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列女傳補注(1)

열녀전보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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列女傳補注序(馬瑞辰)
劉向列女傳八卷 古有曹大家綦母邃虞貞節三家注러니 今皆不傳이요 世所傳明黃省曾列女傳本及明繪圖本 皆無注하고 傳寫溷淆하여 浸失其舊하니 此福山王婉佺安人補注所爲作也
往歲 瑞辰以年家子弟 問學於郝蘭皐先生한대 先生方爲爾雅疏라가 每寫數頁이면 輒以見示하니 往復討論 心獲良多 檮昧所及 過蒙採錄이라
旣乃出安人所著列女傳補注相示 受而讀之하니 其立論則原本禮經하고 其詁義則讀應爾雅하며 考譌正謬 必廣證乎群書하고 訂異參同 亦兼綜夫衆說이라
博而不蕪하고 精而不鑿하니 洵足傳子政之家法하고 紹惠姬之懿範已
顧鄙陋之見 有與補注相發明者하니 如魯漆室女傳 其家倩吾兄行追之라하니 補注 借也
今按琴操컨대 作請吾兄追之 請倩 形相似하니 倩卽請之譌耳
陳國辨女傳 引詩墓門有楳하니 有鴞萃止로다하니 補注云 楳當作棘이라하고 據楚辭繁鳥萃棘爲證이라
今案玉篇컨대 古文某作槑 槑棘 形相似하니 棘蓋譌作槑 因之毛詩作梅하고 又作楳耳
有爲補注所未及者하니 如有虞二妃傳 選于林木 路史引作遜于林木하고 棄母姜嫄傳 性明而仁 路史注引作性敷而仁이라하니 此異字也
陳寡孝婦傳頌 妣將嫁之 終不從母라하니 妣當爲比及三年之比 非考妣延年之妣 此誤字也
路史啓母后趫注云 趫 列女傳作嬌라하니 今啓母塗山傳 竝無后嬌之文하니 此逸文也
又有與補注之說 小有異同者하니 如契母簡狄傳 與其妹娣 浴于元邱之水라하니 補注分妹與娣爲二하고 據史記三人行浴爲證이라
今按呂覽音初篇云 有娀氏有二佚女라하고 鴻烈墜形云 有娀在不周之北하니 長女簡翟이요 少女建疵라하여 皆謂姉妹二人이라하니 則知史記三人 實二人之譌 而妹娣不得分爲二矣
又據路史注引列女傳姉妹浴于元邱之水컨대 則知今本與其妹娣 實字形之誤耳
啓母塗山傳 辛壬癸甲이라하니 補注謂旣生啓하고 方四日而遂去라하니 與書言娶四日而去不同이라
據傳旣生啓三字 在辛壬癸甲上也어늘 今按呂覽說文컨대 皆言江淮俗 以辛壬癸甲爲嫁娶之日이라하고 路史注引列女傳에도 亦云娶四日而往治水한대 啓旣生하여 呱呱 是矣
又傳頌 辛壬癸甲 禹往敷土 實承維配帝禹言之하니 則知列女傳 亦謂禹娶四日而去
古本 旣生啓三字 乃在辛壬癸甲禹去而治水之下어늘 今誤移于辛壬癸甲上耳
至傳引詩文義與毛不同하얀 補注悉訂爲魯詩하니 以劉向爲楚元王交元孫일새니라 元王嘗與申公同受詩于浮邱伯宜하여 世傳魯學也
其論肇于王伯厚한대 而朱彝尊經義考 范家相三家詩拾遺 悉本之하고 近臧氏庸 亦主其說이라
但考傳所引詩컨대 康王晏起하니 關雎 與漢書杜欽傳同하고 先君之思하여 以畜寡人 與坊記引詩鄭注爲定姜送婦同하니 一則師古以爲魯詩라하고 一則釋文以爲魯詩라하니 可顯證爲魯詩說耳
其以式微 爲黎莊夫人作이라하고 碩人으로 爲莊姜傅母作이라하고 大車 爲息夫人作 經傳無徵하니 不能確指爲魯詩之學이라
