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孝經注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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爲之棺椁衣衾而擧之하며
속널[]과 덧널[] 및 수의壽衣천금天衾(시신을 관에 넣고서 덮는 이불)을 만들어서, 〈시신을〉 들어 〈속널[]에 넣으며〉,
[注]周尸爲棺이요 周棺爲椁이라 謂斂衣 被也 謂擧屍內於棺也
시신을 둘러싸는 것이 속널[]이고, 속널을 둘러싸는 것이 덧널[]이다. (수의)는 염습殮襲할 때 입히는 옷이고, (천금)은 이불이다. 는 시신을 들어 에 넣음을 말한다.
陳其簠簋而哀慼之하며
簠簋(宋板 六經圖)簠簋(宋板 六經圖)
보궤簠簋(제기祭器들)를 진설해놓고서 슬퍼하며,
[注]簠簋 祭器也 陳奠素器호되 而不見親이라 故哀慼也
제기祭器이다. 옻칠하지 않은 나무 그릇으로 을 진설하건만 어버이를 볼 수 없기 때문에 슬프다.
擗踊哭泣하야 哀以送之하며
여자는 가슴을 치고 남자는 발을 구르며 곡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슬퍼하며 보내고,
[注]男踊女擗하야 祖載送之
남자는 발을 구르고 여자는 가슴을 치면서 널을 상여에 싣고 조전祖奠(발인 전에 을 올려 영결을 고함)을 올려 장송葬送한다.
卜其宅兆而安措之하며
점을 쳐서 묏자리를 잡아 안장安葬하며,
[注]宅 墓穴也 塋域也 葬事大 故卜之
묘혈墓穴(무덤에서 시체가 놓이는 구덩이)이고, 묘역墓域이다. 장사葬事는 중대하기 때문에 점을 쳐서 묏자리를 잡는다.
爲之宗廟하야 以鬼하며
종묘를 만들어서 귀신을 섬기는 로 제향하며,
[注]立廟之後 則以鬼禮享之
사당을 세워 〈아버지 신주를〉 할아버지의 신주와 함께 모아 〈제사하고 종묘에 모신〉 뒤에는 귀신 섬기는 로 제향한다.
春秋祭祀하야 以時思之하나니라
봄가을로 제사하여 철 따라 생각한다.
[注]寒暑變移 益用增感하니 以時祭祀하야 展其孝思也
더위와 추위가 바뀔 때에 느낌이 더욱 더하므로 철 따라 제사하여 효심孝心을 편다.
[疏]‘爲之’至‘思之’
의 [위지爲之]부터 [사지思之]까지
○正義曰:此言送終之禮及三年之後宗廟祭祀之事也. 言孝子送終, 須爲棺椁衣衾也.
정의왈正義曰:이는 장사葬事 지내는 와 3년 뒤에 종묘에서 제사하는 일을 말한 것이다. ‘효자孝子가 장사를 지낼 때는 속널과 덧널 및 수의와 천금天衾을 만들어야 한다.
大斂之時, 則用衾而擧尸, 內於棺中也. 陳設簠簋之奠, 而加哀慼. 葬則男踊女擗, 哭泣哀號以送之.
대렴大殮할 때 천금天衾으로 시신을 감싸 들어서 속널 안에 넣는다. 제기祭器을 진설하면서 더욱 슬퍼하고, 매장할 때면 남자는 발을 구르고 여자는 가슴을 치면서 눈물을 흘리며 하고 슬피 울부짖으며 장송葬送한다.
親旣長依丘壟, 故卜選宅兆之地而安置之. 旣葬之後, 則爲宗廟, 以鬼神之禮享之. 三年之後, 感念於親, 春秋祭祀, 以時思之也.
어버이가 이미 산소에 길이 의지〈해야 할 상황이〉 되었으므로 점을 쳐서 묏자리를 잡아 안장安葬한다. 매장한 뒤에는 종묘를 만들어 귀신을 섬기는 로 제향한다. 3년 뒤부터는 어버이가 그리워서 봄가을로 제사하여 철 따라 생각한다.’라는 말이다.
[疏]○注‘周尸’至‘棺也’
의 [주시周尸]부터 [관야棺也]까지
○正義曰:云“周尸爲棺 周棺爲椁”者, 此依鄭注也. 檀弓稱 “葬也者, 藏也. 藏也者, 欲人之弗得見也.
