疏
[疏]正義曰:‘子曰書不盡言’至‘乎德行’ 此第十二章也.
此章言立象盡意, 繫辭盡言, 易之興廢, 存乎其人事也.
子曰 書不盡言하고 言不盡意하니 然則聖人之意를 其不可見乎아
疏
[疏]正義曰:此一節, 夫子自發其問, 謂聖人之意難見也.
所以難見者, 書所以記言, 言有煩碎, 或
, 有言无字, 雖欲書錄, 不可盡竭於其言, 故云“書不盡言”也.
‘言不盡意’者, 意有深邃委曲, 非言可寫, 是言不盡意也.
聖人之意, 意又深遠. 若言之不能盡聖人之意, 書之又不能盡聖人之言, 是聖人之意, 其不可見也,
故云“然則聖人之意, 其不可見乎”, 疑而問之, 故稱乎也.
聖人
이 立象以盡意
하고 設卦以盡情僞
하고 繫辭焉以盡其言
하고 變而通之以盡利
하고
注
[注]極變通之數
면 則盡利也
라 故
로 曰
라하니라
疏
[疏]正義曰:‘子曰聖人立象以盡意’已下至‘幾乎息矣’
‘聖人立象以盡意’者, 雖言不盡意, 立象可以盡之也.
‘設卦以盡情僞’者, 非唯立象以盡聖人之意, 又設卦以盡百姓之情僞也.
‘繫辭焉以盡其言’者, 雖書不盡言, 繫辭, 可以盡其言也.
‘變而通之以盡利’者, 變謂化而裁之, 通謂推而行之, 故能盡物之利也.
疏
[疏]正義曰:‘鼓之舞之以盡神’者, 此一句, 總結“立象盡意․繫辭盡言”之美.
聖人立象以盡其意, 繫辭則盡其言, 可以說化百姓之心,
百姓之心, 自然樂順, 若鼓舞然, 而天下從之, 非盡神, 其孰能與於此, 故曰“鼓之舞之以盡神”也.
‘乾坤其易之縕邪’者, 上明盡言盡意, 皆由於易道,
乾坤成列하면 而易立乎其中矣니 乾坤毀면 則无以見易이요 易不可見이면 則乾坤或幾乎息矣리라
疏
[疏]正義曰:‘乾坤成列 而易立乎其中矣’者, 夫易者, 陰陽變化之謂, 陰陽變化, 立爻以效之, 皆從乾坤而來.
變而相重, 而有六十四卦․三百八十四爻, 本之根源, 從乾坤而來.
‘乾坤毀 則无以見易’者, 易旣從乾坤而來, 乾坤若缺毀, 則易道損壞, 故云“无以見易”也.
‘易不可見 則乾坤或幾乎息矣’, 若易道毀壞, 不可見其變化之理, 則乾坤亦壞, 或其近乎止息矣, 幾, 近也.
猶若樹之枝幹生乎根株, 根株毀, 則枝條不茂, 若枝幹已枯死, 其根株雖未全死, 僅有微生, 將死不久.
根株譬乾坤也, 易譬枝幹也, 故云“易不可見, 則乾坤或幾乎息矣.”
是故로 形而上者를 謂之道요 形而下者를 謂之器니 化而裁之를 謂之變이요
疏
[疏]正義曰:‘是故形而上者謂之道 形而下者謂之器’者, 道是无體之名, 形是有質之稱.
凡有從无而生, 形由道而立, 是先道而後形, 是道在形之上, 形在道之下, 故自形外已上者謂之道也, 自形內而下者謂之器也.
形雖處道器兩畔之際, 形在器, 不在道也. 旣有形質, 可爲器用, 故云“形而下者謂之器”也.
‘化而裁之謂之變’者, 陰陽變化而相裁節之, 謂之變也, 是得
理之變也.
猶若陽氣之化不可久長, 而裁節之以陰雨也, 是得理之變也. 陰陽之化, 自然相裁, 聖人亦法此而裁節也.
疏
[疏]正義曰:因推此以可變而施行之, 謂之通也. 猶若亢陽之後, 變爲陰雨, 因陰雨而行之, 物得開通, 聖人亦當然也.
