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周易正義(2)

주역정의(2)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주역정의(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小事吉하니라
睽는 작은 일은 吉하다.
[疏]正義曰:‘睽’者, 乖異之名. 物情乖異, 不可大事. 大事謂興役動衆, 必須大同之世, 方可爲之.
正義曰:[睽] 乖異(어그러지고 다름)의 이름이다. 物情이 乖異하여 큰 일을 할 수 없다. 큰 일은 부역을 일으키고 많은 사람을 동원함을 이르니, 반드시 모름지기 大同의 세상이어야 비로소 할 수 있다.
小事謂飮食衣服, 不待衆力, 雖乖而可, 故曰“小事吉”也.
작은 일은 음식과 의복을 이르니, 여러 사람의 힘을 기다리지 아니하여 비록 어그러지나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작은 일은 吉하다.”라고 한 것이다.
彖曰 睽 火動而上하고 澤動而下하며 二女同居하나 其志不同行이라
〈彖傳〉에 말하였다. “睽는 불이 動하여 올라가고 못이 動하여 내려오며 두 여자가 함께 사나 그 뜻이 함께 가지 않는다.
說而麗乎明하고 柔進而上行하여 得中而應乎剛이라 是以 小事吉하니라
기뻐하면서 밝음에 붙어 있고 柔가 나아가 위로 가서 中을 얻어 剛에 應한다. 이 때문에 작은 일은 吉한 것이다.
[注]事皆相違 害之道也 何由得小事吉이리오 以有此三德也
일이 모두 서로 어긋남은 해로운 방도이니, 어떤 이유로 작은 일이 吉함을 얻을 수 있는가? 이 세 가지 德이 있기 때문이다.
[疏]‘彖曰睽動而上’至‘小事吉’
經의 [彖曰睽火動而上]에서 [小事吉]까지
○正義曰:‘睽 火動而上 澤動而下 二女同居 其志不同行’者, 此就二體, 釋卦名爲睽之義, 同而異者也.
○正義曰:[睽 火動而上 澤動而下 二女同居 其志不同行] 이는 두 體를 가지고 卦의 이름이 睽가 된 뜻이 ‘같으면서도 다름’임을 해석한 것이다.
水火二物, 共成烹飪, 理應相濟, 今火在上而炎上, 澤居下而潤下, 无相成之道, 所以爲乖.
물과 불 두 물건이 함께 음식을 삶아 익힘을 이루니, 이치가 응당 서로 구제해야 하는데, 지금 불은 위에 있으면서 타오르며 못은 아래에 있으면서 적셔주고 내려가서 서로 이루는 道가 없으니, 이 때문에 어그러짐[乖]이 된 것이다.
中‧少二女共居一家, 理應同志, 各自出適, 志不同行, 所以爲異也.
中女와 少女 두 여자가 함께 한 집안에 사니, 이치가 응당 뜻이 같아야 하는데, 각자 다른 곳으로 시집가서 뜻이 함께 가지 않으니, 이 때문에 다름[異]이 된 것이다.
‘說而麗乎明 柔進而上行 得中而應乎剛 是以小事吉’者, 此就二體及六五有應, 釋所以小事得吉.
[說而麗乎明 柔進而上行 得中而應乎剛 是以小事吉] 이는 두 體와 六五가 應이 있음을 가지고 작은 일이 길함을 얻는 이유를 해석한 것이다.
說而麗乎明, 不爲邪僻, 柔進而上行, 所之在貴, 得中而應乎剛, 非爲全弱, 雖在乖違之時, 卦爻有此三德, 故可以行小事而獲吉也.
‘기뻐하면서 밝음에 붙어 있음’은 邪僻한 짓을 하지 않고, ‘柔가 나아가 위로 올라감’은 가는 곳이 귀함에 있고, ‘中을 얻고 剛에 應함’은 온전히 약함이 되지 않으니, 비록 어긋나는 때에 있으나 卦와 爻에 이 세 가지 德이 있으므로 작은 일을 행하면 吉함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天地睽而其事同也 男女睽而其志通也 萬物睽而其事類也 睽之時用 大矣哉
天地가 어긋나나 그 일이 같고, 남자와 여자가 어긋나나 그 뜻이 통하고, 萬物이 어긋나나 그 일이 같으니, 睽의 時와 用이 크다.”
[注]睽離之時 非小人之所能用也
睽離(어긋나고 離散함)의 때는 小人이 능히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疏]‘天地睽而其事同也’至‘時用大矣哉’
經의 [天地睽而其事同也]에서 [時用大矣哉]까지
○正義曰:‘天地睽而其事同’, 此以下歷就天地‧男女‧萬物, 廣明睽義體乖而用合也.
○正義曰:[天地睽而其事同] 이 이하는 天地, 男女, 萬物에 차례로 나아가서 ‘睽의 뜻이 體는 어긋나나 用은 합함’을 넓혀 밝힌 것이다.
天高地卑, 其體懸隔, 是天地睽也, 而生成品物, 其事則同也.
하늘은 높고 땅은 낮아서 그 體가 懸隔하니, 이는 하늘과 땅이 어긋난 것이지만, 品物(萬物)을 생성함은 그 일이 같다.
‘男女睽而其志通’者, 男外女內, 分位有別, 是男女睽也, 而成家理事, 其志則通也.
