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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易正義(4)

주역정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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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정의(4)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疏]正義曰:‘精氣爲物’至‘鮮矣’ 此第四章也. 上章明卦爻之義, 其事類稍盡, 但卦爻未明鬼神情狀.
此章說物之改變而爲鬼神, 易能通鬼神之變化, 故於此章明之.
精氣爲物이요 遊魂爲變이라
[注]精氣하여 聚而成物하고 聚極則散하여 而遊魂爲變也 遊魂 言其遊散也
‘遊魂爲變’者, 物旣積聚, 極則分散, 將散之時, 浮遊精魂, 去離物形, 而爲改變, 則生變爲死, 成變爲敗,
或未死之間, 變爲異類也.
[注]盡聚散之理하면 則能知變化之道하여 无幽而不通也
[疏]‘是故’至‘情狀’
○正義曰:能窮易理, 盡生死變化, 以此之故, 能知鬼神之內外情狀也.
物旣以聚而生, 以散而死, 皆是鬼神所爲, 但極聚散之理, 則知鬼神之情狀也, 言聖人以易之理而能然也.
[疏]○注‘知變化之道’
○正義曰:案下云“神无方”, 韓氏云“自此以上, 皆言神之所爲”, 則此經情狀, 是虛无之神.
聖人極虛无之神, 如變化之道, 幽冥悉通, 故能知鬼神之情狀.
與天地相似 不違하며
[注]德合天地故 曰 相似
[疏]正義曰:天地能知鬼神, 任其變化, 聖人亦窮神盡性, 能知鬼神, 是與天地相似所爲所作, 故不違於天地, 能與天地合也.
知周乎萬物하여 而道濟天下 不過하며
[注]知周萬物이면 則能以道濟天下也
[疏]正義曰:‘知周乎萬物 而道濟天下’者, 聖人无物不知, 是知周於萬物. 天下皆養, 是道濟天下也.
‘故不過’者, 所爲皆得其宜, 不有愆過, 使物失分也.
旁行而不流하며
[注]應變이로되 而不流淫也
[疏]正義曰:言聖人之德, 應變旁行, 无不被及, 而不有流移淫過. 若不應變化, 非理而動, 則爲流淫也.
樂天知命이라 不憂하며
[注]順天之化故 曰 樂也
[疏]正義曰:順天施化, 是歡樂於天, 識物始終, 是自知性命. 順天道之常數, 知性命之始終, 任自然之理, 故不憂也.
安土하고 敦乎仁이라
[注]安土敦仁者 萬物之情也 物順其情이면 則仁功贍矣
[疏]正義曰: 敦厚於仁, 聖人能行此安土敦仁之化, 故能愛養萬物也.
範圍天地之化而不過하며
[注]範圍者 擬範天地하여 而周備其理也
[疏]正義曰:範, 謂模範, 圍, 謂周圍.
言聖人所爲所作, 模範周圍天地之化養, 言法則天地, 以施其化, 而不有過失違天地者也.
曲成萬物而不遺하며
[注]曲成者 乘變以應物하여 不係一方者也 則物
[疏]正義曰:言聖人隨變而應, 屈曲委細, 成就萬物, 而不有遺棄細小而不成也.
通乎晝夜之道而知
[注]通幽明之故 則无不知也
[疏]正義曰:言聖人通曉於晝夜之道. 晝則明也, 夜則幽也, 言通曉於幽明之道, 而无事不知也.
自此以上, 皆神之所爲, 聖人能極神之幽隱之德也.
神无方하고 而易无體하나니라
[注]自此以上 皆言神之所爲也 方體者 皆係於形器者也
神則陰陽不測이요 易則唯變所適하여 不可以一方一體明이라
[疏]‘故神’至‘无體’
○正義曰:神則寂然虛无, 陰陽深遠, 不可求難, 是无一方可明也, 易則隨物改變, 應變而往, 无一體可定也.
[疏]○注‘自此以上’
○正義曰:‘自此以上 皆言神之所爲’者, 謂從‘神无方’以上至‘精氣爲物’以下, 經之所云, 皆言神所施爲.
神者, 微妙玄通, 不可測量, 故能知鬼神之情狀, 與天地相似,
知周萬物, 樂天知命, 安土敦仁, 範圍天地, 曲成萬物, 通乎晝夜, 此皆神之功用也.
作易者因自然之神, 以垂敎, 欲使聖人用此神道以被天下, 雖是神之所爲, 亦是聖人所爲.
云‘方體者 皆係於形器’者, 方是處所之名, 體是形質之稱. 凡處所形質, 非是虛无, 皆係著於器物, 故云“皆係於形器”也.
云‘神則陰陽不測’者, 旣幽微不可測度, 不可測, 則何有處所, 是神无方也.
云‘易則唯變所適’者, 旣是變易, 唯變之適, 不有定往, 何可有體, 是易无體也.
