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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萊博議(1)

동래박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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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6 虞叔伐虞公
【左傳】桓十年이라 有玉이러니 虞公求한대 弗獻이라가 旣而悔之曰
周諺有之하니 〈曰〉 匹夫無罪 라하니 吾焉用此리오
其以라하고 乃獻之하다
又求〈其〉寶劍이어늘 叔曰 是無厭也
無厭이면 라하고 遂伐虞公하다
故虞公出奔하다
【主意】虞公以貪失國하고 虞叔以吝逐君 此二句 可爲此事之斷案이라
出新意하야 言人能以貪財之心而求道하고 以吝財之心而守道 則所得詎可璧이리오하니라
此是就當說中 發出新意하니 所以爲妙
虞公以貪失國注+求玉而又求劍 至於見逐하고 虞叔以吝逐君注+獻玉而不獻劍 至於伐君하니 貪與吝遇하야 此禍之所以成也
貪者惟恐不得人之物하고 吝者惟恐失己之物하며 貪者雖得萬金而不能滿하고 吝者雖失一金而不能忘이라
虞之君臣 上貪而下吝하야 貪者求之하고 吝者하니 亂安得而不作乎
然貪吝非二法也注+言二病同一體
視人之物則貪하고 視己之物則吝하며 未得而求之則貪하고 旣得而守之則吝하니 名雖不同이나 其心則同出於嗜貨焉注+虞公貪人之物 虞叔吝己之物 同一好貨之心이라
使虞公思吾求劍之心 卽虞叔守劍之心注+吾愛彼之劍 彼寧不自守乎이면 必不至於貪矣注+虞公能如此 則貪之病除 使虞叔思吾守劍之心 卽虞公求劍之心注+吾自愛其劍 彼豈不欲得之乎이면 必不至於吝矣注+虞叔能如此則吝之患消리라
惟其不能交相恕하고 而反相責注+恕 謂以己之心度人之心 相責則反是하니 此其所以釀莫大之釁也注+一貪一吝 成用兵伐君之禍
由古而曁今 人所以相戕相賊相刃相靡者 職此之由니라
吾將告貪者以廉하고 告吝者以施 庶幾其有瘳乎
嗚呼
彼方貪而吾告之以廉이면 是敎餓虎之不求肉也 彼方吝而吾告之以施 是將求肉於餓虎也 無益於彼 祗取辱焉이라
信如是 則果無術以救之乎
至理之中 無一物之可廢注+貪吝雖非美事 而皆有用處 人心之中 無一念之可除注+貪吝是非善心 亦人情所不能無니라
貪吝之念 苟本無邪 安從而有注+若以爲無 則人安得有貪吝者 苟本有邪 安得而無注+今旣有此貪吝之人 則亦安能盡除此念리오
是貪吝固不可强使之無注+人情不能어니와 然亦不必使之無也注+但要善用其貪吝耳니라
吾心一旦渙然氷釋注+心悟於差 渙然如春氷之消融이면 則曰貪曰吝 孰非至理哉注+善用之則皆至理也리오
蓋事有善惡이나 而念無善惡注+ 念生於中 此卽天理人欲同行異情之意이라
是念加於事之善者則名善念注+如貪吝之念 用之以好道 則爲善念矣이요 是念加于事之惡者卽名惡念注+貪吝之念 用之以好貨 則爲惡念矣이니 所謂念者 初無二也注+叔出貪吝之念 而所用則不同
譬之於火컨대 用之㸑釜則爲善하고 用之燎原則爲惡이라 然曷嘗有二火哉
譬之於水컨대 用之漑田則爲善하고 用之灌城則爲惡이나 然曷嘗有二水哉
世所以指虞公爲貪者注+此下一節 發明以治貪之說 以其求財不厭耳注+虞公貪 故爲惡念
苟用是念以求道不厭注+善用其貪 卽善念矣하야
立而不已注+共學適道 可與立矣 貪
之念 猶未已也하고 必求與權注+必求造於達權之變之妙하며 賢而不已注+ 貪道之念 猶未已也하고 必求爲聖注+求造於之境이면 則與夫子 何以異乎注+不厭則貪之意也
世所以指虞叔爲吝者注+此下一節 發明以吝治吝之說 以其守財欲不失耳注+虞叔吝財 故爲惡念
苟用是念以守道不失注+善用其吝 卽善念矣하야 與生俱生하야 欲不能遷注+當生而不爲物欲所移하고 與死俱死하야 威不能奪注+當死而不爲威武所屈이면 則與顔子服膺弗失 何以異乎注+勿失 卽吝之意也 服膺 謂珮服於心胸間
求財與求道相去遠矣 而所謂不厭者 其念未嘗加損也 守財與守道相去遠矣 而所謂不失者 其念未嘗加損也니라
向之惡 今之善注+好道 特因物而改其名耳注+物 事也 因事之善惡而改其名 吾之念曷嘗改哉注+其爲貪吝之念一也
人徒見其嘗名貪嘗名吝하고 遂疑而惡之하야 乃欲求道於是念之外하니
是猶惡焚而廢火하고 食惡溺而廢水飮也 誤矣


우숙虞叔우공虞公을 치다
환공桓公 10년, 당초에 우숙虞叔이 좋은 을 갖고 있었는데, 우공虞公이 그 을 달라고 요구하였으나 주지 않았다가 오래지 않아 후회하며 말하기를
나라 속담에 ‘필부匹夫에게 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옥벽玉璧을 가진 것이 죄이다.’라고 하였으니, 내게 이 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때문에 를 사게 될 것이다.”라고 하고서, 그 옥을 우공虞公에게 바쳤다.