注
[注]事業은 所以濟物이라 故로 擧而錯之於民이라
疏
[疏]正義曰:謂擧此理, 以爲變化, 而錯置於天下之民. 凡民得以營爲事業, 故云“謂之事業”也.
此乃自然以變化, 錯置於民也, 聖人亦當法此, 錯置變化於萬民, 使成其事業也.
凡繫辭之說, 皆說易道, 以爲聖人德化, 欲使聖人法易道, 以化成天下, 是故易與聖人, 恒相將也.
以作易者, 本爲立敎故也, 非是空說易道, 不關人事也.
是故로 夫象은 聖人이 有以見天下之賾하여 而擬諸其形容하고 象其物宜라 是故로 謂之象이요
聖人이 有以見天下之動하여 而觀其會通하여 以行其典禮하니 繫辭焉以斷其吉凶이라 是故로 謂之爻라
疏
[疏]正義曰:‘是故夫象聖人有以見天下之賾’至‘是故謂之爻’者, 於第六章, 已具其文, 今於此復言者何也.
爲下云“極天下之賾存乎卦, 鼓天下之動存乎辭”, 爲此故更引其文也.
且已下又云“存乎變”․“存乎通”․“存乎其人”, 廣陳所存之事, 所以須重論也.
極天下之賾者는 存乎卦하고 鼓天下之動者는 存乎辭라
疏
[疏]正義曰:‘極天下之賾
存乎卦’者, 言窮極天下深賾之處存乎卦, 言觀卦以知賾也.
‘鼓天下之動
存乎辭’者, 鼓謂發揚天下之動, 動有得失, 存乎爻卦之辭, 謂觀辭以知得失也.
化而裁之는 存乎變하고 推而行之는 存乎通하고 神而明之는 存乎其人이니
注
[注]體神而明之는 不假於象이라 故로 存乎其人이라
疏
[疏]正義曰:‘化而裁之存乎變’者, 謂覆說上文“化而裁之謂之變”也.
‘推而行之存乎通’者, 覆說上文“推而行之謂之通”也.
‘神而明之存乎其人’者, 言人能神此易道而顯明之者, 存在於其人.
若其人聖, 則能神而明之, 若其人愚, 則不能神而明之, 故存於其人, 不在易象也.
注
[注]德行은 賢人之德行也니 順足於內故로 默而成之也요 體與理會故로 不言而信也라
疏
[疏]正義曰:若能順理足於內, 默然而成就之, 闇與理會, 不須言而自信也.
‘存乎德行’者, 若有德行, 則得默而成就之, 不言而信也, 若无德行, 則不能然.
此言德行, 據賢人之德行也, 前經“神而明之存乎其人”, 謂聖人也.
疏
정의왈正義曰:경經의 [자왈서부진언子曰書不盡言]에서 [乎德行]까지 이는 제12장이다.
이 장은 ‘상象을 세워 뜻을 다하고 글을 달아 말을 다해서, 역易의 흥하고 폐지됨이 인사人事에 달려 있음’을 말하였다.
공자孔子가 말씀하였다. “글로는 말을 다하지 못하고 말로는 뜻을 다하지 못하니, 그렇다면 성인聖人의 뜻을 볼 수 없단 말인가.”
疏
정의왈正義曰:이 한 절은 부자夫子가 스스로 물음을 내어서 성인聖人의 뜻을 보기 어려움을 말씀한 것이다.
보기 어려운 이유는, 글은 말을 기록하는 것이지만 말은 번쇄煩碎함이 있어서 혹 초楚와 하夏가 똑같지 않고, 말만 있고 글자가 없어서 비록 글로 기록하고자 하나 그 말을 다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글로는 말을 다하지 못한다.”라고 한 것이다.
[言不盡意] 뜻에는 심오하고 곡진함이 있어서 말로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이것이 ‘말로는 뜻을 다하지 못함’이다.
성인聖人의 뜻은 의미가 또 심원하다. 만약 말로는 성인의 뜻을 다하지 못하고 글로도 또 성인의 말씀을 다하지 못한다면 이는 성인聖人의 뜻을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렇다면 성인의 뜻을 볼 수 없단 말인가.”라고 하였으니, 의심하여 물었으므로 ‘호乎’라고 칭한 것이다.
