疏
[疏]正義曰:‘頤 貞吉’者, 於頤養之世, 養此貞正, 則得吉也.
彖曰 頤貞吉은 養正則吉也니 觀頤는 觀其所養也요 自求口實은 觀其自養也라
天地養萬物하고 聖人養賢하여 以及萬民하니 頤之時 大矣哉로다
疏
○正義曰:‘頤貞吉 養正則吉’者, 釋頤貞吉之義. 頤, 養也, 貞, 正也, 所養得正, 則有吉也.
其養正之言, 乃兼二義. 一者, 養此賢人, 是其養正, 故下云“聖人養賢以及萬民.”
二者, 謂養身得正, 故象云“愼言語, 節飲食.” 以此言之, 則養正之文, 兼養賢及自養之義也.
‘觀頤 觀其所養也’者, 釋觀頤之義也. 言在下觀視在上頤養所養何人, 故云“觀頤, 觀其所養也.”
‘自求口實 觀其自養’者, 釋自求口實之義也. 謂在下之人, 觀此在上自求口中之實, 是觀其自養,
則是在下觀上, 乃有二義. 若所養是賢, 及自養有節, 則是其德盛也, 若所養非賢, 及自養乖度, 則其德惡也.
疏
[疏]‘天地養萬物’者, 自此已下, 廣言頤卦所養事大, 故云“天地養萬物”也.
‘聖人養賢以及萬民’者, 先須養賢, 乃得養民, 故云“養賢以及萬民”也.
聖人但養賢人, 使治衆, 衆皆獲安, 有如
‧
‧
‧
,
此皆養得賢人, 以爲輔佐, 政治世康, 兆庶咸說, 此則聖人養賢以及萬民之養也.
‘頤之時 大矣哉’者, 以彖釋頤義, 於理旣盡, 更无餘意, 故不云義, 所以直言“頤之時大矣哉”, 以所養得廣, 故云“大矣哉.”
象曰 山下有雷 頤니 君子以愼言語하고 節飲食하니라
疏
[疏]正義曰:山止於上, 雷動於下, 頤之爲用, 下動上止, 故曰“山下有雷頤.”
人之開發言語, 咀嚼飲食, 皆動頤之事, 故君子觀此頤象, 以謹愼言語, 裁節飲食.
先儒云“禍從口出, 患從口入.” 故於頤養而愼節也.
注
[注]朵頤者는 嚼也라 以陽處下하여 而爲動始하여 不能令物由己養하고 動而求養者也라
夫安身은 莫若不競이요 修己는 莫若自保니 守道則福至하고 求祿則辱來라
居養賢之世하여 不能貞其所履以全其德하여 而舍其靈龜之明兆하고 羨我朵頤而躁求하여
離其致養之至道하고 闚我寵祿而競進하니 凶莫甚焉이라
疏
○正義曰:靈龜, 謂神靈明鑒之龜. 兆, 以喻己之明德也. 朵頤, 謂朵動之頤以嚼物, 喻貪惏以求食也.
初九以陽處下而爲動始, 不能使物賴己而養, 而更自動求養, 是舍其靈龜之明兆, 觀我朵頤而躁求.
是損己廉靜之德, 行其貪竊之情, 所以凶也, 不足可貴, 故象云“亦不足貴也.”
疏
○正義曰:‘朵頤者 嚼也’者, 朵是動義, 如手之捉物, 謂之朵也. 今動其頤, 故知嚼也.
‘不能令物
己養’者, 若道德弘大, 則己能養物, 是物由己養, 今身處无位之地, 又居震動之始, 是動而自求養也.
‘離其致養之至道 闚我寵祿而競進’者, 若能自守廉靜, 保其明德, 則能致君上所養, 今不能守廉靜,
注
[注]養下曰顚이라 拂은 違也요 經은 猶義也요 丘는 所履之常也라
處下體之中하고 无應於上하여 反而養初居下하여 不奉上而反養下라 故로 曰 顚頤하여 拂經于丘也라
以此而養이면 未見其福也요 以此而行이면 未見有與라 故로 曰 頤征凶이라하니라
疏
[疏]正義曰:顚, 倒也. 拂, 違也. 經, 義也. 丘, 所履之常處也. 六二處下體之中, 无應於上, 反倒下養初, 故曰“顚頤.”
下當奉上, 是義之常處也, 今不奉於上, 而反養於下, 是違此經義於常之處, 故云“拂經于丘”也.