云‘不可以一方一體明’者, 解无方无體也. 凡无方无體, 各有二義.
一者神則不見其處所云爲, 是无方也, 二則周遊運動, 不常在一處, 亦是无方也.
无體者, 一是自然而變, 而不知變之所由, 是无形體也, 二則隨變而往, 无定在一體, 亦是无體也.
一陰一陽之謂道
[注]道者何 无之稱也 无不通也 无不由也 況之曰道 寂然하여 不可爲象이라
必有之用極이라야 而无之功顯이라 至乎神无方而易无體라야 而道可見矣
窮變以盡神하고 因神以明道 陰陽雖殊 无一以待之
在陰이면 爲无陰하여 陰以之生하고 在陽이면 爲无陽하여 陽以之成이라 曰 一陰一陽也라하니라
[疏]‘一陰’‘謂道’
○正義曰:一謂无也, 无陰无陽, 乃謂之道. 一得爲无者, 无是虛无, 虛无是大虛, 不可分別, 唯一而已, 故以一爲无也.
若其有境, 則彼此相形, 有二有, 不得爲一.
故在陰之時, 而不見爲陰之功, 在陽之時, 而不見爲陽之力, 自然而有陰陽, 自然无所營爲, 此則道之謂也.
故以言之爲道, 以數言之謂之一, 以體言之謂之无,
以物得開通謂之道, 以微妙不測謂之神, 以應機變化謂之易, 總而言之, 皆虛无之謂也.
聖人以人事名之, 隨其義理, 立其稱號.
[疏]○注‘道者’至‘一陽也’
○正義曰:云‘道者何 无之稱’者, 此韓氏自問其道而釋之也. 道是虛无之稱, 以虛无能開通於物, 故稱之曰道.
云‘无不通 无不由’者, 若處於有, 有則爲物礙難, 不可通, 道旣虛无爲體, 則不爲礙難, 故曰“不通也.”
无不由者, 言萬物皆因之而通, 由之而有.
云‘況之曰道’者, 比況道路, 以爲稱也.
‘寂然无體 不可爲象’者, 謂寂然幽靜而无體, 不可以形象求, 是不可爲象.
至如天覆地載, 日照月臨, 冬寒夏暑, 春生秋殺, 萬物運動, 皆由道而然, 豈見其所營, 知其所爲.
是寂然无體, 不可爲象也.
云‘必有之用極 而无之功顯’者, 猶若風雨, 是有之所用, 當用之時, 以无爲心, 風雨旣極之後, 萬物賴此風雨而得生育,
是生育之功, 由風雨无心而成, 是有之用極, 而无之功顯.
是神之發作動用, 以生萬物, 其功成就, 乃在於无形. 應機變化, 雖有功用, 本其用之所以, 亦在於无也.
故至乎神无方而易无體, 自然无爲之道, 可顯見矣, 當其有用之時, 道未見也.
[疏]云‘故窮變以盡神’者, 神則杳然不測, 千變萬化. 聖人則窮此千變萬化, 以盡神之妙理, 故云“窮變化以盡神.”
云‘因神以明道’者, 謂盡神之理, 唯在虛无, 因此虛无之神, 以明道之所在, 道亦虛无, 故云“因神以明道”也.
‘陰陽雖殊 无一以待之’者, 言陰之與陽, 雖有兩氣, 恒用虛无之一, 以擬待之.
言在陽之時, 亦以爲虛无, 無此陽也, 在陰之時, 亦以爲虛无, 无此陰也.
云‘在陰爲无陰 陰以之生’者, 謂道雖在於陰, 而无於陰, 言道所生皆无陰也.
无於陰, 陰終由道而生, 故言“陰以之生”也.
‘在陽爲无陽 陽以之成’者, 謂道雖在陽, 陽中必无道也. 雖无於陽, 陽必由道而成, 故言“陽以成之”也.
繼之者善也 成之者性也 仁者見之 謂之仁이요 知者見之 謂之知
[注]仁者 資道以見其仁하고 知者 資道以見其知하여 各盡其分이라
若性仁者, 成就此道爲仁, 性知者, 成就此道爲知也, 故云“仁者見之謂之仁, 知者見之謂之知”,
是仁之與知, 皆資道而得成仁知也.
百姓 日用而不知 君子之道鮮矣니라
[注]君子 體道以爲用也 仁知則滯於所見이요 百姓則日用而不知하니 體斯道者 不亦鮮矣
라야 始可以語至而言極也
[疏]‘百姓’至‘鮮矣’
○正義曰:‘百姓日用而不知’者, 言萬方百姓, 恒日日賴用此道而得生, 而不知道之功力也, 言道冥昧, 不以功爲功, 故“百姓日用而不能知”也.
‘故君子之道鮮矣’者, 君子謂聖人也. 仁知則各滯於所見, 百姓則日用不知, 明體道君子不亦少乎.