공자孔子가 말씀하였다. “성인聖人이 상象을 세워 뜻을 다하고, 괘卦를 베풀어 정위情僞를 다하고, 글을 달아 말씀을 다하고, 변變하여 통通해서 〈물건의〉 이로움을 다하고,
注
변통變通하는 수數를 다하면 이로움을 다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역易은 궁窮하면 변變하고 변變하면 통通하고 통通하면 오래간다.”라고 한 것이다.
疏
정의왈正義曰:경經의 [子曰聖人立象以盡意] 이하에서 [幾乎息矣]까지
이 한 절은 부자夫子가 다시 ‘성인聖人의 뜻을 볼 수 있는 이치’를 스스로 해석한 것이다.
[聖人立象以盡意] 비록 말이 뜻을 다하지 못하나 상象을 세우면 다할 수 있는 것이다.
[設卦以盡情僞] 비단 상象을 세워서 성인聖人의 뜻을 다할 뿐만이 아니요, 또 괘卦를 만들어 백성의 실정과 거짓을 다하는 것이다.
[繫辭焉以盡其言] 비록 글로는 말을 다할 수 없으나 글을 달면 그 말씀을 다할 수 있는 것이다.
[變而通之以盡利] ‘변變’은 화化하여 제재함을 이르고, ‘통通’은 미루어 행함을 이른다. 그러므로 물건의 이로움을 다할 수 있는 것이다.
〈백성을〉 고무鼓舞시켜서 신神을 다하니, 건乾과 곤坤은 역易의 〈도道가〉 깊이 쌓이게 된 〈근원일〉 것이다.
疏
정의왈正義曰:[鼓之舞之以盡神] 이 한 구句는 ‘상象을 세워 뜻을 다하고 글을 달아 말을 다하는 아름다움’을 총결한 것이다.
성인聖人이 상象을 세워 그 뜻을 다하고 글을 달아 그 말씀을 다해서 백성의 마음을 기쁘게 하여 감화할 수 있으니,
〈이렇게 하면〉 백성의 마음이 자연 즐거워하고 순종하여 마치 고무鼓舞함과 같아서 천하天下가 따르니, 신神을 다하는 자가 아니면 그 누가 여기에 참여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백성을〉 고무시켜서 신神을 다하였다.”라고 말한 것이다.
[乾坤其易之縕邪] 위에서는 ‘말을 다하고 뜻을 다함이 모두 역易의 도道에 말미암은 것임’을 밝혔고,
여기에서는 ‘역易의 성립하는 바가 건乾․곤坤에 근본함’을 밝혔으니, 만약 건乾․곤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역易의 도道가 말미암아 일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건乾․곤坤은 역易의 도道가 깊이 쌓이게 된 근원인 것이다.
이는 역易과 더불어 천부川府의 깊이 감춰짐이 된다. 그러므로 “건乾과 곤坤은 역易의 〈도道가〉 깊이 쌓이게 된 〈근원일〉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건乾․곤坤이 열위列位를 이루면 역易이 그 가운데에 건립되니, 건乾․곤坤이 훼손되면 역易을 볼 수가 없고, 역易을 볼 수가 없으면 건乾․곤坤이 혹 그쳐짐에 가까울 것이다.
疏
정의왈正義曰:[乾坤成列 而易立乎其中矣] 역易은 음양陰陽이 변화變化함을 이르니, 음양의 변화를 효爻를 세워 본받음이 모두 건乾․곤坤으로부터 왔다.
그러므로 건乾은 세 아들을 낳고 곤坤은 세 딸을 낳아서 팔괘八卦가 되었고, 변하여 서로 거듭해서 64괘卦와 384효爻가 있게 되었으니, 근원을 근본해보면 건乾과 곤坤으로부터 온 것이다.
그러므로 건乾․곤坤이 이미 열위列位를 이루면 역易의 도道의 변화變化가 건乾․곤坤의 가운데에 건립되는 것이다.
