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孝經注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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況泯絶於秦하야 得之者 皆煨燼之末이요
[疏]正義曰:泯, 滅也. 秦者, 隴西谷名也, 在雍州鳥鼠山之東北. 昔皐陶之子伯翳, 佐禹治水有功, 舜命作虞, 賜姓曰嬴.
非子爲周孝王養馬於汧‧渭之間, 封爲附庸, 邑于秦谷. 及非子之曾孫秦仲, 周宣王又命爲大夫.
仲之孫襄公討西戎, 救周. 周室東遷, 以岐‧豐之地賜之, 始列爲諸侯, 春秋時稱秦伯.
至孝公子惠文君, 立, 是爲. 及莊襄王, 爲秦質子於趙, 見呂不韋姬, 說而取之, 生始皇.
按秦昭王四十八年正月生於邯鄲, 及生, 名爲政, 姓趙氏. 年十三, 莊襄王死, 政代立爲秦王.
至二十六年, 平定天下, 號曰始皇帝. 三十四年, 置酒咸陽宮,
博士齊人淳于越進曰 “臣聞殷‧周之王千餘歲, 封子弟, 立功臣, 自爲枝輔.
今陛下有海內, 而子弟爲匹夫. 卒有之臣, 無輔拂, 何以哉.”
丞相李斯曰 “五帝不相復, 三代不相襲, 非其相反, 時變異也. 今陛下創大業, 建萬世之功, 固非愚儒之所知.
臣請史官非秦記皆燒之, 非博士官所職, 天下敢有藏詩‧書‧百家語者, 悉詣守尉雜燒之.” 制曰 “可.”
三十五年, 以爲諸生誹謗, 乃自除犯禁者四百六十餘人, 皆阬之咸陽.
是經籍之道, 滅絶於秦. 說文云 “煨, 也.” “燼, 火餘也.”
言遭秦焚阬之後, 典籍滅亡, 雖僅有存者, 皆火餘之微末耳. 若伏勝尙書‧顔貞孝經之類是也.