우공이 또 보검寶劍을 요구하자, 우숙虞叔은 “이 사람은 욕심이 끝이 없어 만족을 모르는 사람이다.
만족할 줄 모르면 가 장차 나에게 미칠 것이다.”라고 하고서, 드디어 우공虞公을 쳤다.
그러므로 우공이 공지共池로 도망간 것이다.
우공虞公탐욕貪慾으로 인해 나라를 잃었고, 우숙虞叔인색吝嗇으로 인해 임금을 축출하였다.’는 이 두 구는 이 사건의 단안斷案이 될 만하다.
신의新意창출創出하여 “사람이 재물을 탐하는 마음으로 를 구하고 재물을 아끼는 마음으로 를 지킨다면, 얻는 것이 어찌 옥벽玉璧뿐이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는 논설하는 가운데 신의新意를 끄집어낸 것이니, 기묘奇妙하다 하겠다.
우공虞公탐욕貪慾으로 인해 나라를 잃었고注+을 요구하고 또다시 을 요구하였다가 축출당하는 데에 이르렀다.우숙虞叔인색吝嗇으로 인해 임금을 축출하였으니注+은 바쳤으나 은 바치지 않고서 임금을 치기까지 하였다., 탐욕과 인색이 서로 만나서 이 화란禍亂을 조성한 것이다.
탐욕스러운 자는 오직 남의 물건을 얻지 못할까 걱정하고 인색한 자는 오직 자기 물건을 잃을까 걱정하며, 탐욕스러운 자는 비록 만금萬金을 얻어도 만족하지 못하고 인색한 자는 비록 한 푼을 잃어도 잊지 못한다.
나라 군신君臣이 윗사람은 탐욕스럽고 아랫사람은 인색하여, 탐욕스런 자는 끝없이 요구하고 인색한 자는 죽기로 지켰으니, 화란이 어찌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탐욕과 인색은 각각 다른 두 가지 일이 아니다注+두 가지 병통은 같은 한 몸이라는 말이다..
남의 물건을 보고서 얻고 싶어 하는 것이 탐욕이고 자기 물건을 보고서 지키고자 하는 것이 인색이며, 얻지 못하여 얻기를 구하는 것이 탐욕이고 얻은 뒤에 죽기로 지키는 것이 인색이니, 이름은 비록 같지 않으나 그 마음은 다 같이 재물을 좋아하는 데서 나온 것이다注+우공虞公이 남의 물건을 탐한 것과 우숙虞叔이 자기 물건을 아낀 것은 똑같이 재화財貨를 좋아하는 마음이다..
가령 우공虞公이 자신이 을 요구한 마음이 바로 우숙虞叔이 검을 지키려는 마음임을 생각하였다면注+내가 그의 검을 좋아하듯이 그도 어찌 스스로 지키려 하지 않겠는가? 반드시 탐욕貪慾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고注+우공虞公이 이와 같이 할 수 있었다면 탐욕貪慾의 병통이 제거되었을 것이다., 가령 우숙이 자신이 검을 지키려는 마음이 바로 우공이 검을 요구한 마음임을 생각하였다면注+내가 스스로 나의 검을 아끼듯이 그도 어찌 얻기를 바라지 않겠는가? 반드시 인색吝嗇에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注+우숙虞叔이 이와 같이 할 수 있었다면 인색吝嗇의 병통이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저 두 사람은〉 자기 마음을 미루어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도리어 서로 꾸짖었으니注+는 나의 마음으로 남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다. 서로 꾸짖는 것은 이와 반대이다., 이것이 바로 더없이 큰 흔단釁端을 빚게 된 까닭이다注+한 사람의 탐욕貪慾과 한 사람의 인색吝嗇이 끝내 무력武力을 사용하여 임금을 치는 화를 만들었다..