[乾坤毀 則无以見易] 역易이 이미 건乾․곤坤으로부터 왔으니, 건乾․곤坤이 만약 망가지고 훼손되면 역易의 도道가 훼손되고 파괴된다. 그러므로 “역易을 볼 수가 없다.”라고 한 것이다.
[易不可見 則乾坤或幾乎息矣] 만약 역易의 도道가 훼손되고 파괴되어서 변화의 이치를 볼 수 없으면 건乾․곤坤 또한 파괴되어서 혹 그쳐짐에 가깝게 될 것이니, ‘기幾’는 가까움이다.
비유하건대 나무의 가지와 줄기가 뿌리 밑동에서 생겼으니 뿌리 밑동이 훼손되면 가지가 무성하지 못하고, 가지와 줄기가 이미 말라 죽으면 뿌리 밑동이 완전히 죽지 아니하여 겨우 조금 살아 있더라도 장차 오래지 않아 죽게 됨과 같은 것이다.
뿌리 밑동은 건乾․곤坤을 비유한 것이고, 역易은 가지와 줄기에 비유한 것이다. 그러므로 “역易을 볼 수가 없으면 건乾․곤坤이 혹 그쳐짐에 가까울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이 때문에 형이상形而上인 것을 도道라 이르고 형이하形而下인 것을 기器라 이르니, 〈음양陰陽이〉 변화變化하여 제재함을 변變이라 이르고
注
인하여 회통會通(회합會合과 변통變通)을 제재해서 변화의 도道에 맞게 하는 것이다.
疏
정의왈正義曰:[是故形而上者謂之道 形而下者謂之器] ‘도道’는 형체가 없음의 이름이고, ‘형形’은 형질이 있음의 칭호이다.
무릇 유有는 무无로부터 생기고, 형形은 도道로 말미암아 성립되니, 이는 먼저 도道가 있은 뒤에 형形이 있는 것인바, 도道는 형形의 위에 있고 형形은 도道의 아래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형形 외에 이상인 것을 ‘도道’라 이르고, 형形 안에 이하인 것을 ‘기器’라 이르는 것이다.
형形은 비록 도道와 기器의 두 두둑(경계)의 사이에 있으나 형形은 기器에 있고 도道에 있지 않다. 이미 형질이 있으면 기용器用을 만들 수 있으므로 “형이하形而下인 것을 기器라 이른다.”라고 한 것이다.
[化而裁之謂之變] 음양陰陽이 변화하여 서로 제재해서 절도節度에 맞게 함을 ‘변變’이라 이르니, 이는 이치의 변화를 얻은 것이다.
이는 양기陽氣의 변화가 오래가지 못해서 음우陰雨로써 제재하여 절도에 맞게 함과 같으니, 이것이 이치의 변화를 얻은 것이다. 음양의 변화가 자연히 서로 제재하니, 성인聖人이 또한 이것을 본받아 제재하여 절도에 맞게 하는 것이다.
疏
정의왈正義曰:이것을 인하여 미루어서 변하여 시행하게 할 수 있는 것을 ‘통通’이라 이른다. 이는 마치 항양亢陽(심한 가뭄)의 뒤에 변하여 음우陰雨가 되어서 음우로 인해 행하여 물건이 개통되는 것과 같으니, 성인聖人 또한 마땅히 그러한 것이다.
들어서 천하의 백성에게 조치함을 사업事業이라 이른다.
注
사업事業은 사물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들어서 백성에게 조치하는 것이다.
疏
정의왈正義曰:이 이치를 들어서 변화를 만들어 천하의 백성에게 조치함을 이른 것이다. 무릇 백성이 사업事業을 경영할 수 있으므로 “사업이라 이른다.”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바로 자연히 변화하여 백성에게 조치하는 것이니, 성인聖人 또한 마땅히 이것을 본받아서 변화를 만민에게 조치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그 사업을 이루게 해야 한다.
무릇 계사繫辭의 말은 다 역易의 도道를 말해서 이를 성인聖人의 덕화德化로 삼아 성인으로 하여금 역易의 도道를 본받아 천하를 교화하여 이루고자 한 것이니, 이 때문에 역易과 성인이 항상 서로 이어가는 것이다.