[疏]○注‘君子體道’至‘極也’
○正義曰:‘君子體道以爲用’者, 謂聖人爲君子, 體履於至道, 法道而施政, 則
云‘仁知則滯於所見’者, 言仁知雖賢, 猶有偏見, 仁者觀道, 謂道爲仁, 知者觀道, 謂道爲知, 不能徧曉, 是滯於所見也.
至於百姓, 但日用通生之道, 又不知通生, 由道而來, 故云“百姓日用而不知”也.
云‘體斯道者 不亦鮮矣’者, 是聖人君子獨能悟道, 故云“不亦鮮矣.”
云‘故常無欲以觀其妙’者, 引老子道經之文, 以結成此義.
無欲謂無心, 若能寂然無心無欲, 觀其道之妙趣, 謂不爲所爲, 得道之妙理也.
云‘始可以語至而言極也’者, 若能無欲, 觀此道之妙理, 無事無爲, 如此, 可以語說其至理, 而言其極趣也.
若不如此, 不可語至而言極也.


정의왈正義曰의 [정기위물精氣爲物]에서 [鮮矣]까지 이는 제4장이다. 위의 장은 괘효卦爻의 뜻을 밝혀서 그 일의 종류를 거의 다하였으나 다만 귀신鬼神정상情狀을 밝히지 못하였다.
이 장은 물건이 바뀌고 변하여 귀신鬼神이 됨을 말하였으니, 은 능히 귀신鬼神변화變化를 통하기 때문에 이 장에서 밝힌 것이다.
정기精氣가 물건이 되고, 이 떠돌아다님이 이 된다.
정기精氣연온烟熅(음양陰陽가 서로 붙고 화합함)해서 모여 물건을 이루고, 모임이 지극하면 흩어져서 이 떠돌아다녀 이 된다. ‘유혼遊魂’은 혼이 흩어져 떠돌아다님을 말한 것이다.
정의왈正義曰:[정기위물精氣爲物] 음양陰陽정령精靈인온氤氳(연온烟熅)하여 쌓이고 모여서 만물萬物이 됨을 말한 것이다.
[유혼위변遊魂爲變] 물건이 이미 쌓이고 모여서 지극하면 나뉘고 흩어지니, 장차 흩어지려 할 때에 정혼精魂이 떠돌아다녀서 물건의 형체를 떠나 바뀌고 변하면, 이 변하여 가 되고 이 이루어져 부패腐敗가 되며,
혹 죽지 않은 사이에 변하여 이류異類가 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귀신鬼神정상情狀을 알아서
모이고 흩어지는 이치를 다하면 능히 변화變化를 알아서 아무리 그윽하여도 통달하지 못함이 없는 것이다.
의 [시고是故]에서 [정상情狀]까지
정의왈正義曰의 이치를 능히 연구하면 생사生死변화變化의 이치를 다할 수 있으니, 이 때문에 능히 귀신鬼神내외內外정상情狀을 아는 것이다.
물건이 이미 모여서 생기고 흩어져 죽으니, 이는 모두 귀신이 하는 것인데, 다만 모이고 흩어지는 이치를 다하면 귀신의 정상을 아는 것이니, ‘성인聖人의 이치를 가지고 능히 그러함’을 말한 것이다.
의 [지변화지도知變化之道]
정의왈正義曰:살펴보건대 아래에 “은 일정한 방소가 없다.”라고 하였는데, 한씨韓氏(한강백韓康伯)가 이르기를 “이로부터 이상은 모두 의 하는 바를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 경문의 ‘정상情狀’은 바로 허무虛无인 것이다.
성인聖人이 허무의 을 다하기를 변화變化와 같이 하여 유명幽冥한 것도 모두 통달하였다. 그러므로 능히 귀신鬼神정상情狀을 안 것이다.
천지天地와 서로 같으므로 어기지 않으며,
천지天地에 합하므로 “서로 같다.”고 말한 것이다.
정의왈正義曰천지天地가 능히 귀신鬼神을 알아서 변화變化에 맡겨두는데 성인聖人 또한 을 다하고 을 다하여 능히 귀신을 아니, 이는 천지의 하는 바와 만드는 바와 서로 같은 것이다. 이 때문에 천지를 어기지 않아서 천지와 능히 합하는 것이다.
아는 것이 만물萬物에 두루 하여 천하天下를 구제하므로 허물이 없으며,
아는 것이 만물萬物에 두루 하면 능히 천하天下를 구제할 수 있는 것이다.
정의왈正義曰:[知周乎萬物 而道濟天下] 성인聖人이 사물마다 알지 못하는 것이 없으니, 이는 아는 것이 만물萬物에 두루 함이다. 천하天下를 모두 기르니, 이는 천하天下를 구제함이다.
[故不過] 하는 바가 모두 마땅함을 얻으므로 허물이 없어 물건으로 하여금 분수를 잃게 하지 않는 것이다.