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서로 죽이고 서로 해치며 서로 찌르고 서로 쓰러뜨린 것은 오로지 여기에서 연유하였다.
내가 장차 탐욕스러운 자에게 청렴淸廉을 말해주고, 인색한 자에게 베풂을 말해준다면, 탐욕과 인색을 고칠 가망이 있겠는가?
아!
저 사람이 바야흐로 탐욕스러운데 내가 그에게 청렴을 말해주면 이는 굶주린 호랑이에게 고기를 구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꼴이고, 저 사람이 바야흐로 인색한데 내가 베풂을 말해주면 이는 굶주린 호랑이에게 고기를 나누어달라고 요구하는 꼴이니, 저 사람에게는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고 다만 나 스스로 욕을 취할 뿐이다.
진실로 이와 같다면 과연 그들을 구제할 방법이 없는 것인가?
나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그 방법은 본래 다른 데서 찾을 것이 아니라, 도리를 탐하는 마음으로 재물을 탐하는 마음을 다스리고, 도리를 아끼는 마음으로 재물을 아끼는 마음을 다스리는 데 불과할 뿐이다.’
지극한 이치 중에는 한 가지 일도 버릴 것이 없고注+탐욕과 인색이 비록 아름다운 일은 아니지만 모두 유용한 곳이 있다., 사람 마음속에는 한 가지 생각도 버릴 것이 없다注+탐욕과 인색이 선심善心은 아니지만 인정人情에 없을 수 없는 것이다..
탐하고 아끼는 마음이 본래 없는 것이라면 탐욕과 인색이 어디에서 생겼겠으며注+만약 없다고 여긴다면 사람에게 어찌 탐욕과 인색이 있겠느냐는 말이다., 본래 있는 것이라면 탐욕과 인색을 어떻게 없앨 수 있겠는가?注+지금 이미 이렇게 탐욕스럽고 인색한 사람이 있다면 또한 어찌 이런 생각을 다 없앨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이와 같다면 탐욕과 인색은 본래 억지로 없앨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注+인정人情에 이것을 없앨 수 없다., 또 굳이 없앨 필요도 없는 것이다注+탐욕과 인색을 잘 쓰기를 구할 뿐이다..
내 마음에 쌓였던 탐욕과 인색이 하루아침에 얼음 녹듯이 다 풀리면注+마음으로 잘못을 깨달으면 봄날에 얼음이 녹듯 다 없어진다는 뜻이다. 탐욕과 인색이 어느 것인들 지극한 이치가 아니겠는가?注+잘 쓰면 모두 지극한 이치라는 말이다.
대체로 일에는 선악善惡이 있으나 생각에는 선악이 없다注+일은 밖(身外)에서 탐욕스럽게 되고 생각은 마음에서 생겨나니, 이것이 바로 천리天理인욕人慾이 함께 행해지지만 정황이 다르다는 것이다..
생각이 선한 일에 이른 것을 선념善念이라 하고注+탐욕과 인색의 생각을 도를 좋아하는 데에 쓰면 선념善念이 된다는 말이다., 생각이 악한 일에 이른 것을 악념惡念이라 하니注+탐욕과 인색의 생각을 재물을 좋아하는 데에 쓰면 악념惡念이 된다는 말이다., 이른바 ‘생각’이라는 것에 애당초 두 가지가 있는 것이 아니다注+우숙虞叔의 행위는 탐욕과 인색의 생각에서 나와서 쓴 곳이 다르다는 말이다..
이것을 불에 비유하면 불을 취사炊事에 쓰면 좋은 불이 되고, 들판을 태우는 데 쓰면 나쁜 불이 되는 것과 같으니, 그렇다면 어찌 불에 두 가지 불이 있겠는가?
