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孝經注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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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軸
云 “石刻孝經, 今在西安府.
前第二行題曰 ‘御製序幷注及書’, 其下小字曰 ‘’,
後有‘天寶四載九月一日, 國子祭酒 上柱國 臣李齊古上表’及宗御批大字草書三十八字,
其下有‘特進 行尙書左僕射 兼右相 吏部尙書 集賢院學士 修國史 上柱國 晉國公 臣林甫’等四十五人, .
經‧序‧注俱八分書, 其額曰 ‘大唐開元天寶聖文神武皇帝注孝經’.
臺中間人名下攙入‘丁酉歲八月卄六日紀’九字, 是後人所添. 是歲乙酉, 非丁酉也. 又末二, 官銜不書‘臣’, 亦可疑.”
唐石經孝經 一卷
宋熙寧石刻孝經 一卷
是本, 張南軒所書. 不分章, 每行十一字,
末題 “熙寧壬子八月壬寅, 書付姪慥收. 時寓之廢寺, 居東齊. 南軒題.”
南宋本孝經 一卷
刊. 每半葉八行, 行十七字, 注文雙行, 附音釋.
正德本孝經注疏 九卷
是本刊于明正德六年. 每半葉十行, 行十七字, 注疏每格雙行, 行卄三字. , 不標注字, 正義冠大疏字於上.
每葉之末上題篇識, 皆元泰定間刊本舊式. 錯字甚多, 今校正義, 無別本可據, 記中所稱此本者, 卽據是刻而言.
本孝經注疏九卷
明嘉靖閩中御史刻. 分卷同正德本, 每半葉九行, 每章首行卄一字, 餘低一格, 每行二十字.
注同正義雙行, 每行亦二十字.
孝經注疏九卷
明萬曆十四年刊. 分卷同正德本.
毛本孝經注疏九卷
明崇禎己巳常熟汲古閣刊. 分卷同正德本.


나라의 ≪석대효경石臺孝經≫ 4
고염무顧炎武의 ≪금석문자기金石文字記≫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석각石刻된 ≪효경≫이 지금 서안부 유학西安府 儒學에 있다.
앞면의 둘째 행에 ‘황제가 지은 및 친필’이라고 쓰여 있고, 그 다음 행에 작은 글씨로 ‘황태자인 신 형臣 亨(숙종肅宗)이 칙명을 받들어 제액題額을 씀’이라고 되어 있으며,
뒷면에는 ‘천보天寶 4년(745) 9월 1일 은청광록대부 국자좨주銀靑光祿大夫 國子祭酒 상주국 신上柱國 臣 리제고李齊古를 올림’이라는 말과 큰 글씨의 초서草書 38자로 된 현종玄宗비답批答이 있다.
그 아래에 ‘특진 행상서좌복사特進 行尙書左僕射 겸 우상兼 右相 이부상서 집현원학사吏部尙書 集賢院學士 수국사 상주국修國史 上柱國 진국공 신晉國公 臣 림보林甫’ 등 45명〈의 직함과 성명이 기록되어〉 있는데, 유독 림보林甫만은 좌복야左僕射였기 때문에 을 쓰지 않았다.
경문經文서문序文주문注文이 모두 팔분서八分書(예서隸書 2전서篆書 8을 섞어 장식 효과를 낸 서체)로 되어 있고, 그 제액에 ‘대당개원천보성문신무황제주효경大唐開元天寶聖文神武皇帝注孝經(나라 개원開元천보연간天寶年間에 성스러운 문덕文德과 신령한 무덕武德을 겸비한 황제皇帝가 ≪효경孝經≫에 를 내심)’이라고 하였다.
의 중간에 있는 인명人名 아래에 ‘정유세팔월입륙일기丁酉歲八月卄六日紀(정유년 8월 26일에 기록함)’라는 9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후대 사람이 보탠 것이다. 이해(745)는 을유년이지 정유년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마지막 2행〈에 기록된 2명〉에는 관함 〈아래〉에 ‘’자를 쓰지 않았으니, 이 또한 의심스럽다.”
나라의 ≪석경효경石經孝經≫ 1권
나라 희녕년간熙寧年間의 ≪석각효경石刻孝經≫ 1권
장남헌張南軒(장식張栻, 1133~1180)이 필사한 것이다. 을 나누지 않았고 마다 11자씩이다.
말미에 “희령 임자년(1072) 8월 임인일에 필사하여 조카 에게 부쳐 보관하게 하였다. 이때 등주鄧州의 버려진 절에 우거하며 동재東齋에 거처하고 있었다. 남헌南軒이 씀.”이라고 쓰여 있다.
