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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易正義(2)

주역정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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習坎이니
[注]坎 險陷之名也 謂便習之
[疏]正義曰:坎, 是險陷之名. 習者, 便習之義. 險難之事, 非經便習, 不可以行, 故須便習於坎, 事乃得用, 故云“習坎”也.
案諸卦之名, 皆於卦上不加其字, 此坎卦之名, 特加習者, 以坎爲險難, 故特加習名.
者, 人之行險, 先須使習其事, 乃可得通, 故云“習”也.
有孚하여 維心亨하니
[注]剛正在內 有孚者也 陽不外發而在乎內 心亨者也
[疏]‘有孚維心亨’
○正義曰:‘有孚’者, 亨, 信也, 由剛正在內, 故有信也.
‘維心亨’者, 陽不發外而在於內, 是維心亨, 言心得通也.
[疏]○注‘剛正在內’至‘心亨者也’
○正義曰:‘剛正在內’者, 謂陽在中也, 心剛正, 則能有誠信, 故云“剛正在內, 有孚者也.”
‘陽不外發而在乎內 心亨者也’, 若外陽內陰, 則內心柔弱, 故不得亨通, 今以陽在於內, 陽能開通, 故維其在心之亨也.
行有尙이라
[注]內亨外闇하고 內剛外順하니 以此行險이면 行有尙也
[疏]‘行有尙’
○正義曰:內亨外闇, 內剛外柔, 以此行險, 事可尊尙, 故云“行有尙”也.
[疏]○注‘內亨外闇’至‘行有尙也’
○正義曰:內亨外闇者, 內陽故內亨, 外陰故外闇, 以亨通之性而往陰闇之所, 能通於險, 故行可貴尙也.
彖曰 習坎 重險也
[注]坎 以險爲用이라 特名曰 重險이라 言習坎者險也
[疏]‘彖曰習坎重險也’
○正義曰:釋習坎之義. 言習坎者, 習行重險, 險, 難也. 若險難不重, 不爲至險, 不須便習, 亦可濟也,
今險難旣重, 是險之甚者, 若不便習, 不可濟也, 故注云“習坎者, 習重險也.”
[疏]注‘坎以險爲用’至‘習乎重險也’
○正義曰:‘言習坎者 習乎重險也’者, 言人便習於坎, 止是便習重險, 便習之語, 以釋習名.
兩坎相重, 謂之重險, 又當習義, 是一習之名, 有此兩義.
水流而不盈하며 行險而不失其信하나니라
[注]險陗之이라 水流而不能盈也 處至險而不失剛中하고 行險而不失其信者 習坎之謂也
[疏]‘水流而不盈’至‘不失其信’
○正義曰:此釋重險‧習坎之義. 水流而不盈, 謂險陷旣極, 坑穽特深, 水雖流注, 不能盈滿, 言險之甚也, 釋重險之義也.
行險而不失其信, 謂行此至險, 能守其剛中, 不失其信也, 此釋習坎及有孚之義也. 以能便習於險, 故守剛中, 不失其信也.
[疏]○注‘險陗之極’至‘習坎之謂也’
○正義曰:‘險陗之極 故水流而不能盈’者, 若淺岸平谷, 則水流有可盈滿,
若其崖岸險峻, 澗谷泄漏, 是水流不可盈滿, 是險難之極也.
維心亨 乃以剛中也 行有尙 往有功也
[注]便習於坎하여 而之坎地 盡坎之宜 往必有功也
[疏]正義曰:‘維心亨 乃以剛中也’者, 釋維心亨義也, 以剛在於中, 故維得心亨也.
‘行有尙 往有功’者, 此釋行有尙也, 旣便習於坎, 而往之險地, 必有其功, 故云“行有尙, 往有功也.”
天險 不可升也
[注]不可得升이라 得保其威尊이라
[疏]正義曰:此已下, 廣明險之用也. 言天之爲險, 懸邈高遠, 不可升上, 此天之險也.
若其可升, 不得保其威尊, 故以不可升爲險也.
地險 山川丘陵也
[注]有山川丘陵이라 物得以保全也
[疏]正義曰:言地以山川丘陵而爲險也, 故使地之所載之物, 保守其全.
若无山川丘陵, 則地之所載之物, 失其性也, 故地以山川丘陵而爲險也.
王公 設險以守其國하나니
[注]國之爲衛 恃於險也 言自天地以下 莫不須險也
[疏]正義曰:言王公法象天地, 固其城池, 嚴其法令, 以保其國也.
險之時用 大矣哉
[注]非用之常이니 用有時也
[疏]正義曰:言天地已下, 莫不須險, 險有時而用, 故其功盛大矣哉.
[疏]○注‘非之常用有時也’
○正義曰:若天險地險, 不可暫无, 此謂人之設險, 用有時也.