六三은 拂頤貞하니 凶이라 十年勿用하여 无攸利하니라
注
[注]履夫不正하여 以養於上하니 納上以諂者也니 拂養正之義라 故로 曰 拂頤貞하니 凶也라하니라
處頤而爲此行이면 十年見棄者也니 立行於斯하면 无施而利라
疏
[疏]正義曰:‘拂頤貞 凶’者, 拂, 違也. 履夫不正, 以養上九, 是自納於上以諂媚者也, 違養正之義,
爲行如此, 雖至十年, 猶勿用而見棄也, 故曰“十年勿用.” 立行於此, 故无所利也.
疏
[疏]正義曰:釋十年勿用之義. 以其養上以諂媚, 則於正道大悖亂, 解十年勿用見棄也.
六四는 顚頤나 吉하니 虎視耽耽하고 其欲逐逐하면 无咎리라
注
[注]體屬上體하고 居得其位而應於初하여 以上養下하여 得頤之義라 故로 曰 顚頤나 吉也라하니라
下交엔 不可以瀆이라 故로 虎視耽耽하니 威而不猛하고 不惡而嚴이라
養德施賢에 何可有利리오 故로 其欲逐逐하여 尙敦實也라 修此二者然後에 乃得全其吉而无咎라
觀其自養이면 則履正하고 察其所養이면 則養陽하니 頤爻之貴 斯爲盛矣라
疏
○正義曰:‘顚頤 吉’者, 體屬上體, 居得其位, 而應於初, 以上養下, 得養之宜, 所以吉也.
‘虎視耽耽’者, 以上養下, 不可褻瀆, 恒如虎視耽耽然, 威而不猛也.
‘无咎’者, 若能虎視耽耽, 其欲逐逐, 雖復顚頤養下, 則得吉而无咎也.
疏
○正義曰:‘觀其自養 則履正’者, 以陰處陰, 四自處其身, 是觀其自養, 則能履正道也.
‘察其所養 則養陽’者, 六四下養於初, 是觀其所養, 初是陽爻, 則能養陽也.
疏
[疏]正義曰:釋顚頤吉之義. 上謂四也, 下養於初, 是上施也.
能威而不猛, 如虎視耽耽, 又寡欲少求, 其欲逐逐, 能爲此二者, 是上之所施, 有光明也.
然六二顚頤, 則爲凶, 六四顚頤, 得爲吉者, 六二身處下體, 而又下養, 所以凶也,
六四身處上體, 又應於初, 陰而應陽, 又能威嚴寡欲, 所以吉也.
注
[注]以陰居陽은 拂頤之義也니 行則失類라 故로 宜居貞也라
无應於下而比於上이라 故로 可守貞從上하여 得頤之吉이라 雖得居貞之吉이나 處頤違謙하여 難未可涉也라
疏
[疏]正義曰:拂, 違也. 經, 義也. 以陰居陽, 不有謙退, 乖違於頤養之義, 故言“拂經”也.
‘不可涉大川’者, 處頤違謙, 患難未解, 故不可涉大川, 故居貞吉也.
疏
[疏]正義曰:釋居貞之義. 以五近上九, 以陰順陽, 親從於上, 故得居貞吉也.
注
[注]以陽處上而履四陰하니 陰不能獨爲主하여 必宗於陽也라 故로 莫不由之以得其養이라 故로 曰 由頤라
爲衆陰之主
하니 不可瀆也
라 故
로 厲乃吉
하니 有似
라
貴而无位하니 是以厲也요 高而有民하니 是以吉也라 爲養之主하여 物莫之違라 故로 利涉大川也라
疏
[疏]正義曰:‘由頤’者, 以陽處上, 而履四陰, 陰不能獨爲其主, 必宗事於陽也. 衆陰莫不由之以得其養, 故曰“由頤”也.
‘利涉大川’者, 爲養之主, 无所不爲, 故利涉大川而有慶也, 故象云“大有慶也.”
頤는 바르면 길하니, 길러줌을 보고 스스로 입에 담겨 있는 물건을 구한다.
疏
正義曰:[頤 貞吉] 頤養의 세상에서 이 貞正함을 기르면 길함을 얻는 것이다.
[觀頤] ‘頤’는 길러줌이니, 이 聖人이 기르는 바의 물건을 보는 것이다.
[自求口實] 스스로 기르는 것을 살펴보아 입안에 담긴 물건을 구하는 것이다.
〈彖傳〉에 말하였다. “‘頤는 바르면 길함’은 바름을 기르면 길한 것이니, ‘길러줌을 봄’은 그 기르는 바를 보는 것이요, ‘스스로 입안에 담긴 물건을 구함’은 자기가 스스로 길러줌을 살펴보는 것이다.