사방으로 행하면서도 유음流淫(법도를 따르지 않고 마음대로 함)하지 아니하며,
에 응하여 사방으로 통하면서도 유음流淫하지 않는 것이다.
정의왈正義曰성인聖人이 변화에 응하여 사방으로 행해져서 널리 입혀지지 않는 것이 없으나 유망流亡하고 음일淫佚함이 있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만약 변화에 응하지 아니하여 이치가 아닌데도 한다면 유망流亡하고 음일淫佚함이 되는 것이다.
하늘을 즐거워하고 을 알기 때문에 근심하지 않으며,
하늘의 조화를 순히 따르므로 “즐겁다.”라고 말한 것이다.
정의왈正義曰:하늘이 베푸는 조화造化를 순히 따름은 바로 하늘을 즐거워하는 것이요, 물건의 시종始終을 앎은 바로 스스로 성명性命을 아는 것이다. 천도天道상수常數를 순히 따르고 성명의 시종을 알아서 자연의 이치에 맡기기 때문에 근심하지 않는 것이다.
땅을 안정시키고 을 돈후하게 하므로 사랑할 수 있으며,
땅을 안정시키고 을 돈후하게 함은 만물萬物이니, 물건이 그 을 순히 따르면 의 공효가 넉넉한 것이다.
정의왈正義曰:‘만물萬物의 성품이 모두 땅을 안정하게 하고 을 돈후하게 하고자 하는데, 성인聖人이 이 땅을 안정하게 하고 을 돈후하게 하는 교화를 능히 행하기 때문에 만물을 사랑하여 기를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천지天地의 조화를 범위範圍(본받고 두루 구비함)하여 허물이 없으며,
범위範圍’는 천지天地를 본받아서 그 이치를 두루 구비하는 것이다.
정의왈正義曰모범模範(본받음)을 이르고, 주위周圍(두루 함)를 이른다.
성인聖人의 하는 바와 만드는 바가 천지天地의 조화와 길러줌을 본받고 두루 구비함’을 말하였으니, ‘천지를 본받아 그 교화를 베풀어서 과실過失이 있어 천지를 어기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만물萬物을 곡진히 이루어 빠트리지 않으며,
곡성曲成’은 변화變化를 타고 물건에 응하여 한 방소에 매여 있지 않은 것이니, 이렇게 하면 물건이 마땅함을 얻게 된다.
정의왈正義曰성인聖人변화變化에 따라 응하여 곡진하고 자세해서 만물을 성취하여 작은 것을 빠트려서 이루지 않음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주야晝夜를 통달하여 안다.
유명幽明의 일을 통달하면 알지 못함이 없는 것이다.
정의왈正義曰성인聖人주야晝夜에 통달함을 말한 것이다. 낮은 이고 밤은 이니, ‘유명幽明에 통달하여 일마다 알지 못함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이로부터 이상은 모두 이 하는 바이니, 성인聖人의 그윽하고 숨겨진 을 능히 다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은 일정한 방소가 없고 은 일정한 형체가 없는 것이다.
이로부터 이상은 모두 이 하는 바를 말한 것이다. ‘’과 ‘’는 모두 형기形器에 매여 있는 것이니,
음양陰陽을 측량할 수 없고 은 오직 가는 바대로 변하여 한 방소와 한 형체로 밝힐 수가 없다.
의 [故神]에서 [无體]까지
정의왈正義曰적연寂然허무虛无해서 음양陰陽이 깊고 멀어 추구하고 따질 수가 없으니, 이는 한 방소로 밝힐 수가 없는 것이며, 은 물건에 따라 바뀌고 변하여 변화에 응하여 가므로 한 형체로 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의 [自此以上]
정의왈正義曰:[自此以上 皆言神之所爲] ‘신무방神无方’ 이상으로부터 ‘정기위물精氣爲物’ 이하까지는 경문經文에 말한 바가 모두 이 시행한 바임을 말한 것이다.
’은 미묘하고 현통玄通하여 측량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능히 귀신의 정상情狀을 아는 것이니, 천지天地와 서로 같으며,
앎이 만물萬物에 두루 하며, 하늘을 즐거워하고 명을 알며, 땅을 안정시키고 을 돈후하게 하며, 천지를 범위範圍하며, 만물을 곡진히 이루며, 주야晝夜를 통달함은 이는 모두 공용功用이다.
을 지은 자가 자연自然을 인하여 가르침을 남겨서 성인聖人으로 하여금 이 신도神道를 사용하여 천하天下에 입혀지게 하고자 하였으니, 이는 비록 이 하는 바이나 또한 성인이 하는 바인 것이다.
[方體者 皆係於形器] ‘’은 처소處所의 이름이고, ‘’는 형질形質의 칭호이다. 무릇 처소와 형질은 허무虛无한 것이 아니요, 모두 기물器物에 매여 있고 붙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두 형기形器에 매여 있다.”라고 말한 것이다.