[男女睽而其志通] 남자는 밖에 있고 여자는 안에 있어서 자리를 나누어 분별이 있으니, 이는 남자와 여자가 어긋난 것이지만, 집안을 이루고 일을 다스림은 그 뜻이 통한다.
萬物殊形, 各自爲象, 是萬物睽也, 而均於生長, 其事卽類, 故曰“天地睽而其事同也, 男女睽而其志通也, 萬物睽而其事類也.”
萬物이 형체가 달라서 각자 이를 형상으로 삼으니, 이는 萬物이 어긋난 것이지만, 生長이 똑같음은 그 일이 바로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天地가 어긋나나 그 일이 같고, 남자와 여자가 어긋나나 그 뜻이 통하고, 萬物이 어긋나나 그 일이 같다.”라고 한 것이다.
‘睽之時用大矣哉’, 旣明睽理合同之大, 又歎能用睽之人, 其德不小.
[睽之時用大矣哉] 睽의 이치가 合同하는 큼을 이미 밝혔고, 또 睽를 능히 사용하는 사람이 그 德이 작지 않음을 감탄하였다.
睽離之時, 能建其用, 使合其通理, 非大德之人, 則不可也, 故曰“睽之時用大矣哉”也.
睽離의 때에 능히 用을 세워 通하는 이치를 합하게 함은 大德의 사람이 아니면 불가하다. 그러므로 “睽의 時와 用이 크다.”라고 한 것이다.
象曰 上火下澤 君子以同而異하나니라
〈象傳〉에 말하였다. “위가 불이고 아래가 못인 것이 睽卦이니, 君子가 보고서 같으면서도 다르게 한다.”
[注]同於通理하고 異於職事
通하는 이치가 같고 맡은 직책의 일이 다른 것이다.
[疏]正義曰:‘上火下澤 睽’者, 動而相背, 所以爲睽也.
正義曰:[上火下澤 睽] 動하여 서로 위배됨은 睽가 된 이유이다.
‘君子以同而異’者, 佐王治民, 其意則同, 各有司存, 職掌則異, 故曰“君子以同而異”也.
[君子以同而異] 왕을 보좌하여 백성을 다스림은 그 뜻이 같고, 각각 맡은 일이 있어서 주관하는 것은 다르다. 그러므로 “君子가 보고서 같으면서도 다르게 한다.”라고 한 것이다.
初九 悔亡하니 喪馬 勿逐이라도 自復이요 見惡人이라야 无咎리라
初九는 후회가 없어지니, 말을 잃으나 쫓아가지 않아도 스스로 돌아오고, 惡人을 〈공손히〉 접견해야 허물이 없으리라.
[注]處睽之初하고 居下體之下하여 无應獨立 悔也로되合志 得悔亡이라
睽의 처음에 처하고 下體의 아래에 거하여 應이 없이 홀로 서는 것은 후회이나 九四와 뜻이 같다. 그러므로 후회가 없어짐을 얻는 것이다.
馬者 必顯之物이니 處物之始하여 乖而喪其馬 物莫能同하여 其私必相顯也 勿逐而自復也
말은 반드시 나타나는 물건이니, 물건의 시초에 처하여 어긋나서 말을 잃었으나 물건이 능히 함께하는 이가 없어서 그 사사로움이 반드시 서로 나타날 것이다. 그러므로 쫒아가지 않아도 스스로 돌아오는 것이다.
時方乖離어늘 而位乎窮下하여 上无應可援하고 下无權可恃하니 顯德自異 爲惡所害 見惡人이라야 乃得免咎也
때가 막 어긋나고 離散할 때인데 맨 아래에 자리하여 위에 구원할 만한 應이 없고 아래에 믿을 만한 권력이 없으니, 德을 나타내어 스스로 달리하면 악한 사람에게 해를 당한다. 그러므로 惡人을 〈공손히〉 접견해야 비로소 허물이 없는 것이다.
[疏]‘初九悔亡喪馬勿逐自復見惡人无咎’
經의 [初九悔亡喪馬勿逐自復見惡人无咎]
○正義曰:‘悔亡’者, 初九處睽離之初, 居下體之下, 无應獨立, 所以悔也.
○正義曰:[悔亡] 初九가 睽離의 처음에 처하고 下體의 아래에 거하여 應이 없이 홀로 서 있으니, 이 때문에 후회하는 것이다.
四亦處下, 无應獨立, 不乖於己, 與己合志, 故得悔亡.
그러나 九四 또한 〈上體의〉 아래에 처하여 應이 없이 홀로 서서 자기와 어긋나지 아니하여 자기와 뜻이 합한다. 그러므로 ‘후회가 없음’을 얻는 것이다.
‘喪馬 勿逐 自復’者, 時方睽離, 觸目乖阻. 馬之爲物, 難可隱藏, 時或失之,
[喪馬 勿逐 自復] 때가 막 睽離할 때여서 눈에 보이는 것마다 어긋나고 막힌다. 말이란 물건은 숨겨 감추기가 어려워서 때로 혹 잃지만,
不相容隱, 不須尋求, 勢必自復, 故曰“喪馬, 勿逐, 自復”也.
서로 숨길 수 없어서 굳이 찾지 않더라도 형편상 반드시 스스로 돌아온다. 그러므로 “말을 잃었으나 쫒아가지 않아도 스스로 돌아온다.”라고 한 것이다.
