疏
孝者, 事親之名, 經者, 常行之典. 按漢書藝文志云 “夫孝, 天之經, 地之義, 民之行也. 擧大者言, 故曰孝經.”
摠而言之, 道常在心, 盡其
, 中情悅好, 承順無怠之義也.
爾雅曰 “善父母爲孝.” 皇侃曰 “經者, 常也, 法也. 此經爲敎, 任重道遠,
雖復時移代革, 金石可消, 而爲孝事親常行, 存世不滅, 是其常也. 爲百代規模, 人生所資, 是其法也.”
言孝之爲敎, 使可常而法之. 易有上經‧下經, 老子有道經‧德經. 孝爲百行之本, 故名曰孝經.
疏
按
, 其略曰 “炫謂孔子自作孝經, 本非曾參請業而對也. 士有百行, 以孝爲本.
本立而後道行, 道行而後業就, 故曰
. 然則治世之要, 孰能非乎.
徒以敎化之道, 因時立稱, 經典之目, 隨事表名, 至使威儀禮節之餘盛傳當代, 孝悌德行之本隱而不彰.
夫子運偶陵遲, 禮樂崩壞, 名敎將絶, 特感聖心, 因弟子有請問之道, 師儒有敎誨之義. 故假曾子之言以爲對揚之體, 乃非曾子實有問也.
若疑而始問, 答以申辭, 則曾子應每章一問,
應每問一答. 按經, 夫子先自言之, 非參請也. 諸章以次演之, 非待
也.
疏
○御者, 按大戴禮盛德篇云 “
者, 御民之本也. 古之御政以治天下者,
冢宰之官以成道, 司徒之官以成德, 宗伯之官以成仁, 司馬之官以成聖, 司寇之官以成義, 司空之官以成禮.
故
故曰 ‘御四馬者執六轡, 御天地與人與事者亦有
’.
是故善御者, 正身同轡, 均馬力, 齊馬心, 唯其所引而之, 以取
, 遠行可以之, 急疾可以御.
天地與人事, 此四者, 聖人之所乘也. 是故天子, 御者.
‧
, 左右手也. 六官, 亦六轡也.
合以執六官, 均
, 齊
, 以御四者. 故亦爲其所引而之,
以之道則國治, 以之德則國安, 以之仁則國和, 以之聖則國平, 以之義則國成, 以之禮則國定, 此御政之體也.”
然則御者, 治天下之名, 若柔轡之御剛馬也.
. 是以秦‧漢以來, 以御爲至尊之稱.
又
曰 “御者, 進也, 凡衣服加於身, 飮食入於口, 妃妾接於寢, 皆曰御.”
疏
又
, 引鄭六藝論敍孝經云 ‘「玄又爲之注」,
論如是而均無聞焉. 有義無辭, 令予昏惑.’
擧鄭之語而云無聞, 其驗七也. 宋均春秋緯注云 ‘爲春秋‧孝經略說’, 則非注之謂. 所言‘又爲之注’者, 汎辭耳, 非事實.
其敍春秋亦云 ‘玄又爲之注’, 寧可復責以實注春秋乎. 其驗八也.
後漢史書存於
者, 有
等, 其所注皆無孝經, 唯
有孝經. 其驗九也.
首有
奉詔, 令諸儒注述孝經, 以肅說爲長. 若先有鄭注, 亦應言及, 而不言鄭. 其驗十也.
王肅注書, 好發鄭短, 凡有小失, 皆在
, 若孝經此注亦出鄭氏, 被肅攻擊, 最應煩多, 而肅無言. 其驗十一也.
魏晉朝賢辯論時事, 鄭氏諸注, 無不撮引, 未有一言孝經注者. 其驗十二也.
疏
此證驗, 易爲討覈. 而
之學者不覺其非, 乘
謬說, 競相推擧, 諸解不立學官.
此注獨行於世, 觀言語鄙陋, 義理乖謬, 固不可示彼後來, 傳諸不朽. 至古文孝經孔傳, 本出孔氏壁中, 語甚詳正, 無俟商搉.
而曠代亡逸, 不被流行, 隋開皇十四年, 祕書學生
於京市陳人處買得一本, 送與著作
.
以示河間劉炫, 仍令校定. 而此書更無
, 難可依憑, 炫輒以所見率意刊改,
故開元七年勅議之際, 劉子玄等議以爲 “孔‧鄭二家雲泥致隔, 今綸旨煥發, 校其短長. 必謂行孔廢鄭, 於義爲允.”
疏
國子博士司馬貞議曰 “今文孝經是漢河間王所得顔芝本, 至劉向, 以此參校古文, 省除繁惑, 定此一十八章.
其注相承云 ‘是鄭玄所作’. 而鄭志及目錄等不載, 故往賢共疑焉. 唯荀昶‧
以爲鄭注,
故
, 具載此注爲優. 且其注縱非鄭玄, 而義旨敷暢, 將爲得所, 雖數處小有非穩, 實亦未爽經言.
其古文二十二章,
出孔壁. 先是安國作傳, 緣遭
, 未之行也.
昶集注之時,
見孔傳,
遂亡其本. 近儒欲崇古學, 妄作
, 假稱孔氏,
輒穿鑿改更, 又僞作閨門一章. 劉炫詭隨, 妄稱其善. 且閨門之義, 近俗之語, 必非
正說.