天地가 만물을 기르고 聖人이 賢者를 길러서 萬民에게 미치니, 頤의 때가 크다.”
疏
○正義曰:[頤貞吉 養正則吉] ‘頤는 바르면 길함’의 뜻을 해석한 것이다. ‘頤’는 기름이요, ‘貞’은 바름이니, 기르는 바가 바름을 얻으면 길함이 있는 것이다.
‘바름을 기른다’는 말은 두 뜻을 겸하고 있다. 첫 번째는 이 賢者를 기름이 바로 바름을 기르는 것이므로 아래에 “聖人이 賢者를 길러서 萬民에게 미친다.”라고 한 것이다.
두 번째는 몸을 기름에 바름을 얻음을 말하였으므로 〈象傳〉에 “언어를 삼가고 음식을 절제한다.”라고 한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말하면 바름을 기른다는 글은 현자를 기름과 스스로 기른다는 뜻을 겸한 것이다.
[觀頤 觀其所養也] ‘길러줌을 봄’의 뜻을 해석한 것이다. 아래에 있는 자들이 위에서 기르는 바가 어떤 사람을 기르는가를 봄을 말하였다. 그러므로 “‘길러줌을 봄’은 그 기르는 바를 봄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自求口實 觀其自養] ‘입안에 담긴 물건을 구함’의 뜻을 해석한 것이다. 아래에 있는 사람이 이 윗사람이 스스로 입안에 담긴 것을 구함을 봄은 바로 스스로 기르는 것을 관찰하는 것이니,
이는 아래에 있는 자가 위를 관찰함이 마침내 두 뜻이 있는 것이다. 만약 기르는 바가 현자이고 스스로 기름에 절제가 있으면 이는 그 德이 성한 것이요, 만약 기르는 바가 현자가 아니고 또 스스로 기름에 법도에 어긋나면 그 德이 악한 것이다.
이 卦의 뜻은 기르는 바가 알맞게 하려는 것이지 기르는 바가 잘못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疏
[天地養萬物] 이로부터 이하는 頤卦의 기르는 바의 일이 큼을 널리 말하였다. 그러므로 “天地가 만물을 기른다.”라고 말한 것이다.
[聖人養賢以及萬民] 먼저 모름지기 賢者를 길러야 비로소 백성을 기를 수 있다. 그러므로 “賢者를 길러 萬民에게 미친다.”라고 말한 것이다.
聖人이 다만 賢人을 길러 그로 하여금 무리(백성)를 다스리게 해서 무리가 다 편안함을 얻으니, 예컨대 虞나라 舜임금의 다섯 사람과 周나라 武王의 열 사람과 漢나라 高帝의 張良과 齊나라 군주의 管仲 같은 경우이니,
이는 모두 賢人을 길러서 보좌로 삼아 政事가 다스려지고 세상이 편안해서 억조 백성들이 모두 기뻐한 것인바, 이는 聖人이 현자를 길러서 만민을 기름에 미친 것이다.
[頤之時 大矣哉] 〈彖傳〉을 가지고 頤의 뜻을 해석하였는데, 이치에 이미 다하여 다시 남은 뜻이 없으므로 ‘義’라고 말하지 않은 것이니, 이 때문에 다만 “頤의 때가 크다.”라고 말한 것이다. 기르는 바가 넓음을 얻었기 때문에 “크다.[大矣哉]”라고 말한 것이다.
〈象傳〉에 말하였다. “산 아래에 우레가 있는 것이 頤卦이니, 君子가 보고서 언어를 삼가고 음식을 절제한다.”
注
言語와 飮食도 오히려 삼가고 절제하는데 하물며 그 나머지 일에 있어서랴.
疏
正義曰:산이 위에서 그치고 우레가 아래에서 동하니, 턱[頤]의 쓰임이 아래가 동하고 위가 그친다. 그러므로 “산 아래에 우레가 있는 것이 頤卦이다.”라고 한 것이다.
사람이 언어를 개발하고(입을 열어 말하고) 음식을 咀嚼하는 것이 모두 턱을 통한 일이다. 그러므로 君子가 이 頤의 象을 보고서 언어를 삼가고 음식을 절제하는 것이다.
先儒가 이르기를 “禍는 입에서 나오고 근심은 입으로 들어간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기름에 삼가고 절제하는 것이다.