[神則陰陽不測] 이미 그윽하고 미묘하여 측량하고 헤아릴 수가 없으니, 측량할 수 없으면 어찌 처소가 있겠는가. 이것이 ‘은 일정한 방소가 없음’이다.
[易則唯變所適] 이미 변역變易하면 변화變化에 나아가서 일정하게 감이 없으니, 어찌 일정한 형체가 있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은 일정한 형체가 없음’이다.
[不可以一方一體明] ‘무방无方’과 ‘무방无方无體는 각각 두 가지 뜻이 있다.
무방无方의 두 가지 뜻 중에〉 첫 번째는, 은 그 처소와 운위云爲를 볼 수 없으니 이것이 방소가 없는 것이요, 두 번째는, 주유周遊하고 운동하여 항상 한 곳에 있지 않으니 이 또한 방소가 없는 것이다.
자연自然스럽게 변하여 변하는 이유를 알지 못하니 이것이 형체가 없는 것이요, 두 번째는, 을 따라가서 일정하게 하나의(일정한) (형질)에 있지 않으니 이 또한 체가 없는 것이다.
일음一陰일양一陽라 이르니,
는 무엇인가? 의 칭호이니, 통하지 않음이 없고 말미암지 않음이 없는바, 이를 비유하여 라 한다. 적연寂然히 형체가 없어서 형상形象할 수 없다.
반드시 이 지극함에 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은 일정한 방소가 없고 은 일정한 형체가 없음’에 이르러야 를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변화變化를 다하여 을 다하고, 을 인하여 를 밝히는 것이니, 이 비록 다르나 로써 음양陰陽의대擬待(의정擬定하여 상대함)한다.
에 있으면 가 되어서 이 이 때문에 생겨나고, 에 있으면 가 되어서 이 이 때문에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일음一陰일양一陽”이라고 한 것이다.
의 [일음一陰]에서 [謂道]까지
정의왈正義曰:‘’은 를 이르니, 도 없고 도 없는 것이어야 비로소 ‘’라 이른다. 가 될 수 있는 까닭은, 허무虛无이니 허무虛无는 바로 태허大虛인바, 분별할 수가 없고 오직 하나일 뿐이기 때문에 라 한 것이다.
만약 의 경계라면 가 서로 드러나서 가 있고 이 있어서 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의 때에 있어서는 이 됨을 보지 못하고 의 때에 있어서는 의 힘이 됨을 보지 못하여 자연히 이 있어서 자연히 경영하고 행하는 바가 없으니, 이는 를 이른다.
그러므로 이것을 일러 라 한 것이니, 로써 말하면 이라 이르고, 로써 말하면 라 이르고,
물건이 개통開通됨을 얻음으로써 말하면 라 이르고, 미묘하여 측량할 수 없음으로써 말하면 이라 이르고, 에 응하여 변화함으로써 말하면 이라 이르는바, 총괄하여 말하면 모두 허무虛无함을 이른다.
성인聖人인사人事를 가지고 이름하여 의리에 따라 칭호를 세운 것이다.
의 [도자道者]에서 [一陽也]까지
정의왈正義曰:[道者何 无之稱] 이는 한씨韓氏(한강백韓康伯)가 스스로 를 묻고 해석한 것이다. 허무虛无의 칭호이니, 허무虛无로써 능히 물건을 개통開通한다. 그러므로 이것을 칭하여 “”라 한 것이다.
[无不通 无不由] 만약 에 처하면 는 물건에게 막히고 어려움을 당하여 항상 통할 수는 없으니, 가 이미 허무虛无로 삼았으면 막히고 어려움을 당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통하지 않음이 없다.”라고 말한 것이다.
만물萬物이 모두 이것을 인하여 개통開通되고 이것으로 말미암아 있게 됨을 말한 것이다.
[況之曰道] 도로道路를 비유하여 〈의〉 칭호로 삼은 것이다.
[寂然无體 不可爲象] 적연寂然히 그윽하고 고요하여 형체가 없어서 형상形象으로 찾을 수가 없음을 이르니, 이것은 형상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예컨대 하늘이 덮어주고 땅이 실어주며, 해가 비추고 달이 임하며, 겨울이 춥고 여름이 더우며, 봄에 낳고 가을에 죽임에 이르기까지 만물이 운동하는 것이 모두 로 말미암아 그러하니, 어찌 그 경영하는 바를 보고 그 하는 바를 알겠는가.
이것이 ‘적연히 형체가 없어서 형상을 할 수 없음’이다.
[必有之用極 而无之功顯] 예컨대 바람과 비는 가 사용하는 바이니, 사용할 때에 를 마음으로 삼아서 바람과 비가 이미 지극한 뒤에 만물이 이 바람과 비를 의뢰하여 낳고 길러짐을 얻으니,
이는 낳고 길러지는 이 바람과 비의 무심함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인바, 이것이 ‘이 지극함에 이 드러남’이다.