若化洽平治, 內外輯睦, 非用險也, 若家國有虞, 須設險防難, 是用有時也.
象曰 水洊至 習坎이니
[注]重險懸絶이라 水洊至也 不以坎爲隔絶이요 相仍而至 習乎坎也
[疏]正義曰:重險懸絶, 其水不以險之懸絶, 水亦相仿而至, 故謂爲習坎也.
以人之便習于坎, 猶若水之洊至, 水不以險爲難也.
君子以常德行하고 習敎事하니라
[注]至險未夷하니 敎不可廢 以常德行而習敎事也
習於坎然後 乃能不以險難爲困하여 而德行不失常也 則夫習坎하여 以常德行하고 而習敎事也
[疏]正義曰:言君子當法此, 便習於坎, 不以險難爲困, 當守德行, 而習其政敎之事, 若能習其敎事, 則可便習於險也.
初六 習坎하되 入于坎窞하니하니라
[注]習坎者 習爲險難之事也 最處坎底하여 入坎窞者也 處重險而復入坎底하니 其道凶也
行險而不能自濟하고 習坎而入坎窞하여 失道而窮在坎底어늘 上无應援可以自濟하니 是以凶也
[疏]正義曰:旣處坎底, 上无應援, 是習爲險難之事. 无人應援, 故入於坎窞, 而至凶也. 以其失道, 不能自濟, 故象云“失道凶也.”
象曰 習坎入坎 失道하여 凶也
九二 坎有險이나 求小得하리라
[注]履失其位 曰坎이요 上无應援이라 曰有險하니 坎而有險하여 未能出險之中也
處中而與初三相得이라 可以求小得也 初三 未足以爲援이라 曰小得也
象曰 求小得 未出中也
六三 來之坎坎이며 險且枕하여 入于坎窞하니 勿用이니라
[注]旣履非其位 而又處兩坎之間하여 出則之坎하고 居則亦坎이라 曰來之坎坎也
枕者 出則无之하고 處則无安이라 曰險且枕也 來之皆坎이라 无所用之하니 徒勞而已
[疏]正義曰:來之坎坎者, 履非其位, 而處兩坎之間, 出之與居, 皆在於坎, 故云“來之坎坎”也.
‘險且枕’者, 出則无應, 所以險處則不安, 故且枕也.
‘入于坎窞’者, 出入皆難, 故入於坎窞也.
‘勿用’者, 不出行, 若其出行, 終必无功, 徒勞而已, 故象云“終无功也.”
象曰 來之坎坎 終无功也
六四 樽酒簋貳 用缶하여 納約自牖 終无咎리라
[注]處重險而履正하고 以柔居柔하여 履得其位하여 以承於五하고
五亦得位하여 剛柔各得其所하여 不相犯位하며 皆无餘應하여 以相承比하여 明信顯著하여 不存外飾하니
處坎以斯하면 雖復一樽之酒 二簋之食 瓦缶之器 納此至約호되 自進於牖하면 乃可羞之於王公하고 薦之於宗廟 終无咎也
[疏]‘象曰’至‘自牖終无咎’
○正義曰:‘樽酒簋貳’者, 處重險而履得其位, 以承於五, 五亦得位, 剛柔各得其所,
皆无餘應, 以相承比, 明信顯著, 不假外飾. 處坎以此, 雖復一樽之酒, 二簋之食, 故云“樽酒簋二”也.
‘用缶’者, 旣有樽酒簋二, 又用瓦缶之器, 故云“用缶”也.
象曰 樽酒簋貳 剛柔際也
[注]剛柔相比而相親焉 際之謂也
[疏]正義曰:釋樽酒簋二義. 所以一樽之酒, 二簋之食, 得進獻者,
以六四之柔, 與九五之剛, 兩相交際而相親, 故得以此儉約而爲禮也.
九五 坎不盈하니 祗旣平이라야 无咎니라
[注]爲坎之主하여 而无應輔可以自佐하여 未能盈坎者也 坎之不盈이면 則險不盡矣 辭也
爲坎之主하여 盡平이라야 乃无咎 曰 祗旣平이라야 无咎也 說旣平이라야 乃无咎 明九五未免於咎也
[疏]正義曰:‘坎不盈’者, 爲坎之主, 而无應輔可以自佐, 險難未能盈坎, 猶險難未盡也, 故云“坎不盈”也.
‘祗旣平 无咎’者, 謂險難旣得盈滿而平, 乃得无咎, 若坎未盈平, 仍有咎也.
象曰 坎不盈 中未大也
[疏]正義曰:釋坎不盈之義, 雖復居中, 而无其應, 未得光大, 所以坎不盈滿也.
