唐
宗明皇帝御注
하고 宋邢昺疏
라 案唐會要
컨대 開元十年六月
에 上注孝經
하야 頒天下及國子學
하고
天寶二年五月에 上重注하야 亦頒天下라하니라 舊唐書經籍志에 孝經一卷 (元)[玄]宗注라하고
唐書藝文志
에 今上孝經制旨一卷
이라하니 注曰 (元)[玄]宗
이라하니라 其稱制旨者
는 猶
니 實一書也
라
에 載明皇注孝經四卷
하고 에도 亦稱家有此刻
하니 爲四大軸
이라하니라
蓋天寶四載九月에 以御注刻石於太學하야 謂之石臺孝經이라하니 今尙在西安府學中이라 爲碑凡四라 故拓本稱四卷耳라
(元)[玄]宗御製序末에 稱一章之中에 凡有數句하고 一句之內에 義有兼 明하니
具載則文繁하고 略之則義闕일새 今存於疏하야 用廣發揮라하니라
唐書元行沖傳에 稱(元)[玄]宗自注孝經하고 詔行沖爲疏하야 立於學官이라하니라
唐會要에 又載天寶五載에 詔孝經書疏가 雖麤發明이나 未能該備니 今更敷暢하야 以廣闕文하야 令集賢院寫頒中外하라하니라
宋咸平中에 邢昺所修之疏는 卽據行沖書爲藍本이라 然孰爲舊文이요 孰爲新說을 今已不可辨別矣라
孝經有今文古文二本
이라 今文稱鄭(元)[玄]注
하니 이나 而
不載其名
이요
古文稱孔安國注
하니 其書出自劉炫
이나 而
라 至唐開元七年三月
하야 詔令群儒質定
하니
右庶子劉知幾主古文하야 立十二驗以駁鄭하고 國子祭酒司馬貞主今文하야 摘閨門章文句凡鄙와
庶人章割裂舊文하고 妄加子曰字와 及注中脫衣就功諸語하야 以駁孔이라 其文具載唐會要中이라 厥後에 今文行而古文廢하니라
元熊禾作董鼎孝經大義序에 遂謂貞去閨門一章하야 卒啓(元)[玄]宗無禮無度之禍라하고
明孫本作孝經辨疑에도 倂謂唐宮闈不肅이어늘 貞削閨門一章하니 乃爲國諱라하니라
夫削閨門一章
하야 遂啓
이라하니 使當時行用古文
이면 果無天寶之亂乎
아
唐宮闈不肅
은 誠有之
어니와 至於閨門章二十四字
하얀 則絶與
不相涉
이어늘 指爲避諱
하니 不知所避何諱也
라
況知幾與貞兩議幷上가 會要載當時之詔하니 乃鄭依舊行用하고 孔注傳習者稀나 亦存繼絶之典이라 是未因知幾而廢鄭이며 亦未因貞而廢孔이라
迨時閱三年하야 乃有御注太學刻石이니 署名者三十六人에 貞不預列이라 御注旣行에 孔鄭兩家遂倂廢하니 亦未聞貞更建議廢孔也라
禾等徒以朱子刊誤偶用古文일새 遂以不用古文爲大罪하고 又不能知唐時典故하야
徒聞
에 有議者排毁
하야 古文遂廢之語
하야 遂沿其誤說
하야 憒憒然歸罪於貞
이라
不知以注而論컨댄 則孔佚鄭亦佚하니 孔佚罪貞이면 鄭佚又罪誰乎아
以經而論컨댄 則鄭存孔亦存하니 古文幷未因貞一議亡也어늘 貞又何罪焉가
今詳考源流하야 明今文之立은 自(元)[玄]宗此注始요 (元)[玄]宗此注之立은 自宋詔邢昺等修此疏始라
衆說喧呶는 皆揣摩影響之談이니 置之不論不議가 可矣라
〈≪효경정의孝經正義≫ 3권은〉 당唐나라 현종 명황제玄宗 明皇帝가 주注를 내고 송宋나라 형병邢昺이 소疏를 단 것이다. 살펴보건대, ≪당회요唐會要≫에 “개원開元 10년(722) 6월에 상上께서 ≪효경孝經≫에 주注를 내어 천하와 국자학國子學에 반포하셨고,
천보天寶 2년(743) 5월에 상께서 다시 주注를 내어 그 또한 천하에 반포하셨다.”라고 하였고, ≪구당서舊唐書≫ 〈경적지經籍志〉에 “≪효경孝經≫ 1권, 현종玄宗이 주를 냄.”이라고 하였으며,
≪신당서新唐書≫ 〈예문지藝文志〉에 “금상今上의 ≪효경제지孝經制旨≫ 1권”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그 주注에 “〈금상今上은〉 현종玄宗이다.”라고 하였다. ‘제지制旨’라는 명칭은 양 무제梁 武帝의 ≪중용의中庸義≫를 ‘제지制旨’라고 칭한 것과 같으니, 실은 〈≪구당서≫에 기록된 것과〉 동일한 책이다.