若以柏舟 爲衛宣夫人詩 與李黃集解注+① 毛詩李黃集解四十一卷. 係集李樗黃𢣤兩家之說, 不著編錄姓氏.引韓詩合이라 芣苢 爲傷夫有惡疾이라하고 汝墳으로 爲家貧親老하여 仕于亂世 與韓詩章句合이라
行露 爲夫不備禮하야 女不肯往이라하고 載馳 爲許穆夫人始欲與齊하여 以爲國援 與韓詩外傳合注+② 韓詩外傳, 高子問于孟子曰 “夫嫁娶, 非己所自親也, 衛女, 何以得編于詩也.” 衛女, 卽許穆夫人. 嫁娶非己所自親, 正以其自欲與齊爲疑也.이라
渭陽으로 爲秦太子瑩送晉文公 與後漢書注引韓詩合하고 行葦 爲公劉詩 與趙長君吳越春秋合이라 長君嘗從杜撫受韓詩하니 蓋亦韓詩說也
劉向所引韓詩實多하니 似不得謂其悉本魯詩也注+① 或謂韓魯詩多同, 晉唐以後, 韓存魯亡. 故所引多韓詩, 不知其實魯詩也. 但劉向本傳, 竝無傳授魯詩之說, 世傳魯詩, 特後人以前證後之詞, 不若據所引詩證之爲確. 王曼卿學士疑劉向嘗治韓詩, 與鄙說互有詳略. 凡玆數義 知無裨于鉅觀이나 聊取證于往訓하여 敢以質之蘭臯先生及安人하니 庶幾無負芻蕘之詢云爾
嘉慶十有七年三月望日 桐城馬瑞辰謹序하다


열녀전보주列女傳補注
유향劉向의 ≪열녀전列女傳≫ 8은 옛적에 조대고曹大家기모수綦母邃우정절虞貞節 삼가三家가 있었는데 지금 모두 전하지 않고, 세상에 전하는 나라 열녀전본列女傳本나라의 회도본繪圖本은 모두 가 없고 전사傳寫 과정에서 뒤섞여 점점 그 구본舊本의 모습을 잃었으니, 이것이 복산福山 왕완전王婉佺 안인安人이 ≪열녀전보주列女傳補注≫를 지은 까닭이다.
지난해에 내()가 자제子弟로써 학란고郝蘭皐 선생先生에게 배움을 청하였는데, 선생께서 막 ≪이아소爾雅疏≫를 저술하다가 몇 장을 쓸 때마다 나에게 보여주었다. 토론을 주고받으면서 마음에 얻은 것이 실로 많았고 우매한 내가 언급한 것을 과분하게 채록해주셨다.
이윽고 선생께서 안인安人이 지은 ≪열녀전보주≫를 꺼내어 보여주기에 받아서 읽어보니, 그 입론立論예경禮經에 근본을 두었고 그 훈의訓義에 부합하게 독해하였으며, 오류를 상고하고 바로잡음은 반드시 여러 서책에서 널리 증명하고 이동異同을 정정하고 참고함은 여러 을 종합하였다.
광대하면서도 거칠지 않고 정밀하면서도 천착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자정子政(유향)의 가법家法을 전할 만하고 혜희惠姬(반소班昭)의 아름다운 의범儀範을 이을 만하다.
돌아보건대, 비루한 나의 견해가 왕안인王安人보주補注와 서로 뜻을 드러내 밝힌 것이 있다. 예컨대 〈노칠실녀전魯漆室女傳〉에 “그 집에서 우리 오라버니에게 부탁하여 좇아가도록 하였다.[기가천오형행추지其家倩吾兄行追之]”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 보주補注에 “‘’은 빌린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지금 를 살펴보건대, ‘청오형추지請吾兄追之’로 되어 있다. ‘’과 ‘’은 자형字形이 서로 비슷하니, ‘’은 곧 ‘’의 오류이다.