上六 係用徽纆하여 寘于叢棘하여 三歲不得하니하니라
[注]險陗之極하여 不可升也 嚴法峻整하여 難可犯也하니 宜其囚執寘于思過之地
三歲 險道之夷也 險終乃反이라 三歲不得自脩라가 三歲 乃可以求復이라 曰 三歲不得하여 凶也라하니라
[疏]正義曰:‘係用徽纆 寘于叢棘’者, 險陗之極, 不可升上, 嚴法峻整, 難可犯觸,
上六居此險陗之處, 犯其峻整之威, 所以被繫, 用其徽纆之繩. 置於叢棘, 謂囚執之處, 以棘叢而禁之也.
‘三歲不得 凶’者, 謂險道未終, 三歲已來, 不得其吉而有凶也.
險終乃反, 若能自脩, 三歲後, 可以求復自新, 故象云“上六失道凶, 三歲也”, 言失道之凶, 唯三歲之後, 可以免也.
象曰 上六失道凶 三歲也


坎을 익힘이니,
坎은 험하고 빠짐의 이름이고, 習은 익숙히 익힘[便習]을 이른다.
正義曰:‘坎’은 바로 험하고 빠짐의 이름이다. ‘習’은 익숙히 익힘[便習]의 뜻이다. 험난한 일은 便習을 거치지 않으면 행할 수 없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坎을 便習하여야 일이 비로소 쓰일 수 있으므로 “坎을 익힌다.”라고 한 것이다.
살펴보건대, 여러 卦의 이름이 모두 卦 위에 글자를 더하지 않았는데, 이 坎卦의 이름에 특별히 ‘習’字를 가한 것은, 坎이 험난함이 되기 때문에 특별히 ‘習’의 이름을 가한 것이다.
習은 두 가지 뜻이 있다. 첫 번째는 ‘거듭한다’는 뜻이니, 위아래가 모두 坎임을 이른다. 이는 重疊으로 험함이 있는 것이니, 험함이 중첩되면 바로 험함의 쓰임을 이루는 것이다.
두 번째는 사람이 험한 곳을 행할 때에는 먼저 모름지기 그 일을 便習하여야 비로소 통할 수 있으므로 “習”이라 한 것이다.
성실함이 있어서 마음이 형통하니,
剛과 正이 안에 있음은 성실함이 있는 것이요, 陽이 밖으로 나오지 않고 안에 있음은 마음이 형통한 것이다.
經의 [有孚維心亨]
○正義曰:[有孚] 형통함은 성실하기 때문이니, 剛과 正이 안에 있으므로 성실함이 있는 것이다.
[維心亨] 陽이 밖으로 나오지 않고 안에 있으니, 이는 마음이 형통한 것인바, 마음이 형통함을 얻음을 말한 것이다.
○注의 [剛正在內]에서 [心亨者也]까지
○正義曰:[剛正在內] 陽이 中에 있음을 이르니, 안에 마음이 剛하고 바르면 능히 誠信을 소유하므로 “剛과 正이 안에 있음은 성실함이 있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陽不外發而在乎內 心亨者也] 만약 밖이 陽이고 안이 陰이면 안의 마음이 유약하기 때문에 형통함을 얻지 못하는데, 지금 陽이 안에 있어서 陽이 통함을 열 수 있기 때문에 마음에 있는 형통함인 것이다.
행함에 높일 만한 것이 있다.
안은 형통하고 밖은 어두우며 안은 剛하고 밖은 順하니, 이로써 험함을 행하면 행함에 높임이 있는 것이다.
經의 [行有尙]
○正義曰:안은 형통하고 밖은 어두우며 안은 剛하고 밖은 柔順하니, 이로써 험함을 행하면 일이 높일 만하기 때문에 “행함에 높일 만한 것이 있다.”라고 말한 것이다.
○注의 [內亨外闇]에서 [行有尙也]까지
○正義曰:[內亨外闇] 陽이 안에 있기 때문에 안이 형통하고, 陰이 밖에 있기 때문에 밖이 어두운 것이니, 형통한 성질로 陰闇의 장소에 가서 능히 험함을 통할 수 있다. 그러므로 행함이 귀할 만하고 높일 만한 것이다.
〈彖傳〉에 말하였다. “習坎은 거듭된 험함이니,
坎은 험함을 쓰임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특별히 이름하기를 “重險”이라 한 것이다. 習坎이라고 말한 것은 ‘거듭된 험함[重險]’을 익히는 것이다.
經의 [彖曰習坎重險也]
○正義曰:‘習坎’의 뜻을 해석하였다. ‘習坎’이라고 말한 것은 ‘거듭된 험함[重險]’을 익혀 행하는 것이니, 險은 어려움이다. 만일 험난함이 거듭되지 않으면 지극히 험함이 되지 않으니, 굳이 便習하지 않더라도 구제할 수 있지만,
지금 험난함이 이미 거듭되니 이는 험난함이 심한 것이므로 만약 便習하지 않으면 건널 수 없다. 그러므로 注에 “習坎은 거듭된 험함을 익히는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注의 [坎以險爲用]에서 [習乎重險也]까지
○正義曰:[言習坎者 習乎重險也] 사람이 坎을 便習한다고 말한 것은 다만 거듭된 험함을 便習하는 것이니, 便習이란 말로 習의 이름을 해석한 것이다.
