疏
[疏]正義曰:‘睽’者, 乖異之名. 物情乖異, 不可大事. 大事謂興役動衆, 必須大同之世, 方可爲之.
小事謂飮食衣服, 不待衆力, 雖乖而可, 故曰“小事吉”也.
彖曰 睽는 火動而上하고 澤動而下하며 二女同居하나 其志不同行이라
說而麗乎明하고 柔進而上行하여 得中而應乎剛이라 是以로 小事吉하니라
注
[注]事皆相違는 害之道也니 何由得小事吉이리오 以有此三德也라
疏
○正義曰:‘睽 火動而上 澤動而下 二女同居 其志不同行’者, 此就二體, 釋卦名爲睽之義, 同而異者也.
水火二物, 共成烹飪, 理應相濟, 今火在上而炎上, 澤居下而潤下, 无相成之道, 所以爲乖.
中‧少二女共居一家, 理應同志, 各自出適, 志不同行, 所以爲異也.
‘說而麗乎明 柔進而上行 得中而應乎剛 是以小事吉’者, 此就二體及六五有應, 釋所以小事得吉.
說而麗乎明, 不爲邪僻, 柔進而上行, 所之在貴, 得中而應乎剛, 非爲全弱, 雖在乖違之時, 卦爻有此三德, 故可以行小事而獲吉也.
天地睽而其事同也요 男女睽而其志通也요 萬物睽而其事類也니 睽之時用이 大矣哉라
疏
○正義曰:‘天地睽而其事同’, 此以下歷就天地‧男女‧萬物, 廣明睽義體乖而用合也.
天高地卑, 其體懸隔, 是天地睽也, 而生成品物, 其事則同也.
‘男女睽而其志通’者, 男外女內, 分位有別, 是男女睽也, 而成家理事, 其志則通也.
萬物殊形, 各自爲象, 是萬物睽也, 而均於生長, 其事卽類, 故曰“天地睽而其事同也, 男女睽而其志通也, 萬物睽而其事類也.”
‘睽之時用大矣哉’, 旣明睽理合同之大, 又歎能用睽之人, 其德不小.
睽離之時, 能建其用, 使合其通理, 非大德之人, 則不可也, 故曰“睽之時用大矣哉”也.
疏
[疏]正義曰:‘上火下澤 睽’者, 動而相背, 所以爲睽也.
‘君子以同而異’者, 佐王治民, 其意則同, 各有司存, 職掌則異, 故曰“君子以同而異”也.
初九는 悔亡하니 喪馬나 勿逐이라도 自復이요 見惡人이라야 无咎리라
注
[注]處睽之初
하고 居下體之下
하여 无應獨立
은 悔也
로되 與
合志
라 故
로 得悔亡
이라
馬者는 必顯之物이니 處物之始하여 乖而喪其馬나 物莫能同하여 其私必相顯也라 故로 勿逐而自復也라
時方乖離어늘 而位乎窮下하여 上无應可援하고 下无權可恃하니 顯德自異면 爲惡所害라 故로 見惡人이라야 乃得免咎也라
疏
○正義曰:‘悔亡’者, 初九處睽離之初, 居下體之下, 无應獨立, 所以悔也.
四亦處下, 无應獨立, 不乖於己, 與己合志, 故得悔亡.
‘喪馬 勿逐 自復’者, 時方睽離, 觸目乖阻. 馬之爲物, 難可隱藏, 時或失之,
不相容隱, 不須尋求, 勢必自復, 故曰“喪馬, 勿逐, 自復”也.
‘見惡人 无咎’者, 處於窮下, 上无其應, 无應則無以爲援, 窮下則无權可恃.
疏
○正義曰:‘以辟咎也’者, 惡人不應與之相見, 而遜接之者, 以辟咎也.
注
[注]處睽失位하여 將无所安이라 然五亦失位하니 俱求其黨하여 出門同趣하여 不期而遇라
故曰 遇主于巷也라하니라 處睽得援하니 雖失其位나 未失道也라
疏
○正義曰:九二處睽之時而失其位, 將无所安, 五亦失位, 與己同黨, 同趣相求, 不假遠涉而自相遇, 適在於巷,
言
, 故曰“遇主於巷.” 主, 謂五也. 處睽得援, 咎悔可亡, 故无咎也.
疏
[疏]正義曰:‘未失道’者, 旣遇其主, 雖失其位, 亦未失道也.