案其文云 ‘閨門之內具禮矣. 嚴親‧嚴兄‧妻子‧臣妾, 繇百姓徒役也.’ 是比妻子於徒役, 文句凡鄙, 不合經典.
又分庶人章, 從‘故自天子’已下別爲一章, 仍加‘子曰’二字. 然故者
之辭, 旣是章首, 不合言故.
是古人旣沒, 後人妄開此等數章, 以應二十二之數. 非但經
不眞, 抑亦傳文淺僞.
又注用
分地之利, 其略曰 ‘
, 暴其肌體, 朝暮從事, 露髮徒足, 少而習之, 其心安焉.’
與鄭氏所云‘分別五土, 視其高下’, 高田宜黍稷, 下田宜稻麥, 優劣懸殊,
何等級.
今議者欲取近儒詭說而廢鄭注, 理實未可. 請准令式, 孝經鄭注與孔傳, 依舊俱行.”
詔鄭注仍舊行用, 孔傳亦存. 是時
文吏拘於流俗, 不能發明古義, 奏議排子玄, 令諸儒對定.
司馬貞與學生郗常等十人盡非子玄, 卒從諸儒之說. 至十年, 上自注孝經, 頒于天下, 卒以十八
章爲定.
疏
정의왈正義曰:≪효경≫은 공자孔子가 증삼曾參을 위해 효孝의 도리道理를 진술한 책이다.
한초漢初에 장손씨長孫氏, 박사 강옹博士 江翁, 소부 후창少府 后倉, 간대부 익봉諫大夫 翼奉, 안창후 장우安昌侯 張禹가 전수하여 각자 명가名家가 되었지만 경문經文은 모두 같았다.
오직 공자가 살았던 집의 벽壁 속에서 나온 고문古文만 달랐다. 유현劉炫에 이르러 마침내 ≪고문효경≫의 〈서인장庶人章〉을 2개의 장으로 나누고, 〈증자감문장曾子敢問章〉을 3개의 장으로 나누었으며, 또 〈금문본에 없는〉 〈규문장閨門章〉 1장이 더 많았으니, 총 22장이 되었다.
환담桓譚의 ≪신론新論≫에 “≪고문효경≫은 1,872자이니, 금문본과 다른 것이 400여 자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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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孝는 어버이를 섬긴다는 말이고, 경經은 항상 실천하는 준칙이다. 살펴보건대,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효孝는 하늘의 경經(상도常道)이요, 땅의 의義(정의正義)요, 백성의 행行(품행品行)이다. 〈이 중에〉 큰 것을 들어 말했기 때문에 효경孝經이라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살펴보건대 ≪예기禮記≫ 〈제통祭統〉에 “효孝는 축畜(기름, 봉양)이다.”라고 했는데, 이때 ‘축畜’은 ‘봉양[양養]’의 뜻이다. ≪석명釋名≫에는 “효孝는 호好(좋음, 좋아함)이다.”라고 하였고, ≪주서周書(일주서逸周書)≫의 〈익법해謚法解〉에는 “지극히 공순한 것을 효孝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종합하여 말하면, 〈부모에 대한〉 도리를 항상 마음속에 생각하여 늘 좋은 표정으로 모시고 마음속으로 좋아하여, 받들고 따르는 데에 나태함이 없다는 뜻이다.
≪이아爾雅≫에 “부모에게 잘하는 것이 효孝이다.”라고 하였고, 황간皇侃이 “경經은 상常(항상됨)이요 법法(법도, 준칙)이다. 이 경經의 가르침은 소임所任이 무겁고 갈 길이 멀다.
시대가 바뀌어 쇠와 돌이 부서지더라도 효도하여 어버이를 섬기는 불변의 행동은 세상에 남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니, 이것이 ‘상常(항상됨)’이다. 〈이는 또〉 백대百代 후손의 규범이 되어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의거하는 바가 될 것이니, 이것이 법法(법도, 준칙)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효孝라는 가르침은 항상적이고 또 준칙으로 삼을 수 있다는 말이다. ≪주역周易≫에 상경上經‧하경下經이 있고, ≪노자老子≫에 도경道經‧덕경德經이 있듯이, 효孝는 온갖 행실의 근본이기 때문에 이름을 ‘효경孝經’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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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만들어진 경문經文은 공자孔子가 지은 것이다. 선학先學들은 〈≪효경≫의 저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증삼曾參이 지극한 효성을 지니기는 했으나 효덕孝德의 근본을 알지 못하였다.
한가로이 지낼 때 우연히 공자를 모시고 앉은 틈을 타서, 증삼이 일어나 공자에게 묻고 공자가 질문에 따라 답하였다. 증삼이 이를 모아 기록하고 ‘효경’이라고 이름하였다.” 〈그러나 이 설은〉 두 번 세 번 곱씹어 보아도 거의 옳다고 할 수가 없다. 어째서인가?
공자는 이전의 역사서에서 오류를 교정하고 자료를 수집하여 ≪춘추春秋≫를 편수할 때 가필할 것은 직접 가필하고 삭제할 것은 직접 삭제하여, 10명의 뛰어난 제자들도 감히 〈≪춘추≫의〉 문장을 지을 수 없었다.
살펴보건대, ≪구명결鉤命決≫에 “공자가 말하기를 ‘내 뜻은 ≪춘추≫에 담겨 있고, 행실은 ≪효경≫에 담겨 있다.’라고 하였다.” 하였다.