조명성趙明誠의 ≪금석록金石錄≫에는 “명황明皇이 주를 낸 ≪효경≫ 4권”이 기재되어 있고, 진진손陳振孫의 ≪직재서록해제直齋書錄解題≫에도 “집안에 이 각본刻本이 있는데, 큰 권축卷軸으로 4권卷이다.”라고 하였다.
천보 4년(745) 9월에 현종의 주본注本을 태학太學의 비석에 새기고 ≪석대효경石臺孝經≫이라 했는데, 지금도 서안부학西安府學 안에 있다. 비석이 모두 4기基이기 때문에 그 탁본을 4권이라 한 것이다.
현종의 어제서御製序 끝에 “한 장章 안에 총 몇 구句가 있고 한 구句 안에 여러 의미가 함께 설명되어 있으니,
모두 기재하면 글이 번잡해지고 생략하면 의미가 누락되겠기에, 이제 소疏에 〈이전의 주해를〉 보존하여 폭넓게 〈경문의 의미를〉 드러내었다.”라고 하였다.
≪신당서新唐書≫ 〈원행충전元行沖傳〉에는 “현종이 스스로 ≪효경≫에 주를 내고 원행충에게 소를 달도록 명하여 국립학교[학관學官]의 정식 과목으로 채택하였다.”라고 하였다.
≪당회요唐會要≫에는 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실려 있다. “천보 5년(746)에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효경≫의 소가 대략은 〈경문의〉 의미를 드러내어 밝히고 있으나 완전하지 못하다. 이제 다시 부연하여 의미를 소통시킴으로써 빠진 내용을 폭넓게 보충한 다음, 집현원集賢院에서 필사하여 경향京鄕 각지에 반포케 하라.’라고 하였다.”
이로 볼 때 주注도 두 차례 찬수撰修되고 소疏도 두 차례 찬수되었다. 그 소가 ≪신당서≫ 〈예문지〉에는 2권으로 기록되고 ≪송사宋史≫ 〈예문지〉에는 3권으로 기록되었으니, 〈개원 연간의 소疏에〉 이어 〈천보 연간의 소疏는〉 1권을 늘린 듯하다.
송나라 함평년간咸平年間(998~1003)에 형병邢昺이 찬수한 소는 원행충의 책을 저본底本으로 삼았다. 그러나 어떤 것이 구문舊文(원행충의 소疏)이고 어떤 것이 신설新說(형병의 글)인지 지금은 변별할 수 없다.
≪효경≫은 금문今文과 고문古文 2가지 본本이 있다. 금문본今文本은 정현鄭玄의 주본注本을 일컫는데, 이러한 설은 순창荀昶으로부터 전해졌다. 그러나 ≪정지鄭志≫에는 그 서명書名이 실려 있지 않다.
고문본은 공안국孔安國의 주본注本을 일컫는데, 이 책은 유현劉炫에게서 나왔다. 그러나 ≪수서隋書≫에 이미 이 책은 위서僞書라고 하였다. 당나라 개원開元 7년(719) 3월에 조령詔令을 내려 뭇 유학자들에게 〈금문과 고문의 진위眞僞를〉 고증하여 판정하도록 하였다.