이는 이 발동하고 작용하여 만물을 낳아서 그 공의 성취됨이 바로 무형无形에 있는 것이다. 에 응하여 변화함은 비록 공용功用이 있으나 그 공용의 원인을 근본해보면 또한 에 있다.
그러므로 ‘은 일정한 방소가 없고 은 일정한 형체가 없음’에 이르면 자연의 무위无爲가 드러날 수 있는 것이고, 그 공용이 있을 때에는 를 볼 수 없는 것이다.
[故窮變以盡神] 은 아득하여 측량할 수가 없어서 천 가지로 하고 만 가지로 한다. 성인聖人은 이 천 가지로 변하고 만 가지로 화함을 다하여 묘리妙理를 다하였다. 그러므로 “변화變化를 다하여 을 다한다.”라고 말한 것이다.
[因神以明道] ‘의 이치를 다함은 오직 허무虛无에 달려 있으니, 이 허무의 을 인하여 의 소재를 밝힘’을 말한 것이니, 또한 허무이므로 “을 인하여 를 밝힌다.”라고 한 것이다.
[陰陽雖殊 无一以待之] 이 비록 두 가지 가 있으나 항상 허무虛无을 사용하여 의대擬待함을 말한 것이다.
의 때에 있어서도 허무가 되어 이 이 없고, 의 때에 있어서도 허무가 되어 이 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在陰爲无陰 陰以之生] 가 비록 에 있으나 속에는 없음을 말한 것이니, 의 생겨나는 바가 모두 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비록 에 없으나 이 끝내 로 말미암아 생겨나므로 “이 이 때문에 생겨난다.”라고 말한 것이다.
[在陽爲无陽 陽以之成] 가 비록 에 있으나 가운데에는 반드시 가 없음을 말한 것이다. 비록 에 없으나 은 반드시 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므로 “이 이 때문에 이루어진다.”라고 말한 것이다.
가 비록 에 없으나 을 떠나지 않으며, 이 비록 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나 가 아니다. 그러므로 “일음一陰일양一陽”이라고 한 것이다.
계승하는 것은 이요, 성취하는 것은 이다. 인자仁者가 이것을 보면 이라 이르고, 지자知者(지자智者)가 이것을 보면 ()라 이르고,
인자仁者를 의뢰하여 그 을 보고 지자知者를 의뢰하여 그 를 보아서 각각 자기 분수를 다하는 것이다.
정의왈正義曰:[繼之者善也] 는 물건을 낳아 개통開通하게 하는 것이고, 은 이치를 순히 따라 물건을 기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을 계승하는 것은 오직 선행善行인 것이다.
[成之者性也] 이 를 성취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사람의 본성이다.
예컨대 성품이 한 자는 이 를 성취하여 으로 만들고, 성품이 지혜로운 자는 이 를 성취하여 (지혜)로 만드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인자仁者가 이것을 보면 이라 이르고, 지자知者가 이것을 보면 라 이른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가 모두 를 의뢰하여 를 이루는 것이다.
백성百姓은 날마다 사용하면서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군자君子가 적은 것이다.
군자君子를 체행하여 으로 삼는다. 인자仁者지자知者(지자智者)는 소견에 막혀 있고 백성은 날마다 사용하면서도 알지 못하니, 이 를 체행하는 자가 적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항상 욕심이 없어서 그 묘함을 보아야 비로소 를 말하고 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의 [백성百姓]에서 [鮮矣]까지
정의왈正義曰:[百姓日用而不知] 만방의 백성이 항상 날마다 이 를 의뢰해 사용하며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의 공력을 알지 못함을 말한 것이니, 가 아득하고 어두워서 으로 여기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백성은 날마다 사용하면서도 알지 못한다.”라고 말한 것이다.
[故君子之道鮮矣] 군자君子성인聖人을 이른다. 인자仁者지자知者는 각각 소견에 막혀 있고 백성은 날마다 사용하면서도 알지 못하니, ‘를 체행하는 군자가 적지 않겠는가’라고 밝힌 것이다.
의 [君子體道]에서 [極也]까지
정의왈正義曰:[君子體道以爲用] 성인聖人을 일러 군자君子라 하였으니, 지극한 를 체행해서 를 본받아 정사를 베푸는 것이니, 노자老子가 말하기를 “하면서도 주재하지 않고 이 이루어져도 거하지 않는다.”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仁知則滯於所見] ‘가 비록 훌륭한 것이지만 오히려 편견이 있어서 인자仁者를 보면 를 일러 이라 하고 지자知者를 보면 를 일러 라 해서 두루 깨닫지 못하니, 이는 소견에 막혀 있는 것임’을 말한 것이다.
이미 으로 삼았는데, 만약 이라 하고 라 한다면 이는 소견에 막혀 있는 것이다.