六三은 見輿曳하고 其牛掣이니 其人이 天且劓나 无初有終이리라
注
[注]凡物近而不相得이면 則凶이라 處睽之時하여 履非其位하여 以陰居陽하고 以柔乘剛하며
志在於上하여 而不和於四하고 二應於五하니 則近而不相比라 故로 見輿曳니 輿曳者는 履非其位하여 失所載也라
其牛掣者는 滯隔所在하여 不獲進也라 其人天且劓者는 四從上取하고 二從下取로되
而應在上九하여 執志不回하니 初雖受困이나 終獲剛助라
疏
○正義曰:‘見輿曳 其牛掣’者, 處睽之時, 履非其位, 以陰居陽, 以柔乘剛, 志在上九, 不與四合, 二自應五, 又與己乖.
‘其人 天且劓 无初有終’者, 剠額爲天, 截鼻爲劓. 旣處二·四之間, 皆不相得,
而應在上九, 執志不回, 初雖受困, 終獲剛助, 故曰“无初有終.”
象曰 見輿曳는 位不當也요 无初有終은 遇剛也일새라
九四는 睽孤하여 遇元夫하니 交孚하여 厲하나 无咎리라
注
[注]无應獨處하여 五自應二하고 三與己睽라 故로 曰 睽孤也라하니라
初亦无應特立하니 處睽之時하여 俱在獨立하고 同處體下하여 同志者也라
而己失位하여 比於三·五에 皆與己乖하여 處无所安이라 故로 求其疇類而自託焉이라 故로 曰 遇元夫也요
同志相得而无疑焉이라 故로 曰 交孚也라 雖在乖隔이나 志故得行이라 故로 雖危无咎라
疏
○正義曰:
初‧四俱陽而言夫者, 蓋是丈夫之夫, 非夫婦之夫也.
注
[注]非位
는 悔也
로되 有應故
로 亡
이라 厥宗
은 謂二也
요 噬膚者
는 齧柔也
라
三雖比二
나 니 以斯而往
이면 何咎之有
리오 往必合也
라
疏
○正義曰:‘悔亡’者, 失位, 悔也, 有應, 故悔亡也.
三是陰爻, 故以膚爲譬, 言柔脆也. 二旣噬三卽五, 可以往而无咎矣, 故曰“往, 无咎.”
疏
○正義曰:‘往有慶也’者, 有慶之言, 善功被物, 爲物所賴也. 五雖居尊而不當位, 與二合德, 乃爲物所賴, 故曰“往有慶也.”
上九는 睽孤하여 見豕負塗와 載鬼一車라 先張之弧라가 後說之弧니 匪寇婚媾니 往하여 遇雨則吉하리라
注
[注]處睽之極하여 睽道未通이라 故로 曰 睽孤라하니라 己居炎極하고 三處澤盛하니 睽之極也요
以文明之極
으로 而觀至穢之物
하니 睽之甚也
니 豕
負塗
는 穢莫過焉
이라
至睽將合하고 至殊將通하여 恢詭譎怪나 道將爲一이로되 未至於洽하여 先見殊怪라
故로 見豕負塗하니 甚可穢也요 見鬼盈車하니 吁可怪也라 先張之弧는 將攻害也요 後說之弧는 睽怪通也라
四剠其應故로 爲寇也니 睽志將通하여 匪寇婚媾니 往不失時하면 睽疑亡也라 貴於遇雨는 和陰陽也니 陰陽旣和면 群疑亡也라
疏
○正義曰:‘睽孤’者, 處睽之極, 睽道未通, 故曰“睽孤”也.
‘見豕負塗’者, 火動而上, 澤動而下, 己居炎極, 三處澤盛, 睽之極也.
離爲文明, 澤是卑穢, 以文明之極, 而觀至穢之物事同豕而負塗泥, 穢莫斯甚矣, 故曰“見豕負塗.”
‘載鬼一車 先張之弧 後說之弧’者, 鬼魅盈車, 怪異之甚也.
至睽將合, 至殊將通, 未至於
, 先見殊怪, 故又見載鬼一車. 載鬼, 不言見者, 爲豕上有見字也.
見怪若斯, 懼來害己, 故先張之弧, 將攻害也, 物極則反, 睽極則通, 故後說之弧, 不復攻也.
疏
‘往 遇雨則吉’者, 雨者, 陰陽交和之道也, 衆異倂消, 无復疑阻, 往得和合, 則吉從之, 故曰“往, 遇雨則吉.”
