孝義保者
는 魯孝公稱之保母
요 臧氏之寡也
라 初
에 孝公父武公
이 與
長子括
과 中子戲
로 朝周宣王
이러니 宣王
이 立戲爲魯太子
하다 武公薨
에 戲立
하니 是爲懿公
이라
孝公
號公子稱
하고 最少
注+① 孝公名稱, 武公少子也.라 義保與其子
로 俱入宮
하여 養公子稱
注+② 公羊傳云 “養公者, 必以其子入養.” 注云 “不離人母子, 因以娛公也.”이러니 括之子伯御
가 與魯人作亂
하여 攻殺懿公而自立
하고 求公子稱於宮
하여 將殺之
하다 義保聞伯御將殺稱
하고 乃衣其子以稱之衣
하여 臥於稱之
하니 伯御殺之
하다
義保遂抱稱以出이라가 過稱舅魯大夫於外한대 舅問 稱死乎아 義保曰 不死라 在此니이다 舅曰 何以得免가 義保曰 以吾子代之로이다 義保遂以逃하다
十一年
注+① 言伯御立十一年也.에 魯大夫皆知稱之在保
라 於是
에 請周天子
注+② 周天子者, 宣王也. 伐魯立孝公, 事見國語.하여 殺伯御立稱
하니 是爲孝公
이라
魯人高
之
라 論語曰 可以託六尺之孤
라하니 其義保之謂也
라
노魯 효공孝公의 의로운
보모保母는 노 효공
칭稱의
보모保母이자
장씨臧氏의
과부寡婦이다. 처음에, 효공의 아버지
이 그 두 아들 첫째
괄括과 둘째
희戲를 데리고
주周 에게
조회朝會를 갔었는데, 선왕이 희를 세워 노나라
태자太子로 삼았다. 무공이 죽자 희가 즉위하니, 이가 바로
의공懿公이다.
효공孝公은 이 당시
공자公子 칭稱이라 불렸고 나이가 가장 어렸다.
注+① 효공孝公의 이름이 ‘칭稱’이니, 무공武公의 가장 어린 아들이다. 그리하여
의보義保가 자기 아들과 함께 궁으로 들어가 공자 칭을 기르고 있었는데,
注+②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 소공昭公 31년 조에 이르기를 “공公을 기른 것은 틀림없이 자기 아들로 들여 기른 것일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이에 대한 하휴何休의 주注에 “남의 모자母子를 갈라놓지 않음으로써 공을 즐겁게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괄括의 아들
백어伯御가
노魯나라 사람들과 더불어 난을 일으켜 〈숙부인〉
의공懿公을 공격하여 죽이고 스스로 즉위한 뒤, 공자 칭을 궁에서 찾아 장차 죽이려고 하였다. 의보가 백어가 장차 칭을 죽이려 한다는 소리를 듣고는 자기 아들에게 칭의 옷을 입혀 칭의 처소에 눕혀두니, 백어가 그를 죽였다.
의보가 마침내 칭을 안고 나가다가 밖에서 칭의 외삼촌인 노魯나라 대부大夫에게 들렀다. 외삼촌이 묻기를 “칭이 죽었느냐?” 하니, 의보가 “죽지 않았습니다. 여기 있습니다.” 하였다. 외삼촌이 “어떻게 면할 수 있었느냐?” 하니, 의보가 “제 아들과 바꾸었습니다.” 하였다. 의보는 마침내 도망갔다.
11년이 지나자,
注+① 백어伯御가 즉위한 지 11년이라는 말이다. 노나라 대부들이 모두
칭稱이 살아서
보모保母에게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에
주周 천자天子에게 청하여
注+② 주천자周天子는 선왕宣王이다. 백어伯御를 죽이고 칭을 세우니, 이가 바로
효공孝公이다.
노나라 사람들이
의보義保의 의로운 행실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므로 그를 ‘
의보義保’라 하였다. ≪
논어論語≫에 말하기를
라고 하였으니, 의보를 두고 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