晉趙衰妻者
는 晉文公之女也
니 號趙姬
라 初文公爲公子時
에 與趙衰奔狄
하니 狄人入其二女叔隗季隗於公子
어늘 公
以叔隗妻趙衰
注+① 【校注】 左傳公下有子字, 此脫.하여 生盾
이라
及反國하여 文公以其女趙姬妻趙衰하여 生原同屛括樓嬰하다
趙姬請迎盾與其母而納之
한대 趙衰辭而不敢
이라하거늘 姬曰 不可
하니이다 夫得寵而忘舊
면 舍義
요 好新而嫚故
면 無恩
이요 與人勤於隘
注+① 【校正】 念孫案困․厄字古通作隘, 疑此文本作與人勤於隘, 無厄字, 今作隘厄者, 後人旁記厄字, 因誤入正文耳. 古無以隘․厄二字連用者.라가 富貴而不顧
면 無禮
라
注+② 三字, 謂禮恩義.면 何以使人
이리오 雖妾
이라도 亦無以侍執巾櫛
이라 詩不云乎
아 采葑采菲
는 無以下體
니 德音莫違
인댄 及爾同死
니라하니
與人同寒苦면 雖有小過라도 猶與之同死而不去어든 況於安新忘舊乎아
又曰 讌爾
注+③ 【校注】 讌毛詩作宴.하여 不我屑以
로다하니 蓋傷之也
라 君其逆之
하여 無以新廢舊
하소서 趙衰許諾
하고 乃逆叔隗與盾來
라
姬以盾爲賢
하여 請立爲嫡子
하고 使三子下之
하고 以叔隗爲內
注+① 婦當作子. 見左傳.하고 姬親下之
라
及盾爲正卿하여 思趙姬之讓恩하여 請以姬之中子屛括爲公族大夫하여 曰君姬氏之愛子也라 微君姬氏면 則臣狄人也라 何以至此리오하니 成公許之라 屛括遂以其族爲公族大夫라
君子謂趙姬恭而有讓이라하니라 詩曰 溫溫恭人은 維德之基라하니 趙姬之謂也라
진晉나라
조최趙衰의 아내는
의 딸이니
조희趙姬라고 불렸다. 처음 문공이
공자公子로 있을 때 조최와 함께
적狄 땅으로 도망을 가니,
〈본국인〉 진晉나라로 돌아와서는 문공文公이 그의 딸 조희趙姬를 조최趙衰에게 아내로 주어 원동原同, 병괄屛括, 누영樓嬰을 낳았다.
조희가 조최에게
적狄 땅에 있는
돈盾과 그 어머니를
진晉나라로 맞이해 오자고 청하였으나, 조최가 사양하면서 감히 그럴 수 없다고 하였다. 조희가 말하기를 “안 됩니다. 〈새로〉 사랑하는 사람을 얻었다 하여 옛사람을 잊는다면
의義를 버리는 것이요, 새 사람을 좋아하여 옛사람을 경시하면 은혜가 없는 것이요, 곤궁한 처지에서 함께 애쓴 사람을
注+① 【교정校正】 왕염손王念孫이 상고해보건대, 곤困․액厄자는 고자古字에 통용하여 ‘애隘’로 썼으니, 아마 이 글은 본래 ‘여인근어애與人勤於隘’로 되어 있고 ‘액厄’자는 없었을 것이다. 지금 ‘애액隘厄’으로 되어 있는 것은 후인後人이 곁에 ‘액厄’자를 기록해서 인하여 잘못 정문正文에 들어갔을 뿐이다. 옛적에 애隘․액厄 2자를 연용連用하는 경우는 없었다. 부귀해진 뒤에 돌아보지 않는다면
예禮가 없는 것입니다.
그대가 이 세 가지를 버린다면
注+② ‘삼三’자는 예禮와 은恩과 의義를 이른다. 어떻게 사람을 부릴 수 있겠습니까. 비록
첩妾이라 하더라도 그대를 모시지 않을 것입니다. ≪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추위와 고생을 함께 겪은 사람이라면 비록 작은 잘못이 있더라도 오히려 그와 더불어 죽을 때까지 함께하고 버리지 않는데, 더구나 새 사람을 편안히 여겨 옛사람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시경≫에 또
라고 하였으니, 대개 이를 상심한 것입니다. 그대는 그들을 맞이하여 새 사람 때문에 옛사람을 버리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조최가 허락하고 이에
숙외叔隗와
돈盾을 맞이하여 오게 하였다.
조희趙姬는
돈盾을 어질게 여겨
적자嫡子로 세우기를 청하고서 세 아들로 하여금 그의
하위下位에 있게 하였으며,
숙외叔隗를
로 삼고서
注+① 조희 자신은 스스로
하위下位에 처하였다.
돈이
정경正卿이 되자, 조희가 자신에게 양보와 은혜를 베풀었음을 생각하여 조희의 둘째 아들인
병괄屛括을
로 삼기를 청하면서 말하기를 “〈병괄은〉
께서 아끼는 아들입니다. 군희씨가 아니었다면 저는
적인狄人이 되었을 것이니, 어찌 여기에 이를 수 있었겠습니까.”라고 하니,
이 허락하였다. 병괄은 마침내 그
공족公族을 통솔하는
공족대부公族大夫가 되었다.
진조쇠처晉趙衰妻
군자君子가 이르기를 “
조희趙姬는 공손하고 사양함이 있었도다.”라고 하였다. ≪
시경詩經≫에 말하기를
라고 하였으니, 조희를 두고 이른 말이다.