疏
○正義曰:‘恢詭譎怪 道將爲一’者, 莊子內篇齊物論曰“无物不然, 无物不可. 故爲擧筳與楹, 厲與西施, 恢詭譎怪, 道通爲一.”
郭象注云“夫筳橫而楹縱, 厲醜而西施好, 所謂齊者, 豈必齊形狀, 同規矩哉.
擧縱橫好醜, 恢詭譎怪, 各然其所然, 各可其所可, 卽形雖萬殊, 而性本得同, 故曰道通爲一也.”
莊子所言以明齊物, 故擧恢詭譎怪至異之物, 道通爲一, 得性則同.
王輔嗣用此文而改通爲將字者, 明物極則反, 睽極則通,
, 不必與本義同也.
疏
[疏]正義曰:‘群疑亡也’者, 往與三合, 如雨之和, 向之見豕見鬼, 張弧之疑, 倂消釋矣, 故曰“群疑亡也.”
疏
正義曰:[睽] 乖異(어그러지고 다름)의 이름이다. 物情이 乖異하여 큰 일을 할 수 없다. 큰 일은 부역을 일으키고 많은 사람을 동원함을 이르니, 반드시 모름지기 大同의 세상이어야 비로소 할 수 있다.
작은 일은 음식과 의복을 이르니, 여러 사람의 힘을 기다리지 아니하여 비록 어그러지나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작은 일은 吉하다.”라고 한 것이다.
〈彖傳〉에 말하였다. “睽는 불이 動하여 올라가고 못이 動하여 내려오며 두 여자가 함께 사나 그 뜻이 함께 가지 않는다.
기뻐하면서 밝음에 붙어 있고 柔가 나아가 위로 가서 中을 얻어 剛에 應한다. 이 때문에 작은 일은 吉한 것이다.
注
일이 모두 서로 어긋남은 해로운 방도이니, 어떤 이유로 작은 일이 吉함을 얻을 수 있는가? 이 세 가지 德이 있기 때문이다.
疏
○正義曰:[睽 火動而上 澤動而下 二女同居 其志不同行] 이는 두 體를 가지고 卦의 이름이 睽가 된 뜻이 ‘같으면서도 다름’임을 해석한 것이다.
물과 불 두 물건이 함께 음식을 삶아 익힘을 이루니, 이치가 응당 서로 구제해야 하는데, 지금 불은 위에 있으면서 타오르며 못은 아래에 있으면서 적셔주고 내려가서 서로 이루는 道가 없으니, 이 때문에 어그러짐[乖]이 된 것이다.
中女와 少女 두 여자가 함께 한 집안에 사니, 이치가 응당 뜻이 같아야 하는데, 각자 다른 곳으로 시집가서 뜻이 함께 가지 않으니, 이 때문에 다름[異]이 된 것이다.
[說而麗乎明 柔進而上行 得中而應乎剛 是以小事吉] 이는 두 體와 六五가 應이 있음을 가지고 작은 일이 길함을 얻는 이유를 해석한 것이다.
‘기뻐하면서 밝음에 붙어 있음’은 邪僻한 짓을 하지 않고, ‘柔가 나아가 위로 올라감’은 가는 곳이 귀함에 있고, ‘中을 얻고 剛에 應함’은 온전히 약함이 되지 않으니, 비록 어긋나는 때에 있으나 卦와 爻에 이 세 가지 德이 있으므로 작은 일을 행하면 吉함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天地가 어긋나나 그 일이 같고, 남자와 여자가 어긋나나 그 뜻이 통하고, 萬物이 어긋나나 그 일이 같으니, 睽의 時와 用이 크다.”
注
睽離(어긋나고 離散함)의 때는 小人이 능히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疏
經의 [天地睽而其事同也]에서 [時用大矣哉]까지
○正義曰:[天地睽而其事同] 이 이하는 天地, 男女, 萬物에 차례로 나아가서 ‘睽의 뜻이 體는 어긋나나 用은 합함’을 넓혀 밝힌 것이다.
하늘은 높고 땅은 낮아서 그 體가 懸隔하니, 이는 하늘과 땅이 어긋난 것이지만, 品物(萬物)을 생성함은 그 일이 같다.
[男女睽而其志通] 남자는 밖에 있고 여자는 안에 있어서 자리를 나누어 분별이 있으니, 이는 남자와 여자가 어긋난 것이지만, 집안을 이루고 일을 다스림은 그 뜻이 통한다.