남송南宋상대본相臺本효경孝經≫ 1권
송나라 악가岳珂가 간행하였다. 반엽半葉마다 8행씩이고, 행마다 17자씩이며, 주문注文은 쌍행이고, 음석音釋부기附記하였다. 권말에 나무에 아형 전서亞形 篆書로 새긴 ‘상대 악씨相臺 岳氏형계荊溪가숙家塾에서 판각함[상대악씨각재형계가숙相臺岳氏刻梓荊溪家塾]’이라는 문구의 도장이 찍혀 있다.
정덕본正德本 ≪효경주소≫ 9권
은 명나라 정덕正德 6년(1511)에 간행되었다. 반엽半葉마다 10행이고, 행마다 17자이며, 는 칸마다 2행씩이고 행마다 23자씩이다. 경문 뒤에 를 싣고 ‘’자 표시는 하지 않았으며, 정의正義 앞에 큰 글씨의 ‘’자를 두었다.
말미의 윗부분에 표시를 한 것은 모두 나라 태정년간泰定年間(1324~1327) 간행본의 옛 판식版式이다. 잘못된 글자가 매우 많지만, 지금 정의正義를 교감하면서 〈정덕正德 연간의 간행본으로는〉 근거할 만한 다른 본이 없으므로, 교감기에 이 본을 일컬은 경우는 곧 이 각본刻本에 의거하여 말한 것이다.
민본閩本 ≪효경주소≫ 9권
명나라 가정년간嘉靖年間(1522~1566)에 민중閩中감찰어사 이원양監察御史 李元陽이 판각하였다. 을 나눈 것은 정덕본正德本과 같고, 반엽半葉마다 9행이며, 매장의 첫 행은 21자이고 나머지는 1칸을 낮추어 행마다 20자이다.
정의正義는 모두 쌍행이고, 행마다 역시 20자이다. 〈나머지는〉 ≪춘추좌씨전주소교감기春秋左氏傳注疏校勘記≫에 상세하다.
중수重修감본監本 ≪효경주소≫ 9권
명나라 만력萬曆 14년(1586)에 간행하였다. 을 나눈 것은 정덕본正德本과 같다. 〈나머지는〉 ≪춘추좌씨전주소교감기春秋左氏傳注疏校勘記≫에 상세하다.
모본毛本 ≪효경주소≫ 9권
명나라 숭정 기사년崇禎 己巳年(1629)에 상숙常熟급고각 모진汲古閣 毛晉이 간행하였다. 을 나눈 것은 정덕본正德本과 같다. 〈나머지는〉 ≪춘추좌씨전주소교감기春秋左氏傳注疏校勘記≫에 상세하다.


역주
역주1 石臺孝經 : 唐나라 天寶 4년(745) 玄宗이 743년의 天寶重注本 ≪효경≫ 全文을 직접 필사하여 石臺에 새기게 한 것이다. 지금 陝西省 西安 碑林에 보존되어 있다.
역주2 顧炎武金石文字記 : 고염무(1613~1682)는 명말청초에 抗淸활동에 참가했다가 실패하자 평생 은거한 문인‧학자이다. ≪金石文字記≫는 漢代 이후의 碑刻 300여 종을 수록하고 각 비각의 유래를 설명, 글자 오류를 지적한 총 6권의 저작이다.
역주3 儒學 : 元‧明‧淸代에 지방의 각 府‧州‧縣에 설치하여 生員(입학 자격시험에 합격한 사람)을 가르치던 지방 학교이다.
역주4 皇大子臣亨奉勅題額 : 唐 玄宗의 아들이자 당시 황태자였던 李亨(肅宗)의 글씨로 碑의 상단에 새긴 ‘大唐開元天寶聖文神武皇帝注孝經’이라는 15자의 篆書를 말한다.
역주5 銀靑光祿大夫 : 魏晉 이후로 光祿大夫들이 대부분 ‘푸른색 끈이 달린 은색 인장[銀章靑綬]’을 지녔기 때문에 ‘銀靑’이라는 수식어가 관용적으로 붙게 되었다.
역주6 (元)[玄] : 49쪽 주1) 참조.
역주7 惟林甫以左僕射不書姓 : ≪舊唐書≫ 권179 〈王璠列傳〉에 “左右僕射는 뭇 관원의 수장으로, 開元年間에는 左右丞相이라고 칭하였습니다. 좌우복야는 機務를 처리하지 않을 때에도 뭇 관원을 통솔하므로 문서에 관직만 기록하고 姓은 기록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역주8 : ≪經義考≫ 권291 〈唐石臺孝經〉에는 ‘人’으로 되어 있다.
역주9 (阝)[鄧] : 저본에는 ‘阝’로 되어 있으나, ≪兩浙金石志≫ 권6 ‘宋張南軒手書孝經碑(송나라 장남헌이 손수 필사한 ≪효경≫ 碑)’에 의거하여 ‘鄧’으로 바로잡았다. 누구의 이름자 때문에 피휘한 것인지는 상세하지 않다.