진국변녀전陳國辨女傳〉에 ≪시경≫의 ‘묘문墓門에 매화나무가 있으니, 올빼미가 모여 앉았도다.[묘문유매墓門有楳 유효췌지有鴞萃止]’라는 것을 인용하였는데, 보주補注에 “‘’는 응당 이 되어야 한다.”라고 하고, 에 의거하여 증거를 삼았다.
지금 ≪옥편玉篇≫을 살펴보건대, 고문古文에는 ‘’가 ‘’로 되어 있다. ‘’와 ‘’은 자형이 서로 비슷하니, ‘’이 아마 잘못되어 ‘’로 된 듯하다. 이로 인해 ≪모시毛詩≫에 ‘’로도 되어 있고, 또 ‘’로도 되어 있을 뿐이다.
보주補注에 미처 언급하지 않은 것이 있다. 예컨대 〈유우이비전有虞二妃傳〉의 ‘임목林木에 들여보냈다.[선우림목選于林木]’는 구절은 의 이 구절을 인용한 곳에는 ‘손우림목遜于林木’으로 되어 있고, 〈기모강원전棄母姜嫄傳〉의 ‘성품이 총명聰明하고 인애仁愛하다.[성명이인性明而仁]’는 구절은 ≪노사≫ 의 이 구절을 인용한 곳에는 ‘성품이 관대하고 인자하였다.[성부이인性敷而仁]’로 되어 있으니, 이는 이자異字이다.
진과효부전陳寡孝婦傳〉의 에 “친정어머니가 장차 개가시키려 하였으나 끝내 어머니 말을 듣지 않았다오.[비장가지妣將嫁之 종부종모終不從母]”라고 하였는데, ‘’는 응당 ‘삼년에 이르렀다.[비급삼년比及三年]’고 할 때의 ‘’가 되어야지 ‘고비考妣가 수명을 늘린다.[고비연년考妣延年]’의 ‘’가 아니니, 이는 오자誤字이다.
≪노사≫의 의 어머니인 후교后趫에 대한 에 이르기를 “‘’는 ≪열녀전≫에 ‘’로 되어 있다.”라고 하였는데, 지금 〈계모도산전啓母塗山傳〉에 모두 ‘후교后嬌’라는 글자가 없으니, 이는 일문逸文이다.
보주補注과 조금 이동異同이 있는 것이 있다. 예컨대 〈설모간적전契母簡狄傳〉에 “간적簡狄이 여동생과 함께 원구元邱의 물에서 목욕하고 있었다.[여기매제與其妹娣 욕우원구지수浴于元邱之水]”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 보주補注를 둘로 나누고, ≪사기史記≫ 〈은본기殷本紀〉의 ‘세 사람이 목욕하러 갔다.[삼인행욕三人行浴]’는 구절에 의거하여 증명하였다.
지금 살펴보건대, 음초편音初篇〉에 이르기를 “유융씨有娀氏에게는 2명의 가 있었다.”라고 하였고, 추형편墜形篇〉에 이르기를 “유융有娀부주산不周山의 북쪽에 있는데, 장녀長女간적簡翟이고 소녀少女건자建疵이다.”라고 하여 모두 자매 두 사람이라고 하였으니, ≪사기≫ 〈은본기〉의 ‘3인’은 실로 ‘2인’의 오류이고 를 둘로 나눌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또 ≪노사路史에서 인용한 ≪열녀전≫의 ‘자매가 원구元邱의 물에서 목욕하였다.[자매욕우원구지수姉妹浴于元邱之水]’라는 구절에 의거해보건대, 금본今本의 ‘여기매제與其妹娣’는 실로 자형字形이 비슷해서 생긴 오자임을 알 수 있다.
계모도산전啓母塗山傳〉에 “신일辛日 임일壬日 계일癸日 갑일甲日을 지났다.[신임계갑辛壬癸甲]”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 보주補注는 “〈가〉 를 낳고 나서 겨우 4일 만에 마침내 가서 〈홍수洪水를 다스렸다.〉[기생계旣生啓 방사일이수거方四日而遂去]”라고 하였으니, ≪서경書經≫에서 ‘〈도산씨塗山氏에게〉 장가든 지 4일 만에 가서 〈홍수洪水를 다스렸다.〉[취사일이거娶四日而去]’라고 한 말과 같지 않다.