더구나 나라 때 깡그리 없어져서 〈그 후에〉 찾은 것은 모두 타다 남은 것뿐이었고,
정의왈正義曰(완전히 없어짐)이다. 농서隴西 지방의 골짜기 이름으로, 옹주 조서산雍州 鳥鼠山 동북쪽에 있다. 옛날 고요皐陶의 아들 백예伯翳(백익伯益)가 를 도와 치수治水 사업에 을 세우자, 임금이 우관虞官(산림山林천택川澤을 관리하는 관원)으로 임명하고 영씨 성嬴氏 姓을 하사하였다.
그의 후손 비자非子주 효왕周 孝王을 위해 견수汧水위수渭水 일대에서 말을 기르며 부용국附庸國(제후국에 종속된 약소국)에 봉해져 진곡秦谷에 도읍하였다. 비자非子증손 진중曾孫 秦仲에 이르러 주 선왕周 宣王이 또 대부大夫로 임명하였다.
진중秦仲의 손자 양공襄公서융西戎을 토벌하여 나라를 구원한 일이 있는데, 나라가 동쪽으로 천도한 다음 땅과 땅을 하사하였다. 이에 비로소 제후의 반열에 들어, 춘추시대에 진백秦伯으로 칭해졌다.
효공孝公의 아들 혜문군惠文君에 이르러 제위帝位에 올랐으니, 이 사람이 혜왕惠王이다. 장양왕莊襄王에 이르러 나라에 나라의 인질로 있었는데, 여불위呂不韋의 여자를 보고 좋아하여 취해서 시황始皇을 낳았다.
살펴보건대 〈시황은〉 진 소왕秦 昭王 48년 정월에 한단邯鄲에서 태어났다. 태어났을 때 이름은 이고 성은 조씨趙氏였다. 13살이 되었을 때 장양왕이 죽자 이 대신 즉위하여 나라 왕이 되었다.
26살에 천하를 평정하고 ‘시황제始皇帝’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34살에 함양궁咸陽宮에서 주연을 베풀었는데,
박사博士 지방 사람 순우월淳于越이 나아가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신이 듣건대, 나라와 나라는 천하를 다스린 천여 년 동안 자제子弟들을 제후국에 봉해주고 공신功臣들을 제후왕으로 세워 자신의 우익羽翼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천하를 소유하셨지만 자제들은 〈아무런 권한도 없는〉 필부匹夫들이니, 갑자기 〈나라의〉 전상田常이나 〈나라의〉 육경六卿 같은 신하가 나온다면 〈폐하를〉 보필할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 승상 이사李斯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오제五帝는 〈이전 제왕의 제도를〉 반복하지 않았고, 삼대三代는 〈이전 시대의 체제를〉 인습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일부러 이전과〉 반대로 하려 해서가 아니라 시대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지금 폐하께서 대업大業개창開創하시어 만대 불후萬代 不朽의 공을 세우신 것은 실로 어리석은 유자儒者들이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신은 청원합니다. 사관史官나라의 역사 기록이 아니면 모두 불사르고, 박사관博士官이 직무로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면 천하 사람들이 감히 지니고 있는 ≪≫‧≪≫‧제자백가의 서적들을 모두 군수郡守군위郡尉에게 보내어 불태우게 하소서.” 〈이에 진 시황이〉 “그리 하라.”라고 명하였다.
35살에 학자들이 〈국가에 대한〉 비방을 일삼는다며, 마침내 금령을 범한 460여 명을 스스로 골라내어 모두 함양에서 생매장하였다.
이리하여 경적經籍을 전수하는 길이 나라에서 완전히 끊겼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 “는 동이[] 속의 불이다.” “은 타고 남은 재이다.”라고 하였다.
〈이 대목은〉 나라의 분서갱유焚書坑儒를 당한 뒤에 전적典籍이 깡그리 사라져서 비록 가까스로 남은 것이 있더라도 모두 타다 남은 자질구레하고 대수롭지 않은 것에 불과했다는 말이다. 복승伏勝의 ≪상서尙書≫와 안정顔貞의 ≪효경孝經≫ 따위가 그것이다.


역주
역주1 左孫 : 後孫과 같은 말이다. 사당에서 서쪽이 윗자리이고 동쪽이 아랫자리이므로, 남쪽을 향했을 때를 기준으로 오른쪽이 윗자리가 되고 왼쪽이 아랫자리가 된다. 이 때문에 祖孫을 右祖左孫으로 표현하기도 한다.(≪韓昌黎文集≫ 卷26 〈烏氏廟碑銘〉)
역주2 惠王 : B.C.356~B.C.311. 惠文王이라고도 한다.
역주3 田常六卿 : 국정을 전횡하는 신하의 대표적 사례로 든 것이다. 田常은 춘추시대 齊 簡公 때 정승으로서 민심을 얻은 후 簡公을 시해하고 平公을 세워 제나라에서 田氏의 專權 정치를 연 陳恒으로, 陳成子 또는 田成子라고도 한다. 본디 陳나라의 왕족이던 그의 선조 陳完이 齊나라로 망명한 뒤로 田氏 姓을 사용하였다.
六卿은 춘추시대 晉 昭公 때 권력을 행사하여 왕실을 약화시키고 頃公 때 왕실의 혼란을 평정한 다음 땅을 10개 縣으로 분할하여 자신들의 아들들을 縣大夫로 세웠던 韓氏‧趙氏‧魏氏‧范氏‧中行氏‧智氏를 말한다.
역주4 輔政 : ≪史記≫ 권6 〈秦始皇本紀〉에는 ‘相救’로 되어 있으므로, 이에 따라 번역하였다.
역주5 盆火 : ≪說文解字≫ ‘煨’조에는 ‘盆中火’로 되어 있으므로, 이에 따라 번역하였다.

효경주소 책은 2019.11.0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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