두 坎이 서로 거듭함을 ‘重險’이라 이르고, 또 익힘의 뜻에 해당하니, 이는 한 ‘習’의 이름에 이 두 가지 뜻이 있는 것이다.
물이 흘러가도 차지 않으며 험함을 행하면서도 그 성실함을 잃지 않는다.
험하고 높음이 지극하기 때문에 물이 흘러도 능히 채우지 못한다. 지극히 험함에 처하여 剛中을 잃지 않고 험함을 행하면서도 그 성실함을 잃지 않는 것은 習坎임을 이른 것이다.
經의 [水流而不盈]에서 [不失其信]까지
○正義曰:이는 重險과 習坎의 뜻을 해석한 것이다. ‘水流而不盈’은 험함과 빠짐이 이미 지극함에 구덩이와 함정이 특별히 깊어서 물이 비록 흘러가고 주입하나 능히 가득 차지 못함을 이르니, 이는 험함이 심함을 말한 것인바, 重險의 뜻을 해석한 것이다.
‘行險而不失其信’은 이 지극히 험함을 행함에 능히 剛中을 지켜서 그 성실함을 잃지 않음을 이르니, 이는 習坎과 有孚의 뜻을 해석한 것이다. 능히 험함을 便習하기 때문에 剛中을 지켜서 그 성실함을 잃지 않는 것이다.
○注의 [險陗之極]에서 [習坎之謂也]까지
○正義曰:[險陗之極 故水流而不能盈] 만약 얕은 언덕과 평평한 골짜기이면 물이 흘러가 가득 채울 수 있지만,
만약 그 언덕이 험하고 높으며 시내와 골짜기로 물이 새면 이는 물이 흘러도 가득 채울 수가 없으니, 이는 험난함이 지극한 것이다.
마음이 형통함은 바로 剛中하기 때문이요, 행함에 높일 만함이 있는 것은 가면 功이 있는 것이다.
坎을 便習하여 坎의 땅으로 감에 坎의 마땅함을 다하였다. 그러므로 가면 반드시 功이 있는 것이다.
正義曰:[維心亨 乃以剛中也] ‘마음이 형통함’의 뜻을 해석한 것이니, 剛이 中에 있기 때문에 마음이 형통함을 얻는 것이다.
[行有尙 往有功] 이는 ‘행함에 높일 만함’을 해석한 것이니, 이미 坎을 便習하여 험한 땅으로 가면 반드시 功이 있다. 그러므로 “행함에 높일 만함이 있음은 가면 功이 있는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하늘의 험함은 올라갈 수 없고,
올라갈 수가 없기 때문에 그 위엄과 높음을 보존할 수 있는 것이다.
正義曰:이 이하는 險의 쓰임을 넓혀 밝힌 것이다. 하늘의 험함은 높고 멀리 매달려 있어서 올라갈 수가 없으니, 이것이 하늘의 험함임을 말한 것이다.
만약 올라갈 수가 있으면 그 위엄과 높음을 보장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올라갈 수 없는 것을 험함으로 삼는 것이다.
땅의 험함은 山川과 구릉이요,
산천과 구릉이 있기 때문에 물건이 保全될 수 있는 것이다.
正義曰:땅이 산천과 구릉을 험함으로 삼기 때문에 땅에 실려 있는 물건들로 하여금 그 온전함을 보존하여 지키게 함을 말한 것이다.
만약 산천과 구릉이 없으면 땅에 실려 있는 물건들이 그 본성을 잃게 된다. 그러므로 땅은 산천과 구릉을 험함으로 삼는 것이다.
王公이 험함을 만들어서 그 나라를 지키니,
나라를 보위함은 험한 지형을 믿는 것이니, 하늘과 땅 이하로 험함을 필요로 하지 않음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正義曰:王公이 하늘과 땅을 본받고 형상하여 城과 해자를 견고히 하고 법령을 엄격히 시행해서 그 나라를 보존함을 말한 것이다.
險을 때로 씀이 盛大하다.”
늘 쓰는 것이 아니니, 씀에 때가 있는 것이다.
正義曰:하늘과 땅 이하로 험함을 필요로 하지 않음이 없어서 험난함을 쓸 때가 있다. 그러므로 그 功이 성대한 것이다.
○注의 [非用之常用有時也]
○正義曰:하늘의 험함과 땅의 험함으로 말하면 잠시도 없어서는 안 되고, 이것은 사람이 험함을 만드는 것이 씀에 때가 있음을 말한 것이다.
