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列女傳補注(2)

열녀전보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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列女傳目錄序
劉向所敍列女傳 凡八篇이니 事具漢書向列傳이어늘 而隋書及崇文總目 皆稱向列女傳十五篇이요 曹大家注라하니
以頌義考之컨대 蓋大家所注 離其七篇爲十四하여 與頌義 凡十五篇이요 而益以陳嬰母及東漢以來凡十六事하니 非向書本然也
蓋向舊書之亡 久矣러니 嘉祐中 集賢校理蘇頌 始以頌義篇次하여 復定其書爲八篇하고 與十五篇 竝藏於館閣이어늘 而隋書以頌義爲劉歆作하니 與向列傳不合이라
今驗頌義之文컨대 蓋向之自敍 又藝文志 有向列女傳頌圖하니 明非歆作也 自唐之亂으로 古書之在者少矣러니 而唐志錄列女傳凡十六家 至大家注十五篇者하얀 亦無錄이라
然其書今在하니 則古或有錄而亡어나 或無錄而在者 亦衆矣 非可惜哉 今校讎其八篇及十五篇者하여 已定하니 可繕寫
漢承秦之敝하여 風俗已大壞矣 而成帝後宮趙衛之屬 尤自放이라 向以謂王政必自內始 故列古女善惡所以致興亡者하여 以戒天子하니 此向述作之大意也
其言太任之娠文王也 目不視惡色하며 耳不聽淫聲하며 口不出敖言이라하고 又以謂古之人胎敎者 皆如此라하니
夫能正其視聽言動者 此大人之事 而有道之所畏也어늘之女子能之하니 何其盛也
以臣所聞으로 蓋爲之師傅保姆之助 詩書圖史之戒 珩璜琚瑀之節 威儀動作之度하니 其敎之者 有此具라도 然古之君子 未嘗不以身化也
故家人之義 歸於反身하고 二南之業 本於文王하니 豈自外至哉리오
世皆知文王之所以興 能得內助하고 而不知其所以然者하니 蓋本於文王之躬化
故內則后妃有關雎之行하고 外則群臣有二南之美하여 與之相成하니
其推而及遠하여 則商辛之昏俗 江漢之小國 兔罝之野人 莫不好善而不自知하니 此所謂身修 故家國天下治者也
後世自學問之士 多徇於外物하여 而不安其守하니 其室家旣不見可法이라
故競於邪侈하니 豈獨無相成之道哉 士之苟於自恕하여 顧利冒恥하여 而不知反己者 往往以家自累故也일새니라
故曰 身不行道 不行於妻子라하니 信哉로다 如此人者 非素處顯也로되 然去二南之風 亦已遠矣어든 況於南鄕天下之主哉
向之所述 勸戒之意 可謂篤矣 然向號博極群書어늘 而此傳稱詩芣苢柏舟大車之類 與今序詩者之說 尤乖異하니 蓋不可考 至於式微之一篇하얀 又以謂二人之作이라하니 豈其所取者博이라 故不能無失歟
其言象計謀殺舜 及舜所以可脫者 頗合於孟子 然此傳或有之어늘 而孟子所不道者 蓋亦不足道也
凡後世諸儒之言經傳者 固多如此하니 覽者采其有補而擇其是非 可也 故爲之敍論하여 以發其端云하노라
編校館閣書籍臣曾鞏이라


열녀전列女傳≫ 목록 서문
유향劉向이 지은 ≪열녀전列女傳≫은 모두 8편이니, 이 사실이 ≪한서漢書≫ 〈유향열전劉向列傳〉에 갖추어져 있는데, ≪수서隋書≫ 〈경적지經籍志〉와 ≪숭문총목崇文總目≫에는 모두 “유향의 ≪열녀전≫은 15편이고, 조대고曹大家(반소班昭)가 를 달았다.”라고 하였다.
송의頌義〉를 가지고 상고해보건대, 조대고가 주를 단 것은 7편을 분리해 14편으로 만든 것에 〈송의〉까지 합쳐 모두 15편이고 〈진영陳嬰의 어머니〉 등 후한後漢 이래 16건의 일을 덧붙였으니, 유향이 지은 책 본연의 모습이 아니다.
유향의 옛 책이 없어진 지가 오래되었는데, 연간(1056~1063)에 집현교리集賢校理 이 처음으로 〈송의〉를 편차篇次하여 다시 이 책을 8편으로 정하고 15편으로 된 것과 함께 관각館閣에 보관하였다. 그런데 ≪수서≫에서는 〈송의〉를 유흠劉歆의 저작으로 여겼으니, 〈유향열전〉의 내용과 부합하지 않는다.