萬物이 형체가 달라서 각자 이를 형상으로 삼으니, 이는 萬物이 어긋난 것이지만, 生長이 똑같음은 그 일이 바로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天地가 어긋나나 그 일이 같고, 남자와 여자가 어긋나나 그 뜻이 통하고, 萬物이 어긋나나 그 일이 같다.”라고 한 것이다.
[睽之時用大矣哉] 睽의 이치가 合同하는 큼을 이미 밝혔고, 또 睽를 능히 사용하는 사람이 그 德이 작지 않음을 감탄하였다.
睽離의 때에 능히 用을 세워 通하는 이치를 합하게 함은 大德의 사람이 아니면 불가하다. 그러므로 “睽의 時와 用이 크다.”라고 한 것이다.
〈象傳〉에 말하였다. “위가 불이고 아래가 못인 것이 睽卦이니, 君子가 보고서 같으면서도 다르게 한다.”
注
通하는 이치가 같고 맡은 직책의 일이 다른 것이다.
疏
正義曰:[上火下澤 睽] 動하여 서로 위배됨은 睽가 된 이유이다.
[君子以同而異] 왕을 보좌하여 백성을 다스림은 그 뜻이 같고, 각각 맡은 일이 있어서 주관하는 것은 다르다. 그러므로 “君子가 보고서 같으면서도 다르게 한다.”라고 한 것이다.
初九는 후회가 없어지니, 말을 잃으나 쫓아가지 않아도 스스로 돌아오고, 惡人을 〈공손히〉 접견해야 허물이 없으리라.
注
睽의 처음에 처하고 下體의 아래에 거하여 應이 없이 홀로 서는 것은 후회이나 九四와 뜻이 같다. 그러므로 후회가 없어짐을 얻는 것이다.
말은 반드시 나타나는 물건이니, 물건의 시초에 처하여 어긋나서 말을 잃었으나 물건이 능히 함께하는 이가 없어서 그 사사로움이 반드시 서로 나타날 것이다. 그러므로 쫒아가지 않아도 스스로 돌아오는 것이다.
때가 막 어긋나고 離散할 때인데 맨 아래에 자리하여 위에 구원할 만한 應이 없고 아래에 믿을 만한 권력이 없으니, 德을 나타내어 스스로 달리하면 악한 사람에게 해를 당한다. 그러므로 惡人을 〈공손히〉 접견해야 비로소 허물이 없는 것이다.
疏
○正義曰:[悔亡] 初九가 睽離의 처음에 처하고 下體의 아래에 거하여 應이 없이 홀로 서 있으니, 이 때문에 후회하는 것이다.
그러나 九四 또한 〈上體의〉 아래에 처하여 應이 없이 홀로 서서 자기와 어긋나지 아니하여 자기와 뜻이 합한다. 그러므로 ‘후회가 없음’을 얻는 것이다.
[喪馬 勿逐 自復] 때가 막 睽離할 때여서 눈에 보이는 것마다 어긋나고 막힌다. 말이란 물건은 숨겨 감추기가 어려워서 때로 혹 잃지만,
서로 숨길 수 없어서 굳이 찾지 않더라도 형편상 반드시 스스로 돌아온다. 그러므로 “말을 잃었으나 쫒아가지 않아도 스스로 돌아온다.”라고 한 것이다.
[見惡人 无咎] 맨 아래에 처하여 위에 應이 없으니, 應이 없으면 구원해줄 대상이 없고, 맨 아래에 있으면 믿을 만한 권력이 없다.
만약 표출하고 드러내어 스스로 달리해서 和光同塵하지 못하면 반드시 악한 사람에게 害를 당한다. 그러므로 “惡人을 〈공손히〉 접견해야 허물이 없다.”라고 한 것이니, ‘見’은 공손히 接함을 이른다.
〈象傳〉에 말하였다. “惡人을 〈공손히〉 접견함은 허물을 피하려는 것이다.”
疏
○正義曰:[以辟咎也] 惡人은 더불어 서로 만나보지 않아야 하는데, 공손히 接하는 것은 허물을 피하려 해서이다.
九二는 君主를 골목에서 만나면 허물이 없으리라.
注
睽에 처하고 正位를 잃어서 장차 편안할 곳이 없다. 그러나 六五 또한 지위를 잃었으니, 함께 그 무리를 구하여 문을 나가 志趣가 같아서 기약하지 않고도 만난다.