‘見惡人 无咎’者, 處於窮下, 上无其應, 无應則無以爲援, 窮下則无權可恃.
[見惡人 无咎] 맨 아래에 처하여 위에 應이 없으니, 應이 없으면 구원해줄 대상이 없고, 맨 아래에 있으면 믿을 만한 권력이 없다.
若標顯自異, 不能, 則必爲惡人所害, 故曰“
만약 표출하고 드러내어 스스로 달리해서 和光同塵하지 못하면 반드시 악한 사람에게 害를 당한다. 그러므로 “惡人을 〈공손히〉 접견해야 허물이 없다.”라고 한 것이니, ‘見’은 공손히 接함을 이른다.
象曰 見惡人 以辟咎也
〈象傳〉에 말하였다. “惡人을 〈공손히〉 접견함은 허물을 피하려는 것이다.”
[疏]‘象曰見惡人以辟咎也’
經의 [象曰見惡人以辟咎也]
○正義曰:‘以辟咎也’者, 惡人不應與之相見, 而遜接之者, 以辟咎也.
○正義曰:[以辟咎也] 惡人은 더불어 서로 만나보지 않아야 하는데, 공손히 接하는 것은 허물을 피하려 해서이다.
九二 遇主于巷하면 无咎리라
九二는 君主를 골목에서 만나면 허물이 없으리라.
[注]處睽失位하여 將无所安이라 然五亦失位하니 俱求其黨하여 出門同趣하여 不期而遇
睽에 처하고 正位를 잃어서 장차 편안할 곳이 없다. 그러나 六五 또한 지위를 잃었으니, 함께 그 무리를 구하여 문을 나가 志趣가 같아서 기약하지 않고도 만난다.
故曰 遇主于巷也라하니라 處睽得援하니 雖失其位 未失道也
그러므로 “君主를 골목에서 만난다.”라고 한 것이다. 睽에 처하여 구원을 얻었으니, 비록 正位를 잃었으나 道를 잃지 않은 것이다.
[疏]‘九二遇主于巷无咎’
經의 [九二遇主于巷无咎]
○正義曰:九二處睽之時而失其位, 將无所安, 五亦失位, 與己同黨, 同趣相求, 不假遠涉而自相遇, 適在於巷,
○正義曰:九二가 睽의 때에 처하여 正位를 잃어서 장차 편안할 곳이 없는데, 六五 또한 正位를 잃어서 자기와 무리를 함께하여 志趣가 같아서 구하여 멀리 건너갈 필요 없이 저절로 서로 만나서 마침 골목에 있으니,
, 故曰“遇主於巷.” 主, 謂五也. 處睽得援, 咎悔可亡, 故无咎也.
만남이 멀지 않음을 말하였다. 그러므로 “君主를 골목에서 만난다.”라고 한 것이다. 主는 六五를 이른다. 睽에 처하여 구원해줄 사람을 얻었으면 허물과 후회가 없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허물이 없는 것이다.
象曰 遇主于巷 未失道也
〈象傳〉에 말하였다. “‘君主를 골목에서 만남’은 道를 잃지 않은 것이다.”
[疏]正義曰:‘未失道’者, 旣遇其主, 雖失其位, 亦未失道也.
正義曰:[未失道] 이미 군주를 만났으니, 비록 正位를 잃었으나 또한 道를 잃지 않은 것이다.
六三 見輿曳하고 其牛掣이니 其人 天且劓 无初有終이리라
六三은 수레가 끌려가고 소가 끌려감을 보니, 사람이 이마에 刺字[天]하고 또 코를 베었으나 初는 없어도 終은 있으리라.
[注]凡物近而不相得이면 則凶이라 處睽之時하여 履非其位하여 以陰居陽하고 以柔乘剛하며
모든 물건이 가까이 있으면서 서로 맞지 못하면 흉하다. 睽의 때에 처하여 밟은 것이 正位가 아니어서 陰爻로서 陽의 자리에 있고 柔로서 剛을 타고 있으며,
志在於上하여 而不和於四하고 二應於五하니 則近而不相比 見輿曳 輿曳者 履非其位하여 失所載也
뜻이 上九에 있어서 九四와 화합하지 못하고 九二는 六五와 응하니, 가까이 있으면서 서로 친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수레가 끌려감을 보는 것이니, ‘수레가 끌려감’은 밟은 것이 正位가 아니어서 실을 바를 잃은 것이다.
其牛掣者 滯隔所在하여 不獲進也 其人天且劓者 四從上取하고 二從下取로되
‘소가 끌려감’은 있는 곳에 막혀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이 이마에 刺字하고 또 코를 벰’은, 九四는 위에서 취하고 九二는 아래에서 취하는 것이다.
而應在上九하여 執志不回하니 初雖受困이나 終獲剛助
그러나 應이 上九에 있어서 뜻을 지키고 돌리지 않으니, 처음은 비록 곤궁함을 받으나 끝내 剛의 도움을 얻게 된다.
[疏]‘六三見輿曳其牛’至‘无初有終’
經의 [六三見輿曳其牛]에서 [无初有終]까지
○正義曰:‘見輿曳 其牛掣’者, 處睽之時, 履非其位, 以陰居陽, 以柔乘剛, 志在上九, 不與四合, 二自應五, 又與己乖.