그렇다면 ≪춘추≫를 편수하고 ≪효경≫을 찬술한 것은 각기 공자의 뜻과 행실〈을 담기 위해서〉였는데, 어찌 뜻은 중시하여 가필과 삭제를 직접 하면서 행실은 경시하여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렸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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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劉炫의 ≪효경술의孝經述義≫를 살펴보면, 그는 대체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 생각에는 공자가 독자적으로 ≪효경≫을 지은 것이지, 본디 증삼이 배우기를 청하자 응대한 것이 아니다. 선비의 온갖 행동 중에 효孝가 근본이다.
근본이 바로 선 뒤에 도道(실천 방도)가 실행되고, 도道가 실행된 뒤에 사업이 성취된다. 그래서 〈〈효치장孝治章〉에〉 ‘영명한 제왕이 효孝로 천하를 다스릴 적에’라고 한 것이니, 그렇다면 세상을 다스리는 요체(효孝)를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다만 교화의 방도는 시대에 따라 명칭을 정하고, 경전의 명목은 일에 따라 이름을 드러낸다. 이에 따라 예절禮節의 말단에 불과한 위의威儀(위엄 있고 예법에 맞는 행동거지)가 당대當代에 성대히 전해지게 하면서도 덕행의 근본인 효제孝悌는 숨겨져 드러나지 않게 하는 데에 이르렀다.
공자는 시운時運이 쇠퇴한 때를 만났으니, 예악이 무너지고 명교名敎가 끊기려는 상황이 성스러운 마음에 특별한 감회를 일으켰다. 그런데 제자에게는 질문할 도리가 있고 스승에게는 가르쳐 주는 의리가 있기에 증자曾子의 말을 가설하여 대답하는 체재를 취한 것이지 증자가 실제로 질문을 한 것이 아니다.
만약 〈증자가〉 의심하여 비로소 질문하고 〈공자가 그에 대한〉 대답으로 말한 것이라면 증자는 응당 매장每章에서 한 번씩 물었어야 하고 중니仲尼(공자孔子)는 응당 질문마다 한 번씩 답했어야 한다. 그러나 경문을 살펴보면 부자夫子(공자孔子)가 먼저 자발적으로 말한 것이지 증자가 청한 것이 아니며, 이후의 장章들도 〈맥락에 따라〉 순차적으로 전개해 나간 것이지 질문을 기다려 답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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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글의 형식과 내용이 혈맥血脈처럼 통하여 문장이 연결되고 의미가 이어져서, 〈개종명의장開宗明義章〉에서 단서를 제기하고 그 여운이 넓게 퍼져 〈전체 의미가〉 완성되었으니, 일문일답一問一答의 형국이 아니다.
또 지극한 이치가 있어 처음에 〈공자가〉 질문을 꺼낸 것이지, 〈증자가〉 배우기를 청하거나 대답을 청한 일이 아니다. 첫 장에서 ‘선왕先王들은 지극한 덕德과 간요簡要한 도道가 있으시어’라고 했으니, 뒷장에서 ‘이것을 일러 간요한 도道라고 한다’,
‘지극한 덕〈을 갖춘 임금〉이 아니라면 그 누가 〈이처럼 크게〉 백성의 마음을 따라 〈다스릴〉 수 있겠는가’라고 한 것은 모두 〈첫 장에서 언급한〉 ‘간요한 도道’와 ‘덕행의 근본’을 멀리서 종결한 것이지 증자에게 답한 것이 아니다. 이를 유례類例로 삼는다면, 전체에서 몇 조항은 틀림없이 주로 증자에게 말한 것이긴 하나,
첫 장에서 증자에 대한 대답은 이미 끝났는데 어떤 방법으로 증자의 질문을 기다리지 않고 〈공자가〉 다시 스스로 진술하여 논지를 전개해나간 것일까? 우선 모시고 앉은 증자를 세 번 일으켜 세워 〈그 직전까지의 말과〉 구별했는데, 두 번은 질문한 것이고 한 번은 감탄한 것이다.
〈≪효경≫은〉 한가한 틈을 타 증자가 공자를 모시고 앉은 상황을 가설하여 공자가 그와 함께 효孝에 대해 논한 말〈을 기록한 것〉이다. 〈〈개종명의장〉에서〉 종지宗旨를 처음 말하고 효孝의 의미를 밝힌 다음 〈그 이하 〈광요도장廣要道章〉 까지〉 위로 천자〈의 효孝부터〉 진술하고 아래로 일반 백성〈의 효孝까지〉 진술하여 할 말을 다 하자 더는 〈말을 이어갈〉 꼬투리가 없었고, 증자의 입장에서도 질문할 만한 점이 없었다.