지금 〈송의〉의 글로 살펴보건대, 유향 자신이 직접 쓴 것이고 또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유향의 〈열녀전송도列女傳頌圖〉가 있으니, 유흠의 저작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나라가 혼란해진 이후로 남아 있는 고서古書가 적었는데, ≪당서唐書≫ 〈경적지〉에 ≪열녀전≫이라는 이름으로 모두 16인의 저술이 기록되어 있고, 조대고가 주를 단 15편본에 대해서는 또한 기록이 없다.
그러나 그 책이 지금 있으니, 고서 중에 혹 기록은 있고 책은 없거나 혹 기록은 없고 책은 있는 것이 또한 많다. 애석히 여길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지금 그 8편본과 15편본을 교정하여 이미 정본을 확정하였으니, 선사繕寫할 만하다.
처음에 나라가 나라의 폐습을 이어받아 풍속이 이미 크게 무너졌고, 성제成帝의 후궁 등은 더욱 방종하였다. 유향劉向왕정王政은 반드시 안으로부터 시작한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흥성과 멸망을 초래하였던 옛 여인들의 을 열거하여 천자를 경계하였으니, 이것이 유향이 이 책을 저술하게 된 대의大意이다.
그는 “태임太任문왕文王을 임신하였을 때 눈으로는 나쁜 색깔을 보지 않았으며, 귀로는 음란한 소리를 듣지 않았으며, 입으로는 오만한 말을 내지 않았다.”고 하고, 또 “옛사람의 태교가 모두 이와 같았다.”고 하였다.
대체로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이처럼 바르게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대인大人의 일로써 도덕이 있는 이조차 제대로 하지 못할까 두려워하는 바인데, 도리어 천하의 여인들로 하여금 이것을 실천하도록 요구하였으니, 얼마나 대단한가.
내가 들은 바로는, 〈옛사람은 여자에게〉 이를 위해 사부師傅보모保姆를 선택하여 돕게 하기도 하고, ≪시경詩經≫․≪상서尙書≫와 도화圖畫사적史籍의 내용으로 경계하기도 하며, 등의 패옥佩玉을 차서 걸음을 절도에 맞게 하도록 하고, 남을 대하는 예절을 법도에 맞게 하도록 하였으니, 그 가르치는 방도가 비록 이처럼 갖추어졌더라도 옛날의 군자는 모두 자신의 덕행으로 여인들을 감화시키지 않은 적이 없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문왕이 흥하게 된 까닭이 〈훌륭한〉 내조內助를 얻었기 때문임은 알고 〈훌륭한〉 내조를 얻게 된 까닭은 알지 못하니, 이는 문왕이 덕행을 몸소 행하여 남을 감화시킨 데에 근본이 있는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안으로는 후비后妃의 노래와 같은 품행이 있었고, 밖으로는 뭇 신하가 이남二南에서 칭송한 것과 같은 아름다운 덕이 있게 되어 안팎에서 서로 도와 이루어주었다.
이러한 감화가 확대되어 먼 지역까지 이르자 모두 을 좋아하면서도 왜 그렇게 됐는지 스스로 알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대학大學≫에서 이른바 “몸이 닦여졌기 때문에 집안과 국가와 천하가 다스려진다.”는 것이다.
후세에는 학문하는 선비로부터 대부분 외물外物을 추구하여 자신이 지켜야 할 도리를 편안히 여기지 않으니, 그 집안사람들이 이미 본받을 만한 점을 보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앞다투어 사악하고 방종한 짓을 행하니, 어찌 서로 도와 이루어주는 만 없을 뿐이겠는가. 선비가 구차하게 자신을 용서하여 염치를 무릅쓰고 이익을 추구하면서 자신을 돌아볼 줄 모르는 것은 왕왕 집안에 스스로 얽매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맹자孟子라고 하였으니, 참으로 그러하도다. 이러한 사람은 본래 드러나는 높은 지위에 있는 자가 아닌데도 이남二南의 교화와 또한 너무 동떨어졌는데, 더구나 남면南面한 천하의 군주에 있어서야 말할 나위 있겠는가.
유향劉向이 저술한 ≪열녀전列女傳≫은 천자를 권면하고 경계한 뜻이 독실하다 이를 만하다. 그러나 유향은 많은 서적을 섭렵했다고 알려졌는데, 이 어쩌면 자료를 취합한 범위가 넓었기 때문에 실수가 없을 수 없었던 것은 아닌가.
후대에 경전에 대해 말하는 유자儒者들에게 진실로 이러한 경우가 많으니, 보는 자들이 경전에 도움이 되는 내용을 취하고 그 시비를 가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서론敍論을 써서 그 단서를 열어 둔다.
편교관각서적編校館閣書籍 증공曾鞏은 서문을 쓰다.