정의왈正義曰:[주시위관 주관위곽周尸爲棺 周棺爲椁] 이는 정현의 를 따른 것이다. ≪예기禮記≫ 〈단궁檀弓〉에 “(감춤)이니, 감추는 것은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是故衣足以飾身, 棺周於衣, 槨周於棺, 土周於槨.” 注約彼文, 故言 “周尸爲棺, 周棺爲槨”也.
이 때문에 옷으로 충분히 몸을 가리고, 속널[]로 옷을 둘러싸고, 덧널[]로 속널을 둘러싸고, 흙으로 덧널을 둘러싼다.”라고 하였다. 〈≪효경≫의 이〉 는 저(〈단궁〉의) 글을 요약한 것이다. 이 때문에 “시신을 둘러싸는 것이 속널[]이고, 속널을 둘러싸는 것이 덧널[]이다.”라고 하였다.
백호통白虎通≫에는 “의 뜻은 (완전함)이니, 완전하여 빈틈없어야 한다. 의 뜻은 (넓음, 텅 빔)이니, 빈 공간을 두어 흙이 속널에 닿지 않게 한다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易繫辭曰 “古之葬者, 厚衣之以薪, 葬之中野, 不封不樹, 喪期無數. 後世聖人易之以棺槨.”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에는 “옛날에 장사葬事 지낼 때는 섶나무로 두껍게 둘러싸서 들 가운데 매장할 뿐 봉분封墳도 만들지 않고 나무도 심지 않았으며 상기喪期에 일정한 기한이 없었는데, 후대의 성인聖人이 속널과 덧널을 사용하는 것으로 바꾸었다.”라고 하였다.
案禮記云 “有虞氏瓦棺. 夏后氏堲周. 殷人棺槨. 周人牆置翣.” 則虞夏之時, 棺槨之初也.
살펴보건대 ≪예기禮記≫ 〈단궁 상檀弓 上〉에 “나라(임금이 세운 나라) 때는 도관陶棺을 사용했고, 나라 때는 벽돌을 구워 도관陶棺 주위를 감쌌으며, 나라 사람들은 속널과 덧널을 사용했고, 나라 사람들은 널[영구靈柩] 바깥에 유의柳衣(상여 위에 덮는 베 휘장)를 덮고 운삽雲翣(영구靈柩 앞뒤에 세우는, 구름무늬를 그린 부채 모양의 널판)을 꽂았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우나라 때 속널을 처음 사용하고 하나라 때 덧널을 처음 사용한 것이다.
云“衣 謂斂衣 衾 被也 擧 謂擧屍內於棺也”者, 此依孔傳也. 衣謂襲與大小斂之衣也. 衾謂單被覆尸‧薦尸所用.
[의 위렴의衣 謂斂衣 금 피야衾 被也 거 위거시내어관야擧 謂擧屍內於棺也] 이는 공안국의 을 따른 것이다. 과 대렴‧소렴에 사용하는 옷이고, 은 시신을 덮는 데와 시신 밑에 까는 데 사용하는 홑이불을 말한다.
從初死至大斂, 凡三度加衣也. 一是襲也, 謂沐尸竟, 著衣也. 天子十二稱, 公九稱, 諸侯七稱, 大夫五稱, 士三稱.
막 사망했을 때부터 대렴까지 옷을 모두 세 번 덧입힌다. 첫째는 으로, 시신을 목욕시키고 나서 옷을 입힘을 말한다. 천자는 12, 은 9칭, 제후는 7칭, 대부는 5칭, 는 3칭이다.
襲皆有袍, 袍之上, 又有衣一通朝祭之服, 謂之一稱. 二是小斂之衣也, 天子至士, 皆十九稱, 不復用袍, 衣皆有絮也.
할 때는 모두 (평상시에 입는 긴 옷)가 있는데, 위에 또 1조복朝服 또는 제복祭服이 있는 것을 1칭이라고 한다. 둘째는 소렴小斂 때의 옷으로, 천자부터 까지 모두 19칭이다. 이때는 더 이상 를 사용하지 않고, 옷에 모두 솜을 둔다.
三是大斂也, 天子百二十稱, 公九十稱, 諸侯七十稱, 大夫五十稱, 士三十稱, 衣皆襌袷也.