이 때문에 증자가 효孝의 위대함에 감탄하는 상황을 가설하여, 효孝로 다스리는 공효功效를 말하였다. 그 말이 끝난 뒤에는 성인聖人의 도道는 효孝보다 큰 것이 없음을 말하고자 또 증자의 질문을 가설하여 성인의 덕은 효孝보다 더한 것이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앞에서 공경恭敬과 공순恭順의 도리를 논한 데에는 바른 말로 간쟁諫諍하는 일이 들어있지 않았으니, 간절함이 기쁜 표정 속에 들어있어야 함을 〈말하면서〉 갑자기 부모의 안색顔色에 개의치 않고 간쟁하는 일을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다시 증자의 말을 가설하여 간쟁의 도리를 진술할 필요가 있었다. 이는 모두 공자가 증자의 질문을 필요로 한 것이지, 증자가 공자에게 물을 필요가 있었던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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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주莊周가 말한 ‘메추라기가 붕鵬새를 비웃은 일’과 ‘망량罔兩(곁그림자)이 그림자에게 물은 일’, 굴원屈原이 말한 ‘어부가 뱃전을 두드리며 떠나간 일’과 ‘태복太卜이 거북 껍질에서 먼지를 털어낸 일’, 마경馬卿(사마상여司馬相如)의 작품에 나오는 오유선생烏有先生과 무시공無是公,
양웅楊雄의 작품에 나오는 한림翰林과 자묵子墨 등이 어찌 저자著者가 지어내어 전형典型으로 삼은 것이 아니겠는가. 만약 정씨鄭氏의 주注대로 〈공자와 증자가〉 실제로 강당에 있었다면 생도들을 널리 불러 모시고 앉은 자가 한둘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공자가 어찌 다른 사람들을 모두 무시하고 오직 증자하고만 말했겠는가. 그리고 ‘너는 이것을 아느냐?’라고 물었는데, 〈그런 상황이라면 공자가〉 어찌 굳이 증자만을 지적하여 ‘너’라고 했겠으며 증자가 〈어찌 남들보다〉 먼저 자리를 피해 〈일어서서 대답했겠는가.〉 틀림없이 공자는 여러 생도들에게 두루 말했을 것이다.
또 〈증자 외에도〉 대답하는 자가 있었을 터인데, 증자가 동료들에게 사양하지 않고 홀로 답했겠는가. 설사 공자가 오직 증자하고만 말했다 하더라도, 말이 끝난 다음 증자가 스스로 문답을 모아 기록할 때 어찌 스승의 자字를 칭했겠는가.
이를 근거로 말하면, 지극한 〈도리를〉 밝힌 ≪효경≫의 가르침은 공자가 지은 것이다.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효경≫은 공자가 증자를 위해 효孝의 도리를 진술한 책이다.’라고 하였으니, 공자가 증자를 위해 특별히 이 경經(문文의 내용)을 일러 주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성인聖人의 저술이 그래 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란 말인가. 이들은 모두 〈상황을 살피지 못하고〉 문면文面에만 근본한 결과 이 같은 오류를 부른 것이다. 이 때문에 선유들의 주해는 통행되지 못한 것이 많다.
정현鄭玄의 ≪육예론六藝論≫에 ‘공자는 육경六經의 주제가 서로 같지 않고 의미가 달라서,
도道가 흩어져 후세에는 그 근원을 알지 못하게 될까 염려하였다. 그래서 ≪효경≫을 지어 모두 모았다.’라고 하였다. 이 말 〈자체는〉 비록 옳지 않지만 그 의미는 상당히 근리近理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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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학문적 조예가 깊은 문도門徒가 한둘이 아닌데 유독 증자曾子만 〈문답의 대상으로〉 가설하여 말한 것은 증자가 특히 효자로서 명성을 얻었기 때문이다. ≪노자老子≫에 ‘육친六親이 화목하지 않게 되자 효자孝慈의 덕목이 있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효자孝慈의 명칭은 불화不和로 인하여 있는 것이다. 온갖 행실을 다 갖추어 성인聖人으로 불리는 사람으로 말하면, 모든 성인은 효성스럽지 않은 사람이 없다.
집안에 악인惡人 셋이 있었기에 순舜임금이 대효大孝로 일컬어지고, 관룡봉關龍逢과 비간比干이 유독 충성으로 이름난 것은 임금이 현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효孝로 백기伯奇의 이름이 유독 드러난 것은 계모가 자애롭지 못했기 때문이다.
증자의 성품이 비록 지극히 효성스럽기도 했지만 〈그 역시〉 까닭이 있어 이름이 났다. 〈계모에게 공양할〉 명아주 삶은 것이 제대로 익지 않자 아내를 내쫓았으니, 〈그의〉 집안은 법도가 엄격하였다. 오이 밭의 김을 매다가 싹을 손상시키자 죽도록 매질했으니, 〈그의〉 아버지는 매정했음이 분명하다.
증자가 효성으로 크게 이름난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일 것이니, 실로 증자의 성품이 노둔하고 질박하여 필부匹夫의 효도를 몸소 실천했기 때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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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문의 말을 자세히 검토하고 유현劉炫의 풀이를 상세히 살펴보면 〈유현은〉 옛날에 감추어진 이치를 소중히 여겨 오늘날에 홀로 터득한 사람인 듯하다. 원씨元氏의 설이 유현의 설과 같기는 하나 완전무결하지는 못한 듯하니, 지금 〈살펴보면 그는〉 ≪한서≫ 〈예문지〉와 정씨鄭氏의 설을 옳다고 했다.
경문을 지은 연도에 대해 선유先儒는 “노 애공魯 哀公 14년에 〈애공이〉 서쪽 〈들판〉에서 사냥〈하던 중 숙손씨叔孫氏의 어자御者가〉 기린을 잡자 공자가 ≪춘추≫를 지은 사실과 16년 여름 4월 기축일己丑日에 공자가 죽은 사실이 증거가 된다.”고 하였다.