우서자 유지기右庶子 劉知幾(661~721)는 고문古文의 신빙성을 주장하면서 12가지 증거를 내세워 정현〈이 ≪효경≫에 주를 내었다는 설〉을 논박하였고, 국자좨주 사마정國子祭酒 司馬貞은 금문今文의 신빙성을 주장하면서 〈규문장閨門章〉의 문구가 평범하고 비루한 점,
〈서인장庶人章〉의 원래 문장을 쪼개어 〈별도의 장으로 만들고〉 멋대로 ‘자왈子曰’을 붙인 점, 주注 중에 ‘웃통을 벗고 일한다’는 등의 말〈이 속된 점〉을 지적하여 공안국〈이 주해한 고문본은 위서僞書라고〉 논박하였다. 이들이 올린 문장이 ≪당회요唐會要≫ 속에 구체적으로 실려 있다. 그 뒤로 ≪금문효경≫이 통용되고 ≪고문효경≫은 폐기되었다.
원元나라 웅화熊禾(1253~1312)가 지은 동정董鼎(송宋)의 ≪효경대의孝經大義≫ 서문에 마침내 “사마정이 〈규문장閨門章〉 1장章을 삭제하여 결국 당 현종의 무례무도無禮無度한 재앙을 야기했다.”라고 하였고,
명明나라 손본孫本이 지은 ≪효경변의孝經辨疑≫에도 “당나라의 궁중이 정숙하지 못하였기에 사마정이 〈규문장〉 1장을 삭제하였으니, 이는 바로 나라를 위한 금기禁忌로 삼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규문장〉 1장을 삭제하여 마침내 〈당 현종이〉 촉蜀으로 피신하는 재앙을 야기했다는 것인데, 만약 당시에 고문본을 통용했더라면 과연 천보天寶의 난亂이 없었겠는가.
당나라의 궁중이 정숙치 못한 일이 정말로 있기는 했지만, 〈규문장〉 24자로 말하면 무후武后‧위후韋后와 전혀 상관이 없다. 그런데도 금기로 삼아 언급을 피했다고 지적했으니, 그 피한 것이 어떤 금기인지 알 수 없다.
더구나 유지기의 주장과 사마정의 주장이 나란히 상주되었음에랴. ≪당회요唐會要≫에 당시의 조서詔書가 실려 있는데, 그것은 바로 ‘정현〈의 금문본〉은 예전대로 통용하고, 공안국이 주〈를 단 고문본〉은 익히는 사람이 드물기는 하나 그 역시 단절된 전통을 잇는 규례에 따라 보존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로 볼 때 유지기로 인해 정현〈의 금문본〉이 폐기되지도 않았고, 또한 사마정으로 인해 공안국〈의 고문본〉이 폐기되지도 않았다.
3년이 지난 뒤에 어주본御注本을 태학太學의 비석에 새겼는데, 서명한 36인人 중에 사마정은 끼어 있지 않다. 어주본이 통행되고 나서 공안국과 정현의 주본注本이 모두 폐기되었는데, 사마정이 공안국〈의 주본注本〉을 폐기하도록 다시 건의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웅화熊禾 등은 그저 주자朱子의 ≪효경간오孝經刊誤≫가 우연히 고문본을 채용했기 때문에, 마침내 고문본을 사용하지 않는 것을 큰 죄로 삼았다. 그는 또 당나라 때의 고사故事를 알지 못한 채
한낱 ≪중흥서목中興書目≫에 “논의하는 자가 배격하고 비난하여 ≪고문효경≫은 마침내 폐기되었다.”라고 한 말만 듣고서 그 잘못된 설을 따라 분명한 논거도 없이 사마정에게 죄를 돌렸다.
그러나 주注를 가지고 논하자면 공안국의 주注도 유실되고 정현의 주注도 유실되었으니, 공안국의 주가 사마정 탓으로 유실되었다고 한다면 정현의 주는 또 누구 탓으로 유실되었다고 할 것인가.
경문經文을 가지고 논하자면 정현〈이 다루었던〉 금문본도 남아있고 공안국〈이 다루었던〉 고문본도 남아있다. 고문본이 결코 사마정의 한 번 비판으로 인해 유실되지 않았는데 사마정에게 또 무슨 죄를 돌리겠는가.
지금 기원과 내력을 상세히 고찰하여 금문본이 확고히 자리 잡은 것은 당 현종의 이 주注에서 시작되었고, 당 현종의 이 주注가 확고히 자리 잡은 것은 송나라 때 형병邢昺 등에게 이 소疏를 찬수하도록 명한 데서 시작되었음을 밝혔다.
시끄럽게 떠드는 뭇 설들은 모두 그림자와 메아리를 가지고 〈실체를〉 추측한 듯한 말들이니, 내버려두고 논의하지 않는 것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