셋째는 대렴大斂으로, 천자는 120칭, 은 90칭, 제후는 70칭, 대부는 50칭, 는 30칭인데, 이때의 옷은 모두 솜을 두지 않은 홑옷이다.
喪大記云 “布紟二衾, 君大夫士一也.” 鄭玄云 “二衾者, 或覆之, 或薦之, 是擧屍所用也.”
예기禮記≫ 〈상대기喪大記〉에 “삼베로 만든 홑이불 2개〈를 사용하는 것은〉 임금‧대부‧가 똑같다.”라고 하였는데, 정현이 “이불 2개 중 하나로는 시신을 덮고 나머지 하나는 시신 밑에 까는데, 이것이 시신을 들 때 〈이불을〉 사용한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棺槨之數, 貴賤不同. 皇侃據檀弓, 以“天子之棺四重”, 謂 “水‧兕革棺‧杝棺一, 梓棺二.
속널과 덧널의 수는 신분에 따라 다르다. 황간皇侃은 ≪예기禮記≫ 〈단궁檀弓〉에 의거하여 ‘천자의 속널 4’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물소 가죽으로 만든 속널, 들소 가죽으로 만든 속널, 나무로 만든 속널 1개씩과 가래나무로 만든 속널 2개이다.
最在內者水牛皮, 次外兕牛皮, 各厚三寸, 爲一重, 合厚六寸. 又有杝棺, 厚四寸, 謂之椑棺, 言.
가장 안에 있는 것이 물소 가죽으로 만든 것이고, 그 다음 밖에 있는 것이 들소 가죽으로 만든 것인데, 두께가 각기 3치[]이다. 〈둘을 합한 것이〉 1이 되는데 합한 두께가 6치이다. 또 나무로 만든 속널이 있는데, 두께가 4치이다. 비관椑棺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옻칠을 했다는 뜻이다.
前三物爲二重, 合一尺. 外又有梓棺, 厚六寸, 謂之屬棺, 言連屬內外. 就前四物爲三重, 合厚一尺六寸.
앞의 세 가지가 2이 되는데, 합한 두께가 1자[]이다. 밖에 또 가래나무[]로 만든 속널이 있는데, 두께가 6치이다. 속관屬棺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안팎을 잇는다는 뜻이다. 앞의 네 가지가 3이 되는데, 합한 두께가 1자 6치이다.
外又有梓棺, 厚八寸, 謂之大棺, 言其最大, 在衆棺之外. 就前五物爲四重, 合厚二尺四寸也.
밖에 또 가래나무로 만든 속널이 있는데, 두께가 8치이다. 대관大棺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속널들 중에〉 가장 커서 여러 속널 밖에 있다는 뜻이다. 앞의 다섯 가지가 4이 되는데, 합한 두께가 2자 4치이다.
上公去水牛皮, 則三重, 合厚二尺一寸也. 侯‧伯‧子‧男又去兕牛皮, 則二重, 合厚一尺八寸.
상공上公은 물소 가죽으로 만든 속널을 제외하므로 3이고 합한 두께가 2자 1치이다. 은 〈여기에서〉 또 들소 가죽으로 만든 속널을 제외하므로 2이고 합한 두께가 1자 8치이다.
上大夫又去椑棺, 一重, 合厚一尺四寸. 下大夫亦一重, 但屬四寸, 大棺六寸, 合厚一尺.
상대부上大夫는 〈여기에서〉 또 비관椑棺을 제외하므로 1이고 합한 두께가 1자 4치이다. 하대부下大夫도 1이지만, 속관屬棺이 4치이고 대관大棺이 6치이므로 합한 두께가 1자이다.
士不重, 無屬, 唯大棺六寸. 庶人卽棺四寸.” 案檀弓云 “栢槨以端, 長六尺”, 又喪大記曰 “君松槨, 大夫栢槨, 士雜木槨”, 是也.
는 속널을 겹으로 하지 않아서 속관屬棺이 없고 오직 대관大棺 6치뿐이다. 서인은 속널 4치뿐이다.” 살펴보건대 〈단궁〉에 “잣나무로 된 덧널[]은 밑동으로 만들고 길이가 6자이다.”라고 한 것과, 또 〈상대기〉에 “임금은 소나무로 만든 덧널, 대부는 잣나무로 만든 덧널, 는 잡목으로 만든 덧널〈을 사용한다.〉”라고 한 것이 이것(에서 말한 덧널)이다.