〈계모도산전〉에 의거하면 ‘기생계旣生啓’ 3자가 ‘신임계갑辛壬癸甲’의 위에 있는데, 지금 ≪여람呂覽≫과 를 살펴보건대, 모두 ‘강회江淮 지방의 풍속에 신일辛日임일壬日계일癸日갑일甲日을 시집가고 장가드는 날로 삼는다.’고 하였고, ≪노사≫ 에서 인용한 ≪열녀전≫에도 “장가든 지 4일 만에 가서 홍수洪水를 다스렸는데, 가 이미 태어나 응애응애 울었다.[취사일이거치수娶四日而去治水 계기생啓旣生 고고呱呱]”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또 〈계모도산전〉의 에 ‘신일辛日임일壬日계일癸日갑일甲日 4일을 지남에 가 가서 토지를 분별하였도다.[신임계갑辛壬癸甲 우왕부토禹往敷土]’라는 구절을 실로 ‘우임금의 배필이 되었다.[유배제우維配帝禹]’에 이어 말하였으니, ≪열녀전≫ 역시 “가 장가든 지 겨우 4일 만에 가서 〈홍수洪水를 다스렸다.〉[우취사일이거禹娶四日而去]”라고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고본古本에 ‘기생계旣生啓’ 3자가 곧 ‘신임계갑辛壬癸甲 우거이치수禹去而治水’의 아래에 있었는데, 지금 착오로 ‘신임계갑辛壬癸甲’의 위로 옮겨진 것일 뿐이다.
≪열녀전≫에 인용한 문의文義가 ≪모시毛詩≫와 같지 않은 경우에 보주補注에서는 모두 ≪노시魯詩≫의 이라고 정정訂正하였으니, 이는 유향劉向초원왕楚元王 유교劉交원손元孫이 되기 때문이다. 초원왕楚元王은 일찍이 과 함께 부구백浮邱伯 에게 를 배워 노학魯學을 대대로 전수하였다.
이러한 의론은 에게 시작되었는데, 의 ≪삼가시습유三家詩拾遺≫가 모두 여기에 근본하였고, 근래에 장용臧庸 또한 그 을 주장하였다.
다만 ≪열녀전≫에 인용한 를 상고하건대, ‘의 부인이 늦게 나오자 시인詩人 시를 지어 미리 일러주었다.[주지강왕부인안기周之康王夫人晏起 관저예견關雎豫見]’라고 한 것은 선군先君의 깊은 은덕을 생각하여, 나를 효성스럽게 봉양하였도다.[선군지사先君之思 이축과인以畜寡人]’라고 한 것은 ≪예기≫ 〈방기坊記〉에 인용된 이 시에 대한 정현鄭玄에 ‘정강이 며느리를 전송하였다.[정강송부定姜送婦]’라고 한 것과 같으니, 하나는 가 ≪노시≫라고 하였고 하나는 ≪경전석문經典釋文≫에 ≪노시≫라고 하였으니, ≪노시≫의 임을 뚜렷이 증명할 수 있다.
보주補注에서 〈식미式微〉를 장공莊公부인夫人이 지은 시라고 하고, 〈석인碩人〉을 장강莊姜부모傅母가 지은 시라고 하고, 〈대차大車〉를 식부인息夫人이 지은 시라고 한 것은 경전經傳에서 징험할 수 없으니, ≪노시魯詩≫의 학문이라고 분명하게 지적할 수 없다.
백주柏舟〉를 선공宣公 부인夫人의 시라고 한 경우는 의 ≪집해集解≫에注+의 ≪모시집해毛詩集解≫ 41이다. 황훈黃𢣤을 이어 모아놓고 편록編錄한 이의 성씨姓氏를 드러내지 않았다. 인용한 ≪한시韓詩≫와 합치한다. 〈부이芣苢〉를 남편에게 악질惡疾이 있는 것을 상심傷心한 시라고 하고, 〈여분汝墳〉을 집안이 가난하고 어버이가 연로하여 난세亂世에 벼슬한 것을 읊은 시라고 한 것은 ≪한시장구韓詩章句≫와 합치한다.