初九는 너의 신령스러운 거북을 버리고 내가 턱을 움직이는 것을 보니, 흉하다.
注
턱을 움직이는 것은 물건을 씹는 것이다. 陽으로서 아래에 처하여 動의 처음이 되어서 물건으로 하여금 자기를 말미암아 길러지게 하지 못하고 동하여 기름을 구하는 자이다.
몸을 편안히 함은 남과 다투지 않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고, 자기 몸을 닦음은 스스로 보존하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道를 지키면 福이 이르고 祿을 구하면 辱이 이른다.
賢者를 기르는 세상에 거하여 행하는 바를 바르게 하여 德을 온전히 하지 못해서, 신령스러운 거북의 밝은 조짐을 버리고 내가 턱을 움직이는 것을 부러워하여 조급히 구한다.
그리하여 길러줌을 이르게 하는 지극한 道를 버리고 나의 영광과 祿을 엿보면서 다투어 나아가니, 흉함이 이보다 더 심함이 없는 것이다.
疏
○正義曰:‘靈龜’는 신령스러워서 밝게 보는 거북을 이른다. ‘兆’는 자기의 밝은 德을 비유하였다. ‘朵頤’는 움직이는 턱으로 물건을 씹음을 이르니, 탐하여 음식을 구함을 비유한 것이다.
初九가 陽으로서 아래에 처하여 動의 처음이 되어서 물건으로 하여금 자기를 의뢰해서 길러지게 하지 못하고 다시 스스로 동하여 길러주기를 구하니, 이는 신령스러운 거북의 밝은 조짐을 버리고 내가 턱을 움직이는 것을 보고서 조급히 구하는 것이다.
이는 자기의 청렴하고 고요한 德을 덜고서 탐하고 도둑질하는 情을 행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흉한바, 귀하게 여길 것이 못 된다. 그러므로 〈象傳〉에 “또한 족히 귀하게 여길 것이 못 된다.”라고 한 것이다.
疏
○正義曰:[朵頤者 嚼也] ‘朵’는 바로 동하는 뜻이니, 손에 물건을 쥐는 것을 朵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제 그 턱을 움직이므로 물건을 씹음을 아는 것이다.
[不能令物由己養] 만약 도덕이 넓고 크면 자기가 능히 물건을 길러줄 수 있으니, 이는 물건이 자기로 말미암아 길러지는 것인데, 지금 자기 몸이 지위가 없는 자리에 처하였고 또 震이 動하는 시초에 거하였으니, 이는 동하여 스스로 길러주기를 구하는 것이다.
[離其致養之至道 闚我寵祿而競進] 만약 스스로 청렴함과 고요함을 지켜서 자기의 明德을 보존하면 능히 君上이 길러주는 바를 이르게 할 수 있는데 지금 청렴함과 고요함을 지키지 못하니,
이는 길러줌을 이르게 하는 지극한 道를 버리고 도리어 그 영광과 祿을 구하여 다투어 나아가는 것이다.
〈象傳〉에 말하였다. “‘내가 턱을 움직이는 것을 봄’은 또한 귀하게 여길 것이 못 되는 것이다.”
六二는 거꾸로 길러주어 언덕(떳떳한 곳)에서 의리를 거스르니, 길러주면 감에 흉하다.
注
아래를 길러주는 것을 ‘顚’이라 한다. ‘拂’은 어김이요, ‘經’은 義와 같고, ‘丘’는 밟고 있는 바의 떳떳한 곳이다.
下體의 中에 처하고 위에 應이 없어서 도리어 아래에 있는 初九를 길러주어, 위를 받들지 않고 도리어 아래를 길러준다. 그러므로 “거꾸로 길러주어 언덕에서 의리를 거스른다.”라고 말한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길러주면 그 福을 받지 못하고, 이런 방법으로 행하면 함께하는(친한) 사람이 있음을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길러주면 감에 흉하다.”라고 한 것이다.
疏
正義曰:‘顚’은 거꾸로이다. ‘拂’은 어김이다. ‘經’은 義이다. ‘丘’는 밟고 있는 바의 떳떳한 곳이다. 六二가 下體의 中에 처하고 위에 應이 없어서 도리어 거꾸로 아래로 初九를 길러준다. 그러므로 “거꾸로 기른다.”라고 말한 것이다.
아랫사람이 마땅히 윗사람을 받들어야 하니 이는 義의 떳떳한 곳인데, 지금 위를 받들지 않고 도리어 아래를 길러주니, 이는 이 經義를 떳떳한 곳에서 위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언덕에서 의리를 거스른다.”라고 말한 것이다.