역易을 지은 까닭은 본래 가르침을 세우기 위함 때문이니, 역易의 도道를 공연히 말하여 인사人事에 관여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이 때문에 상象은 성인聖人이 천하天下의 그윽함(심오함)을 보고서 형용形容에 비의比擬하고 사물의 마땅함을 형상한 것이므로 상象이라 이르고,
성인이 천하의 동動함을 보고서 그 회통會通을 관찰하여 전례典禮를 행하니 글을 달아 길흉吉凶을 결단하기 때문에 효爻라 이른 것이다.
疏
정의왈正義曰:경經의 [是故夫象聖人有以見天下之賾]에서 [是故謂之爻]까지 제6장에 이미 이 글이 갖추어져 있는데, 지금 여기에서 다시 말한 것은 어째서인가?
아래에서 “천하天下의 그윽함을 다함은 괘卦에 달려 있고, 천하의 동動함을 고무시킴은 글에 달려 있다.”라고 하였으니, 이 때문에 다시 이 글을 인용한 것이다.
게다가 이하에 또 ‘변變에 달려 있다’․‘통通에 달려 있다’․‘사람에게 달려 있다’라 하여 달려 있는 바의 일을 넓게 말하였으니, 이 때문에 거듭 논해야 했던 것이다.
천하天下의 그윽함을 다함은 괘卦에 달려 있고, 천하의 동動함을 고무鼓舞시킴은 글(괘사卦辭와 효사爻辭)에 달려 있다.
注
사辭는 효사爻辭이다. 효爻로써 고동鼓動함은 천하天下의 동動함을 본받은 것이다.
疏
정의왈正義曰:[極天下之賾者存乎卦] 천하의 깊고 그윽한 곳을 다함은 괘卦에 달려 있음을 말한 것이니, 괘卦를 보고서 그윽한 이치를 앎을 말한 것이다.
[鼓天下之動者存乎辭] ‘고鼓’는 천하天下의 동動함을 발양發揚함을 말하니, 동함에 득실得失이 있는 것이 효사爻辭와 괘사卦辭에 달려 있는바, ‘글을 보고서 득실을 앎’을 이른 것이다.
화化하여 제재함은 변變에 달려 있고, 미루어 행함은 통通에 달려 있고, 신묘하게 하여 밝힘은 사람에게 달려 있으니,
注
신神을 체행하여 밝힘은 상象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疏
정의왈正義曰:[化而裁之存乎變] 윗글의 “〈음양陰陽이〉 변화變化하여 제재함을 변變이라 이른다.”는 것을 반복하여 말한 것이다.
[推而行之存乎通] 윗글의 “미루어 행함을 통通이라 이른다.”는 것을 반복하여 말한 것이다.
[神而明之存乎其人] ‘사람이 능히 이 역易의 도道를 신묘하게 해서 드러내어 밝힘은 그 사람에 존재함’을 말한 것이다.
만약 그 사람이 성스러우면 신묘하게 하여 밝힐 수 있고, 만약 그 사람이 어리석으면 신묘하게 하여 밝히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 사람에 달려 있고 역易의 상象에 달려 있지 않은 것이다.
묵묵히 하여 이루고 말하지 않아도 믿음은 덕행德行에 달려 있다.”
注
덕행德行은 현인賢人의 덕행이니, 순리順理가 안에 충족되어 있으므로 묵묵히 이루는 것이요, 체體가 이理와 맞기 때문에 말하지 않아도 믿는 것이다.
疏
정의왈正義曰:만약 순리順理가 안에서 충족되어 있으면 묵묵히 성취하여 은연중 이치와 맞아서 굳이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믿는 것이다.
[存乎德行] 만약 덕행德行이 있으면 묵묵히 성취해서 말하지 않아도 믿을 수 있는 것이요, 만약 덕행이 없으면 이렇게 하지 못한다.
여기서 말한 덕행은 현인賢人의 덕행을 근거한 것이요, 앞 경문의 “신묘하게 하여 밝힘은 사람에게 달려 있다.”는 것은 성인聖人을 이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