[疏]○注‘簠簋’至‘慼也’
의 [보궤簠簋]부터 [척야慼也]까지
○正義曰:“簠簋 祭器也”者, 周禮舍人職云 “凡祭祀, 供簠簋, 實之陳之.”
정의왈正義曰:[보궤 제기야簠簋 祭器也] ≪주례周禮≫ 〈사인舍人〉의 직무에 “모든 제사에 보궤簠簋를 공급하여, 음식을 담아 진설하게 한다.”라고 하였는데,
是簠簋爲器也. 故鄭玄云 “方曰簠, 圓曰簋, 盛黍稷稻器.”
보궤簠簋제기祭器이다. 이 때문에 정현이 “네모난 것을 라 하고, 둥근 것을 라 한다. 기장과 피[], 벼와 메조를 담는 그릇이다.”라고 하였다.
云“陳奠素器 而不見親 故哀慼也”者, 檀弓云 “奠以素器, 以生者有哀素之心也.”
[진전소기 이불견친陳奠素器 而不見親 고애척야故哀慼也] 살펴보건대 ≪예기≫ 〈단궁檀弓〉에 “옻칠하지 않은 나무 그릇으로 을 올리는 것은, 살아있는 사람은 〈예의에 신경 쓸 겨를이 없이〉 몹시 슬픈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又案陳簠簋在“衣衾”之下, “哀以送”之上, 舊說以爲 “大斂祭是不見親, 故哀慼也.”
또 살펴보건대 ‘보궤簠簋를 진설해놓는다’는 말이 ‘수의壽衣천금天衾을 만든다’는 말 뒤, ‘슬퍼하며 보낸다’는 말 앞에 있는데, 구설舊說에 “대렴大斂을 행하고 지내는 제사에는 〈더 이상〉 어버이를 뵐 수 없기 때문에 슬프다.”라고 하였다.
[疏]○注‘男踊’至‘送之’
의 [남용男踊]부터 [송지送之]까지
○正義曰:案問喪云 “在牀曰尸, 在棺曰柩. 動尸擧柩, 哭踊無數.
정의왈正義曰:살펴보건대 ≪예기禮記≫ 〈문상問喪〉에 “〈죽은 이가〉 침상에 있는 것을 시신[]이라 하고, 속널[]에 들어 있는 것을 영구靈柩[]라고 한다. 시신을 움직이거나 영구를 들 때면 수없이 곡하고 발을 구른다.
惻怛之心, 痛疾之意, 悲哀志懣氣盛, 故而踊之. 婦人不宜(祖)[袒],
측은한 마음과 애통한 생각으로 구슬픈 뜻과 기운이 가득하고 성하기 때문에 웃통의 한 쪽을 벗고 발을 구른다. 부인은 웃통의 한 쪽을 벗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
故發胷‧擊心‧爵踊‧殷殷田田, 如然.” 則是女質不宜極踊, 故以擗言之. 據此女旣有踊, 則男亦有擗, 是互文也.
이 때문에 가슴을 펴 심장 부위를 두드리고 팔짝팔짝 뛰어 쿵쿵거리는 소리가 마치 담장에 흙을 북돋아 다지는 것 같이 한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여자는 신체 조건 상 끝까지 발을 구르는 것이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가슴을 친다고〈만〉 말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여자에게도 발을 구르는 행동이 있으므로 남자에게도 가슴을 치는 행위가 있다. 이는 호문互文(가 되는 양쪽 글에서 한쪽씩 번갈아 드러냄으로써 숨겨진 부분을 유추하게 한 문장)이다.
云“祖載送之”者, 案旣夕禮, 柩車遷祖, 質明設遷祖奠, 日側徹之, “乃載”. 鄭注云 “乃擧柩郤下而載之.”
[조재송지祖載送之] 살펴보건대 ≪의례儀禮≫ 〈기석례旣夕禮〉에, 영구를 조상의 사당으로 옮기는 절차는, 날이 밝으려 할 때 천조전遷祖奠을 배설하고 해가 기울기 시작할 때(미시未時) 거둔 다음 “비로소 상여에 영구를 싣는다.”라고 하였는데, 정현의 주에 “비로소 영구를 들어 〈에서〉 내려와 〈상여에〉 싣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又云, 商祝飾柩, 及陳器訖, “乃祖”. 注云 “還柩鄕外, 爲行始.” 又檀弓云 “曾子弔於負夏, 主人旣祖.”