만약 교화가 흡족하여 나라가 편안하게 다스려져서 안과 밖이 화목하면 험함을 쓸 때가 아니요. 만약 나라와 집안에 근심할 만한 일이 있으면 모름지기 험함을 만들어 難을 방지하여야 하니, 이것이 ‘씀에 때가 있는 것’이다.
〈象傳〉에 말하였다. “물이 거듭 이르는 것이 習坎卦이니,
거듭된 험함이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물이 거듭 이르는 것이다. 坎을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한 것이 아니요 서로 이어서 오니, 이것이 坎을 거듭[習]한 것이다.
正義曰:거듭된 험함이 멀리 떨어져 있으나 물은 험함이 멀리 떨어져 있다고 여기지 않고 물이 또한 서로 계속하여 이르므로 習坎이라 한 것이다.
사람이 坎을 便習함은 물이 거듭 이르는 것과 같으니, 물은 험함을 어려움으로 삼지 않는다.
君子가 보고서 德行을 항상하고 가르치는 일을 익힌다.”
지극히 험하여 아직 평탄하지 못하니 가르침을 폐할 수 없다. 그러므로 德行을 항상하고 가르치는 일을 익히는 것이다.
坎을 익힌 연후에 비로소 능히 험난함을 곤궁함으로 삼지 않아서 德行이 떳떳함을 잃지 않는다. 그러므로 習坎을 본받아서 德行을 항상하고 가르치는 일을 익히는 것이다.
正義曰:君子가 마땅히 이것을 본받아서 坎을 便習하여 험난함을 곤궁으로 여기지 않고, 마땅히 德行을 지키며 그 政事와 가르치는 일을 익힘을 말한 것이니, 만약 가르치는 일을 익히면 험함을 便習할 수 있다.
初六은 坎을 익히되 구덩이 속으로 들어가니, 흉하다.
習坎은 험난한 일을 익히는 것이다. 初六은 坎의 가장 밑바닥에 처하여 구덩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거듭된 險에 처하여 다시 坎의 밑바닥으로 들어가니, 그 道가 흉하다.
험함을 행하면서 스스로 구제하지 못하고, 坎을 익히되 구덩이 속으로 들어가서 道를 잃고 곤궁하게 구덩이 밑바닥에 있는데, 위에 자신을 구제해줄 응원이 없다. 이 때문에 흉한 것이다.
正義曰:이미 坎의 밑바닥에 처하여 위에 응원이 없으니, 이는 험난한 일을 익히는 것이다. 응원해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구덩이 속으로 들어가서 흉함에 이른 것이다. 그 道를 잃어서 스스로 구제하지 못하기 때문에 〈象傳〉에 “道를 잃어 흉하다.”라고 한 것이다.
〈象傳〉에 말하였다. “‘坎을 익히되 구덩이 속으로 들어감’은 道를 잃어 흉한 것이다.”
九二는 坎이면서 험함이 있으나 구하는 것을 조금 얻으리라.
밟은 자리가 正位를 잃었기 때문에 “坎”이라 하였고, 위에 응원이 없기 때문에 “험함이 있다.”라고 하였으니, 坎이면서 험함이 있어 험한 가운데를 탈출하지 못하였다.
中에 처하여 初六ㆍ六三과 서로 맞기 때문에 구함을 다소 얻을 수 있으나, 初六ㆍ六三이 응원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조금 얻는다.”라고 말한 것이다.
正義曰:[坎有險] 밟은 자리가 正位를 잃었기 때문에 “坎”이라 하였고, 위에 응원이 없기 때문에 “험함이 있다.”라고 한 것이다.
이미 坎의 어려움에 있는데 또다시 험함을 만나서 험한 가운데를 탈출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象傳〉에 “험한 가운데를 탈출하지 못했다.”라고 한 것이다.
[求小得] 陽으로서 中에 처하여 初六과 六三이 와서 붙기 때문에 구함을 조금 얻을 수 있는 것이요, 初六과 六三이 柔弱하여 큰 응원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구함을 조금 얻는다.”라고 말한 것이다.
〈象傳〉에 말하였다. “‘구함을 조금 얻음’은 험한 가운데를 탈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六三은 오고 감이 坎이고 坎이며, 험하고 또 위태로워서 구덩이 속으로 들어가니, 쓰지 말아야 한다.
이미 밟은 것이 正位가 아니고 또 두 坎의 사이에 처하여, 나가면 坎으로 가고 거하면 또한 坎이므로 “오고 감이 坎이고 坎이다.”라고 한 것이다.
枕은 위태로워 편안하지 못함을 이르니, 나가면 갈 곳이 없고 머물면 편안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험하고 또 위태롭다.”라고 한 것이다. 오고 감이 모두 坎이어서 쓸 바가 없으니, 한갓 수고로울 뿐이다.