물에 비유하면 농지를 관개灌漑하는 데 쓰면 좋은 물이 되고, 성읍城邑을 잠기게 하는 데 쓰면 나쁜 물이 되는 것과 같으니, 그렇다면 어찌 물에 두 가지 물이 있겠는가?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비록 두 가지인 것 같지만, 그 한 가지가 우뚝하게 두 가지 안에 홀로 존재하지 않은 적이 없다.
세상에서 우공虞公을 가리켜 탐욕스럽다고 하는 것은注+이하의 한 구절은 를 탐하는 마음으로 재물財物을 탐하는 마음을 다스리는 뜻을 천명闡明한 것이다. 그가 재물을 구하는 데 항상 만족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注+우공虞公은 재물을 탐하였기 때문에 악념惡念이 된 것이다..
만약 이 생각을 도를 구하는 데 사용하여 항상 만족해하지 않고서注+탐하는 생각을 한 곳에 쓰는 것이 바로 선념善念이다., 확고하게 설 수 있어도 그치지 않고注+함께 배워 도에 나아가고 함께 자립하게 되었어도 도를 탐하는 마음을 오히려 그치지 않음이다. 반드시 함께 권도權道를 행할 수 있기를 구하며注+반드시 하는 오묘한 이치를 통달하는 데 이르기를 구하는 것이다., 현인賢人이 되었어도 그치지 않고注+본성을 회복하여 보호해 지키니 현인賢人이라고 할 수 있는데도 도를 탐하는 생각을 오히려 그치지 않는 것이다. 반드시 성인聖人이 되기를 구하였다면注+반드시 ‘성언性焉’, ‘안언安焉’의 경지에 이르기를 구하는 것이다., 공자孔子의 ‘학이불염學而不厭(학문을 항상 만족해하지 않음)’과 무엇이 다르겠는가?注+불염不厭(만족해하지 않음)’이 바로 의 뜻이다.
세상에서 우숙虞叔을 가리켜 인색하다고 하는 것은注+이하의 한 구절은 를 아끼는 마음으로 재물財物을 아끼는 마음을 다스리는 뜻을 천명한 것이다. 그가 재물을 지켜 잃지 않고자 하였기 때문이다注+우숙虞叔은 재물에 인색하였기 때문에 악념惡念이 된 것이다..
만약 이 생각을 도를 지키는 데 사용하여 굳게 지켜 잃지 않고서注+그 인색을 한 곳에 쓰는 것이 바로 선념善念이다., 살아서는 도와 함께 공생共生하여 물욕物慾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注+살아서는 물욕物慾에 흔들림을 당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죽어야 할 때는 도와 함께 공사共死하여 위협이나 무력에 지조를 빼앗기지 않았다면注+죽어야 할 때는 죽어서 위협이나 무력에 굴복을 당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안자顔子의 ‘복응이물실服膺而勿失(가슴에 새겨 잊지 않음)’과 무엇이 다르겠는가?注+물실勿失’이 바로 ‘’의 뜻이다. ‘복응服膺’은 마음속에 깊이 새김이다. 《예기禮記》 〈중용中庸〉에 보인다.
재물財物을 구하는 것과 를 구하는 것이 서로 거리가 멀지만 이른바 ‘불염不厭(만족해하지 않음)’에는 그 생각이 덜하거나 더한 적이 없으며, 재물을 지키는 것과 도를 지키는 것이 서로 거리가 멀지만 이른바 ‘불실不失(잃지 않음)’에는 그 생각이 덜하거나 더한 적이 없다.
먼저의 과 지금의 注+를 좋아함을 이른다. 다만 일로 인하여 그 이름이 바뀌었을 뿐이니注+은 일이다. 일의 선악善惡에 따라 그 이름이 바뀌었다는 말이다., 나의 생각이 어찌 바뀐 것이겠는가?注+그 탐하고 아끼는 생각은 하나라는 말이다.
사람들은 일찍이 ‘’이라 명칭하고 ‘’이라 명칭한 것만을 보고서 드디어 의심하고 미워하여, 도를 이 생각(貪念) 밖에서 구하고자 한다.
이는 불이 가옥을 태우는 것을 미워하여 익혀 먹기를 포기하고, 물이 사람을 빠뜨리는 것을 미워하여 물 마시기를 포기하는 것과 같으니, 잘못이다.


역주
역주1 [역주] 虞叔 : 虞公의 아우이다. 虞는 姬姓의 나라로 公爵이다. 周 太王의 아들 仲雍의 후손을 周 武王이 虞에 封하였다.
역주2 [역주] 旃 : ‘之’와 같이 쓰였다.