그러므로 “君主를 골목에서 만난다.”라고 한 것이다. 睽에 처하여 구원을 얻었으니, 비록 正位를 잃었으나 道를 잃지 않은 것이다.
疏
○正義曰:九二가 睽의 때에 처하여 正位를 잃어서 장차 편안할 곳이 없는데, 六五 또한 正位를 잃어서 자기와 무리를 함께하여 志趣가 같아서 구하여 멀리 건너갈 필요 없이 저절로 서로 만나서 마침 골목에 있으니,
만남이 멀지 않음을 말하였다. 그러므로 “君主를 골목에서 만난다.”라고 한 것이다. 主는 六五를 이른다. 睽에 처하여 구원해줄 사람을 얻었으면 허물과 후회가 없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허물이 없는 것이다.
〈象傳〉에 말하였다. “‘君主를 골목에서 만남’은 道를 잃지 않은 것이다.”
疏
正義曰:[未失道] 이미 군주를 만났으니, 비록 正位를 잃었으나 또한 道를 잃지 않은 것이다.
六三은 수레가 끌려가고 소가 끌려감을 보니, 사람이 이마에 刺字[天]하고 또 코를 베었으나 初는 없어도 終은 있으리라.
注
모든 물건이 가까이 있으면서 서로 맞지 못하면 흉하다. 睽의 때에 처하여 밟은 것이 正位가 아니어서 陰爻로서 陽의 자리에 있고 柔로서 剛을 타고 있으며,
뜻이 上九에 있어서 九四와 화합하지 못하고 九二는 六五와 응하니, 가까이 있으면서 서로 친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수레가 끌려감을 보는 것이니, ‘수레가 끌려감’은 밟은 것이 正位가 아니어서 실을 바를 잃은 것이다.
‘소가 끌려감’은 있는 곳에 막혀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이 이마에 刺字하고 또 코를 벰’은, 九四는 위에서 취하고 九二는 아래에서 취하는 것이다.
그러나 應이 上九에 있어서 뜻을 지키고 돌리지 않으니, 처음은 비록 곤궁함을 받으나 끝내 剛의 도움을 얻게 된다.
疏
○正義曰:[見輿曳 其牛掣] 睽의 때에 처하여 밟은 것이 正位가 아니어서 陰爻로서 陽의 자리에 있고 柔로서 剛을 타고 있으며, 뜻이 上九에 있어서 九四와 합하지 못하고 九二는 따로 六五와 응하여 또 자기와 어긋난다.
싣고자 하면 수레가 끌려감을 당하여 자기가 실을 바를 잃고, 나아가고자 하면 소가 끌려감을 당하여 있는 곳에 막혀서 나아갈 수가 없다. 그러므로 “수레가 끌려가고 소가 끌려감을 본다.”라고 한 것이다.
[其人 天且劓 无初有終] 이마에 刺字한 것을 ‘天’이라 하고, 코를 벤 것을 ‘劓’라 한다. 이미 九二와 九四의 사이에 처하여 모두 서로 맞지 못하니,
사람됨이 九四는 위에서 형벌하므로 그 이마를 刺字하고, 九二는 아래에서 형벌하여 또 그 코를 벤다. 그러므로 “사람이 이마에 刺字하고 또 코를 베었다.”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應이 上九에 있어서 뜻을 지키고 돌리지 않으니, 처음은 비록 곤궁함을 받으나 끝내 剛의 도움을 얻는다. 그러므로 “初는 없어도 終은 있다.”라고 한 것이다.
〈象傳〉에 말하였다. “‘수레가 끌려감을 봄’은 자리가 마땅하지 않기 때문이요, ‘初는 없어도 終이 있음’은 剛을 만났기 때문이다.”
疏
○正義曰:[位不當] 자리가 마땅하지 않기 때문에 수레가 끌려감을 당하는 것이다.
[遇剛] 上九의 剛을 만났기 때문에 終이 있는 것이다.
九四는 睽에 외로워 元夫를 만나니, 서로 믿어서 위태로우나 허물이 없으리라.
注
應이 없이 홀로 처하여, 六五는 본래 六二에 應하고 九三은 자기와 어긋난다. 그러므로 “睽에 외롭다.”라고 한 것이다.
初九 또한 應이 없이 홀로 서 있으니, 睽의 때에 처하여 〈九四와 初九가〉 모두 홀로 서 있는 위치에 있고 卦體의 아래에 처하여 同志인 자이다.