곧 ≪효경≫이 지어진 것은 노 애공 14년 후, 16년 전이라는 것이다. ≪구명결鉤命決≫을 살펴보면 “공자가 ‘나의 뜻은 ≪춘추≫에 담겨 있고 행실은 ≪효경≫에 담겨 있다.’라고 하였다.” 하였으니, 선후先後를 따져 말하면 ≪효경≫의 문장은 ≪춘추≫와 유사한 시기에 지어졌음이 분명하다.
또 ≪구명결≫에 “공자가 ‘≪춘추≫는 상商(자하子夏)에게 맡기고 ≪효경≫은 참參(증자)에게 맡긴다.’라고 하였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효경≫의 저술은 ≪춘추≫ 뒤에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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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御’〈에 대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살펴보건대 ≪대대례기大戴禮記≫ 〈성덕편盛德篇〉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덕법德法(덕德에 기반한 모범적 몸가짐)이 백성을 다스리는[어御] 근본이다. 옛날에 정치를 주관하여[어御] 천하를 다스린 방법은,
총재冢宰의 관직으로 도道를 이루고 사도司徒의 관직으로 덕德을 이루고 종백宗伯의 관직으로 인仁을 이루고 사마司馬의 관직으로 성聖을 이루고 사구司寇의 관직으로 의義를 이루고 사공司空의 관직으로 예禮를 이루었다.
그래서 이 여섯 관직을 고삐[비轡]로 삼고 사회司會가 〈재무 회계財務 會計와 관원 고과考課에 대한 통계 자료를〉 공평하게 작성해 들이도록 하여 안고삐[납軜]로 삼았다. 이 때문에 ‘네 마리 말을 모는 사람은 여섯 고삐를 잡고, 천지天地와 사람과 일을 다스리는 사람에게는 여섯 정무政務가 있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수레를 잘 모는 사람은 몸을 바르게 하고 〈여섯〉 고삐를 똑같이 잡아서 말의 힘을 고르게 조절하고 말의 마음을 통일시킨다. 그리하여 오직 〈자신이〉 인도하는 대로 〈말들이〉 가도록 하여 큰 길로 가서, 먼 길을 갈 수 있고 빠르게 몰 수 있다.
하늘과 땅과 사람과 일, 이 네 가지는 성인이 타는[승乘] 것이다. 그러므로 천자는 어자御者이고, 내사內史와 태사太史는 왼손과 오른손이며, 여섯 관직은 여섯 고삐이다.
천자와 삼공三公이 함께 여섯 관직을 통솔하여 다섯 〈농사철의〉 농정農政을 고루 시행하고 다섯 가지 준칙을 조화시켜 네 가지(하늘‧땅‧사람‧일)를 다스린다. 그래서 이 역시 인도하는 대로 가는데,
도道로 가면 나라가 다스려지고, 덕德으로 가면 나라가 편안하며, 인仁으로 가면 나라가 화합하고, 성聖으로 가면 나라가 균평하며, 의義로 가면 나라〈의 질서〉가 완성되고, 예禮로 가면 나라가 안정된다. 이것이 정치를 주관하는 체재이다.”
그렇다면 ‘어御’는 천하를 다스린다는 말로, 부드러운 고삐가 강한 말을 부리는 것과 같다. ≪공자가어孔子家語≫에도 이 글이 있다. 이 때문에 진秦‧한漢 이래로 ‘어御’를 지존至尊의 칭호로 삼았다.
또 채옹蔡邕의 ≪독단獨斷≫에 “어御는 진進(나아감)이다. 의복을 몸에 걸치는 것, 음식을 입에 넣는 것, 비첩妃妾과 잠자리에서 교접하는 것을 모두 ‘어御’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마찬가지로〉 기물器物을 제작하는 것도 모두 어御라고 하기 때문에 〈현종의 서문 첫머리에〉 ‘어御’라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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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製’는 마름질하여 지음을 말한다. 이 때문에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그대에게 아름다운 비단이 있다면 남이 〈그것을 재료로 삼아〉 마름질[제製]을 배우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의 아름다운 표현을 취하여, 사람들이 문장 짓는 것을 모두 ‘제製’라고 한다.
이 서문은 당 현종唐 玄宗이 지은 것이기 때문에 ‘어제御製’라고 하였다. 현종은 당나라의 6번째 황제로 휘諱는 융기隆基이고 예종睿宗의 아들이다. 연화 원년延和 元年(712)에 즉위했는데 당시 나이가 33세였다.
45년 동안 재위在位하고 78세에 승하하였다. 시호는 명효황제明孝皇帝이고 묘호廟號는 현종玄宗이다. 개원開元 10년(722)에 ≪효경≫ 서문과 주注를 지었다.
‘서序’〈에 대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시경詩經≫ 〈주송 민여소자周頌 閔予小子〉를 살펴보면 “차례[서序]를 이음을 생각하여 잊지 못하리로다.”라고 하였는데, ≪모시고훈전毛詩詁訓傳≫에 “서序는 서緖(실마리)이다.”라고 하였다. 또 ≪이아爾雅≫ 〈석고釋詁〉에 “서敍는 서緖(실마리)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로 볼 때 서序와 서敍는 음과 뜻이 같다.
곽박郭璞이 말하기를 “〈서敍는〉 또 단서端緖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여기(‘어제서병주御製序幷注’)서 말한 실마리[서緖]는 전체 경문經文의 단서를 들어 말한 것이다.