역주10 相臺 : 相州(지금의 하북성 臨漳縣)의 별칭이다. 州 안에 銅雀臺가 있기 때문에 붙은 명칭으로, 滑州(지금의 하남성 滑縣)에 測景臺가 있기 때문에 滑臺라고도 칭하는 것과 같은 例이다.
역주11 岳珂 : 1183~1234. 송나라 相州 湯陰 사람으로, 관료‧문인이자 ≪九經三傳沿革例≫ 등을 저술한 經學家이기도 하다.
역주12 卷末有木刻亞形篆書相臺岳氏刻梓荊溪家塾印 : 아래 그림의 예와 같이 卷末에 10字가 새겨진 刊印이 찍혀 있다는 말이다. ‘亞形篆書’는 ‘亞자 형태(가로획은 수평, 세로획은 수직이며, 좌우대칭인 형태)의 篆書’라는 말인지, 아니면 大篆에 버금가는 篆書體라는 말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어쨌든 小篆(진 시황 때 李斯가 周代의 大篆을 간략하게 변형하여 만든 서체)을 일컬은 말로 판단된다.
仿宋相臺岳氏本 ≪尙書≫仿宋相臺岳氏本 ≪尙書≫
역주13 經文下載注 : 처음에는 注疏가 경문과 따로 편집되었다가 뒤에야 경문 사이사이에 小字夾註로 배치되었다. 여기에 열거된 각본들 중에는 正德本이 처음으로 경문과 주소를 함께 배치하여 편집한 것이다.
역주14 : 福建省의 이칭이다. 省안에 閩江이 있기 때문에 복건성을 ‘閩’이라 한 것이다.
역주15 李元陽 : 1497~1580. 명나라 雲南 大理府 太和 사람으로 白族이다. 監察御史‧荊州知府 등을 지냈다. 理學을 깊이 연구하여 ≪心性圖說≫ 등을 저술하였고, ≪大理府志≫‧≪雲南通志≫ 등의 지방지와 ≪中溪漫稿≫‧≪艶雪臺詩≫ 등의 시문집을 남겼다. 嘉靖 15년(1536)에 御史로서 福建을 순찰했는데, 이때 任地에서 宋 10행본을 바탕으로 ≪십삼경주소≫를 다시 판각하였다.
역주16 詳春秋左傳注疏校勘記 : ≪春秋左傳注疏≫의 ‘引據各本目錄(근거로 인용한 각본의 목록)’에 실린 閩本에 대한 다음과 같은 설명을 가리킨다. “注의 문장을 중간 크기의 글씨로 바꾸고 맨 앞에 ‘注’자를 표시하는 형식이 李氏(李元陽)에게서 시작되었다. 이는 宋板의 옛 형식이 아니다.……監本과 毛本에는 글자가 빠지거나 순서가 잘못되었는데 이 本은 잘못되지 않은 경우들이 있으니, 감본과 모본에 비해 우수하다.”
역주17 重修監本 : 國子監에서 간행한 監本을 중수한 본이다.
역주18 詳春秋左傳注疏校勘記 : ≪春秋左傳注疏≫의 ‘引據各本目錄(근거로 인용한 각본의 목록)’에 실린 重修監本에 대한 다음과 같은 설명을 가리킨다. “매권 제3행에 ‘皇明朝列大夫 國子監祭酒 臣 吳士元과 承德郞 司業 仍加俸一級 臣 黃錦 등이 칙지를 받들어 중수함.’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고, 盛訥(중수하기 전의 원래 監本을 만든 國子監祭酒)의 직함이 행을 바꾸어 제2행에 열거되어 있다. 원본에 비해 잘못된 글자가 많다. 교감기에 인용된 문구가 원본과 동일한 경우는 모두 監本이라 칭하고, 다른 경우는 重修監本이라고 칭하였다.”
역주19 毛晉 : 1599~1659. 명나라 蘇州府 常熟(지금의 강소성 常熟市) 사람으로, 서적을 수집하여 소장하기를 좋아해서 장서루 汲古閣에 8만 4,000책의 서적을 소장하고, 十三經과 十七史, 諸子와 文集 등 100여 종을 飜刻하였다.
역주20 詳春秋左傳注疏校勘記 : ≪春秋左傳注疏≫의 ‘引據各本目錄(근거로 인용한 각본의 목록)’에 실린 毛本에 대한 다음과 같은 설명을 가리킨다. “字數와 行數 등의 체재는 閩本과 일치한다. 이 본은 세상에 통행되면서 到處에 傳寫의 오류가 생겼다.”

효경주소 책은 2019.11.0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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