행로行露〉를 남자가 를 갖추지 않아 여자가 시집가려 하지 않은 것을 읊은 시라고 하고, 〈재치載馳〉를 허적 목공穆公부인夫人이 처음에 나라에 시집가서 나라의 원조援助를 삼고자 한 것을 읊은 시라고 한 것은 과 합치한다.注+② ≪한시외전韓詩外傳≫에 고자高子맹자孟子에게 묻기를 “시집가고 장가드는 일은 자기 스스로 결정하는 일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의공懿公의 딸은 어찌 ≪시경≫에 올라 있습니까.”라고 하였다. 의공懿公의 딸은 바로 허적 목공穆公의 부인이다. 시집가고 장가드는 일은 자기 스스로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스스로 나라에 시집가려 한 것을 의심한 것이다.
위양渭陽〉을 나라 태자太子 문공文公을 전송한 시라고 한 것은 ≪후한서後漢書에 인용한 ≪한시≫와 합치하고, 〈행위行葦〉를 공류公劉의 시라고 한 것은 의 ≪오월춘추吳越春秋≫와 합치한다. 장군長君이 일찍이 에게서 ≪한시≫를 배웠으니, 이 또한 ≪한시≫의 인 듯하다.
유향劉向이 인용한 ≪한시韓詩≫가 실로 많으니, 모두 ≪노시魯詩≫에 근본하였다고 이를 수는 없을 듯하다.注+① 혹자가 이르기를 “≪한시≫와 ≪노시≫가 대부분 같았는데 이후로 ≪한시≫는 보존되고 ≪노시≫는 망실되었다. 그러므로 인용한 바가 ≪한시≫가 많으나, 그것이 실제로 ≪노시≫임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한서漢書≫ 〈유향전劉向傳〉에 ≪노시≫를 전수받았다는 이 전혀 없고, 세상에 전하는 ≪노시≫는 다만 후인들이 전대의 일로써 후대의 일을 증거로 삼는 말 뿐이니, 인용한 시에 의거하여 증거로 삼는 것이 보다 확실하다. 왕만경王曼卿(왕인지王引之) 학사學士는 유향이 일찍이 ≪한시≫를 전공하였다고 의심하였으니, 나의 과 서로 자세하고 소략한 차이가 있다. 무릇 이 몇 가지 뜻이 전체 내용을 살펴보는 데 별로 보탬이 없는 줄은 알지만 애오라지 옛 훈고訓詁에서 증거를 수집하여 감히 난고蘭臯 선생先生안인安人에게 질정하니, 부디 변변찮은 나의 의견을 저버리지 않기를 바란다.
가경嘉慶 17년(1812) 3월 보름에 동성桐城 마서신馬瑞辰은 삼가 서문을 쓴다.


역주
역주1 黃省曾 : 1490~1540. 明나라의 학자로 자는 勉之, 호는 五岳山人이며 江蘇省 蘇州 사람이다. 王守仁과 종유하였고 李夢陽에게 詩를 배웠다. 저서에 ≪疑詩外傳≫, ≪客問≫, ≪騷苑≫, ≪五岳山人集≫ 등이 있다.
역주2 馬瑞辰 : 1782~1853. 淸나라 桐城 사람으로, 자는 元伯이다. 嘉慶 연간(1796~1820)에 진사에 급제하여 工部員外郎 등을 역임하였다. 경학에 博通하였는데 洪楊의 난리에 고향에 거처하면서 절의를 굽히지 않다가 죽었다. 저서에 ≪毛詩傳箋通釋≫이 있다.
역주3 年家 : 같은 해에 과거에 급제한 자가 兩家 사이에 서로 일컫던 명칭이다.