疏
‘병주幷注’〈에 대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병幷’은 겸兼함이고, 주注는 저著(드러냄)이니, 경문의 뜻을 해석하여 의미가 밝게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다. 〈‘병주幷注’는 곧〉 서문을 지었을 뿐만 아니라 겸하여 주注도 내었다고 말한 것이다. 그래서 ‘병幷’이라고 한 것이다.
〈≪금문효경≫ 정씨주鄭氏注에 대해 유지기劉知幾는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 “지금 세상에 통행되고 있는 ≪효경≫을 살펴보면, ‘정씨주鄭氏注(정씨가 주注를 냄)’라고 표기되어 있다. 〈이 ‘정씨’를〉 근고近古에는 모두 정강성鄭康成(정현鄭玄)이라고 하는데, 위대魏代와 진대晉代에는 이런 설이 없었다.
진 목제晉 穆帝 영화永和 11년(355)과 효무제 태원孝武帝 太元 원년元年(376) 두 차례에 걸쳐 신하들을 소집하여 경문의 뜻을 함께 토론하도록 하였다. 그때 순창荀昶이란 사람이 ≪효경≫의 여러 설들을 찬집撰集하면서 처음으로 정씨鄭氏의 설을 으뜸으로 자리매김했는데,
진말晉末 이래로 이론異論이 많았다. 육징陸澄은 정현이 주를 낸 것이 아니라면서 비서성祕書省(왕실 도서관)에 보관하지 말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왕검王儉이 그 청을 따르지 않아서 결국 전해질 수 있었다.
북조 위北朝 魏나라와 남조 제南朝 齊나라에 이르러서 국립학교[학관學官]의 정식 과목으로 채택되어 율령律令에 기재되었으니, 북방의 풍속이 무식함으로 인해 이 같이 잘못된 일이 발생한 것이다. 그렇다면 정현이 경문에 주를 낸 것이 아님〈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12가지 증거가 있다.
疏
정현鄭玄의 〈자서自序〉에 ‘당고黨錮의 일을 만나 환난을 피해 〈은거하면서〉 ≪예禮≫에 주注를 내었고, 당고의 일이 풀렸을 때 ≪고문상서古文尙書≫‧≪모시毛詩≫‧≪논어論語≫에 주를 내었으며,
원담袁譚의 핍박으로 원성元城 고을에 와서 ≪주역≫에 주를 내었다.’라고 한 것에 의거하면, ≪효경≫에 주를 내었다는 말이 전혀 없으므로 이것이 그 첫째 증거이다.
정현이 죽은 뒤에 제자들이, 스승이 전적典籍을 주해한 글과 당대 사람들에게 응답한 말들을 논찬論纂하여 ≪정지鄭志≫라고 일컬었는데,
이 책에서 정현이 주를 냈다고 한 것은 오직 ≪모시毛詩≫‧≪삼례三禮≫‧≪상서尙書≫‧≪주역周易≫뿐이고 ≪효경≫에 주를 냈다고는 전혀 말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그 둘째 증거이다.
또 ≪정지鄭志≫와 ≪목록≫에 정현이 주를 낸 책을 기록하였는데 오경五經 이외에도 ≪중후中候≫‧≪상서대전尙書大傳≫‧≪칠정론七政論≫‧≪건상역乾象曆≫‧≪육예론六藝論≫‧≪모시보毛詩譜≫‧
≪답림석난례答臨碩難禮≫‧≪박허신이의駁許愼異義≫‧≪석폐질釋廢疾≫‧≪발묵수發墨守≫‧≪잠고황箴膏肓≫‧≪답견수연答甄守然≫ 등의 책이 있다.
〈이와 같이〉 적은 분량의 글도 모두 기재했으니, 만약 ≪효경孝經≫에 주를 내었다면 숨기고 말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이것이 그 셋째 증거이다.
疏
정현의 제자들이 〈사방에 흩어져〉 나뉘어 살면서 문도門徒들을 가르치며 스승의 말을 각기 서술하고 서로 문답을 주고받고는 그 말을 엮어 기록하여 ≪정기鄭記≫라고 칭하였는데,
오직 ≪시≫‧≪서≫‧≪예≫‧≪역≫‧≪논어≫에 대한 것만 실려 있고 ≪효경≫은 언급하지 않았다. 이것이 그 넷째 증거이다.
조상趙商이 지은 정현鄭玄의 비명碑銘에도 정현이 저술한 주注‧전箋‧박駁‧논論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면서 ≪효경≫에 주를 내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진중경부晉中經簿≫에서는 ≪주역周易≫‧≪상서尙書≫‧≪상서중후尙書中候≫‧≪상서대전尙書大傳≫‧≪모시毛詩≫‧≪주례周禮≫‧≪의례儀禮≫‧≪예기禮記≫‧≪논어論語≫ 등 총 9종의 책에 모두 ‘정씨鄭氏가 주를 내었다. 이름은 현玄이다.’라고 하면서
≪효경≫에 대해서는 ‘정씨鄭氏가 해解를 달았다.’라고만 하고 ‘이름은 현玄이다.’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것이 그 다섯째 증거이다.
춘추위春秋緯 ≪연공도演孔圖≫의 주注에 ‘정강성鄭康成이 ≪삼례≫‧≪시≫‧≪역≫‧≪상서≫‧≪논어≫에는 주를 내었고, ≪춘추≫‧≪효경≫에는 평론을 달았다.’라고 하였다.
송균宋均은 〈시보서詩譜序〉에서 ‘나의 스승이신 북해 정사농北海 鄭司農’이라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송균은 정현에게서 배운 제자이므로 스승의 주석서를 몰랐을 리 없다.