백성百姓에 이르러서는 다만 〈만물을〉 개통開通시키고 낳는 를 날마다 사용하면서 또 개통시키고 낳음이 로 말미암아 온 것임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백성은 날마다 사용하면서도 알지 못한다.”라고 말한 것이다.
[體斯道者 不亦鮮矣] 이는 성인군자聖人君子가 홀로 를 깨닫기 때문에 “적지 않겠는가.”라고 말한 것이다.
[故常無欲以觀其妙] 노자老子도덕경道德經≫의 글을 인용하여 이 뜻을 맺어 이룬 것이다.
무욕無欲’은 무심無心함을 이르니, 만약 적연寂然히 사심이 없고 욕심이 없을 수 있으면 그 묘취妙趣를 보게 되니, ‘작위를 하지 않아서 묘리妙理를 얻음’을 말한 것이다.
[始可以語至而言極也] 만약 욕심이 없어서 이 묘리妙理를 보아 일이 없고 함이 없다면, 이와 같아야 지극한 이치를 말하고 지극한 지취旨趣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이와 같지 못하면 를 말하고 을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역주
역주1 烟熅 : 閩本․監本․毛本은 ‘絪縕’으로 되어 있다.(阮元의 〈校勘記〉 참조)
역주2 云精氣爲物者……氤氳積聚而爲萬物也 : 經文의 ‘精氣’를 孔穎達은 ‘정령한 기운’으로 해석하였다.
반면 朱子는 ‘陰의 精’과 ‘陽의 氣’로 나누어보았다. 그리하여 ‘精氣爲物 遊魂爲變’을 “陰의 精과 陽의 氣가 모여서 물건을 이룸은 神의 펴짐이요, 魂이 돌아다니고 魄이 내려와서 흩어져 變이 됨은 鬼의 돌아감이다.[陰精陽氣 聚而成物 神之伸也 魂游魄降 散而爲變 鬼之歸也]”라고 풀이하였다.
역주3 是故 知鬼神之情狀 : 朱子는 ‘仰以觀於天文’부터 여기까지를 한 단락으로 보고 “이는 이치를 궁구하는 일이다. ‘以’는 聖人이 ≪周易≫ 책을 이용하는 것이다.”라고 풀이하였다.
역주4 (考)[旁] : 저본에는 ‘考’로 되어 있으나 阮元의 〈校勘記〉에 “살펴보건대 ‘考’는 ‘旁’이 되어야 하니, 글자의 모양이 비슷하여 잘못된 것이다. 毛本은 바로 ‘旁’으로 되어 있다.”라고 한 것에 의거하여 ‘旁’으로 바로잡았다.
역주5 故能愛 : 朱子는 ‘與天地相似’부터 여기까지를 한 단락으로 보았으며, ‘知’를 ‘智’로 해석하였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이는 聖人이 性을 다하는 일이다. 天․地의 道는 智와 仁일 뿐이니, 智가 만물에 두루 함은 하늘이요, 道가 천하를 구제함은 땅이니, 지혜로우면서도 仁하면 지혜롭되 지나치지 않은 것이다. 사방으로 행함은 權道를 행하는 智이고, 흐르지 않음은 바름을 지키는 仁이다. 이미 天理를 즐거워하고 또 天命을 알기 때문에 근심이 없어 그 지혜가 더욱 깊고, 있는 곳에 따라 모두 편안하여 한 번 숨 쉴 때라도 仁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물건을 구제하려는 마음을 잊지 않아 仁이 더욱 돈독하니, 仁은 사랑의 이치이고 사랑은 仁의 用이다. 그러므로 서로 表․裏가 됨이 이와 같은 것이다.[此聖人盡性之事也 天地之道 知仁而已 知周萬物者 天也 道濟天下者 地也 知且仁 則知而不過矣 旁行者 行權之知也 不流者 守正之仁也 旣樂天理而又知天命 故能无憂而其知益深 隨處皆安而无一息之不仁 故能不忘其濟物之心而仁益篤 蓋仁者 愛之理 愛者 仁之用 故其相爲表裏 如此]”
역주6 言萬物之性 皆欲安靜於土 : ‘安土’를 韓康伯과 孔穎達은 ‘백성의 삶의 터전을 안정시킴’의 의미로 보았는데, 朱子는 이를 ‘安分’ 즉 ‘자신의 처지를 편안히 여김’의 의미로 보았다.
역주7 (宜得)[得宜] : 저본에는 ‘宜得’으로 되어 있으나, 古本․足利本에 의거하여 ‘得宜’로 바로잡았다.(阮元의 〈校勘記〉 참조)
역주8 (天)[无] : 저본에는 ‘天’으로 되어 있으나, 아래 疏와 岳本․宋本․古本․足利本에 의거하여 ‘无’로 바로잡았다.(阮元의 〈校勘記〉 참조)
역주9 (是)[至] : 저본에는 ‘是’로 되어 있으나, 阮元의 〈校勘記〉에 “살펴보건대, ‘是’는 ‘至’가 되어야 한다. 毛本은 잘못되지 않았다.”라고 한 것에 의거하여 ‘至’로 바로잡았다.
