其周易繫辭는 凡有二說하니 一說은 所以卦辭爻辭를 竝是文王所作이라
作易者其有憂患乎인저하고 又曰 易之興也는 其當殷之末世와 周之盛德邪인저
又乾鑿度云 垂皇策者는 犧요 卦道演德者는 文이요 成命者는 孔이라하니라
通卦驗에 又云 蒼牙通靈하고 昌之成하고 孔演命明道經이라하니
準此諸文하면 伏犧制卦하고 文王繫辭하고 孔子作十翼하시니 易歷三聖은 只謂此也라
故로 史遷云 文王囚而演易이라하니 卽是作易者其有憂患乎니 鄭學之徒 竝依此說也라
案升卦六四에 王用亨于岐山이라한대 武王克殷之後에 始追號文王爲王하니 若爻辭是文王所制면 不應云 王用亨于岐山이라
又明夷六五에 箕子之明夷라한대 武王觀兵之後에 箕子始被囚奴하니 文王不宜豫言箕子之明夷라
又旣濟九五
에 東隣殺牛 不如西隣之
祭
라한대 說者皆云 西隣
은 謂文王
이요 東隣
은 謂紂
라하니
文王之時에 紂尙南面하니 豈容自言己德受福勝殷이며 又欲抗君之國하여 遂言東西相隣而已리오
又左傳에 韓宣子適魯라가 見易象하고 云 吾乃知周公之德이라하니 周公被流言之謗도 亦得爲憂患也라
案禮稽命徵曰 文王見禮壞樂崩하여 道孤無主라 故로 設禮經三百과 威儀三千이라하니 其三百, 三千은 卽周公所制周官, 儀禮라
明文王本有此意어시늘 周公述而成之라 故로 繫之文王이라
然則易之爻辭도 蓋亦是文王本意라 故로 易緯但言文王也라
《주역周易》의 괘사卦辭와 효사爻辭를 단 것에는 모두 두 가지 설說이 있으니, 한 설說은 괘사卦辭와 효사爻辭를 모두 문왕文王이 지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를 알 수 있는 것은, 살펴보건대 〈계사전繫辭傳〉에 “역易이 일어남은 중고中古시대에 있었을 것이다.
역易을 지은 분은 우환이 있었을 것이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역易이 일어남은 은殷나라 말기와 주周나라의 성덕盛德인 때에 해당할 것이다.
문왕文王과 주紂의 일에 해당할 것이다.” 하였다.
또 《건착도乾鑿度》에 이르기를 “황책皇策을 드리운 사람은 복희씨伏羲氏이고, 괘卦의 도道를 가지고 덕德을 부연한 사람은 문왕文王이고, 명命을 이룬 사람은 공자孔子이다.” 하였다.
〈역易의 위서緯書인〉 《통괘험通卦驗》에 또 이르기를 “창아蒼牙(伏羲)가 신령함을 통하고 창昌(文王)이 완성하고 공자孔子가 부연해서 도경道經을 명명하여 밝혔다.” 하였다.
이 여러 글을 기준으로 보면 복희씨伏羲氏가 괘卦를 만들고 문왕文王이 괘사卦辭와 효사爻辭를 달고 공자孔子가 십익十翼을 지은 것이니, 역易이 세 성인聖人을 거쳤다는 것은 다만 이것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마천司馬遷이 이르기를 “문왕文王이 유리羑里에 갇혀 있으면서 역易을 부연하였다.” 하였으니, 바로 이것이 ‘역易을 지은 분이 우환이 있었을 것이다.’라는 것인바, 정현鄭玄의 무리들이 모두 이 설說을 따랐다.
두 번째 설說은, 효사爻辭를 징험해보면 문왕文王 이후의 일이 많다고 여긴 것이다.
살펴보건대, 승괘升卦 육사六四 효사爻辭에 “왕이 기산岐山에서 형통할 것이다.[王用亨于岐山]”라 하였는데, 무왕武王이 은殷나라를 이긴 뒤에 처음으로 문왕文王을 추호追號하여 왕王이라 하였으니, 만약 효사爻辭가 문왕文王이 지은 것이라면 응당 “왕용형우기산王用亨于岐山”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또 명이괘明夷卦 육오六五 효사爻辭에 “기자箕子의 밝음을 감춤[箕子之明夷]”이라 하였는데, 무왕武王이 〈맹진孟津(盟津)에서〉 열병閱兵한 뒤에 기자箕子가 처음으로 갇혀서 노예가 되었으므로, 문왕文王이 미리 ‘기자箕子의 명이明夷’를 말씀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또 기제괘旣濟卦 구오九五 효사爻辭에 “동쪽 이웃[東隣]의 소를 잡아 성대히 제사함이 서쪽 이웃[西隣]의 검소한 제사가 〈복福을 받는〉 것만 못하다.” 하였는데, 해설하는 자들이 모두 말하기를 “서린西隣은 문왕文王을 이르고, 동린東隣은 주紂를 이른다.” 하였으니,
문왕文王 때에 주紂가 아직도 천자天子의 지위에 있어 남면南面하고 있었는바, 어찌 문왕文王이 스스로 자기의 덕德이 복福을 받아 은殷나라를 이긴다고 말할 수 있었겠으며, 또 군주의 나라와 맞서고자 하여 마침내 동쪽과 서쪽으로 서로 이웃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하였겠는가.
또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한선자韓宣子(韓起)가 노魯나라에 갔다가 역상易象을 보고 말하기를 “나는 이제야 비로소 주공周公의 덕德을 알았다.” 하였으니, 주공周公이 유언비어의 비방을 받은 것도 〈역易을 지은 분의〉 우환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여러 설說을 징험해보면 괘사卦辭는 문왕文王이 지었고 효사爻辭는 주공周公이 지었다고 할 수 있다.
마융馬融과 육적陸績 등이 모두 이 설說에 찬동하였는데, 지금 이것을 따라 사용한다.
다만 세 성인聖人을 말하고 주공周公을 넣지 않은 까닭은 아버지가 자식의 사업을 통합하기 때문이다.
예禮의 위서緯書인 《계명징稽命徵》을 살펴보면, “문왕文王이 예악禮樂이 붕괴됨에 도道가 고립되어 주장함이 없음을 보았기 때문에 예禮의 경례經禮 삼백三百과 위의威儀 삼천三千을 만들었다.” 하였으니, 경례經禮 삼백三百과 위의威儀 삼천三千은 바로 주공周公이 제정한 《주관周官(周禮)》과 《의례儀禮》이다.
문왕文王이 본래 이러한 뜻을 가지고 계셨는데 주공周公이 전술하여 이룬 것임을 밝혔기 때문에 문왕文王에게 단 것이다.
그렇다면 《주역周易》의 효사爻辭도 문왕文王의 본래 뜻이기 때문에 역위易緯에서 다만 문왕文王이라고 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