伯嬴者
는 秦穆公之女
注+① 吳入郢之歲, 當秦哀公之世, 上去秦穆公之時遠矣. 不知何字之誤.注+② 【校注】 穆字誤. 伯莒之戰, 在魯定公四年, 穆公卒於文公六年, 相去一百十六年矣. 史通云 “校以年代, 殊爲乖剌.” 是唐時本已誤.요 楚平王之夫人
이며 昭王之母也
라 當昭王時
하여 楚與吳爲伯莒之戰
注+③ 伯莒, 左傳作柏舉, 古字通耳.이러니 吳勝楚
하여 遂入至郢
하다
昭王亡이어늘 吳王闔閭盡妻其後宮하고 次至伯嬴하니 伯嬴持刃曰 妾聞호니 天子者는 天下之表也요 公侯者는 一國之儀也니 天子失制면 則天下亂하고 諸侯失節이면 則其國危라하니이다
夫婦之道
는 固人倫之始
요 王敎之端
이라 以
로 明王之制
에 使男女不親授
하며 坐不同席
하고 食不共器
하며 殊椸枷
하고 異巾櫛
注+① 本曲禮文.하니 所以施
之也
注+② 施讀爲移, 施易也, 所以變易其邪心.니이다
若諸侯外淫者絶
하고 卿大夫外淫者放
하고 士庶人外淫者宮割
하나니 夫然者
는 以爲仁失可復以義
요 義失可復以禮
어니와 男女之
이면 亂亡興焉
일새니이다
夫造亂亡之端
은 公侯之所絶
이요 天子之所誅也
어늘 今君王棄儀表之行
하고 縱亂亡之欲
하여 犯
絶之
하니 何以行令訓民
이리잇고
且妾聞
호니 生而辱
이 不若死而榮
이라하니이다 若使君王棄其儀表
면 則無以臨國
이요 妾有淫端
이면 則無以生世
니이다 而兩辱
이어니 妾以死守之
요 不敢承命
이니이다
且凡所欲妾者는 爲樂也어늘 近妾而死면 何樂之有며 如先殺妾이면 又何益於君王이리잇고
於是에 吳王慙하여 遂退舍어늘 伯嬴與其保阿로 閉永巷之門하고 皆不釋兵이러라 三旬에 秦救至하여 昭王乃復矣라
君子謂 伯嬴勇而
壹
注+① 勇謂持刃誓以必死也. 精疑當作靜, 言其貞靜專壹也.이라하니라 詩曰 莫莫葛纍
注+② 纍與藟同. 毛詩作藟, 釋文藟又作虆. 虆省, 因又作纍耳.여 施于條枚
로다 豈弟君子
여 求福不回
로다하니 此之謂也
라
백영伯嬴은
진秦 목공穆公의 딸이자
초楚 평왕平王의 부인이며
注+① 오吳나라가 영郢에 들어온 해는 진秦 애공哀公(?~B.C. 534) 시대에 해당하니, 위로 진秦 목공穆公(B.C. 682~B.C. 621) 시대와의 거리가 멀다. 어떤 글자가 오자誤字인지 모르겠다.注+② 【교주校注】 ‘목穆’자는 오자誤字이다. 백거伯莒의 전쟁은 노魯 정공定公 4년(B.C. 506)에 있었고, 목공穆公은 노魯 문공文公 6년(B.C. 621)에 죽었으니, 서로간의 차이가 116년이나 된다. ≪사통史通≫에 이르기를 라고 하였으니, 이는 당唐나라 때 판본도 이미 잘못되었던 것이다. 의 어머니이다.
소왕昭王 때를 당하여
초楚나라와
오吳나라가
백거伯莒에서 전쟁을 벌였는데,
注+③ ‘백거伯莒’는 고자古字에 통용하였다.