자기가 正位를 잃어서 六三과 六五에 가까이 있는데 모두 자기와 어긋나서 처함에 편안할 곳이 없다. 그러므로 同類를 찾아 스스로 의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元夫를 만난다.”라고 한 것이다.
同志가 서로 얻어 의심이 없으므로 “서로 믿는다.”라고 한 것이다. 비록 어긋나고 막히는 때에 있으나 뜻이 진실로 행해질 수 있으므로 비록 위태로우나 허물이 없는 것이다.
疏
○正義曰:‘元夫’는 初九를 이르니, 卦의 시초에 있기 때문에 “元”이라 한 것이다. 初九와 九四가 모두 陽인데 ‘夫’라 말한 것은, ‘丈夫’의 ‘夫’요 ‘夫婦’의 ‘夫’가 아니다.
〈象傳〉에 말하였다. “‘서로 믿어 허물이 없음’은 뜻이 행해지는 것이다.”
六五는 후회가 없어지니, 그 주인이 살을 깨물면 감에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注
正位가 아님은 후회이나 應이 있기 때문에 후회가 없어진 것이다. ‘그 주인’은 九二를 이르고, ‘살을 깨묾’은 부드러움을 깨무는 것이다.
六三이 비록 九二와 가까이 있으나 九二가 깨무는 것은 자기의 應을 해치는 것이 아니니, 이런 방식으로 가면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가면 반드시 합한다.
疏
○正義曰:[悔亡] 正位를 잃음은 후회이나, 應이 있기 때문에 후회가 없어진 것이다.
[厥宗噬膚 往 何咎] ‘宗’은 주인이니 九二를 이르고, ‘噬膚’는 六三을 깨무는 것을 이르니, 六三이 비록 九二를 가로막고 있으나 九二가 六三을 깨문다. 그러므로 “그 주인이 살을 깨문다.”라고 하였다.
六三은 陰爻이므로 살로 비유하였으니, 부드러움(쉬움)을 말한 것이다. 九二가 이미 六三을 깨물고 나서 六五로 나아가면 감에 허물이 없을 수 있다. 그러므로 “감에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라고 한 것이다.
〈象傳〉에 말하였다. “‘그 주인이 살을 깨묾’은 감에 경사스러운 일이 있는 것이다.”
疏
○正義曰:[往有慶也] ‘경사가 있다’는 말은 善한 功이 남에게 입혀져서 물건이 의뢰하는 바가 되는 것이다. 六五가 비록 높은 자리에 거하였으나 자리에 합당하지 않으니 九二와 더불어 德을 합하여야 비로소 물건이 의뢰하는 바가 된다. 그러므로 “감에 경사스러운 일이 있다.”라고 한 것이다.
上九는 睽에 외로워서 돼지가 진흙을 지고 있는 것과 鬼神이 한 수레 가득 실려 있는 것을 본다. 먼저 활을 당겨 쏘려 하다가 뒤에는 활을 풀어놓으니, 도적이 아니라 혼인하자는 것이니, 가서 비를 만나면 吉하리라.
注
睽卦의 極에 처하여 睽의 道가 아직 통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睽에 외롭다.”라고 한 것이다. 자기[上九]는 불꽃[離]이 타오르는 極에 거하였고 六三은 澤의 盛함에 처하였으니 睽가 지극한 것이요,
文明의 極으로서 지극히 더러운 물건을 보니 睽가 심한 것인바, 돼지로서 진흙을 짐은 더러움이 이보다 더할 수 없는 것이다.
지극한 어긋남[睽]이 장차 합치고 지극한 다름이 장차 통하게 되어서 恢詭하고 譎怪하나 道가 장차 하나가 되겠지만 아직 흡족함에 이르지 못하여 먼저 다름과 괴이함을 본다.
그러므로 돼지가 진흙을 지고 있음을 보는 것이니 매우 더럽게 여길 만한 것이요, 귀신이 수레에 가득함을 보는 것이니, 아, 괴이할 만한 것이다. ‘먼저 활을 당김’은 장차 공격하여 해치려는 것이요, ‘뒤에 활을 풀어놓음’은 睽怪가 통한 것이다.