○正義曰:[見輿曳 其牛掣] 睽의 때에 처하여 밟은 것이 正位가 아니어서 陰爻로서 陽의 자리에 있고 柔로서 剛을 타고 있으며, 뜻이 上九에 있어서 九四와 합하지 못하고 九二는 따로 六五와 응하여 또 자기와 어긋난다.
싣고자 하면 수레가 끌려감을 당하여 자기가 실을 바를 잃고, 나아가고자 하면 소가 끌려감을 당하여 있는 곳에 막혀서 나아갈 수가 없다. 그러므로 “수레가 끌려가고 소가 끌려감을 본다.”라고 한 것이다.
‘其人 天且劓 无初有終’者, 剠額爲天, 截鼻爲劓. 旣處二·四之間, 皆不相得,
[其人 天且劓 无初有終] 이마에 刺字한 것을 ‘天’이라 하고, 코를 벤 것을 ‘劓’라 한다. 이미 九二와 九四의 사이에 처하여 모두 서로 맞지 못하니,
사람됨이 九四는 위에서 형벌하므로 그 이마를 刺字하고, 九二는 아래에서 형벌하여 또 그 코를 벤다. 그러므로 “사람이 이마에 刺字하고 또 코를 베었다.”라고 한 것이다.
而應在上九, 執志不回, 初雖受困, 終獲剛助, 故曰“无初有終.”
그러나 應이 上九에 있어서 뜻을 지키고 돌리지 않으니, 처음은 비록 곤궁함을 받으나 끝내 剛의 도움을 얻는다. 그러므로 “初는 없어도 終은 있다.”라고 한 것이다.
象曰 見輿曳 位不當也 无初有終 遇剛也일새라
〈象傳〉에 말하였다. “‘수레가 끌려감을 봄’은 자리가 마땅하지 않기 때문이요, ‘初는 없어도 終이 있음’은 剛을 만났기 때문이다.”
[疏]‘象曰’至‘有終遇剛也’
經의 [象曰]에서 [有終遇剛也]까지
○正義曰:‘位不當’者, 由位不當, 故輿被曳.
○正義曰:[位不當] 자리가 마땅하지 않기 때문에 수레가 끌려감을 당하는 것이다.
‘遇剛’者, 由遇上九之剛, 所以有終也.
[遇剛] 上九의 剛을 만났기 때문에 終이 있는 것이다.
九四 睽孤하여 遇元夫하니 交孚하여하나 无咎리라
九四는 睽에 외로워 元夫를 만나니, 서로 믿어서 위태로우나 허물이 없으리라.
[注]无應獨處하여 五自應二하고 三與己睽 曰 睽孤也라하니라
應이 없이 홀로 처하여, 六五는 본래 六二에 應하고 九三은 자기와 어긋난다. 그러므로 “睽에 외롭다.”라고 한 것이다.
初亦无應特立하니 處睽之時하여 俱在獨立하고 同處體下하여 同志者也
初九 또한 應이 없이 홀로 서 있으니, 睽의 때에 처하여 〈九四와 初九가〉 모두 홀로 서 있는 위치에 있고 卦體의 아래에 처하여 同志인 자이다.
而己失位하여 比於三·五 皆與己乖하여 處无所安이라 求其疇類而自託焉이라 曰 遇元夫也
자기가 正位를 잃어서 六三과 六五에 가까이 있는데 모두 자기와 어긋나서 처함에 편안할 곳이 없다. 그러므로 同類를 찾아 스스로 의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元夫를 만난다.”라고 한 것이다.
同志相得而无疑焉이라 曰 交孚也 雖在乖隔이나 志故得行이라 雖危无咎
同志가 서로 얻어 의심이 없으므로 “서로 믿는다.”라고 한 것이다. 비록 어긋나고 막히는 때에 있으나 뜻이 진실로 행해질 수 있으므로 비록 위태로우나 허물이 없는 것이다.
[疏]‘九四’至‘交孚厲无咎’
經의 [九四]에서 [交孚厲无咎]까지
○正義曰: 初‧四俱陽而言夫者, 蓋是丈夫之夫, 非夫婦之夫也.
○正義曰:‘元夫’는 初九를 이르니, 卦의 시초에 있기 때문에 “元”이라 한 것이다. 初九와 九四가 모두 陽인데 ‘夫’라 말한 것은, ‘丈夫’의 ‘夫’요 ‘夫婦’의 ‘夫’가 아니다.
象曰 交孚无咎 志行也
〈象傳〉에 말하였다. “‘서로 믿어 허물이 없음’은 뜻이 행해지는 것이다.”
六五 悔亡하니 厥宗噬膚 何咎리오
六五는 후회가 없어지니, 그 주인이 살을 깨물면 감에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注]非位 悔也로되 有應故 이라 厥宗 謂二也 噬膚者 齧柔也
正位가 아님은 후회이나 應이 있기 때문에 후회가 없어진 것이다. ‘그 주인’은 九二를 이르고, ‘살을 깨묾’은 부드러움을 깨무는 것이다.
三雖比二 以斯而往이면 何咎之有리오 往必合也
六三이 비록 九二와 가까이 있으나 九二가 깨무는 것은 자기의 應을 해치는 것이 아니니, 이런 방식으로 가면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가면 반드시 합한다.
[疏]‘六五悔亡’至‘往何咎’
經의 [六五悔亡]에서 [往何咎]까지
○正義曰:‘悔亡’者, 失位, 悔也, 有應, 故悔亡也.