〈〈기석례〉에〉 또 상축商祝(예법을 잘 알아서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이 영구를 꾸미고 명기明器(부장품副葬品) 진설이 끝나면 “비로소 조전祖奠을 지내고”라고 하였는데, 에 “영구의 방향을 돌려 밖으로 향하게 하여 길을 나서기 시작함[]을 〈고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예기≫ 〈단궁〉에 “증자曾子부하負夏(나라의 지방)에 가서 조문弔問했는데 주인이 이미 조전祖奠[]을 마치고”라고 하였다.
鄭云 “祖謂移柩車去載處, 爲行始.” 然則祖, 始也. 以生人將行而飮酒曰祖, 故柩車旣載而設奠, 謂之祖奠. 是祖載送之之義也.
〈이에 대해〉 정현이 “는 상여를 옮겨, 영구를 실은 곳을 떠나 길을 나서기 시작함[]을 〈고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시작함)이다. 산 사람이 길을 떠나려 할 때 술을 마시〈며 전송하〉는 것을 라고 한다. 이 때문에 상여에 영구를 실은 다음 설행하는 조전祖奠이라고 한다. 이것이 널을 상여에 싣고 조전祖奠을 올려 장송하는 의미이다.
[疏]○注‘宅墓’至‘卜之’
의 [택묘宅墓]부터 [복지卜之]까지
○正義曰:云“宅 墓穴也 兆 塋域也”者, 此依孔傳也. 案士喪禮“筮宅”, 鄭云 “宅, 葬居也.”
정의왈正義曰:[택 묘혈야宅 墓穴也 조 영역야兆 塋域也] 이는 공안국의 을 따른 것이다. 살펴보건대 ≪의례儀禮≫ 〈사상례士喪禮〉에 “점을 쳐서 묏자리[]를 정한 다음”이라고 하였는데, 정현이 “은 매장할 곳이다.”라고 하였다.
詩云 “臨其穴, 惴惴其慄.” 鄭云 “穴謂冢壙中也.” 故云“宅, 墓穴也.” 案周禮冢人 “掌公墓之地, 辨其兆域.” 則兆是瑩域也.
시경詩經≫ 〈진풍 황조秦風 黃鳥〉에 “그 구덩이[]에 임하여, 두려워 벌벌 떠는구나.”라고 하였는데, 정현이 “은 무덤의 광중壙中(시체가 놓이는 구덩이)을 말한다.”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묘혈墓穴(무덤에서 시체가 놓이는 구덩이)이고”라고 한 것이다. 살펴보건대 ≪주례周禮≫ 〈총인冢人〉에 “왕실의 묘지를 담당하여 그 묘역墓域[조역兆域]〈의 범위〉를 변별한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묘역墓域이다.
云“葬事大 故卜之”者, 此依鄭注也. 孔安國云 “恐其下有伏石, 涌水泉, 復爲市朝之地, 故卜之”, 是也.
[장사대 고복지葬事大 故卜之] 이는 정현의 주를 따른 것이다. 공안국이 “그(묏자리) 아래에 바위가 묻혀 있거나 물이 솟거나 또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번화한 곳이 될까 염려스럽기 때문에 점을 친다.”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疏]○注‘立廟’至‘享之’
의 [입묘立廟]부터 [향지享之]까지
○正義曰:立廟者, 卽禮記祭法, 天子至士皆有宗廟, 云“王立七廟, 曰考廟‧曰王考廟‧曰皇考廟‧曰顯考廟‧曰祖考廟, 皆月祭之.
정의왈正義曰:사당을 세운다는 것은 곧 ≪예기禮記≫ 〈제법祭法〉에 천자天子부터 까지 모두 종묘宗廟가 있다고 한 것으로, 그 내용이 다음과 같다. “천자는 7를 세우니, 아버지 사당, 할아버지 사당, 증조부 사당, 고조부 사당, 시조始祖의 사당에는 모두 매달 제사를 지내고,
遠廟爲祧, 有二祧, . 諸侯五廟, 曰考廟‧曰王考廟‧曰皇考廟, 皆月祭之.