역주10 [三] : 저본에는 ‘三’이 없으나, 毛本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阮元의 〈校勘記〉 참조)
역주11 (當)[常] : 저본에는 ‘當’으로 되어 있으나, ≪周易集解纂疏≫에 의거하여 ‘常’으로 바로잡았다.(北京大 整理本 참조)
역주12 [无] : 저본에는 ‘无’가 없으나, 閩本․監本․毛本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阮元의 〈校勘記〉 참조)
역주13 (班)[雖] : 저본에는 ‘班’으로 되어 있으나, 阮元의 〈校勘記〉에 “‘班’은 ‘雖’가 되어야 하니, 아래의 ‘雖无於陽’과 대거하여 말한 것이다. 毛本은 잘못되지 않았다.”라고 한 것에 의거하여 ‘雖’로 바로잡았다.
역주14 道雖無於陰陽……故曰一陰一陽也 : 韓康伯과 孔穎達은 ‘一陰一陽之謂道’의 해석에 玄學의 의리를 적용하여 이를 ‘无의 陰과 无의 陽을 道라고 한다.’고 풀이하였다. 한강백과 공영달에 따르면, 无를 ‘一’이라고 한 것은 이때의 无가 有無를 초월한 絶對의 一者이기 때문이고, 이 절대의 无를 待對的 개념인 陰․陽과 나란히 쓸 수 있는 것은 道의 운용이 미묘해서 설령 도가 음․양으로 작용하더라도 도가 거기에 없는 것과 같아 도의 절대성에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朱子는 ‘一陰一陽’을 ‘한 번 陰하고 한 번 陽함’으로 풀었는바, ≪本義≫는 다음과 같다. “陰과 陽이 번갈아 운행함은 氣이고, 그 이치는 이른바 道라는 것이다.[陰陽迭運者 氣也 其理則所謂道]”
역주15 繼之者善也者……唯善行也 : ‘繼之者善也’를 孔穎達은 “道를 계승하는 것은 선행이다.”라고 해석하였는바, 즉 경문을 ‘道는 물건을 낳고 기르는 것이니, 사람이 이 도를 계승하는 방법은 남을 길러주는 善을 행하는 것이다.’라는 의미로 본 것이다.
반면 朱子는 이를 위의 ‘一陰一陽之謂道’와 연결하여 ‘한 번 陰하고 한 번 陽하는 천도의 운행을 계속함은 善이다.’라는 의미로 보았는바, 이를 ‘善’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이 그침 없는 운행으로 인해 만물이 화육되기 때문이다.
역주16 成之者性也者……是人之本性 : ‘成之者性也’를 孔穎達은 “道를 성취하는 것은 사람의 본성이다.”라고 해석하였다.
반면 朱子는 이를 ‘천도를 사람이 부여받아 갖추고 있음은 사람의 性이다.’라는 의미로 보았는바, ≪本義≫는 다음과 같다. “成은 갖추고 있음을 말한 것이고, 性은 물건이 받은 것을 이르니, 물건이 생기면 性을 간직하고 있어서 각각 이 道를 갖춤을 말한 것이다.[成言其具也 性謂物之所受 言物生則有性而各具是道也]”
역주17 故常无欲 以觀其妙 : 이 말은 ≪道德經≫에 보인다.
역주18 老子云……功成不居是也 : 이 말은 ≪道德經≫에 “하면서도 믿지 않고 공이 이루어져도 거하지 않는다.[爲而不恃 功成而弗居]”라고 보이는데, 그 주석서인 ≪河上公章句≫에 ‘爲而不恃’에 대해서는 “道는 베풀어 행함에 그 보답을 믿고 바라지 않는다.[道所施爲 不恃望其報也]”라고 하였고, ‘功成而弗居’에 대해서는 “功이 이루어지고 일이 성취되면 물러나 피하여 그 지위에 거하지 않는다.[功成事就 退避不居其位]”라고 하였다.
역주19 若以仁以知 則滯所見也 : 일반적으로 仁은 行으로 말하여 마음이 仁愛한 것이고, 智는 知로 말하여 지혜가 밝음을 이른다. 道는 仁과 智를 겸해야 하는데, 여기의 仁者와 智者는 道의 全體를 보지 못하고 자기가 알고(보고) 있는 것을 전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소견에 막혔다.”라고 한 것이다.
朱子는 “仁의 陽과 智의 陰은 각각 이 道의 한쪽만을 얻었다. 그러므로 그 보는 바에 따라 전체라고 지목하는 것이다.[仁陽知陰 各得是道之一隅 故隨其所見而目爲全體也]”라고 해석하였다.

주역정의(4) 책은 2022.01.2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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