그런데 ‘≪춘추≫와 ≪효경≫에는 오직 평론을 달았다고 하였으니, 정현이 주를 낸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이것이 그 여섯째 증거이다.
疏
또 송균宋均이 효경위孝經緯에 낸 주注에 정현의 ≪육예론六藝論≫ 중 ≪효경孝經≫에 대한 논설의 ‘내(현玄)가 또 주注를 내었다.’라는 말을 인용하고 ‘사농司農(정현)의 말씀은 이와 같으나 나는 그런 말을 〈직접〉 들은 바 없다. 〈정황상〉 그럴 만은 하나 〈구체적으로〉 말씀한 적이 없으니, 나를 혼란스럽게 한다.’라고 하였다.
〈정현에게 직접 배운 송균이〉 정현의 말에 대해 ‘〈직접〉 들은 바 없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그 일곱째 증거이다. 송균이 춘추위春秋緯에 낸 주注에 ‘〈정현鄭玄이〉 ≪춘추≫와 ≪효경≫을 위해서는 간략히 논설하였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주注를 내었다는 말이 아니다. 따라서 ‘또 주注를 내었다.’라고 한 것은 범범한 말일 뿐 사실이 아니다.
정현의 ≪육예론≫ 중 ≪춘추春秋≫에 대한 논설에도 ‘내(현玄)가 또 주注를 내었다.’라고 하였지만, 〈이 말을 가지고〉 어찌 또 그가 실제로 ≪춘추春秋≫에 주를 냈어야 한다고 따질 수 있겠는가. 이것이 그 여덟째 증거이다.
후한後漢의 역사서 중 세상에 남아 있는 것으로는 사승謝承‧설영薛瑩‧사마표司馬彪‧원산송袁山松 등의 저작이 있는데, 〈이들의 책에는〉 모두 정현이 주注를 낸 책들 중에 ≪효경≫이 없고 오직 범씨范氏의 책에만 〈정현이 주注를 낸 책들 중에〉 ≪효경≫이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그 아홉째 증거이다.
왕숙王肅의 ≪효경전孝經傳≫ 서두에는 사마선왕司馬宣王이 조칙을 받들어 여러 유자儒者들에게 ≪효경≫을 주해注解하도록 한 일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때 유자들이〉 왕숙의 설을 가장 좋다고 하였다. 만약 이보다 앞서 정현의 주가 있었다면 그것도 언급했을 텐데 정현을 언급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그 열째 증거이다.
왕숙은 서적에 주注를 내면서 정현의 단점을 들춰내기를 좋아하여, 사소한 실수라도 있으면 모두 그의 ≪성증론聖證論≫에 언급하였다. 만약 ≪효경≫의 이 주注가 정현이 낸 것이라면 왕숙의 공격을 받은 곳이 매우 많았을 텐데 왕숙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으니, 이것이 그 열한째 증거이다.
위진시대魏晉時代에 조정의 신하들은 시사時事를 논변할 때 정현의 여러 주注들을 모두 인용하였는데 ≪효경≫에 대한 정현의 주注를 언급한 곳은 하나도 없으니, 이것이 그 열두째 증거이다.
疏
이 모든 증거들은 그 진위眞僞를 쉽게 조사하여 밝힐 수 있다. 그런데도 세상의 학자들은 그 설이 잘못되었음을 깨닫지 못한 채 저 그릇된 설에 편승하여 서로들 추어주며 다른 여러 주해注解들은 국립학교[학관學官]에 정식 교과로 채택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 주注만이 세상에 통행되었지만, 언어의 비루함과 의미의 불합리함을 살펴볼 때 실로 저 후학들에게 보여주어 영원히 전해지게 해서는 안 된다. 공안국孔安國이 전傳을 단 ≪고문효경古文孝經≫으로 말하면 본디 공자孔子가 살던 집의 벽 속에서 나왔는데, 말이 매우 상세하고 정확하여 깊이 헤아리고 따질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사라져 세상에 쓰이지 못하다가 수隋나라 개황開皇 14년(594)에 비서성祕書省의 학생 왕일學生 王逸이 서울에 있는 시장의 찰구식(시대에 뒤떨어진 케케묵은 사람)에게서 한 본을 매입하여 저작랑 왕소著作郞 王劭에게 보내었다.
〈왕소王劭는〉 이를 하간河間(지금의 하북성 하간시河北省 河間市 일대)의 유현劉炫에게 보여주어 교정校定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 책은 동일한 판본의 책이 전혀 없어서 근거할 만한 것을 찾기 어려웠다. 유현은 번번이 〈자신이 이전에〉 본 것에 따라 뜻 가는 대로 자구를 수정하고 이어서 ≪고문효경계의古文孝經稽疑≫ 1편을 저술하였다.”
이 때문에 개원開元 7년(719) 칙명에 의해 논의할 때 유자현劉子玄(유지기劉知幾) 등이 의견을 내기를 “공안국과 정현 두 학자의 설은 하늘과 땅 만큼이나 차이가 큰데 지금 환히 빛나는 윤음을 내리시어 그 장단점을 비교하게 하셨으니, 반드시 ‘공안국의 설을 통행시키고 정현의 설은 폐기한다.’라고 해야 사리에 맞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疏
국자박사 사마정國子博士 司馬貞은 다음과 같은 의견을 내었다. “≪금문효경≫은 한나라 때 하간왕河間王이 얻은 안지顔芝의 본입니다. 유향劉向에 이르러 이 본을 참고로 ≪고문효경≫을 교정하여 번다한 부분을 생략하고 의심스러운 부분을 삭제하여 이 18장을 확정하였습니다.