[頤征凶] ‘征’은 감이니, 만약 이런 방식으로 길러주면 가는 바가 모두 흉하다. 그러므로 “길러주면 감에 흉하다.”라고 한 것이다.
〈象傳〉에 말하였다. “六二가 감에 흉함은 행함에 무리를 잃은 것이다.”
注
무리가 다 위를 길러주는데, 六二가 아래에 처하여 初九를 길러준다.
疏
正義曰:길러주는 體는 무리가 다 윗사람을 길러주는데, 지금 이 六二만이 홀로 아래를 길러주니, 이는 행하는 바가 무리를 잃은 것이다.
六三은 바름을 길러줌에 어긋나니, 흉하다. 10년 동안 쓰이지 못하여 이로운 바가 없다.
注
不正함을 밟고서 윗사람을 기르니 윗사람에게 아첨을 바치는 자이니, 바름을 길러주는 義에 어긋난다. 그러므로 “바름을 길러줌에 어긋나니, 흉하다.”라고 한 것이다.
頤에 처하여 이러한 행실을 하면 10년 동안 버림을 당하는 자이니, 행실을 이렇게 세우면 베푸는 곳마다 이로움이 없다.
疏
正義曰:[拂頤貞 凶] ‘拂’은 어김이다. 不正한 것을 밟고서 上九를 길러주니 이는 스스로 위에게 아첨을 바치는 자이니, 바름을 길러주는 義에 어긋난다.
그러므로 “바름을 길러줌에 어긋나니, 흉함이 있다.”라고 한 것이다. 행실을 이와 같이 하면 비록 10년에 이르더라도 여전히 쓰이지 못하고 버림을 당한다. 그러므로 “10년 동안 쓰이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행실을 이렇게 세우기 때문에 이로운 바가 없는 것이다.
〈象傳〉에 말하였다. “10년 동안 쓰이지 못함은 道가 크게 어긋났기 때문이다.”
疏
正義曰:‘10년 동안 쓰이지 못함’의 뜻을 해석하였다. 윗사람을 아첨으로써 기르면 正道에 크게 어긋나고 어지러우니, ‘10년 동안 쓰이지 못하여 버림받음’을 해석한 것이다.
六四는 거꾸로 길러주나 길하니, 범이 耽耽히 노려보듯 하고, 하고자 함을 쫓아내면 허물이 없으리라.
注
體가 上體에 속하고 거함이 正位를 얻고서 初九에 응하여 위로서 아래를 길러주어서 길러줌의 의리를 얻었다. 그러므로 “거꾸로 길러주나 길하다.”라고 한 것이다.
아랫사람과 사귈 때에는 煩瀆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범이 耽耽히 노려보듯 하니, 위엄이 있으면서도 사납지 않고 험악하지 않으면서도 엄한 것이다.
德을 기르고 賢者에게 베풂에 어찌 이익을 바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하고자 함을 쫓아내서 도탑고 진실함을 숭상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닦은 뒤에야 비로소 그 길함을 온전히 하여 허물이 없을 수 있다.
스스로 길러줌을 살펴보면 바름을 행하고, 길러주는 바를 살펴보면 陽을 길러주니, 頤卦 여섯 爻의 귀한 것이 여기에서 가장 성하다.
疏
○正義曰:[顚頤 吉] 體가 上體에 속하고 거함이 正位를 얻고서 初九에 응하여 위로서 아래를 길러주어 기름의 마땅함을 얻었으니, 이 때문에 길한 것이다.
[虎視耽耽] 윗사람으로서 아랫사람을 길러줄 적에 함부로 하고 煩瀆해서는 안 되니, 항상 범이 탐탐하게 노려보듯이 하여 위엄이 있으면서도 사납지 않아야 한다.
[其欲逐逐] 이미 아랫사람을 길러줄 적에 구함이 있어서는 안 되니, 그 情에 하고자 하는 바를 쫓아내서 도탑고 진실함을 숭상해야 한다.
[无咎] 만약 범이 탐탐하게 노려보듯이 하고 그 하고자 함을 쫓아내면 비록 다시 거꾸로 길러주어 아래를 기르나 길함을 얻고 허물이 없는 것이다.
疏
○正義曰:[觀其自養 則履正] 陰으로서 陰의 자리에 처하여 六四가 스스로 잘 處身하니, 이것이 ‘스스로 길러줌을 살펴보면 능히 正道를 행함’인 것이다.