역주
역주1 嘉祐 : 宋 仁宗의 연호이다.
역주2 蘇頌 : 송나라 사람으로, 자는 子容이다. 集賢校理, 右僕射, 太子少傅 등의 벼슬을 지냈다. 저서에 ≪新儀象法要≫가 있다.
역주3 [者] : 저본에는 ‘者’가 없으나, ≪唐宋八大家文抄 南豐文抄≫ 권4 〈列女傳目錄序〉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역주4 [書之] : 저본에는 ‘書之’가 없으나, ≪唐宋八大家文抄 南豐文抄≫ 권4 〈列女傳目錄序〉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역주5 趙飛燕과 衛婕妤 : 본서 권8 〈班女婕妤〉와 〈漢趙飛燕〉 참조.
역주6 (今)[令] : 저본에는 ‘今’으로 되어 있으나, ≪唐宋八大家文抄 南豐文抄≫ 권4 〈列女傳目錄序〉에 의거하여 ‘令’으로 바로잡았다.
역주7 (子)[下] : 저본에는 ‘子’로 되어 있으나, ≪唐宋八大家文抄 南豐文抄≫ 권4 〈列女傳目錄序〉에 의거하여 ‘下’로 바로잡았다.
역주8 珩․璜․琚․瑀 : 모두 몸에 차고 다니는 玉이다. ≪詩經≫ 〈女曰雞鳴〉 3장에 “그대가 오게 한 분임을 알면 잡패를 선물할 것이며, 그대가 사랑하는 분임을 알면 잡패를 줄 것이며, 그대가 좋아하는 분임을 알면 잡패로써 보답하리라.[知子之來之 雜佩以贈之 知子之順之 雜佩以問之 知子之好之 雜佩以報之]”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한 朱熹의 注에 “잡패라는 것은 좌우에 차는 옥이다. 위에 가로댄 것을 ‘珩’이라 하고, 아래에 세 개의 끈을 매달고 진주조개를 꿰며 가운데 끈의 중간에 큰 구슬 하나를 꿴 것을 ‘瑀’라 하고, 끝에 하나의 옥을 매다는데 양 끝이 다 뾰족한 것을 ‘衝牙’라 하고, 양 곁의 끈 중간에 각각 옥 하나씩 매다는데 길고 넓고 네모난 것을 ‘琚’라 하고, 그 끝에 각각 옥 하나를 매다는데 璧을 반쪽 낸 것처럼 하여 안으로 향한 것을 ‘璜’이라 한다. 또 두 개의 끈으로 구슬을 꿰어 위로 珩의 양쪽 끝에 매어놓고 아래로 瑀에 교차하여서 아래로 두 璜에 매다니, 걸어가면 충아가 璜과 부딪혀서 소리가 난다.”라고 하였다.
역주9 周易……귀결하고 : ≪周易≫ 家人卦 上九 爻辭에 “上九는 믿음을 지니고 위엄으로 대하면 마침내 길하리라.[上九 有孚威如 終吉]”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한 〈象傳〉에 “위엄으로 대하면 길하다는 것은 자신을 돌이켜보는 것을 말한다.[威如之吉 反身之謂也]” 하였다.
역주10 시경……두었으니 : 二南은 ≪詩經≫ 〈國風〉의 〈周南〉과 〈召南〉을 가리키는 것으로, 周公과 召公이 통치하는 지역의 노래이다. 業은 업적 또는 성과의 뜻으로, 이 두 지역이 잘 다스려지는 성과가 있게 된 것은 앞서 文王의 교화와 后妃의 덕이 그 기반이 되었다는 것이다.
역주11 關雎 : ≪詩經≫ 〈周南〉의 첫 편명으로, 文王 后妃의 덕을 노래한 작품이다.
역주12 商나라……풍속 : 帝辛은 商나라 마지막 군주인 紂王의 이름이다. 주왕이 통치하던 시기의 음탕한 풍속이 周 文王의 교화에 감화되어 변하였는데, ≪詩經≫ 〈召南〉의 〈行露〉와 〈野有死麕〉 등은 이를 노래한 것이라 한다.
역주13 長江과……사람들 : ≪詩經≫ 〈周南 漢廣〉에 대한 〈毛詩序〉에 “文王의 도가 남쪽 나라에까지 파급되어 아름다운 교화가 長江과 漢水 사이에 행해졌다.”라고 하였다.
역주14 그물을……사람까지 : ≪詩經≫ 〈周南 兔罝〉에 대한 〈毛詩序〉에 “〈兔罝〉는 后妃의 덕을 노래한 것이다. 〈關雎〉의 교화가 행해지자 덕을 좋아하지 않는 이가 없어 현인이 많아졌다.”라고 하였다. 이는 后妃의 덕이 백성을 감화시켜 토끼를 잡는 산야의 사람까지도 겸손하고 덕을 좋아하였다는 뜻이다.