正義曰:[來之坎坎] 밟고 있는 것이 正位가 아니고 두 坎의 사이에 처하여, 나가고 거함(머묾)이 모두 坎에 있다. 그러므로 “오고 감이 坎이고 坎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險且枕] ‘枕’은 위태로워 편안하지 못함을 이른다. 나가면 응원이 없으니, 이 때문에 험함에 처하면 편안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또 위태로운 것이다.
[入于坎窞] 나가고 들어옴이 모두 어렵기 때문에 구덩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勿用] 出行해서는 안 되는 것이니, 만약 출행하면 끝내 功이 없어서 한갓 수고로울 뿐이다. 그러므로 〈象傳〉에 “끝내 功이 없다.”라고 한 것이다.
〈象傳〉에 말하였다. “‘오고 감이 坎이고 坎임’은 끝내 功이 없는 것이다.”
六四는 한 동이의 술과 두 그릇의 음식을, 질그릇을 사용하여 약소한 물건을 바치되 창문으로부터 하면 끝내 허물이 없으리라.
거듭된 험함에 처하여 正位를 밟고 柔로서 柔의 자리에 거하여 밟은 것이 正位를 얻어 九五를 받들고,
九五 또한 正位를 얻어서 剛과 柔가 각각 제자리를 얻어 서로 자리를 침범하지 않으며, 〈六四와 九五가〉 모두 다른 應이 없어서 서로 받들고 친하여 밝은 信이 드러나서 밖에 꾸밈을 두지 않는다.
坎에 대처하기를 이로써 하면 비록 다시 한 동이의 술과 두 그릇의 음식을, 질그릇으로 이 지극히 약소한 것을 바치되 창문으로 올리면 마침내 이것을 王公에게 바칠 수 있고 종묘에 올릴 수 있다. 그러므로 끝내 허물이 없는 것이다.
經의 [象曰]에서 [自牖終无咎]까지
○正義曰:[樽酒簋貳] 거듭된 험함에 처하여 밟은 것이 正位를 얻어서 九五를 받들고 九五 또한 正位를 얻어서 剛과 柔가 각각 제자리를 얻었으며
모두 다른 應이 없어서 받들고 친하여 밝은 信이 드러나서 밖의 꾸밈을 빌리지 않는다. 坎에 대처하기를 이로써 하면 비록 다시 한 동이의 술과 두 그릇의 음식이라도 괜찮다. 그러므로 “한 동이의 술과 두 그릇의 음식”이라 한 것이다.
[用缶] 이미 한 동이의 술과 두 그릇의 밥이 있고 또 질그릇을 사용한다. 그러므로 “질그릇을 사용한다.”라고 말한 것이다.
[納約自牖 終无咎] 이 검소하고 약소한 물건을 바치되 창문을 통하여 올리면 王公에게 바칠 수 있고 종묘에 올릴 수 있다. 그러므로 “끝내 허물이 없다.”라고 한 것이다.
〈象傳〉에 말하였다. “한 동이의 술과 두 그릇의 음식은 剛과 柔가 교제하기 때문이다.”
剛과 柔가 서로 가까이 있어 서로 친함은 교제함을 이른다.
正義曰:‘한 동이의 술과 두 그릇의 음식’의 뜻을 해석한 것이다. 한 동이의 술과 두 그릇의 음식을 올려 바칠 수 있는 까닭은
六四의 柔와 九五의 剛이 둘이 서로 교제하여 서로 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검소하고 약소한 것을 禮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九五는 구덩이가 차지 않았으니, 이미 평평해져야 허물이 없다.
〈九五는〉 坎의 주체가 되어서 자신을 도와줄 만한 응원과 보좌가 없어서 능히 구덩이를 채우지 못하는 자이다. 구덩이가 차지 않으면 험함이 다하지 않는다. ‘祗’는 어조사이다.
坎의 주체가 되어서 평평함을 다하여야 비로소 허물이 없다. 그러므로 “이미 평평해져야 허물이 없다.”라고 한 것이다. 이미 평평해져야 비로소 허물이 없다고 말한 것은 九五가 허물을 면치 못함을 밝힌 것이다.
正義曰:[坎不盈] 坎의 주체가 되어서 자신을 도와줄 만한 응원과 보좌가 없어서 험난함이 구덩이를 가득 채우지 못하니, 아직도 험난함이 다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구덩이가 차지 않았다.”라고 말한 것이다.
[祗旣平 无咎] ‘祗’는 어조사이다. 험난함이 이미 가득 차서 평평함을 얻어야 비로소 허물이 없을 수 있으니, 만약 구덩이가 가득 차서 평평하지 못하면 그대로 허물이 있는 것이다.
〈象傳〉에 말하였다. “‘구덩이가 차지 않았음’은 中이 크지 못하기 때문이다.”
正義曰:‘구덩이가 차지 않았음’의 뜻을 해석한 것이니, 비록 다시 中에 거하였으나 그 응원이 없어서 光大하지 못하다. 이 때문에 구덩이가 가득 차지 않은 것이다.