먼 조상의 사당이 (장차 체천遞遷해야 할 신주를 모신 사당)인데, 두 개()의 가 있으며 계절마다 제사하는 데 그친다. 제후는 5를 세우니, 아버지 사당, 할아버지 사당, 증조부 사당에는 모두 매달 제사를 지내고,
顯考廟‧祖考廟, 享嘗乃止. 大夫立三廟, 曰考廟‧曰王考廟‧曰皇考廟, 享嘗乃止.
고조부 사당과 시조始祖의 사당에는 계절마다 제사하는 데 그친다. 대부는 3를 세우니, 아버지 사당, 할아버지 사당, 증조부 사당에 계절마다 제사하는 데 그친다.
적사適士(상사上士)는 2이니, 아버지 사당과 할아버지 사당에 계절마다 제사하는 데 그친다. 관사官師(일반 관원)는 1이니, 아버지 사당이다. 서인은 사당이 없다.”
斯則立宗廟者, 爲能終於事親也. 舊解云 “宗, 尊也. 廟, 貌也. 言祭宗廟, 見先祖之尊貌也.”
그렇다면 종묘를 세우는 것은 어버이 섬기기를 잘 마무리하기 위함이다. 옛 해설에 “(높음)이고, (모습)이니, ‘종묘宗廟에 제사하여 선조의 높은 모습을 뵙는다.’라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故祭義曰 “祭之日, 入室, 僾然必有見乎其位, 周還出戶, 愾然必有聞乎其歎息之聲”, 是也.
예기禮記≫ 〈제의祭義〉에 “제사하는 날 〈신위가 있는〉 묘실廟室에 들어가면 어버이의 모습이 어렴풋이 꼭 보이는 듯하고, 〈예를 행하고〉 문 밖으로 돌아 나올 때면 어버이의 말씀이 엄숙히 꼭 들리는 듯하고, 문을 나와서 들으면 어버이의 한숨 쉬는 소리가 꼭 들리는 듯하다.”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祔祖, 謂以亡者之神, 祔之於祖也. 檀弓曰 “卒哭曰‘成事’. 是日也, 以吉祭易喪祭. 明日, 祔祖父.”
부조祔祖’는 돌아가신 분(아버지)의 신주를 할아버지의 신주와 함께 모아 〈제사하고 종묘에 모시는〉 것을 말한다. ≪예기禮記≫ 〈단궁檀弓〉에 “졸곡卒哭 때 축문에 ‘〈상제喪祭길제吉祭로 바뀌는 일이〉 완료되었다.[성사成事]’라고 쓴다. 이날 상제喪祭길제吉祭로 바꾸고, 이튿날 〈아버지 신주를〉 할아버지 신주와 함께 모아 〈제사하고 종묘에 모신다.〉”라고 하였다.
則是卒哭之明日而祔, 未卒哭之前皆喪祭也. 旣祔之後, 則以鬼禮享之. 然宗廟謂士以上, 則春秋祭祀兼於庶人也.
그렇다면 졸곡 다음날 할아버지 신주와 함께 모아 〈제사하고 종묘에 모시는〉 것으로, 졸곡 전에는 모두 상제喪祭인 것이다. 할아버지 신주와 함께 모아 〈제사하고 종묘에 모신〉 뒤로는 귀신 섬기는 예로 제향한다. 그러나 종묘는 이상에 대해 말한 것이고, 봄가을의 제사는 서인까지 아울러 말한 것이다.
[疏]○注‘寒暑’至‘思也’
의 [한서寒暑]부터 [사야思也]까지
○正義曰:案祭義云 “霜露旣降, 君子履之, 必有悽愴之心, .
정의왈正義曰:살펴보건대 ≪예기禮記≫ 〈제의祭義〉에 “〈가을에〉 서리와 이슬이 내려 군자가 그것을 밟고 반드시 서글픈 마음이 생기는데, 이는 춥다는 말이 아니〈라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이 간절하다는 말이〉다.
春, 雨露旣濡, 君子履之, 必有怵惕之心, 如將見之”, 是也.
봄에 비와 이슬이 대지를 적시면 군자가 그것을 밟고 반드시 깜짝 놀라는 마음이 생겨 마치 돌아가신 어버이를 〈다시〉 뵐 듯이 생각된다.”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역주
역주1 : 고문본에는 ‘亨’으로 되어 있다. 이때 ‘亨’은 ‘享’의 통용자이다.