九四가 자신의 應을 침범하므로 ‘도적’이 되는데, 睽의 뜻이 장차 통하여 ‘도적이 아니고 혼인하자는 것’이니, 감에 때를 잃지 않으면 睽疑가 없어진다. ‘비를 만남을 귀하게 여김’은 陰陽이 화합해서이니, 陰陽이 이미 화합하면 여러 의심이 없어진다.
疏
○正義曰:[睽孤] 睽의 極에 처하여 睽의 道가 아직 통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睽에 외롭다.”라고 한 것이다.
[見豕負塗] 〈離의〉 불은 動하여 올라가고 澤은 動하여 내려와서 자기(上九)는 불꽃이 타오름의 極에 있고 六三은 澤의 성함에 처하였으니, 睽가 지극한 것이다.
離는 文明이 되고 澤은 낮고 더러운 것인데 文明의 지극함으로서 지극히 더러운 물건을 보니, 이 일은 돼지로서 진흙을 지고 있는 것과 같은바, 더러움이 이보다 더 심할 수 없다. 그러므로 “돼지가 진흙을 지고 있는 것을 본다.”라고 한 것이다.
[載鬼一車 先張之弧 後說之弧] 귀신이 수레에 가득함은 怪異함이 심한 것이다.
지극한 어긋남[睽]이 장차 합치고 지극히 다른 것이 장차 통하게 되었으나 아직 흡족함에 이르지 못하여 먼저 다름과 괴이함을 본다. 그러므로 또 귀신이 한 수레 가득 실려 있음을 보는 것이다. 귀신이 실려 있음에 ‘見’을 말하지 않은 것은 ‘豕’자 위에 ‘見’자가 있기 때문이다.
괴이함을 당함이 이와 같으면 와서 자기를 해칠까 두렵다. 그러므로 먼저 활을 펴니 장차 공격하여 해치려 한 것이요, 사물이 極에 이르면 뒤집어지고 어긋남이 지극하면 통한다. 그러므로 뒤에 활을 풀어놓아서 다시 공격하지 않는 것이다.
疏
[匪寇婚媾] 九四가 자기의 應(初六)을 刺字하므로 九四를 ‘도적’이라 하였으니, 睽의 뜻이 이미 통하면 도적이 되려는 것이 아니고 바로 六三과 혼인을 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적이 아니라 혼인하자는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往 遇雨則吉] ‘雨’는 陰과 陽이 서로 화합하는 道이니, 여러 괴이함이 모두 사라져 다시는 의심하거나 막힘이 없어서 가서 화합함을 얻으면 吉함이 따른다. 그러므로 “가서 비를 만나면 吉하리라.”라고 한 것이다.
疏
○正義曰:[恢詭譎怪 道將爲一] ≪莊子≫ 〈內篇 齊物論〉에 “물건마다 옳지 않은 것이 없고 물건마다 可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므로 筳과 楹을 들고 厲와 西施를 들어 恢詭하고 譎怪하나 道가 통하여 하나가 된다.”라고 하였는데,
郭象의 注에 “筳은 가로로 누워 있고 楹은 세로로 세워져 있으며, 厲는 추악하고 西施는 아름다우니, 이른바 가지런하다는 것은 어찌 반드시 形狀이 가지런하고 規矩가 똑같은 것이겠는가.
縱과 橫, 아름다움[好]과 추악함[醜]을 들어서 恢詭하고 譎怪하나 각각 그 옳은 바를 옳게 여기고 각각 그 可한 바를 可하게 여기면 형상이 비록 만 가지로 다르나 性의 근본이 같아진다. 그러므로 ‘道가 통하여 하나가 된다.’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莊子의 말은 물건을 가지런히 함을 밝힌 것이므로 恢詭와 譎怪의 지극히 다른 물건을 들어서 道가 통하여 하나가 되고 性을 얻으면 같아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王輔嗣(王弼)가 이 글을 사용하면서 ‘通’을 고쳐 ‘將’자로 쓴 것은 사물이 極에 이르면 뒤집어지고 어긋남이 지극하면 통함을 밝힌 것이니, ≪詩經≫을 인용할 적에 斷章取義함과 유사하여 굳이 本義와 같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象傳〉에 말하였다. “비를 만남의 吉함은 여러 의심이 없어진 것이다.”
疏
正義曰:[群疑亡也] 가서 六三과 합함이 비의 화합함과 같으니, 지난번에 돼지를 보고 귀신을 보고서 활을 펼치던 의심이 모두 사라져 풀렸다. 그러므로 “여러 의심이 없어졌다.”라고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