그 책의 주注에 대해, 사람들이 서로 전하기를 ‘이는 정현鄭玄이 지은 것이다.’라고 하였지만, ≪정지鄭志≫와 ≪목록目錄≫ 등에 기재되지 않았기 때문에 옛 현인들은 모두 그 말을 의심하였습니다. 오직 순창荀昶과 범엽范曄만은 정현의 주라고 했습니다.
이 때문에 순창이 여러 설을 모아 ≪효경≫을 풀이할 때 이 주를 우수한 것으로 평가하여 온전히 실었습니다. 그리고 그 주가 설사 정현이 낸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의미가 부연되어 통창하므로 장차 그에 걸맞은 지위를 얻게 될 것입니다. 비록 몇 군데 온당치 않은 점이 조금 있기는 하나 실로 경문의 말과 어긋나지는 않습니다.
≪고문효경≫ 22장은 원래 공자孔子가 살던 옛 집의 벽 속에서 나왔습니다. 예전에 공안국이 전傳을 지었으나 무고巫蠱의 옥사에 연루되어 통행되지 못하였습니다.
순창이 여러 주注들을 모을 때는 공안국의 전傳을 볼 수 있었으나, 남조南朝에서도 결국 그 책이 유실되었습니다. 근래의 유자儒者가 고문경학古文經學을 높이려고 이 전傳을 위조하고는 공씨孔氏(공안국)의 저작이라고 사칭했는데,
걸핏하면 의미를 억지로 끌어다 붙여 자구를 고치고 또 〈규문장閨門章〉 1장을 위조해 넣었습니다. 유현劉炫은 그에 아첨하여 맹종하며 맹랑하게도 좋다고 칭찬하였습니다. 또 〈규문장閨門章〉의 내용은 천근하고 통속적인 말이니, 결코 선니宣尼(공자孔子)의 바른 말이 아닙니다.
그 글을 살펴보면 ‘규문閨門 안에 예禮가 갖추어져 있다. 엄부嚴父와 엄형嚴兄이 있고, 처자妻子와 신첩臣妾이 있는 것이 나라에 백성과 도역徒役이 있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처자식을 도역徒役에 빗댄 것으로, 문구가 범속하고 너절하여 경서經書에 맞지 않습니다.
또 〈서인장庶人章〉을 나누어 ‘고자천자故自天子’부터 그 이하를 별도의 한 장으로 만들고 ‘자왈子曰’ 2자를 덧붙였습니다. 그러나 ‘고故’는 윗 문장과 이어주는 말인데, 〈이와 같이 장을 나누면 ‘고자천자故自天子’는〉 이미 장章의 첫머리가 되므로 ‘고故’라고 말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이는 옛사람이 죽은 뒤에 후인이 이들 몇 장을 함부로 고쳐 22라는 수(≪고문효경古文孝經≫의 장수章數)에 맞춘 것입니다. 〈이 ≪위고문효경공전僞古文孝經孔傳≫은〉 비단 경문이 원래의 모습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전문傳文도 천박하여 원래의 공안국 전傳이 아닙니다.
또 ‘하늘의 도道를 이용하고 땅의 이로움을 분별하며[용천지도 분지지리用天之道 分地之利]’에 주注를 내면서 대략 ‘웃통을 벗고 일하며 맨살을 드러내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하면서 맨머리와 맨발인 것을, 어려서부터 익히면 마음이 편안하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이 비록 다른 제자서諸子書에서 뽑아 인용하여 주注로 삼은 것이기는 하나, 어쩌면 말이 이리도 비속하단 말입니까.
정씨鄭氏(정현鄭玄)의 ‘다섯 가지 토지를 분별하고 〈지대의〉 높고 낮음을 살펴’라는 주注가 ‘높은 〈지대의〉 밭에는 기장과 피가 적합하고 낮은 〈지대의〉 밭에는 벼와 밀이 적합함’을 뜻하는 것과는 우열이 현격히 다르니, 또 어찌 같은 급級이겠습니까.
지금 논의하는 자들은 근래 유자의 궤설詭說을 취하고 정현의 주를 폐기하려고 하는데, 이는 실로 사리상 옳지 않습니다. 청컨대 〈기존의〉 규정대로 ≪효경≫의 정현 주注와 공안국 전傳을 변함없이 함께 통행시키소서.”
〈이에 현종이〉 조령을 내려 정현의 주를 이전대로 통행시키고 공안국의 전도 보존시켰다. 이때 소정蘇頲과 송경宋璟 등의 문신이 유속流俗에 얽매여 옛 뜻을 밝히지 못하고 유자현을 배척하는 의견을 상주하자 〈현종이〉 여러 유자들에게 서로 대면하여 시비를 정하게 하였다.
이에 사마정司馬貞이 학생 치상郗常 등 10인과 함께 유자현을 여지없이 비판하자 〈현종이〉 마침내 여러 유자들의 설을 따랐다. 10년(722)에 상上(현종)이 스스로 ≪효경≫에 주를 내어 천하에 반포하여 마침내 〈≪효경≫의 장수章數를〉 18장으로 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