○正義曰:[悔亡] 正位를 잃음은 후회이나, 應이 있기 때문에 후회가 없어진 것이다.
[厥宗噬膚 往 何咎] ‘宗’은 주인이니 九二를 이르고, ‘噬膚’는 六三을 깨무는 것을 이르니, 六三이 비록 九二를 가로막고 있으나 九二가 六三을 깨문다. 그러므로 “그 주인이 살을 깨문다.”라고 하였다.
三是陰爻, 故以膚爲譬, 言柔脆也. 二旣噬三卽五, 可以往而无咎矣, 故曰“往, 无咎.”
六三은 陰爻이므로 살로 비유하였으니, 부드러움(쉬움)을 말한 것이다. 九二가 이미 六三을 깨물고 나서 六五로 나아가면 감에 허물이 없을 수 있다. 그러므로 “감에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라고 한 것이다.
象曰 厥宗噬膚 往有慶也리라
〈象傳〉에 말하였다. “‘그 주인이 살을 깨묾’은 감에 경사스러운 일이 있는 것이다.”
[疏]‘象曰’至‘往有慶也’
經의 [象曰]에서 [往有慶也]까지
○正義曰:‘往有慶也’者, 有慶之言, 善功被物, 爲物所賴也. 五雖居尊而不當位, 與二合德, 乃爲物所賴, 故曰“往有慶也.”
○正義曰:[往有慶也] ‘경사가 있다’는 말은 善한 功이 남에게 입혀져서 물건이 의뢰하는 바가 되는 것이다. 六五가 비록 높은 자리에 거하였으나 자리에 합당하지 않으니 九二와 더불어 德을 합하여야 비로소 물건이 의뢰하는 바가 된다. 그러므로 “감에 경사스러운 일이 있다.”라고 한 것이다.
上九 睽孤하여 見豕負塗 載鬼一車 先張之弧라가 後說之弧 匪寇婚媾하여 遇雨則吉하리라
上九는 睽에 외로워서 돼지가 진흙을 지고 있는 것과 鬼神이 한 수레 가득 실려 있는 것을 본다. 먼저 활을 당겨 쏘려 하다가 뒤에는 활을 풀어놓으니, 도적이 아니라 혼인하자는 것이니, 가서 비를 만나면 吉하리라.
[注]處睽之極하여 睽道未通이라 曰 睽孤라하니라 己居炎極하고 三處澤盛하니 睽之極也
睽卦의 極에 처하여 睽의 道가 아직 통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睽에 외롭다.”라고 한 것이다. 자기[上九]는 불꽃[離]이 타오르는 極에 거하였고 六三은 澤의 盛함에 처하였으니 睽가 지극한 것이요,
以文明之極으로 而觀至穢之物하니 睽之甚也負塗 穢莫過焉이라
文明의 極으로서 지극히 더러운 물건을 보니 睽가 심한 것인바, 돼지로서 진흙을 짐은 더러움이 이보다 더할 수 없는 것이다.
至睽將合하고 至殊將通하여 恢詭譎怪 道將爲一이로되 未至於洽하여 先見殊怪
지극한 어긋남[睽]이 장차 합치고 지극한 다름이 장차 통하게 되어서 恢詭하고 譎怪하나 道가 장차 하나가 되겠지만 아직 흡족함에 이르지 못하여 먼저 다름과 괴이함을 본다.
見豕負塗하니 甚可穢也 見鬼盈車하니 吁可怪也 先張之弧 將攻害也 後說之弧 睽怪通也
그러므로 돼지가 진흙을 지고 있음을 보는 것이니 매우 더럽게 여길 만한 것이요, 귀신이 수레에 가득함을 보는 것이니, 아, 괴이할 만한 것이다. ‘먼저 활을 당김’은 장차 공격하여 해치려는 것이요, ‘뒤에 활을 풀어놓음’은 睽怪가 통한 것이다.
四剠其應故 爲寇也 睽志將通하여 匪寇婚媾 往不失時하면 睽疑亡也 貴於遇雨 和陰陽也 陰陽旣和 群疑亡也
九四가 자신의 應을 침범하므로 ‘도적’이 되는데, 睽의 뜻이 장차 통하여 ‘도적이 아니고 혼인하자는 것’이니, 감에 때를 잃지 않으면 睽疑가 없어진다. ‘비를 만남을 귀하게 여김’은 陰陽이 화합해서이니, 陰陽이 이미 화합하면 여러 의심이 없어진다.
[疏]‘上九睽孤見豕’至‘遇雨則吉’
經의 [上九睽孤見豕]에서 [遇雨則吉]까지
○正義曰:‘睽孤’者, 處睽之極, 睽道未通, 故曰“睽孤”也.
○正義曰:[睽孤] 睽의 極에 처하여 睽의 道가 아직 통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睽에 외롭다.”라고 한 것이다.
‘見豕負塗’者, 火動而上, 澤動而下, 己居炎極, 三處澤盛, 睽之極也.
[見豕負塗] 〈離의〉 불은 動하여 올라가고 澤은 動하여 내려와서 자기(上九)는 불꽃이 타오름의 極에 있고 六三은 澤의 성함에 처하였으니, 睽가 지극한 것이다.