역주15 [雖] : 저본에는 ‘雖’가 없으나, ≪唐宋八大家文抄 南豐文抄≫ 권4 〈列女傳目錄序〉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역주16 [夫] : 저본에는 ‘夫’가 없으나, ≪唐宋八大家文抄 南豐文抄≫ 권4 〈列女傳目錄序〉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역주17 자신이……않는다 : ≪孟子≫ 〈盡心 下〉에 보인다.
역주18 열녀전에서……하였으니 : ≪詩經≫의 序는 前漢의 經學家 毛亨이 썼다고 하는 〈毛詩序〉로, 각 시의 창작배경과 그 의미를 해설한 글인데, ≪시경≫의 일부 작품에 대한 설명이 〈모시서〉와 ≪열녀전≫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芣苢〉에 대해 〈모시서〉에는 “〈부이〉는 后妃의 아름다운 덕을 찬양한 노래이다. 천하가 평화로우면 부인이 자식을 두는 것을 즐거워한다.” 하였는데, ≪열녀전≫ 〈貞順傳 蔡人之妻〉에는 “宋나라 사람의 딸이 蔡나라로 시집을 갔는데 남편에게 악질이 있었다. 그의 친정 어머니가 개가할 것을 권하였으나 그 말을 따르지 않고 〈부이〉를 지었다.” 하였고, 〈柏舟〉에 대해 〈모시서〉에는 “〈백주〉는 어진 덕을 지녔으나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을 한탄한 노래이다. 衛 頃公 때 어진 사람은 때를 만나지 못하고 소인이 군주의 곁에 있었다.” 하였는데, ≪열녀전≫ 〈貞順傳 衛寡夫人〉에는 “衛 宣公의 夫人은 본디 齊侯의 딸인데 衛나라로 시집가 도성 문 앞에 당도하자마자 신랑인 衛나라 임금이 죽어버렸다. 그의 保姆가 齊나라로 도로 돌아가자고 하였으나 듣지 않고 성 안으로 들어가 삼년상을 지켰다. 새 임금이 즉위하여 그를 아내로 삼고자 하고 형제들도 개가할 것을 권하였으나 끝내 받아들이지 않고 〈백주〉를 지었다.” 하였다. 〈大車〉에 대해 〈모시서〉에는 “〈대거〉는 周나라 대부를 풍자한 시이다. 예의가 해이해져 남녀들이 간통하였기 때문에 옛날의 좋은 풍속을 개진하여 지금의 대부가 남녀에 관한 일을 잘 처리하지 못한 것을 풍자하였다.” 하였는데, ≪열녀전≫ 〈貞順傳 息君夫人〉에는 “楚나라가 息나라를 정벌하여 息君과 그의 夫人을 사로잡았다. 楚王이 息君에게 문지기 노릇을 하게 하고 장차 息君의 夫人을 아내로 삼으려 하자, 夫人은 초왕이 궁궐을 나간 틈에 息君을 만나보고 〈대거〉를 지은 뒤에 자살하였다.”고 하였다. 〈式微〉에 대해 〈모시서〉에는 “〈식미〉는 黎侯가 衛나라에 머물러 있자 그의 신하가 돌아갈 것을 권한 노래이다.” 하였는데, ≪열녀전≫ 〈貞順傳 黎莊夫人〉에는 “이 시는 黎 莊公의 夫人이 그의 傅姆와 공동으로 창작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차이가 나타나는 것에 대해 王照圓은 ≪열녀전≫이 ≪魯詩≫에 근거하였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역주19 象이……것이다 : 象은 舜의 이복 아우이다. ≪열녀전≫ 〈母儀傳 有虞二妃〉에 의하면, 舜의 아버지가 象과 함께 舜을 죽일 생각으로 세 번 계책을 꾸몄다. 첫 번째는 舜에게 창고를 수리하라고 명하여 舜이 지붕 위로 올라가자 사다리를 치우고 불을 질렀고, 두 번째는 舜에게 우물을 파게 한 뒤에 위에서 우물 입구를 막아버렸는데, 舜이 두 번 모두 대책을 세워 빠져나왔다. 세 번째는 舜에게 술을 마시게 하여 그가 취했을 때 죽이려고 하였는데, 舜의 두 아내인 娥皇과 女英이 하루 종일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는 약을 주어 화를 면하였다고 하였다. 앞의 두 가지 일은 ≪孟子≫ 〈萬章 上〉에도 기재되어 있다.

열녀전보주(2) 책은 2024.01.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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