역주4 爾雅 : 十三經의 하나이다. 中國 古代의 字典으로, 각 부문에 관한 고금의 문자를 풀이한 책이다. 19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역주5 琴操 : 漢나라 때 蔡邕이 撰한 詩歌集으로, 2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역주6 楚辭에……것 : ≪楚辭≫ 〈天問〉에는 ‘어찌하여 물수리가 가시나무에 모였는가.[何繁鳥萃棘]’로 되어 있다.
역주7 路史 : 宋나라 羅泌이 撰한 책으로, 47권이다. 前紀 9권은 三皇과 陰康, 無懷氏에 대해 기록하였고, 後記 14권은 太昊에서 夏나라에 이르기까지의 일을 기술하였으며, 國名紀 8권은 上古時代에서 兩漢 末期까지 여러 나라의 姓氏와 地理에 대해 서술하였고, 發揮와 餘論 16권은 변론하고 고증한 글이다.
역주8 呂覽 : 秦나라의 정승인 呂不韋가 많은 賓客을 모아 撰한 ≪呂氏春秋≫의 다른 이름이다. 8覽, 6論, 12紀 총 26권으로 이루어져있다.
역주9 佚女 : 美女와 같은 뜻이다. ≪楚辭≫ 〈離騷〉에 “높다란 瑤臺를 바라봄이여, 有娀의 佚女를 보았도다. 내 鴆鳥로 하여금 중매를 서게 했으나, 鴆鳥는 나를 좋지 못하다고 고하였네.[望瑤臺之偃蹇兮 見有娀之佚女 吾令鴆爲媒兮 鴆告余以不好]”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역주10 淮南鴻烈 : 漢나라 때 淮南王 劉安의 저서명으로 처음에 ≪淮南鴻烈≫이었다가 후에 ≪淮南子≫로 확정되어 널리 알려졌다.
역주11 說文解字 : 後漢의 許愼이 지은 字解書이다. 六書에 대해 상세하게 풀이한 책으로 3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역주12 申公 : 前漢 초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四詩 가운데 하나인 ≪魯詩≫의 저자 申培를 말한다. ≪詩經≫과 ≪春秋穀梁傳≫에 정통하여 漢 文帝 때 박사가 되었으며 漢 武帝 때 太中大夫에 제수되었다. ≪魯故≫ 등의 저서가 있었으나 모두 전하지 않고 ≪漢魏叢書≫에 ≪詩說≫이 전한다. 참고로 四詩란 ≪詩經≫을 풀이한 네 가지 해설서로, 魯나라 申培의 ≪魯詩≫, 齊나라 轅古生의 ≪齊詩≫, 燕나라 韓嬰의 ≪韓詩≫, 魯나라 毛亨의 ≪毛詩≫를 말한다. ≪魯詩≫와 ≪齊詩≫와 ≪韓詩≫는 모두 망실되고, 지금은 ≪韓詩≫ 가운데 ≪外傳≫만 남아 있다. ≪毛詩≫가 바로 지금의 ≪詩經≫이다.
역주13 王伯厚 : 伯厚는 王應麟(1223~1296)의 자이다. 호는 深寧居士, 또 다른 호는 厚齋이다. 宋 理宗 때 博學宏詞科에 급제하여 禮部尙書 兼給事中에까지 올랐다. 저서에 ≪困學記聞≫, ≪玉海≫, ≪三字經≫, ≪漢藝文志考證≫ 등이 있다.
역주14 朱彝尊의 ≪經義考≫ : 주이존은 淸나라 秀水 사람으로, 자는 錫鬯, 호는 竹坨, 또 다른 호는 醧舫, 만년의 호는 小長蘆釣魚師이다. 康熙 18년(1679)에 博學鴻詞科에 선발되고 翰林院檢討에 제수되어 ≪明史≫ 편찬에 참여하였다. 古學에 정통하여 金石考證 및 古文詩詞에 밝았다. 新城 王士禛과 더불어 南北二大家로 일컬어졌고, 또 慈谿 姜宸英, 無錫 嚴繩孫과 더불어 江南三布衣로 일컬어졌다. ≪經義考≫는 歷代의 經書에 관한 여러 學說과 그 沿革․存亡을 기술한 책으로, 30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밖의 저서에 ≪曝書亭集≫, ≪詞宗≫, ≪明詩宗≫, ≪日下舊聞≫ 등이 있다.