소왕昭王이 달아나자
오왕吳王 가 그
후궁後宮을 모두 겁탈하고 차례가
백영伯嬴에게 이르렀는데, 백영이 칼을 잡고 말하기를 “제가 들으니,
천자天子는 천하의 표본이고
제후諸侯는 한 나라의 모범이니, 천자가
법제法制를 잃으면 천하가 어지럽고 제후가
절도節度를 잃으면 그 나라가 위태롭다 하였습니다.
부부夫婦의
도道는 진실로
인륜人倫의 시작이며
왕교王敎의 단서입니다. 이 때문에 밝은 임금의 제도에서는 남자와 여자로 하여금 직접 물건을 건네주게 하지 않으며, 앉을 때는 한 자리에 앉지 않고 먹을 때는 한 그릇에 먹지 않으며, 옷걸이와 시렁을 따로 사용하고 수건과 빗을 따로 사용하게 하였으니,
注+① 이는 그 부정한 마음을 바꾸기 위해서입니다.
注+② ‘시施’는 독음讀音이 이移[yì]로, 바꾼다는 뜻이니, 그 부정不正한 마음을 바꾸는 것이다.
제후諸侯가 혼외婚外의 음행淫行을 저지를 경우에는 멸절滅絶을 당하고, 경대부卿大夫가 혼외의 음행을 저지를 경우에는 방축放逐을 당하며, 사서인士庶人이 혼외의 음행을 저지를 경우에는 궁형宮刑을 당하였습니다. 그렇게 한 까닭은 인仁은 잃어도 의義로써 회복할 수가 있고 의義는 잃어도 예禮로써 회복할 수가 있지만, 남녀 간에 도의道義를 상실하면 혼란과 멸망이 일어난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혼란과 멸망의 단서를 만드는 자는 공후公侯에게 멸절을 당하고 천자天子에게 주벌을 당하는데, 지금 군왕께서는 모범과 표본이 되는 행실을 버리고 혼란과 멸망에 이르는 욕심을 마음껏 부려 주벌과 멸절을 당하는 일을 범하시니, 어떻게 명을 내려 백성을 가르치겠습니까.
또 제가 들으니, 살아서 치욕을 당하는 것이 죽어서 영화로운 것만 못하다 하였습니다. 만약 군왕께서 그 모범과 표본을 버린다면 나라를 다스리지 못할 것이며, 저에게 음란한 단서가 있다면 세상에서 살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한 가지 일로 둘 다 욕을 당하니, 저는 죽음으로 몸을 지키고 감히 명을 받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를 원하는 것은 즐기기 위해서인데, 저를 가까이하였다가 죽으면 무슨 즐거움이 있겠으며, 만약 저를 먼저 죽이면 또 군왕께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그제야
오왕吳王이 부끄러워하며 마침내 물러났는데,
백영伯嬴이 그
보모保姆와 더불어
의 문을 닫고 모두 병장기를 놓지 않았다. 30일 만에
진秦나라의 구원병이 이르러
소왕昭王이 마침내 다시 돌아왔다.
군자가 말하기를 “
백영伯嬴은 용감하며
정정貞靜하고
전일專一하였다.”
注+① ‘용勇’은 칼을 잡고 기필코 죽으리라 맹서한 것을 말한다. ‘정精’은 아마도 응당 ‘정靜’이 되어야 할 듯하니, 그 정정貞靜하고 전일專一함을 말한다.라고 하였다. ≪
시경詩經≫에 말하기를
“무성한 칡넝쿨이여,注+② ‘유纍’는 ‘류藟’와 같다. ≪모시毛詩≫에는 ‘류藟’로 되어 있고, ≪경전석문經典釋文≫에는 ‘류藟’가 또 ‘유虆’로 되어 있으니, ‘유虆’가 생략되었기 때문에 또 ‘유纍’로 되었을 뿐이다. 나뭇가지에 뻗어 있도다. 화락한 군자여, 복을 구함에 사특하지 않도다.”
라고 하였는데,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초평백영楚平伯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