上六은 포승줄을 사용하여 묶어서 가시덤불 속에 두어 3년 동안 얻지 못하여 흉하다.
험하고 높음이 지극하여 올라갈 수가 없고, 엄한 법으로 준엄하게 정돈하여 범하기가 어려우니, 마땅히 그 죄수를 잡아 허물을 생각하는 자리에 둬야 하는 것이다.
3년은 험한 道가 평탄해지는 것이니, 험함이 끝나면 비로소 평탄함으로 돌아온다. 그러므로 3년 동안 스스로 닦지 못하다가 3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돌아오기를 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3년 동안 얻지 못하여 흉하다.”라고 한 것이다.
正義曰:[係用徽纆 寘于叢棘] 험하고 높음이 지극하여 올라갈 수가 없고, 엄한 법으로 준엄하게 정돈해서 범하기가 어려우니,
上六이 이 험하고 높은 곳에 처하여 그 준엄하고 정돈된 위엄을 범하였다. 이 때문에 구속을 당하여 포승줄을 사용한 것이다. ‘가시덤불에 둔다’는 것은 죄수를 잡아두는 곳을 가시덤불로써 금함을 이른다.
[三歲不得 凶] 험한 道가 아직 끝나지 않아서 3년 이래로 길함을 얻지 못하여 흉함이 있음을 말한 것이다.
험함이 끝나야 비로소 평탄함으로 돌아오니, 만약 스스로 닦는다면 3년이 지난 뒤에는 돌아옴을 구하여 스스로 새로워진다. 그러므로 〈象傳〉에 “上六이 道를 잃어 흉함은 3년 동안이다.”라고 하였으니, 道를 잃어 흉함을 오직 3년이 지난 뒤에야 면할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象傳〉에 말하였다. “上六이 道를 잃어 흉함은 3년 동안인 것이다.”


역주
역주1 一者……乃成險之用也 : 程伊川과 朱子는 모두 이 뜻을 따라 ‘習坎’을 ‘거듭된 坎’으로 해석하였다.
역주2 (一)[二] : 저본에는 ‘一’로 되어 있으나, 錢本ㆍ宋本에 의거하여 ‘二’로 바로잡았다.[阮刻本 참조]
역주3 (因)[內] : 저본에는 ‘因’으로 되어 있으나, 錢本ㆍ宋本에 의거하여 ‘內’로 바로잡았다.[阮刻本 참조]
역주4 (謂)[詣] : 저본에는 ‘謂’로 되어 있으나, 毛本에 의거하여 ‘詣’로 바로잡았다.[阮刻本 참조]
역주5 (重乎)[乎重] : 저본에는 ‘重乎’로 되어 있으나, 아래의 疏와 岳本ㆍ宋本ㆍ古本ㆍ足利本에 의거하여 ‘乎重’으로 바로잡았다.[阮刻本 참조]
역주6 (釋)[極] : 저본에는 ‘釋’으로 되어 있으나, 岳本ㆍ閩本ㆍ監本ㆍ毛本에 의거하여 ‘極’으로 바로잡았다.[阮刻本 참조]
역주7 (雖)[難] : 저본에는 ‘雖’로 되어 있으나, 宋本에 의거하여 ‘難’으로 바로잡았다.[阮刻本 참조]
역주8 (國)[用] : 저본에는 ‘國’으로 되어 있으나, 注에 의거하여 ‘用’으로 바로잡았다.
역주9 坎有險者……故曰有險 : ‘坎有險’을 王弼과 孔穎達은 ‘坎’과 ‘有險’으로 나누어, ‘坎’은 九二가 陽爻로 陰位에 거한 것을, ‘有險’은 위에 應이 없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았다. 반면 程伊川은 ‘坎有險’을 둘로 나누지 않고, “九二가 坎險의 때를 당하여 위아래 두 陰의 가운데에 빠져 있으니, 지극히 험한 자리인바, 이것이 험함이 있는 것이다.[二當坎險之時 陷上下二陰之中 乃至險之地 是有險也]”라고 하였다.
역주10 求小得者……故云求小得也 : ‘求小得’을 王弼과 孔穎達은 初六ㆍ六三과 관련시켜 이해하여, 이를 ‘初六ㆍ六三이 九二에게 붙으므로 九二가 구함을 얻지만, 初六과 六二가 陰爻라서 큰 응원이 될 수 없으므로 조금 얻음이 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반면 程伊川은 이를 ‘九二가 剛中의 재질이기 때문에 험한 가운데에서 탈출하지는 못하지만 다소 스스로 구제할 수 있으므로 구하는 바를 약간 얻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이러한 해석의 차이로 인해 〈象傳〉에 대한 해석도 달라지게 되는데, 孔穎達의 해석에 따르면 〈象傳〉의 “求小得 未出中也”는 ‘九二가 初六ㆍ六三을 얻는데 그것으로는 험한 가운데를 탈출하지 못한다.’는 의미가 되고, 程伊川의 해석에 따르면 〈象傳〉은 ‘九二가 剛中하여 약간 얻음이 있지만 험한 가운데에서 탈출하지는 못한다.’는 의미가 된다.