[察其所養 則養陽] 六四가 아래로 初九를 길러주니, 이것이 ‘그 길러주는 바를 살펴봄’인바, 初爻가 陽爻여서 능히 陽을 길러주는 것이다.
〈象傳〉에 말하였다. “顚頤의 길함은 위에서 베풂이 광명한 것이다.”
疏
正義曰:‘거꾸로 길러주나 길함’의 뜻을 해석하였다. ‘上’은 六四를 이르니 아래로 初九를 길러줌은 이는 위에서 베푸는 것이다.
능히 위엄이 있으나 사납지 않아서 범이 탐탐히 보듯이 하고, 또 욕심을 적게 하고 구하는 것을 적게 해서 그 하고자 함을 쫓아내니, 능히 이 두 가지를 하면 이는 위에서 베푸는 바가 광명함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六二는 거꾸로 길러주면 흉함이 되는데 六四는 거꾸로 길러줌이 길함이 될 수 있는 것은, 六二는 자신이 下體에 처하고 또 아래로 길러주니 이 때문에 흉한 것이요,
六四는 자신이 上體에 처하고 또 初九에 응하여 陰으로서 陽에 응하고 또 능히 위엄이 있고 욕망이 적으니, 이 때문에 길한 것이다.
六五는 의리에 위배되니 貞에 거함이 길하나, 大川을 건너서는 안 된다.
注
陰으로서 陽의 자리에 거함은 길러줌의 의리에 위배되는 것이니, 행하면 무리를 잃기 때문에 마땅히 貞에 거해야 하는 것이다.
아래에 應이 없어 위와 친하므로 貞을 지켜 위를 따라서 頤의 길함을 얻은 것이다. 비록 貞에 거하는 길함을 얻었으나 頤에 처하여 겸손함을 어기므로 難을 건널 수 없는 것이다.
疏
正義曰:‘拂’은 어김이다. ‘經’은 義이다. 陰으로서 陽의 자리에 거하여 겸손한 마음이 있지 않아서 길러주는 의리에 어긋난다. 그러므로 “의리에 위배된다.[拂經]”고 말한 것이다.
[居貞 吉] 행하면(가면) 무리를 잃으니, 貞에 거함(머묾)이 길한 것이다.
[不可涉大川] 頤에 처하여 겸손함을 어겨서 환란을 아직 풀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大川을 건너서는 안 되니, 이 때문에 貞에 거함이 길한 것이다.
〈象傳〉에 말하였다. “貞에 거함이 길함은 순함으로써 위를 따르는 것이다.”
疏
正義曰:‘貞에 거함’의 뜻을 해석하였다. 六五가 上九에 가까워서 陰으로서 陽을 순종하여 위를 친근히 하고 따른다. 그러므로 ‘貞에 거함이 길함’을 얻는 것이다.
上九는 자기로 말미암아 길러지니 위엄이 있어야 길하니, 大川을 건넘이 이롭다.
注
陽으로서 위에 처하고 네 陰을 밟고 있으니, 陰은 홀로 주체가 되지 못하여 반드시 陽을 높인다. 그러므로 자기로 말미암아 기름을 얻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자기로 말미암아 길러진다.”라고 말한 것이다.
여러 陰의 주체가 되었으니 煩瀆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엄하여야 비로소 길하니, 家人卦의 ‘엄함을 뉘우침[悔厲]’의 뜻과 유사하다.
귀하나 지위가 없으니 이 때문에 엄한 것이요, 높으면서 백성을 소유하니 이 때문에 길한 것이다. 기르는 주체가 되어서 남이 어기지 못한다. 그러므로 大川을 건넘이 이로운 것이다.
疏
正義曰:[由頤] 陽으로서 위에 처하고 네 陰을 밟고 있으니, 陰은 홀로 주체가 되지 못하여 반드시 陽을 높이고 섬긴다. 여러 陰이 자기로 말미암아 기름을 얻지 않음이 없으므로 “자기로 말미암아 길러진다.”라고 한 것이다.
[厲吉] 여러 陰의 주체가 되어서 褻慢하고 煩瀆해서는 안 되고, 엄숙하여야 비로소 길하다. 그러므로 “엄숙하면 길하다.”라고 한 것이다.
[利涉大川] 기르는 주체가 되어서 하지 않는 바가 없다. 그러므로 大川을 건넘이 이로워 福慶이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象傳〉에 “크게 福慶이 있다.”라고 한 것이다.
〈象傳〉에 말하였다. “‘자기를 말미암아 길러지니 위엄이 있어야 길함’은 크게 福慶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