離爲文明, 澤是卑穢, 以文明之極, 而觀至穢之物事同豕而負塗泥, 穢莫斯甚矣, 故曰“見豕負塗.”
離는 文明이 되고 澤은 낮고 더러운 것인데 文明의 지극함으로서 지극히 더러운 물건을 보니, 이 일은 돼지로서 진흙을 지고 있는 것과 같은바, 더러움이 이보다 더 심할 수 없다. 그러므로 “돼지가 진흙을 지고 있는 것을 본다.”라고 한 것이다.
‘載鬼一車 先張之弧 後說之弧’者, 鬼魅盈車, 怪異之甚也.
[載鬼一車 先張之弧 後說之弧] 귀신이 수레에 가득함은 怪異함이 심한 것이다.
至睽將合, 至殊將通, 未至於, 先見殊怪, 故又見載鬼一車. 載鬼, 不言見者, 爲豕上有見字也.
지극한 어긋남[睽]이 장차 합치고 지극히 다른 것이 장차 통하게 되었으나 아직 흡족함에 이르지 못하여 먼저 다름과 괴이함을 본다. 그러므로 또 귀신이 한 수레 가득 실려 있음을 보는 것이다. 귀신이 실려 있음에 ‘見’을 말하지 않은 것은 ‘豕’자 위에 ‘見’자가 있기 때문이다.
見怪若斯, 懼來害己, 故先張之弧, 將攻害也, 物極則反, 睽極則通, 故後說之弧, 不復攻也.
괴이함을 당함이 이와 같으면 와서 자기를 해칠까 두렵다. 그러므로 먼저 활을 펴니 장차 공격하여 해치려 한 것이요, 사물이 極에 이르면 뒤집어지고 어긋남이 지극하면 통한다. 그러므로 뒤에 활을 풀어놓아서 다시 공격하지 않는 것이다.
[匪寇婚媾] 九四가 자기의 應(初六)을 刺字하므로 九四를 ‘도적’이라 하였으니, 睽의 뜻이 이미 통하면 도적이 되려는 것이 아니고 바로 六三과 혼인을 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적이 아니라 혼인하자는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往 遇雨則吉’者, 雨者, 陰陽交和之道也, 衆異倂消, 无復疑阻, 往得和合, 則吉從之, 故曰“往, 遇雨則吉.”
[往 遇雨則吉] ‘雨’는 陰과 陽이 서로 화합하는 道이니, 여러 괴이함이 모두 사라져 다시는 의심하거나 막힘이 없어서 가서 화합함을 얻으면 吉함이 따른다. 그러므로 “가서 비를 만나면 吉하리라.”라고 한 것이다.
[疏]○注‘處睽之極’至‘群疑亡也’
○注의 [處睽之極]에서 [群疑亡也]까지
○正義曰:‘恢詭譎怪 道將爲一’者, 莊子內篇齊物論曰“无物不然, 无物不可. 故爲擧筳與楹, 厲與西施, 恢詭譎怪, 道通爲一.”
○正義曰:[恢詭譎怪 道將爲一] ≪莊子≫ 〈內篇 齊物論〉에 “물건마다 옳지 않은 것이 없고 물건마다 可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므로 筳과 楹을 들고 厲와 西施를 들어 恢詭하고 譎怪하나 道가 통하여 하나가 된다.”라고 하였는데,
郭象注云“夫筳橫而楹縱, 厲醜而西施好, 所謂齊者, 豈必齊形狀, 同規矩哉.
郭象의 注에 “筳은 가로로 누워 있고 楹은 세로로 세워져 있으며, 厲는 추악하고 西施는 아름다우니, 이른바 가지런하다는 것은 어찌 반드시 形狀이 가지런하고 規矩가 똑같은 것이겠는가.
擧縱橫好醜, 恢詭譎怪, 各然其所然, 各可其所可, 卽形雖萬殊, 而性本得同, 故曰道通爲一也.”
縱과 橫, 아름다움[好]과 추악함[醜]을 들어서 恢詭하고 譎怪하나 각각 그 옳은 바를 옳게 여기고 각각 그 可한 바를 可하게 여기면 형상이 비록 만 가지로 다르나 性의 근본이 같아진다. 그러므로 ‘道가 통하여 하나가 된다.’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莊子所言以明齊物, 故擧恢詭譎怪至異之物, 道通爲一, 得性則同.
莊子의 말은 물건을 가지런히 함을 밝힌 것이므로 恢詭와 譎怪의 지극히 다른 물건을 들어서 道가 통하여 하나가 되고 性을 얻으면 같아진다는 것이다.
王輔嗣用此文而改通爲將字者, 明物極則反, 睽極則通, , 不必與本義同也.
그런데 王輔嗣(王弼)가 이 글을 사용하면서 ‘通’을 고쳐 ‘將’자로 쓴 것은 사물이 極에 이르면 뒤집어지고 어긋남이 지극하면 통함을 밝힌 것이니, ≪詩經≫을 인용할 적에 斷章取義함과 유사하여 굳이 本義와 같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象曰 遇雨之吉 群疑亡也
〈象傳〉에 말하였다. “비를 만남의 吉함은 여러 의심이 없어진 것이다.”
[疏]正義曰:‘群疑亡也’者, 往與三合, 如雨之和, 向之見豕見鬼, 張弧之疑, 倂消釋矣, 故曰“群疑亡也.”