역주11 (枕) : 저본에는 ‘枕’이 있으나, 岳本ㆍ宋本ㆍ古本ㆍ足利本에 의거하여 衍文으로 처리하였다.[阮刻本 참조]
역주12 枝而不安之謂也 : 枝에는 ‘위태롭다’는 뜻이 없고, ‘枝梧’라 하여 ‘저촉’의 뜻이 있을 뿐인데, 아래의 ‘不安’에 따라 위태로움으로 해석하였다. 枝에 ‘枝梧’의 뜻이 있어 ‘기대는’ 것으로, ‘枕’과 연관이 되니 아래의 ‘不安’과는 부합하지 않는다.
역주13 枕 枝而不安之謂也 : 王弼과 孔穎達은 ‘枕’을 위태로워 편안하지 못함으로 해석하였고, 程伊川은 ‘枕’을 ‘의지하고 기댐[支倚]’이라 하였는데, 朱子는 “陰柔로 中正하지 못하면서 重險의 사이를 밟고 있어서 오고 감이 모두 험하여 앞에 險이 있고 뒤에 베고 있어서[枕] 그 빠짐이 더욱 깊으니, 쓸 수 없다. 그러므로 그 象과 占이 이와 같은 것이다. ‘枕’은 의지하여 붙음이 편안하지 못한 뜻이다.[以陰柔不中正而履重險之間 來往皆險 前險而後枕 其陷益深 不可用也 故其象占如此 枕 倚著未安之意]”라고 하여 두 가지 해석을 모두 취하였다.
역주14 〈可〉 : 저본에는 ‘可’가 없으나, 錢本ㆍ宋本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阮刻本 참조]
역주15 樽酒簋貳者……故云終无咎也 : 이 六四 爻辭에 대한 해석은 王弼ㆍ孔穎達과 程伊川의 해석이 대체로 같다. 다만 ‘納約’을 程伊川은 ‘人臣이 군주에게 나아가 맺는 道로서, 忠信과 善한 방도로 군주의 마음을 맺음’의 의미로 보았다.
朱子는 經文의 句讀가 이 세 사람의 해석과 다른바, 經文을 “樽酒簋 貳用缶”로 끊고 ‘貳’를 ‘더하다’의 뜻으로 보았다. 이 부분의 ≪本義≫는 다음과 같다. “鼂氏(晁以道)는 이르기를 ‘先儒가 樽酒簋를 한 句로 읽고 貳用缶를 한 句로 읽었다.’라고 하였으니, 지금 이 말을 따른다. ‘貳’는 더함이다. ≪周禮≫에 ‘큰 제사에 세 번 더한다.’ 하고, 〈弟子職〉에 ‘왼쪽으로는 빈 그릇을 잡고 오른쪽으로는 挾匕(숟가락)를 잡아 周旋하여 더한다.’ 한 것이 이것이다. 九五는 尊位인데 六四가 가까이 있으니, 험한 때에 있어서 剛‧柔가 서로 교제하므로 다만 박한 禮를 쓰고, 더욱 誠心으로 나아가 맺되 牖로부터 하는 象이 있는 것이다.[鼂氏云 先儒讀樽酒簋爲一句 貳用缶爲一句 今從之 貳 益之也 周禮 大祭三貳 弟子職 左執虛豆 右執挾匕 周旋而貳 是也 九五尊位 六四近之 在險之時 剛柔相際 故有但用薄禮 益以誠心進結自牖之象]”
한편 아래 〈象傳〉의 ‘樽酒簋貳’는 “陸德明의 ≪經典釋文≫ 本에 貳字가 없으니, 지금 이를 따른다.”라고 한 鼂氏의 說을 취하였다.
역주16 祗 辭也 : 王弼과 孔穎達은 ‘祗’를 어조사로 보았는데, 앞의 復卦 初九 爻辭에서는 ‘无祗悔’의 ‘祗’를 韓康伯의 말에 따라 ‘큼’의 뜻으로 본 것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반면 程伊川은 復卦 初九 爻辭에서 ‘祗’를 ‘이름[抵]’으로 보았는데,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로 ‘이름’으로 보아, “반드시 이미 평평함에 이르면 허물이 없을 수 있지만 이미 가득 차지 않았다고 말했으면 이는 평평하지 못하여 아직도 험한 가운데에 있는 것이니, 无咎일 수 없다.[必抵於已平則无咎 旣曰不盈 則是未平而尙在險中 未得无咎也]”라고 하였다.

주역정의(2) 책은 2019.10.1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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