역주15 范家相 : 淸나라 會稽 사람으로, 자는 左南, 호는 蘅州이다. 乾隆 연간(1736~1795)의 進士로 柳州知府 벼슬을 지냈다. 저서에 ≪環淥軒詩草≫, ≪三家詩拾遺≫, ≪詩瀋≫이 있다.
역주16 周 康王 : 周나라의 제3대 왕으로, 성은 姬이고 이름은 釗이다. 成王의 아들로, 鬼方 및 동남쪽의 여러 부족을 정벌하면서 영토를 개척하였다. 아버지 成王과 함께 文王과 武王의 치적을 계승하여 국가를 안정기에 들도록 하였으므로, 이 시기를 ‘成康之治’라 부르기도 한다.
역주17 關雎 : 周 文王과 后妃의 盛德을 노래한 시로, ≪詩經≫ 〈周南〉의 首篇이다.
역주18 漢書……같고 : ≪漢書≫ 권60 〈杜欽傳〉에 “禍敗가 어찌 늘 女德에서 말미암지 않았겠는가. 이 때문에 패옥소리가 늦게 울리자 〈關雎〉로 탄식한 것이다.[禍敗曷常不由女徳 是以佩玉晏鳴 關雎歎之]”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한 李奇의 注에 “后夫人은 닭이 울면 패옥을 차고 임금의 처소에서 떠나는 법인데, 周 康王의 后妃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詩人이 탄식하며 이를 상심한 것이다.[后夫人鷄鳴珮玉去君所 周康王后不然 故詩人歎而傷之]”라고 하였다.
역주19 師古 : 唐나라의 經學者 顔籒(581~645)의 자이다. ≪顔氏家訓≫의 저자 顔之推의 손자로, 訓詁學에 밝고 문장에 능하며 학식이 해박하였다. 唐 太宗의 명에 의해 祕書省에서 五經의 문자를 고증하여 ≪五經定本≫을 완성하였으며, 中書侍郞을 역임하였다.
역주20 (惟)[周之] : 저본에는 ‘惟’로 되어 있으나, 본서 권3 〈仁智傳 魏曲沃負〉에 의거하여 ‘周之’로 바로잡았다.
역주21 [夫人] : 저본에는 ‘夫人’이 없으나, 본서 권3 〈仁智傳 魏曲沃負〉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역주22 (起興)[豫見] : 저본에는 ‘起興’으로 되어 있으나, ≪列女傳校注≫와 ≪列女傳集注≫에 의거하여 ‘豫見’으로 바로잡았다.
역주23 李樗 : 宋나라의 학자로 자는 迂仲, 자호는 迂齋이다. 呂本中에게 배웠다. ≪毛詩≫를 注解할 때에 諸說을 널리 인용하고 자신의 생각으로 단정하였다.
역주24 韓詩外傳 : 漢나라의 韓嬰이 지은 詩書로, 古事와 古語를 들어 詩句를 論證하되, 經義에 附會하지 않고 대부분 諸子의 說을 인용하였다. 1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역주25 趙長君 : 長君은 後漢의 학자 趙曄의 자이다. 杜撫에게 ≪韓詩≫를 배웠는데, 관아에서 불러 從事에 임명했지만 나아가지 않고 오직 학문에 몰두하였다. 吳․越 양국의 역사를 기본 골격으로 하고 여기에 문학적인 묘사와 상상력을 동원해서 편년체 서술 방식으로 ≪吳越春秋≫를 지었다. 그 밖의 저서에 ≪細詩≫, ≪歷神淵≫이 있다.
역주26 杜撫 : 後漢 武陽 사람으로, 자는 叔和이다. 薛漢에게 수업하여 ≪韓詩章句≫를 정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제자 천여 명을 가르쳤다. ≪詩題約義≫를 지었는데, 학자들이 ‘杜君法’이라 일컬었다.

열녀전보주(1) 책은 2024.01.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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