正義曰:[群疑亡也] 가서 六三과 합함이 비의 화합함과 같으니, 지난번에 돼지를 보고 귀신을 보고서 활을 펼치던 의심이 모두 사라져 풀렸다. 그러므로 “여러 의심이 없어졌다.”라고 한 것이다.
역주
역주1 〈火〉 : 저본에는 ‘火’가 없으나, 阮刻本 〈校勘記〉에 “‘動’자 위에 마땅히 ‘火’자가 있어야 한다.”라고 한 것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역주2 (人)[四] : 저본에는 ‘人’으로 되어 있으나, 岳本‧宋本‧古本‧足利本에 의거하여 ‘四’로 바로잡았다.[阮刻本 참조]
역주3 和光同塵 : ≪道德經≫의 “그 빛을 和하게 하고 그 티끌을 같게 한다.[和其光 同其塵]”에서 온 말로, 자신의 빛나는 재질을 안으로 추슬러 밖에 드러내지 않고 세상과 더불어 조화롭게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역주4 見惡人……謂遜接之也 : ‘見惡人 无咎’의 ‘見’을 王弼과 孔穎達은 ‘공손히 접견함’으로 보아, 經文을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惡人을 공손히 접견해야 허물이 없음’으로 해석하였다.
朱子 역시 “반드시 나쁜 사람을 만나본 뒤에야 허물을 피할 수 있으니, 孔子가 陽貨에 있어서와 같은 것이다.[必見惡人然後可以辟咎 如孔子之於陽貨]”라고 하였다. 陽貨는 魯나라 季孫氏의 家臣으로, 季孫氏를 축출하고 國政을 독단한 자인데, 孔子가 자신을 찾아올 것을 바랐으나 孔子가 찾아오지 않자 孔子가 집에 없을 때를 틈타 삶은 돼지고기를 보내주었고, 이에 孔子는 그가 집에 없을 때를 틈타 그의 집을 방문하여 답례하였는데, 돌아오던 중에 길에서 그를 만났으나 피하지 않고 상대해주었는바, ≪論語≫ 〈陽貨〉에 자세히 보인다.
程伊川은 이와 달리 ‘見惡人 无咎’를 ‘惡人들도 널리 만나보고 교화시키면 허물이 없음’의 뜻으로 해석하여, “惡人은 자기와 어긋나고 다른 자이고, 見은 더불어 서로 통하는 것이다. 睽의 때를 당하여 비록 德이 같은 자와 서로 친하더라도 小人 중에 어그러지고 다른 자가 지극히 많으니, 이들을 많이 버리고 끊으면 天下를 다하여 君子를 원수로 삼음에 가깝지 않겠는가. 이와 같으면 含弘의 뜻을 잃어 凶咎를 이루는 길이니, 또 어떻게 不善한 자들을 교화시켜 합하게 하겠는가. 그러므로 반드시 자기와 사이가 나쁜 사람을 만나보아야 하니, 그러면 허물이 없는 것이다. 옛 聖王이 姦凶을 敎化시켜 선량한 사람으로 만들고 원수와 敵을 바꾸어 臣民으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은 惡人을 끊지 않았기 때문이다.[惡人 與己乖異者也 見者 與相通也 當睽之時 雖同德者相與 然小人乖異者至衆 若棄絶之 不幾盡天下以仇君子乎 如此則失含弘之義 致凶咎之道也 又安能化不善而使之合乎 故必見惡人則无咎也 古之聖王 所以能化姦凶爲善良 革仇敵爲臣民者 由弗絶也]”라고 하였다.
역주5 遇之不遠 : 孔穎達은 ‘골목[巷]에서 만남’이 ‘만남이 멀지 않음’을 의미한다고 하였는데, 程伊川과 朱子는 이것이 ‘委曲하게(곡진하게) 서로 구함’을 비유한다고 보았는바, 程伊川은 이를 “巷은 굽은 길이요 遇는 모이고 만남을 이르니, 마땅히 委曲히 서로 구하여 모이고 만나기를 기약해서 더불어 합하여야 한다.[巷者 委曲之途也 遇者 會逢之謂也 當委曲相求 期於會遇 與之合也]”라고 설명하였다.
역주6 見輿曳……其牛掣也 : 王弼과 孔穎達은 ‘輿曳’를 ‘六三이 正位가 아니고 剛을 타고 있어서 실을 바를 잃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其牛掣’를 ‘六三이 있는 곳에 막힘을 당하여 앞으로 나아가지 못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았다. 반면 程伊川과 朱子는 ‘輿曳’를 ‘九二가 뒤에서 끎’으로, ‘其牛掣’를 ‘九四가 앞에서 가로막음’으로 보았다.
역주7 其人天且劓……故曰其人天且劓 : 王弼과 孔穎達은 ‘天’은 九四가 가하는 형벌이고 ‘劓’는 九二가 가하는 형벌이라고 하였다.
반면 程伊川은 모두 九四가 가하는 것으로 보아 “九三이 正應을 따르려 하나 九四가 가로막아 그치게 하니, 九三이 비록 陰柔이나 剛에 처하여 뜻이 행해지기 때문에 힘써 나아가 형벌을 犯하니, 이 때문에 상함을 당하는 것이다.[三從正應而四隔止之 三雖陰柔 處剛而志行 故力進以犯之 是以傷也]”라고 하였다.