역주2 祔祖 : 喪期가 끝난 신주를 종묘에 들이는 것으로, 卒哭 뒤에 祔祭(망자의 신주를 종묘에 들이기 위해 조상의 신주와 함께 모아 놓고 지내는 제사)를 지내고 나서 이루어진다.
역주3 棺之言……謂開廓不使土侵棺也 : 지금 ≪白虎通≫ 권10 〈崩薨〉에는 “棺之爲言完 所以藏屍 令完全也 槨之爲言廓 所以開廓闢土 無令迫棺也”로 되어 있어 字句의 차이가 있다.
역주4 漆之椑椑然 : ≪禮記≫ 〈檀弓 上〉에 “임금이 즉위하면 椑棺을 만들고 해마다 한 번씩 옻칠을 한다.”라고 한 것에 따라 ‘옻칠을 했다’는 뜻으로 풀이하였다. 椑椑然은 옻칠을 한 모양이다.
역주5 [祭] : 저본에는 ‘祭’가 없으나, 浦鏜의 ≪十三經注疏正字≫에 의거하여 ‘祭’를 보충하였다.(阮元의 〈校勘記〉 참조)
역주6 : 粱과 통용되는 뜻으로 쓰였다.
역주7 : 뒷문장의 ‘又案’과 함께 邢昺 疏의 일반적인 체재에 비추어 볼 때 ‘案’이 되어야 한다.
역주8 (祖)[袒] : 저본에는 ‘祖’로 되어 있으나, 閔本‧監本‧毛本에 의거하여 ‘袒’으로 바로잡았다. 뒷구의 ‘(祖)[袒]’도 마찬가지이다.(阮元의 〈校勘記〉 참조)
역주9 壞牆 : ‘壞’는 본디 ‘坏’였던 것이 잘못 옮겨진 것으로 판단된다. ‘坏’는 ‘坿’의 통가자로 쓰일 수 있고, ‘坿’는 ‘培’로 바꾸어 쓸 수 있으므로, ‘담장 밑에 흙을 북돋아 〈다진다〉’는 뜻으로 이해된다.(王夢鷗 註譯, ≪禮記今註今譯≫, 臺灣商務印書館, 1998, pp.902~903)
역주10 享嘗乃止 : 嘗은 본디 가을 제사이지만, 여기서는 사계절의 제사를 대표하는 말로 쓰였다. 이 문단의 嘗은 모두 마찬가지이다.(≪禮記正義≫ 〈祭法〉)
역주11 [立] : 저본에는 ‘立’이 없으나, ≪禮記≫ 〈祭法〉과 浦鏜의 ≪十三經注疏正字≫에 의거하여 ‘立’을 보충하였다.(阮元의 〈校勘記〉 참조)
역주12 王立七廟……庶人無廟 : ≪禮記≫ 〈祭法〉의 내용을 발췌 인용한 것이다. 七廟는 太祖의 사당과 三昭(태조의 사당을 중심으로 왼쪽의 2世‧4세‧6세)‧三穆(오른쪽의 3세‧5세‧7세)을 합쳐 일곱이다.
역주13 [肅然必有聞乎其容聲 出戶而聽] : 저본에는 이 13자가 없으나, ≪禮記≫ 〈祭義〉와 浦鏜의 ≪十三經注疏正字≫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阮元의 〈校勘記〉 참조)
역주14 非其寒之謂也 : 가을에 서리와 이슬이 내린 것을 알고 서글픈 마음이 드는 것은 추워서가 아니라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이 간절하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다만, ≪陳氏禮記集說大全≫의 小註에 인용된 方氏(方慤)의 다음과 같은 풀이를 따르는 견해도 있음을 밝혀둔다. “비와 이슬에 대해 ‘마치 돌아가신 어버이를 장차 〈다시〉 뵐 듯이 생각된다.’라고 하였으므로 서리와 이슬에 대해서는 ‘어버이를 장차 〈다시〉 잃을 듯이 생각된다.[如將失之]’라는 말이다. 봄여름은 도래하는 만물을 맞이하는 때이고, 가을겨울은 돌아가는 만물을 보내는 때이기 때문이다.” 봄과 가을의 상황을 완전한 대구로 설명하기 위해, 이미 돌아가신 어버이를 ‘장차 〈다시〉 잃을 것처럼 여긴다.’고 다소 무리한 해설을 가한 것이다.

효경주소 책은 2019.11.0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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