끄러워, 高貴賓客面對한 앞에서 비통해하며 스스로 덕이 천박한 것을 치욕으로 여겨 감히 조금도 편안히 있을 수 없었으니,
그가 직위를 사양하지 않은 것은 진실로 꾸짖을 만하지만, 나는 홀로 그에게 오히려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을 존경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의 행위를 전후의 몇몇 周公들의, 직위를 버리지도 향례를 사양하지도 않고 교만하고 사치한 것에 비교하면 어찌 훌륭하지 않은가?
그의 행위를 道家者流의 오만 放誕하고 황당하여 몸과 직위를 나누어 둘로 여긴 것에 비교하면 어찌 훌륭하지 않은가?
范鞅은 한낱 陪臣으로서 오히려 향례 밖의 十牢를 요구하였고,注+春秋左氏傳昭公 23년에 보인다. 周公 天子太宰로 끝내 향례 이내의 備物을 사양하였다.
그런데도 儒者들은 그의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존경하지 않고 그의 행적만을 꾸짖으니, 나는 마음속으로 儒者들의 寬恕하지 못함을 한스러워한다.
그러나 〈周公 이〉 이미 부끄러움을 안 것이라면, 큰 것은 부끄러워하지 않고 작은 것만을 부끄러워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儒者들이 이것을 꾸짖지 못하니〉 나는 또 儒者들이 ‘〈진정으로〉 寬恕하지 못함’을 보지 못했다.


역주
역주1 饗有昌歜(잠)白黑形鹽 : 昌歜은 菖蒲로 담근 김치이고, 白은 볶은 쌀이고, 黑은 볶은 기장이고, 形鹽은 호랑이 모양으로 깎은 소금이다.〈杜注〉
역주2 國君文足昭也 武可畏也 : 文德이 사람들에게 드러낼 만하고, 武德이 사람들을 畏服시킬 만하다는 말이다.〈附注〉
역주3 羞嘉穀 鹽虎形 : 嘉穀은 볶은 쌀과 기장인데, 그것으로 文德을 상징하고, 호랑이 모양으로 소금을 깎아 그것으로 武功을 상징한다.〈杜注〉 羞는 올림이다.〈附注〉
역주4 以獻其功 : 文武의 功을 상징한 것이다.〈杜注〉 獻은 象(상징)과 같은 뜻으로 쓰였다.(≪春秋左傳注≫)
역주5 軒冕 : 수레와 면류관으로 官位와 爵祿을 이른다.
역주6 張君嗣 : 이름은 裔로 蜀漢 成都 사람이다. 諸葛亮이 漢中에 있을 때에 張裔는 益州太守였다. 뒤에 제갈량에게 일을 자문하기 위해 한중으로 갈 때에 전송하는 사람이 수백 명이고 수레가 길을 메우니, 장예는 친한 벗에게 “근자에 길을 떠나기로 하였는데, 밤낮으로 賓客을 접대하다 보니 편이 쉴 수가 없다.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丞相長史를 존경하고, 男子 張君嗣는 그들을 친근히 대하다보니 피곤해 죽고 싶다.[近者涉道 晝夜接賓 不得寧息 人自敬丞相長史 男子張君嗣附之 疲倦欲死]”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三國志≫ 〈蜀志 張裔傳〉)
역주7 蘇孺文 : 이름이 章으로 東漢 사람이다. 漢 順帝 때 冀州刺史가 되었는데, 淸河太守로 있는 벗이 있었다. 蘇章은 管轄地域을 순행하며 太守의 姦贓을 조사한 다음, 太守를 초청해 술자리를 마련하고서 평소의 우정을 이야기하며 매우 즐거워하였다. 太守가 기뻐하며 “사람들에게는 모두 하나의 하늘이 있지만 나에게는 두 개의 하늘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자 蘇章은 “오늘 저녁에 蘇孺文이 벗과 술을 마신 것은 사사로운 恩情이고, 내일 冀州刺史로서 事件을 심문하는 것은 國法이다.”라고 하고서 마침내 벗의 罪를 거론하였다.(≪後漢書≫ 〈蘇章傳〉)
역주8 (荀)[苟]道將 : 이름은 晞로 晉나라 河內 사람이다. 苟晞가 都督靑兗諸軍事로 있을 때에 督護(鎭將의 副官)로 있는 그 姨母의 아들이 법을 범하니 苟晞는 刺史의 권한으로 그를 斬殺하였다. 그 이모가 머리를 조아리며 살려주기를 청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斬刑을 마치고는 素服으로 갈아입고 눈물을 흘리며 弔哭하면서 “그대를 죽인 자는 兗州刺史이고 아우의 죽음에 哭하는 자는 苟道將이다.”라고 하였다.(≪晉書≫ 〈苟晞傳〉)
역주9 (荀)[苟] : 저본에는 ‘荀’으로 되어 있으나, ≪晉書≫에 의거하여 ‘苟’로 바로잡았다.
역주10 (悅)[愧] : 저본에는 ‘悅’로 되어 있으나, 四庫全書本과 三民書局本에 의거하여 ‘愧’로 바로잡았다.
역주11 [不足] : 저본에는 ‘不足’이 없으나, 三民書局本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역주12 (切)[竊] : 저본에는 ‘切’로 되어 있으나, 四庫全書本과 三民書局本에 의거하여 ‘竊’로 바로잡았다.
역주13 昭二十三年 : 실제로는 昭公 21년의 일이다. ≪春秋左氏傳≫ 昭公 21년에 “여름에 晉나라 士鞅(范鞅)이 와서 聘問하니 이때 叔孫이 賓客 접대하는 일을 맡았다. 季孫은 叔孫을 晉나라에 밉보이게 하고자 하여 有司에게 齊나라 鮑國이 費邑을 가지고 왔을 때 접대했던 禮(七牢)로 士鞅을 접대하게 하자, 士鞅이 노하여 말하기를 ‘鮑國은 지위가 낮고 그 나라는 약소한데, 지금 나에게 그가 받았던 牢禮를 따르게 하니, 이는 우리 晉나라를 경시하는 것이다. 나는 장차 이 일을 우리 임금님께 보고하겠다.’고 하니, 魯人은 두려워하여 四牢를 추가하여 十一牢로 접대하였다.”라고 하였다. 范鞅은 晉나라 卿 士鞅이니 바로 范獻子이다. 陪臣은 諸侯의 大夫를 이른다. 牛‧羊‧豕를 갖춘 것을 一牢라 한다. 諸侯를 접대하는 禮는 七牢를 넘을 수 없는데, 范鞅은 제후의 대부로서 十牢를 요구하였으니, 饗禮의 限節을 벗어난 것이다.

동래박의(3) 책은 2020.12.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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