朱子는 上九가 가하는 것으로 보아 “睽의 때를 당하여 上九가 시기하고 원망함이 깊기 때문에 머리가 깎이고 코가 베이는 傷함이 있는 것이다.[當睽之時 上九猜狠方深 故又有髡劓之傷]”라고 하였다.
‘天’을 程伊川과 朱子는 모두 ‘머리를 깎임[髡首]’로 보았다. 옛날에 가벼운 죄인은 머리를 깎았다.
역주8 元夫……故云元也 : 元에는 始와 大, 善의 뜻이 있는바, 孔穎達은 始의 뜻을 취한 것이다. 반면 程伊川은 “夫는 陽을 칭하고, 元은 善이다. 初九가 睽의 初를 당하여 마침내 九四와 더불어 德을 함께하여 睽의 후회를 없앴으니, 睽에 지극히 잘 대처한 자이다. 그러므로 지목하여 元夫라 하였으니, 善士라는 말과 같다.[夫 陽稱 元 善也 初九當睽之初 遂能與同德而亡睽之悔 處睽之至善者也 故目之爲元夫 猶云善士也]”라고 하여 善의 뜻을 취하였다. 朱子는 특별한 해석이 없으니, ≪程傳≫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역주9 〈悔〉 : 저본에는 ‘悔’가 없으나, 古本‧足利本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阮刻本 참조]
역주10 二之所噬 非妨己應者也 : 九二의 깨묾은 九二가 正應인 六五에게 갈 적에 자기 앞을 가로막는 六三을 깨물어 쉽게 없애는 것이지, 자기의 應인 六五를 깨물어 해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역주11 厥宗噬膚……故曰厥宗噬膚也 : ‘厥宗噬膚’를 王弼과 孔穎達은 ‘주인인 九二가 陰爻인 六三을 깨무는 것’으로 해석하였는바, ‘六三을 깨묾’은 ‘六五에게 가는 것을 가로막는 자를 깨물어 없앰’의 의미이다.
반면 程伊川과 朱子는 ‘厥宗噬膚’를 ‘六五와 같은 黨인 九二가 六五와 화합함’으로 보았는바, 이에 대한 ≪程傳≫은 다음과 같다. “‘厥宗’은 그 黨이니, 九二의 正應을 이르며, ‘噬膚’는 肌膚를 깨물어 깊이 들어가는 것이다. 睽의 때를 당하여 들어감이 깊지 않으면 어찌 합할 수 있겠는가. 六五가 비록 陰柔의 才質이나 九二가 陽剛의 道로 보필하여 깊이 들어가면 감에 慶事가 있을 것이니, 다시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厥宗 其黨也 謂九二正應也 噬膚 噬齧其肌膚而深入之也 當睽之時 非入之者深 豈能合也 五雖陰柔之才 二輔以陽剛之道而深入之 則可往而有慶 復何過咎之有]”
역주12 (失)[而] : 저본에는 ‘失’로 되어 있으나, 岳本‧錢本‧宋本‧古本에 의거하여 ‘而’로 바로잡았다.[阮刻本 참조]
역주13 (治)[洽] : 저본에는 ‘治’로 되어 있으나, 岳本‧錢本‧宋本‧足利本에 의거하여 ‘洽’으로 바로잡았다.[阮刻本 참조]
역주14 匪寇婚媾者……故曰匪寇婚媾也 : ‘匪寇婚媾’를 王弼과 孔穎達은 ‘九四가 도적이 아니라 六三과 혼인하려는 것임’의 뜻으로 해석하였다.
반면 程伊川과 朱子는 이를 위의 ‘先張之弧 後說之弧’와 연결하여, ‘六三을 처음에 의심하고 미워하다가 끝내는 합한다.’는 의미로 보았는바, ≪程傳≫은 다음과 같다. “上九의 睽乖가 이미 지극하고 六三의 처한 것이 正理이니, 대개 道를 잃음이 이미 지극하면 반드시 正理로 돌아온다. 그러므로 上九가 六三에 대하여 처음에는 의심하나 마침내는 반드시 합하는 것이다. 먼저는 활줄을 당긴다는 것은 처음에 의심하고 미워하여 활을 쏘고자 하는 것이다. 의심함은 망령됨이니, 망령됨이 어찌 항상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마침내는 반드시 바름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六三은 실로 罪惡이 없기 때문에 뒤에 활줄을 풀어놓고 쏘지 않은 것이니, 睽가 極에 이르러 돌아왔으므로 六三과 더불어 다시는 寇讐가 아니요 바로 婚媾인 것이다.[上之睽乖旣極 三之所處者正理 大凡失道旣極 則必反正理 故上於三 始疑而終必合也 先張之弧 始疑惡而欲射之也 疑之者 妄也 妄安能常 故終必復於正 三實无惡 故後說弧而弗射 睽極而反 故與三非復爲寇讐 乃婚媾也]”
역주15 (二)[三] : 저본에는 ‘二’로 되어 있으나, 錢本‧宋本에 의거하여 ‘三’으로 바로잡았다.[阮刻本 참조]
역주16 有似引詩斷章 : 斷章은 斷章取義의 줄임말로 ≪詩經≫을 인용할 적에 원래의 뜻과는 상관없이 설명하려는 일이 비슷하면 章을 잘라 뜻을 취함을 이른다.

주역정의(2) 책은 2019.10.1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18 By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