역주3 [역주] 懷璧其罪 : 남이 그 璧을 탐하여 璧을 꼬투리로 죄를 만든다는 것이다.
역주4 [역주] 賈害 : 賈는 사는 것이다.
역주5 [역주] 將及我 : 장차 나를 죽일 것이라는 말이다.
역주6 [역주] 共池 : 地名인데, 어디인지 알 수 없어 所在地를 기록하지 않았다.
역주7 [역주] (劍)[創] : 저본에는 ‘劍’으로 되어 있으나, ‘創’의 오자인 듯하므로 ‘創出’로 번역하였다.
역주8 [역주] {故} : 精選本에 의거하여 衍文으로 처리하였다.
역주9 [역주] (共)[守] : 저본에는 ‘共’으로 되어 있으나, 사고전서본에 의거하여 ‘守’로 바로잡았다.
역주10 [역주] 〈與〉 : 저본에는 ‘與’자가 없으나, 사고전서본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역주11 [역주] (救)[終] : 저본에는 ‘救’로 되어 있으나, ‘終’의 오자인 듯하므로 ‘끝내’로 번역하였다.
역주12 不過以貪治貪 以吝治吝而已 : 此一句 後面一截矣 : 未詳이라 번역하지 않았다.
역주13 [역주] (炙)[無] : ‘灸’는 ‘無’의 오자인 듯하므로 이에 따라 번역하였다.
역주14 [역주] 事貪於郊 : ‘貪’은 오자인 듯하나 자세하지 않으므로 우선 저본대로 해석하였다.
역주15 [역주] 雖若爲二 而其一未嘗不卓然獨存于二之中也 : 未詳이다.
역주16 [역주] (令)[貪] : 저본에는 ‘令’으로 되어 있으나, ‘貪’의 오자이다.
역주17 [역주] (則)[財] : 저본에는 ‘則’으로 되어 있으나, 문맥을 살펴 ‘財’로 바로잡았다.
역주18 [역주] 〈常〉 : 저본에는 ‘常’자가 없으나, 사고전서본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역주19 [역주] 立而不已 必求與權 : 《論語》 〈子罕〉에 “함께 배울 수는 있어도 함께 도에 나아갈 수는 없고, 함께 도에 나아갈 수는 있어도 함께 설 수는 없으며, 함께 설 수는 있어도 함께 權을 할 수는 없다.[可與共學 未可與適道 可與適道 未可與立 可與立 未可與權]”라는 말이 보이는데, 朱子의 集註에 “ ‘立’은 道에 自立하는 것이고, ‘權’은 사물의 輕重을 헤아려 中道에 맞게 처리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역주20 [역주] (用)[道] : 저본에는 ‘用’으로 되어 있으나, ‘道’의 오자인 듯하다.
역주21 [역주] 復焉執焉 可謂賢矣 : 周敦頤의 《通書》에 “復焉執焉之謂賢”이란 말이 보인다. 復焉은 본성을 회복하는 것이고, 執焉은 본성을 보호해 지키는 것이다.
역주22 [역주] (及)[必] : 저본에는 ‘及’으로 되어 있으나, ‘必’의 오자인 듯하다.
역주23 [역주] 性焉安焉 : 《通書》에 “性焉安焉之謂聖”이란 말이 보인다. 性焉은 本性이 온전하여 修習할 필요가 없음이고, 安焉은 힘쓰지 않아도 모든 善이 저절로 행해짐이다.
역주24 [역주] 學而不厭 : 《論語》 〈述而〉에 “배우기를 싫어하지 않으며 사람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 중에 무엇이 나에게 있는가?[學而不厭 誨人不倦 何有於我哉]”라는 말이 보인다. 不厭을 일반적으로 ‘싫어하지 않음’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東萊는 위에 ‘求財常不厭’과 ‘求道不厭’을 말하면서 이 말을 인용하였으니, ‘不厭’을 不饜(만족해하지 않음)의 뜻으로 이해한 것이다. 후대의 《論語》 註釋書에는 ‘不饜’의 뜻으로 해석한 책이 많다.
역주25 [역주] 出記中庸 : 《中庸》에 “顔回의 사람됨은 中庸을 선택하여 한 善을 얻으면 받들어 지켜 가슴에 새겨 잊지 않는다.[回之爲人也 擇乎中庸 得一善 則拳拳服膺而弗失之矣]”라고 하였다.

동래박의(1) 책은 2023.12.1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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